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젯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새벽 세시가 가깝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행인 것은 그렇다고 나의 하루 일정이 전혀 바쁘다거나 찾는 이가 거의 없으니 따로 불편할 일도 없다. 그래도 신체리듬은 평형을 유지 하려는듯 피곤에 겨워 저녁밥을 먹고나서 일찌감치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아이들의 목소리가 높게 쌓은 시멘트 벽담을 타고 힘차게 올라왔다. 낮부터 익혀 듣던 목소리 같기도 하였다. 동네 아이들인 것 같은 초등학교 4,5학년 또래의 아이들 예닐곱 명이 매우 자연스런 모습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향유하고 있엇다.
아들내외가 사는 아파트 바로 앞에는 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나는 이곳을 오자마자 서둘러 카메라를 메고 뒷산 공원을 오르거나 인근의 관광명소로 향하였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예외여서 거의 하룻동안 창밖의 광경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초등학교는 하루 종일 아이들과 청년들의 함성으로 가득찼다. 청년들은 숫자를 맞추어 땀을 흘려가며 축구경기를 하고 있었다. 아주 편안한 관람석에서 두 편의 공놀이를 지켜 보노라면 나도 어느새 젊은 시절로 돌아갔다. 공식적인 선수 생활이야 근처에도 못 가보았지만 동네에서, 때론 직장 생활에서 숫자 채우는 선수로 뽑혀 땀을 흘리던 시절이 있었다.
운동장 중앙 조회대 앞에서는 중학생으로 짐작되는 여자 아이들이 피구게임을 하고 있었다. 요즘도 저런 놀이를 하나? 어째 낯설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고, 한편으론 게임이며 향락놀이에 빠진 또래들의 세계에서 벗어난 정감가는 놀이란 생각이 들었다.
서편 가장자리 그네에선 어린 두 여자 애들이 한 시간 넘게 그네를 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정겨운 사연이 저리도 많을까? 사뭇 궁금했었다. 그리고 아파트 바로 앞쪽에선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예닐곱 명의 아이들이 뒤에 아파트 단지 놀이터로 옮겨 온 것이다.
아이들은 미끄럼틀이며 시소가 있는 아파트 단지내 놀이터에서 큰소리로 떠들며 놀았다. 그런게 갑자기 성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하여 내려다보니 아이들이 주변에 설치해둔 의자를 가져다 놀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누군가가 의자가 부서질 수 있다며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라는 말이었다.
그들 중에는 무리들보다 저학년인듯한 여자 애가 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 애는 운동장에서 놀때부터 남자 애들에게 뒤지지 않고 자신의 목적하는 바를 이루어 내고 있었다. 힘은 약하지만 특유의 큰 여자 애 목소리로 남자 아이들을 제압하는 것 같았다. 그런 걸 보면 누가 여성더러 약한 존재라고 하였던가? 다들 제하기 나름이란 말이 떠 올랐다.
상황과 이야기는 오늘도 계속 되었다. 아침부터 조기축구회 회원들이 땀흘리는 한판의 축구경기가 끝이 났고, 이어서 동네 초등학생들의 축구 게임이 이어졌다. 초등학생들의 경우에는 실력보다는 목소리에 힘이 더 들어있다. 여전히 여자 애 둘이 끼어있다. 그래도 남자 애들이 그녀들을 배려 해서인지 프리킥 키커로 양보도 해주는 모습이 흐뭇하다.
학교 안 그네에는 어제 낮과 밤에 오늘도 어린 아이들의 그네타기가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무엇인가 이야기를 이어간다. 불현듯 나도 저들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흘러간 세월은 결코 돌아올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안타까울 뿐이다. 나는 저들의 이야기가 훗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를 기대했다.
문득 '동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동무! 참 오랫만에 그려보는 문자이다. 어린시절 많이 불러 보았던 그 단어는 어느새 우리들의 기억속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북녘에서 애용하는 단어라서 그럴까?
사전적 의미는 「동무」란 '마음이 서로 통하여 가깝게 사귀는 사람'이고, 「친구」는 '오래도록 친하게 사귀어 온 사람'이란 뜻이다. 그런데 친구보단 동무가 더 정겨움이 느껴지는 것은 어릴적의 애뜻한 추억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까?
순간 마음에 혼란이 일어났다. 지금 아래 운동장에서 뛰노는 저들의 사이는 친구일까? 아니면 동무라고 불러야 맞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