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답사 : (원주)<만종역>/(횡성)<횡성역>
1. 무슨 일이든 특별한 변화나 새로운 각성이 생기지 않는 채 다만 지속할 때 ‘진부함’이 뒤따른다. ‘진부함’은 사물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하고 일상적인 루틴 속으로 삶을 고정시킨다. 때론 그러한 단순함이 생각을 맑게 하고 몸의 건강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실제로 어떤 효과도 가져오지 못한다면 진부함은 공허함으로 전치될 뿐이다. 요즘 ‘역답사’가 그런 기분이다. 분명 의미있는 반복인 듯 하지만 반복 속에서 새로운 인식은 실종되어 있고, 건강과 관련된 지표도 그다지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으로 들어가지 못한 피상적인 접근이라는 표식인지, 아니면 근본적인 접근의 실패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럴 때, 답은 없다. 현재 하고 있는 과정을 체크하고 다시 시작할 뿐이다. 지속하는 것은 다만 견디는 일이다. 모든 것은 시간의 경과 속에 새로움은 변질되고 존재의 버거움만이 남게 된다. 삶을 그것을 견뎌내며 앞으로 가는 여정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결코 특별하지 않으며 어떤 성과가 반드시 뒤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2. 원주의 <만종역>에는 밀레의 <만종> 장면이 새겨져 있다. ‘이름’의 동일성으로 만들어진 조형물이 조금은 낯설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왜 밀레의 그림이 여기에 있는지 의아스럽기까지 하였다. 만종역 주변은 논밭이 있는 농촌의 풍경이 아니라 오래되고 낡은 공장 지대와 물류 센터가 점점이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어지는 길은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걷기에는 적당한 장소가 아니지만 제법 많은 사람들이 KTX를 이용하기 위해 오가고 있었다. <만종역>의 특별한 랜드마크(?)는 SK 저유소이다. 역 바로 옆에 거대한 기름창고를 갖고 있는 이곳은 역이 완공되면서 지역 사람들에게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한동안 철거를 요구하는 현수막이 붙었고 시위도 거셌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항상 변한다. 어느 때 석유값이 인상되고 기름 구하기가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는데, 만종역 부근에서는 저유소가 있는 관계로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고 한다. 슬그머니 현수막은 내려갔고 시위도 멈췄다. 이런 것도 ‘새옹지마’라 해야 할까? 흥미로운 전설이다. 현재도 주유 차량이 저유소를 오가고 있었다. 역과 저유소, 어울리지 않지만 나쁘지만도 않은 특별한 풍경이다. ‘만종역’ 주변은 정리되지 않았고 공장들로 에워싸고 있지만, 그 곳에 ‘마늘빵’으로 유명한 상점이 있었다. 커피와 함께 빵을 먹었고, 빵이 맛있어 다음날 개점을 기다려 구입하여 파주로 돌아왔다. 무언가 부조화스럽지만, 그것들은 나름의 존재감으로 만종역을 기억하게 하는 장면들이었다.
3. <횡성역> 역시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는 벌판이다. 하지만 횡성역은 걷기에 좋은 장소였다. 이 곳에서 횡성읍까지는 약 40분 정도 걸리는 코스로 편안하게 지방의 풍경을 관찰하면서 이동할 수 있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길은 넓고 연결은 부담스럽지 않다. 그런 것만으로도 답사는 불편하지 않은 것이다. 길 중간 들판에 특별한 비석이 보였다. 비석에는 ‘횡성보’를 세워 가뭄과 홍수를 대비한 공을 인정받아 6품에서 4품으로 승진한 지방 수령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특별한 행정적 공로에 관한 기념물은 오히려 낯설다. 대부분 비석은 막연한 숭모와 찬양으로 포장되어 있고, 정치적·파당적 행적으로 뒤덮여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듯하지만 정말로 민중들에게 중요한 일을 했다는 증거는 묵묵히 자신의 일에 열중했던 사람들의 소리없는 행적에 주목하게 만든다.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힘겹게 조선의 500년을 견디게 했을 것이다.
횡성역 부근에는 <섬강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거리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약 3시간 정도면 원점으로 회귀할 수 있는 좋은 답사 코스이다. 나에게 ‘좋다’는 의미는 풍경의 아름다움, 길의 쾌적함과 함께 출발점과 도착점이 같으면서도, 왕복하지 않고 다른 코스로 이동할 수 있는 길에 붙일 수 있는 개념이다. 답사를 할 때 항상 낭패스러운 일은 무작정 걷다 보면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경우이다. 체력도 소진되고, 교통편도 없을 때, 답사는 불안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무엇보다 반갑고 좋은 답사 코스인 것이다. <횡성역>은 다음에 다시 방문해야겠다. ‘섬강길’을 여유롭게 걷고, 횡성읍내에서 소박한 식사를 한 다음 돌아오는 코스가 제법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첫댓글 - "시간의 경과 속에 새로움은 변질되고 존재의 버거움만이 남게 된다. 삶은 그것을 견뎌내며 앞으로 가는 여정에 불과하다는 생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