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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즐거움과 가르침’을 준 名詩를 읽다
라 병 훈
시는 S.P.Sdney의 말처럼 ‘즐거움과 가르침을 동시에 주는 말없는 그림’이다. 그러한 면에서 시인들을 생각 해 본다. 외로운 사람일 것이다. 사실(fact)을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홀로 외롭게 진실(truth)을 발견하고, 그것을 내면으로 탐구하여 왜곡 된 우리네 삶 속에서 스스로를 세워가야 하는 고독한 작업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시인들이 자아 올리는 언어의 시적 질서가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과 가르침’은 시를 읽는 독자에게 삶의 지혜라는 알레고리를 선사 해 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에게 그러한 소중한 영감을 주었던 명시들에 대한 감상을 정리 해 본다.
1. 남은 인생의 길, 어떻게 걸어갈 것인가: 아무도 가보지 않던 세상의 끝으로
걸어가리, 아득한 언덕을 넘고 고요한 평원을 지나 이내 북적이는
도회의 한 복판, 누가 누구인지 피할 수 도 식별 할 수도 없는
그저 짐짝처럼 흐트러지고 구겨져 버린 거리로
이미 익숙해져 나름대로의 철학에 익숙해져,
지혜로우나 무디어 가고 영리하나 비겁해지고
가까이 있으나 서로가 어둡고 쓸쓸한 오늘의 일상 위로
걸어가리, 언덕에도 평원에도 어디에도 이제 피할 수 없는 실존의 바람,
그 앞으로 걸어가리, 물러서지도 외면하지도 않고, 보다 큰 세상의 뿌리,
바람의 뿌리를 만나기 위해, 견고한 나의 표정과 말씀의 각(殼 )을 벗어 던지리,
그리고 절룩이며 절룩이며 아무도 가보지 않던 세상의 끝으로 걸어가리.
- 김동수, 「거리에서」 전문
오죽했으면 시를‘고통의 칭얼거림’이라고 고백하였을까? 그러고 보면 김동수 시인의 시정詩情은 마종기 시인의 노래처럼 ‘우화의 江’이었지 않을까? 그에게 있어서의 시는 피 끓는 열정, 삶의 고뇌, 내면의 갈등. 배회와 방황 등 간난의 세월을 견뎌 낸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었으므로. 그 질곡의 인생 경험을 담아 낸 서정의 강물은 서로의 물길을 트고 융합하면서 흐르고 흘러 오늘날, 그의 詩는 우주 본성의 깨달음과 신성神性을 지향하는시의 고향 바다에 안착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고통의 칭얼거림이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상징적인 시어와 산문적 색채가 두드러지는 이 詩는 그러한 유장한 시정詩情이 녹아있는 물길의 흐름 속에 채화彩畫되어 있다. ‘철학적 깨달음’에서 기인하는 의지적인 영혼의 노래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것이다. 유장한 詩의 물길은 시인이 궁극적으로 염원하던 이상향 (不二의 세계 곧 禪的 사유에 의한 직관적 통찰의 세계)의 바다로 안내 해 준 시의 원형이리라. 그러한 물길은 다양한 서정의 무늬와 색상의 모습을 띠면서 결국 ‘존재론적 자문으로 중도中道의 니르바나(열반)를 추구하던 시의 물길이 큰 바다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는 그러한 시류詩流를 대표하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
시인은 어쩌면 神(초월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야스퍼스의 유신론적 실존철학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즉, 내가 그것에 바탕을 두고 사유하는 행동하는 근원인 '실존'은 고립되어 있는 실존이 아니라 다른 실존(초월자)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보는 사유가 이 시정詩情의 기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기반 평론가 등은 이 詩가 '고난의 강인 현실 상황 인식에서 순수와 열정의 의지로 미래세계를 지향하려는 인간의 보편적인 열망'을 분석의 초점이요 주제로 삼은 바 있지만 필자는 결을 달리하고 싶다.
詩 읽기에 있어서 심상적心想的 확장은 시와 화자(또는 작가)의 내면세계로 들어가는 불이문이나 다름 없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 詩에서 구겨져 버린 거리에서 불어오는 ‘피할 수 없는 실존의 바람'은 곧 나 혼자만이 고립되어 살아갈 수 없는 것이며, 오로지 내가 너(실존의 너, 타자=초월자) 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으로 변해버린 현실의 수용과 공존의 외침으로 읽혀진다. 그러니까 그 바람의 실체는 현실(나)을 초월하여 不二의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역동적인 내면의 외침을 실어 나르는 우리 자신 속으로 불어오는 우주의 바람이요, 중도의 니르바나(열반)의 경지로 이끌어주는 바람인 것이다.
행간을 그러한 인식의 틀 속에서 거닐어 보자. 1연의 "짐짝처럼 흐트러지고 구겨진 버린 거리"는 곧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린 현실적인 삶의 무질서한 현장이요, 그로인한 내면세계의 아상我相에 대한 시적 변용이겠다. 따라서 그 거리로 당당히 나선다는 것은 현실(인간적인 숙명과 한계)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대응함으로써 궁극적으로아상 我相을 비워내겠다는 것이다. 2연은 그러한 현실의 삶속 어둡고 쓸쓸한 일상의 민낯을 인식의 영역으로 확대 부연하고 있다. 3연은 주제연이다. 그러한 '거리에서' 곧 나(현실)뿐만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실존의 바람’즉, 너(실존의 너, 타자=초월자) 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현실의 수용을 통한 세상과 바람의 뿌리( 시의 원형 또는 생명과 진리의 이상향)를 찾아 나서자는 의지와 다짐이 호기롭다.
결국 전술한바와 같이 기준잣대인 실존 철학적인 감상의 틀속에서 보면, 화자가 걸어가고자 하는 지향점인 큰 세상의 뿌리와 바람의 뿌리는 생명과 진리의 원천을 표상하겠으나, 조금더 깊이 굽어다 보면 시인의 詩的 고향이요 유신론적 실존을 지향하는 詩的 니르바나(=열반)의 경지가 아닐까 한다. 화자는 견고한 나의 표정과 언어의 껍질 즉, 아상我相을 벗어 던짐으로써 인간 한계의 현실(나)과 실존의 융합融合 을 통해 미래세계로 당당히 걸어 나아가겠다는 다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절룩이며 어떠한 고통을 감내하면서라도 아무도 가보지 못한 저 세상의 끝인 불이不二의 세계, 곧 신성神性의 경지로 들어가겠다는 詩人의 결기가 행간을 통해 호기롭게 흐른다.
헤럴드 슈와이저의 말대로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시인이다. 인간의 삶 자체는 끝없는 간절한 기다림이므로... 그 기다림의 끝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세상의 뿌리이자 바람의 뿌리이리라. 아득한 언덕과 고요한 평원을 지나 온 시인과 우리들은 오늘도 샤무엘 바게트의 '블라디미르'가 되어 그 거리의 작은 나무 옆에서 고도(Godot)를 기다린다. 고도가 실존하는 神임을 확신하면서...
2. 아름답게 익어가는 인생 : 서로의 아픔과 앓는 몸살을 치유해주는 배려
늘그막의 두 내외가
손을 잡고 걷는다
손이 맞닿은 자리, 실은
어느 한 쪽은 뿌리를 잘라낸
다른 한 쪽은 뿌리 윗부분을 잘라낸
혹은 두 상처가 맞닿은 곳일지도 몰라
혹은 예리한 칼날이 내고 간 자상에
또 어느 칼날에 도리워진 살점이 옮겨와
서로의 눈이 되었을지 몰라
더듬더듬 그 불구의 生을 부축하다보니까 예까지 왔을 게다
이제는 이녘의 가지 끝에 꽃이 피면
제 뿌리까지 환해지는,
제 발가락이 아플 뿐인데
이녘이 몸살을 앓는,
어디까지가 고욤나무고
어디까지가 수수감나무인지 구별할 수 없는
저 접목
대신 살아주는 생이어서
비로소 온전히 일생이 되는
- 복효근, 「접목 接木」 전문
2022년 ‘박재삼 문학상’의 주인공인 복효근 시인은 ‘자연을 노래하는 생명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공광규 시인의 선정 소감대로 그는 박재삼의 ‘친 자연 소재, 향토적 서정’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측면에서 보면 국내 정상수준의 생명시인일 것이다. 이 시에서도 그의 자연과 생명에 대한 노래 방식은 유사한 사조를 지녔던 정지용, 김수영 등 여타 시인들과는 본질적으로 그 詩情의 결이 다르다. 이러한 시정은 등단 30년에 즈음에서도 그 본류는 흐트러짐이 없이 견고하다. 이러한 견해는 박재삼 문학상 수상작인 12번째 시집인 『예를 무당거미』의 표사( 이동순 시인)에 압축되어 있다. 즉, “대자연이 주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를 언어로 거뜬히 전사傳寫 해 내는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소재인 자연의 물성(物性)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자연에게 바치는 ‘생명체로서의 인간’에 관한 헌사獻詞로서 시를 짓고 있는 시인인 셈이다. 이 시도 그런 맥락에서 만나야 할 것 같다.
시의 행간으로 들어가 본다. ‘부부는 두 반신半身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이라는 명제를 남긴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화가인 빈센트 반 고호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애기다. 복시인은 이러한 부부관계를 고욤나무와 수수감나무의 접목接木을 통한 알레고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시의 주제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삶의 지혜‘다. 복시인의 시력과 맞물려 동거동락同居同樂 해 온 그만의 자연친화적 시정의 휴머니즘이 진솔하게 흐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시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서 상대방인 자연을 바로 자신인 것처럼 느끼고 배려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이는 바로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로 상호 배려하는 공존공생共存共生의 가치로 확장시키고 있음은 물론니다. 60년 농익었을 노부부의 의지하고 살아가는 감동적인 모습을 통해 자연에서의 ’접목‘이란 상호 배려하는 ’닮음의 가치‘로 복기하며 화자 자신의 이야기를 얹어가는 시상전개는 복효근 시인 특유의 詩作 스킬로써 ’친자연적 생명시인‘으로서의 명성을 환기시키고 있다.
시에서 접목接木은 “두 상처가 맞닿”는 상호 배려의 합일점이며, 이는 “서로의 눈”이 되어 줌으로써 서로의 아픔과 앓는 몸살을 치유해주는 배려의 삶으로 승화시키는 이상적인 삶의 실체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한 이상적인 삶의 모습은 우리 인간들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으로 전이되어 먼저 베풀어야 할 삶의 자세라는 알레고리가 행간에 숨겨져 있음은 물론이다. 결부에 이르러 결국 접목接木은 “ 대신 살아주는 生”이요 “비로소 온전히 함께하는 一生”이라고 명명하며 자연속에서 인간적인 교훈을 추출 해 내고 있는 대부분의 그가 추구하고 있는 시정의 세계를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 사랑의 기술 : 영원히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인내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 나태주, 「사랑에 답함」 전문
‘풀꽃시인’ 나태주, 그는 그저 무심히 존재하는 생명을 보면서도 그 너머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다.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목도하고 있다. 쉬운 언어로 누구나 공감 할 수 있는 노래의 형식을 빌어 노년의 생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법은 다름 아닌 풀꽃같은 ‘사랑이라고 나직하게 귀뜸 해 주고 있다. 긍정하는 마음과 평안한 마음, 과감하게 내려놓고 아낌없이 주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속삭여 주고 있다. 괴테의 말처럼 “사랑하는 것 자체가 인생이기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합이 있는 곳에 기쁨과 사랑이 존재한다” 라는 속삭임이 시의 배면을 흥건히 적시고 있어 풀꽃 사랑의 노래가 더욱 생기롭다.
이 시는 「풀꽃」의 향기가 시향詩香으로 승화되고 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 중 하나로 꼽히는 「풀꽃」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며 짧은 문장으로 많은 사람에게 깊은 위로와 감동을 주고 있는 시인은 언젠가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한바가 있다. 인생은 자세히 그리고 오래 보지 않으면 그 아름다운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다는 「풀꽃」의 알레고리가 백리향百里香처럼 감동을 주며 취하게 만든다. 봄은 유소년기이고 여름은 청년기, 가을은 장년기, 겨울은 노년기로 볼 수 있는데, 모든 계절과 모든 인생의 시기가 한순간도 중요하지 않은 때가 없지만 특히 노년의 삶이 더 중요하다는 애기이겠다. 하루 가운데 여유 있는 시간은 밤의 시간이고, 1년 중 여유 있는 시간은 겨울철이며, 일생 중 여유 있는 시간은 노년기라는 울림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 시와 더불어 노년기의 아름다운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들도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기는 노년기이며 구체적인 나이로 치자면 만 74세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나태주 시인은 다음과 같이 풀꽃시인다운 전제를 달고 있는듯하다. “노년기는 무언가를 성취하고, 얻고, 이룩하고, 확장하고, 결실을 얻는 시기가 아니며, 오히려 지금까지 이룬 것들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기가 가진 것 가운데 좋은 것들을 베푸는 시기”가 전제되어 한다고.
어쩌면 노년의 시기에 ‘베품’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긍정하는 마음과 평안한 마음, 과감하게 내려놓는 마음” 일 것이다. 비록 초라할지라도 줄 것이 있으면 아낌없이 주는 마음이 그 마음이 중요하다는 알레고리로 읽혀진다. 나이가 들어서도 아웅다웅 다투거나 앞자리에 서려고 고집하는 것은 참으로 볼썽사납다. 나이가 들면 그냥 뒤로 물러나 젊은이들의 후원자가 되는 길을 택해야 마음이 편하다. 어떤 세상이든 젊은이들의 삶은 팍팍하고 힘겹게 돼 있다. 청춘은 확장과 재생산을 통해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노년기 생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를 다시한번 자문 해 본다. 그것은 위에서 정리한 바대로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풀꽃같은 사랑'을 지니는 것이 아닐까?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더불어 세상을 사랑하는 것. 나 자신만을 위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주고 그에게 도움을 주는 일 속에 진정한 인생의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4. 아내, 죽어서도 사랑하라 : 철없는 남편들의 그렁그렁한 고백성사
우리 집 처마 끝에 매달려
집을 지키는 물고기
바다를 품어본 적이 없고
바다로 나아갈 생각도 없는
가엾은 저 양철 물고기
문지기 수행자로 살기 위해
얼마나 虛空을 쳐댔던 것일까
가만히 다가가 보니
비늘이 없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이의 어깨에 달라붙은
그렁그렁한 비늘
나 죽은 뒤에도
관 속까지 따라와
가슴에 곱다시 쌓일 것 같다
-오봉옥, 「아내」 전문
시와 시인에 대한 정보를 모르는 생소한 시인의 시를 우연히 만나 아! 바로 이 시야! 하고 탄성을 지를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읽고 감상하며 평까지 정리해야 하는 평론의 입장에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여기 심금을 울려 준 오봉옥 시인의 좋은 시 한편을 모시어 시제인 우리의 “아내”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토로吐露하고자 한다. 처마 지붕 끝에 매달려 허공을 쳐대며 우는 비늘 없는 양철 물고기의 숙명은 아내의 자화상이요 죽어서도 나비가 되어 “그 꽃”을 찾아 나서겠다는 시인의 절절한 토로吐露의 응답임도 상기하면서....또한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는 우리들 자신감의 속내를 진중하게 들춰보면서 시를 읽어내야 할 것 같다.
시상의 발견은 자연스럽고 우연할수록 좋다. 詩人은 어느 절이나 있을 법한 처마 끝 하늘풍경으로 매달려 우는 편종에 대롱대롱 매달린 양철물고기에 착목했을 것이다. 처마 끝에 매달린 양철 물고기가 바람과 바다와 나누는 밀어를 엿들을 수 있었고 이를 집을 지키는 물고기로서의 “아내”라는 서정적 형상화로 환유시켜 소위 몸성을 꺼냄으로써 자기 안에서 성찰의 깨달음으로 삼고자 했음은 애처가로 알려 진 자연스러운 오봉옥 시인의 본능이었으리라. (1연) 남편으로서의 화자는 그러한 양철물고기는 숙명적이게도 나래를 펼 수 있는 바다세상으로 나갈 수 없음을, 아니 나아갈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아내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을 쏟아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내를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바라보는 시의 관점을 구체화 시키고 있다.
하늘풍경 허공虛空 바람에 흔들어 대는 양철 물고기의 처량한 울부짖음은 오로지 남편과 가정을 지키는 문지기로서의 수행자를 자처하는 아내의 의연한 고독에 그저 화자는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릴 뿐이다. 아내는 오직 가족을 위해 살아온 존재이기도 하겠지만 특히 오봉옥 시인에게 있어서의 “아내”는 그저 / 구멍 난 팬티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니는 여자/ 늘어진 뱃살을 애써 감추며 배시시 웃는 여자 <내 사랑이 그렇다 >중 /인 것이다.
기승전결식 시의 생명은 바로 전轉연에 있다. 극단까지 상상의 체험을 끌어 올려 아! 하고 정점을 찍어주기 때문이다. 물고기로 은유 된 아내의 몸을 가만히 다가가 보니 아뿔사! 비늘이 없으니... 비늘은 물고기의 생명이요 희망이며 살아가는 존재 이유인 것을... 화자의 눈에 비친 "아이의 어께에 달라붙은 /그렁그렁한 비늘"에 이르러 결국 오열을 하고 말았으리라. 이 시의 절창이요 화자가 지금까지 쏟아내던 아내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심경적 고백이요 절절한 토로다. 왜 " 詩人은죽어서 나비가 된다하니/ 난 죽어서도 그 꽃을 찾아 가련다< 그 꽃 전문>"라고 오열했던 이유를 짐작케 한다. 왜 우리는 '아내'라는 존재를 평생 사랑해야 되는 지에 대한 통쾌한 돌려차기요 완판승인 셈이다.
결부에 이르러 시공간은 현재에서 미래로 확장된다. 시의 품격을 한 계단 높이고 있다. 아내가 남편과 가정을 위해 희생하는 가치의 존재인 그 비늘은 "죽은 뒤에도 /관 속까지 따라와 /가슴에 곱다시 쌓일 것" 같단다. 시는 경험의 발견이고 확장임을 시론적으로 보여준 시임에는 틀림없다. 평생 지아비와 자식만을 위해 양철물고기를 자임해야 했던 아내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에 우러나오는 본연의 초월적이며 초자연적인 통찰과 직관이 유장한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이시는. 이 세상 철없는 남편들이 고객숙여 할 통절한 고백성사다. 지금도 비늘 없는 양철 물고기고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아내'들에게 경외의 박수를 보낸다.
5. 어머니, 생전에 효도하라 : 희어버린 당신의 못다 부른 노래
파밭에서 풀을 뽑으며 팥죽 땀을 닦습니다
주름진 손등 위로 파 고동 진물이 흘러내리던 지난 밤
염장이 터져 새카맣게 타버린 비인 속의 어머니
그게, 눈물의 결정인 걸 이제사 알겠어요
희어버린 당신의 못다 부른 노래
뼛속까지 비어버린 기둥이란 걸
그 깨달음의 마음 한 자락
눈가로 콧잔등으로 눈물 번집니다
내 가슴 속에 흩날리던 파씨
오늘은 하늘의 별처럼 빛납니다
어두운 하늘에 별꽃이 피는 밤이면
돌아가신 어머니는 나를 내려다보고 계신지요
- 강명수, 「파꽃」 전문
詩 속에서 꽃의 직관적인 이미지는 항상 웃는다. 웃어야만 사는 모태적인 불치병을 앓고 있다. 언제나 웃어야만 하는 꽃이어서 무릇 시인들은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도 편하게 이미지화 함으로써 본인의 詩 감정을 보다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러한 불치병은 시론적 측면에서 보면 꽃이 지니는 다양한 생명력으로서의 통찰과 본능적인 아름다움을 다양한 이미지로 환치 시킨다. 꽃이라는 관념의 이미지화를 위해 이보다 더 한 소재는 찾아보기 힘든 이유다. 이는 꽃이 시인들이 꿈꾸는 대표적인 시적 은유 대상이 되고 있음에 대한 방증傍證일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꽃은 시적 화자의 분신이 되어 기대를 저버리지 아니하고 통찰의 대상을 자초하며 詩 속으로 다소곳이 들어가 앉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다양한 이미지로 분장한 채 좋은 시로 태어나게 하는 언어의 꽃으로 새롭게 피어나 뮤즈(시적 영감)를 선사 해 주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詩 속으로 들어 간 꽃들은 화자 자신이든 객관적 상관물로서의 이미징이던 간에 詩人들의 시적 발상과 장치에 따라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다양한 반사경을 들고 걸어 나온다. 사랑, 행복, 순결, 자유,모정 등 다양한 시적 언어의 이미지화를 통해 구체적 사물로 형상화 시킴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그 시를 씹을 맛을 느끼게 해 주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詩 속에 사는 꽃들은 항상 웃고 행복해야만 하는 존재일까? 위에서 언급한 ‘웃음’이라는 이미지를 버리지 못하는 불치병을 앓아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꽃이 지니는 詩의 소재로서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본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임에 대한 불타오르는 ‘사랑’인 반면 ‘산유화’는 인간의 고독을 표상한다. 영랑의 ‘모란’은 소망을 담아내지만 김춘수는 ‘꽃’을 통해 인간의 진지한 ‘존재의 의미성’을 묻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나태주는 ‘풀꽃’을 통해 인간을 바라 바라보면서 꽃이 지니는 이중적 이미지를 모두 소환한다. 즉 작고 보잘 것 없는 사회적 약자이더라도 관심과 애정을 지니고 보면 ‘소중하고 아름다운’존재로 승화된다는 주지적 서정을 노래하고 있다.
웃음의 불치병에서 자유로운 꽃이 여기에도 존재한다. 바로 말하는 그림으로서의 ‘파꽃’이다. 다양한 꽃들 중에서도 유독 강명수 시인의 '파꽃'이 들려주는 언어의 울림대가 감정으로 이입되어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울림은 바로 ‘파꽃에 대한 직관적 통찰’에 있다.여기가 핵심이요 소위 위스키 한잔이다. 물론 국내에서 기 발표 된 바 있는 파꽃들에 대한 내·외면적 이미지 포착은 詩人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이다. 일례로 ‘파꽃’을 소재로 한 대부분의 서정시들은 암시적인 ‘모정의 세월’이라는 대 이미지를 행간에 툭 던져 놓으면서 현상을 현미경으로 치밀하게 읽어내는 것은 오로지 독자들의 몫으로 돌린다. 구체성 없는 암시성은 詩에 있어서는 무용지물일진데 말이다.
파꽃은 ‘어머니의 매운 눈물’, ‘하얀 머리 수건’, ‘시린 세월’, ‘속 비운 푸른 줄기’, ‘어머니의 긴 기도’, ‘다리 퉁퉁 부은 어머니’, ‘뼈 속까지 비워 낸 몸’, 등 모태적으로 가슴 저미는 유사한 이미지로 환치換置되어 직관과 통찰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강명수 詩人은 남이 가지 않은 길을 택한다. 그녀의 ‘파꽃’은 저만치에 홀로 외롭게 피어 매운 눈물을 안으로만 싸매두고 스스로 깨어 사는 조용한 어머니로서의 인고의 세월을 보듬어 온 가슴 저민 꽃이다. 그 어미의 눈물 꽃은 당신의 모정의 세월에 대한 감정을 행간에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 오로지 서사로만 감정을 감출뿐이다. 바로 이 詩가 여타 파꽃을 소재로 했던 詩들과 참신한 차별성을 지니는 본질이 아닐까?
詩人의 직관적인 통찰로 피원 낸 파꽃의 모습! 그것은 어머니의 염장이 터져 새카맣게 타버린 눈물의 결정으로 이미지화 되더니 이내 그 결정은 어미의 못다 부른 경모景慕의 노래가 되어 별꽃으로 피어 빛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詩는 오로지 감정이 아니라 사건과 이야기를 전개하는 플롯(plot)임을 여기서 실감나게 목도目睹한다. 대학시절 까다로운 철학시간에 선생님 몰래 책상 밑으로 주고받는 쪽지를 호기심으로 훔쳐보는 느낌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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