1부 예배에 가겠다고 철썩 같이 약속했던 아들이 외박을 했다. 7시 반에 시작하는 1부 예배에 가려면 집에서 적어도 6시 40분에는 출발해야 하는데 대략난감이었다.
아들이 없으면 우리는 교회에 가지 못한다. 칼바람 부는 겨울의 신 새벽에 어떻게 뇌경색으로 쓰러진 남편을 끌고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가느냐 말이다. 결국 아들에게 전화했다. 새벽 여섯 시에.
냉큼 전화를 받은 아들이 미안한지 곧 집으로 갈 것이라고, 걱정 붙들어 매어 놓으시라고 했다. 곤하게 자는 남편을 깨워 준비를 시키고, 일주일 만에 화장대 앞에 앉아 인터넷으로 틀어놓은 찬송가를 들으면서 변장인지 분장인지를 마치고 나니 아들의 카톡이 왔다. 6시 반이었다.
-집 앞에 와 있어염. 천천히 나오세염.
창밖으로 보니 아들의 차가 아직도 어두운 길에서 헤드라이트를 켜고 서 있다. 구원의 불빛처럼 고마웠다.
가로등이 환한 거리를 달려 교회에 가니 무려 이십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겨울에는 같은 시각에 출발해도 일찍 도착하곤 한다. 길에 차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여름일 때는 정체구간이 있을 정도로 차가 많았다. 사람들은 날이 밝아야 움직이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경건하게 예배당 앞자리에 앉아 감사기도하고 성경구절도 찾아놓고 광고란도 뒤적였다. 교회에 오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늑하고 따스하고 부드러운, 마치 엄마 품처럼 편안한 기분?
그런데.
오늘의 설교 역시 힘들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라. 기도해라. 성경 읽어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라.... 가장 기본적인 말씀. 예화는 고리타분한 옛날 옛적 에피소드, 그것도 현대의 우리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맹숭하게 앉아있는 성도들이 너무 안타까웠는지 목사님은 중간 중간 목소리를 높이고, 너무도 간절하게 있는 힘을 다하여 말씀을 전하고 계셨는데 그 모습은 보기에도 힘이 들었다.
지금, 목사님은 자신의 힘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하시는구나.
하나님이 설교에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면 좀 더 편안하게, 그리고 즐겁게 설교하실 수도 있을 텐데. 나는 안타까웠다. 정말 안타까웠다. 목사님께서 강단에서 환하게 웃으시면서 설교하는 모습이 보고 싶다. 우리를 향한 안타까움에 목소리를 높이고,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열심히 하나님과 동행하라고 다그치는 말씀보다 우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 사랑은 우리의 고통과 슬픔과 죄를 충분히 감싸 안으시며, 우리의 어리석음과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서 하나님을 향한 시선으로 충분히 가게 할 만큼 크고 위대하다고, 그러니까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목사님을 통해 듣고 싶다.... 나만의 바람일까, 이 소망은?
목사님을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 늘 하는 중보기도 말고 다른 어떤 것이 있을까?
집으로 돌아와 즐거운 휴식.
그리고 이내 백주년 교회 예배 실황을 보았다. 미진하여 그 다음 예배 실황을 다시 보고, 오후 4시 반에 시작하는 마지막 예배 실황까지 보았다. 같은 말씀을 몇 번 들었는데도 어느 순간은 가슴이 저렸다. 아멘, 소리가 내면에서부터 절로 흘러나왔다. 우리 목사님이나 백주년 교회 목사님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정성은 같을 텐데 전하는 말씀이 이토록 차이나는지....
그 와중 듣게 된 뜻밖의 뉴스. 모모씨의 자살 소식. 오늘 새벽의 일이라고 했다. 오 마이 갓.
소름이 끼쳤다. 새해에 새로운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가는 사람에 대하여. 그리고 이른 새벽, 떠오르는 해와 함께 하는 새로운 아침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에 대한 절망으로 자신의 목숨을 놓아버리는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 그분에게 자비와 긍휼을. 그의 고통스러웠던 마음에 평화를 주시기를. 그리고 남겨진 유족들에게도 위로와 평안을 주시기를.
마음 아픈 사연이었다. 이 땅에는 그분처럼 마음의 상처와 현실의 고통을 감당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 역시 작년의 어느 순간,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성경공부 시간에 이런 고백을 한 기억이 있다.
-저는 내일이 오는 것이 싫어요, 일주일 뒤도 싫고, 일 년 후도 싫어요. 다, 싫어요!
그것은 나의 솔직한 비명이었다. 그래서 이해한다. 자신의 생을 놓아버린 그분의 마음을.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그 깊은 절망의 늪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서 사랑에 대하여 생각했다. 인간의 사랑 말이다. 그 허망함, 그 어리석음, 그 이기적인 욕망을. 결혼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분의 아내 역시 몇 년 전 자살했다. 무엇이 그 부부를 몇 년 간극을 두고 스스로 생을 놓게 만들었을까. 너무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그 결혼은 어떻게 해서 지옥이 되었고, 어떻게 해서 원수처럼 되었고, 어떻게 해서 자살로까지 가게 되었을까.
결혼, 사랑, 그런 단어를 검색하다가 영화 한 편을 발견했다. <우리는 사랑일까>
영화 평과 영화 줄거리를 보니 사랑과 결혼에 관한 이야기여서 난생 처음 인터넷으로 얼마간의 비용을 휴대폰으로 지불하고 영화를 다운받았다. 컴맹이 드디어 내 힘으로 영화도 다운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진지하게 앉아 마치 예배를 드리는 심정으로 그 영화를 보았다. 섬세한 내면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영화였다.
나는 그 영화에 만족했다. 또 하나 느낀 것은 사랑이나 결혼은 동서양의 간극이 한 치도 없다는 사실. 그니까 사람의 마음은 똑같다는 것. 사람들이 사랑하는 모습도, 결혼의 모습도, 뒤이은 권태의 모습조차도 한국이나 캐나다나 세계 어디나 똑같다는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나는 안도했는지도 모른다. 영화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별도의 에세이로 만들어야 할 것 같다.
늦은 저녁, 포이에마 교회 신우인 목사님의 설교는 정말 압권이었다.
소울 메이트의 카톡이 날아왔다.
-나, 신우인 목사님 사랑하게 될 것 같아~~^^
포이에마 교회 홈피에 들어가서 마악 설교를 클릭하려던 나는 다른 때보다도 두 배는 열심히 집중해서 말씀을 들었다. 말씀이 끝났을 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한국 교회에 저런 목사님을 보내주셔서 감사해요.
크게 이야기하자면 오늘의 주제는 우리가 사랑일까, 가 될 것 같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하나님의 자녀도 사랑의 작은 알맹이는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사랑일까.
그리고 또 하나의 직접적인 적용의 문제는.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결혼은? 우리의 이웃 사랑은? 우리의 하나님 사랑은.....?
오, 하나님.
우리가 사랑일까, 에서
우리가 사랑이다, 로 결론내릴 수 있는 인생을 살게 하여 주십시오.
첫댓글 이성과의 사랑은 결혼 그 자체보다 어느 추운 겨울날 나뭇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처럼, 그 사람과의 기억이 더 선명하게 기억될 때만이 진정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현재의 살아나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먼 기억 속의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그래서 시인 박인환은 '목마와 숙녀를'를 남기고 소설가 이상의 추도식 참석후 거리에서 30초반의 젊은 나이에 쓸쓸히 죽어갔는지도 모르지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사랑과 낭만은 안 주셨을까요?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은 자기희생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배웠슴니다
자기희생이 없는 사랑은 자기만족 아닐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자비나 동정이상은 아닐것같아요
그래서 저는 예배 마지막 시간이 괴롭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입에 달고 살지만, 실제로 사랑을 할 줄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그 사람을 잃기 전까지는, 따질 게, 가릴 게, 너무 많죠.
미리 깨닫는 건, 왜 그리도 힘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