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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며 감사하라
시편 30:1-12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일 년에 두 차례의 감사주일 가운데 한 날이다. 모든 예배는 감사와 찬양의 마음으로 드린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시 33:1).
이미 찬양대는 몇 주 전부터 감사의 찬송을 준비하였다. 강단 꽃꽂이를 보라. 보리이삭을 묶어 맥추감사의 의미를 한눈에 느끼도록 하였다. 우리는 귀로 들음으로, 또 눈으로 바라봄으로 감사절기의 기쁨을 느끼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심지어 지난 심야기도회에서는 시편 30편 본문도 미리 함께 읽어보았고, 오늘 맥추감사절 설교 제목도 함께 정하였다.
“기억하며 감사하라”(4).
사실 감사는 365일 날마다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가 내 입술에서 감사를 잊으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유를 말한다.
먼저 구원을 베푸셨다.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셨다. 또한 은혜를 베푸신다. 나를 선택하신 주님은 나를 눈동자같이 살피시고 인도하신다. 항상 기쁨과 평강을 주신다. 인간이 겪는 삶의 근심과 고통으로부터 자유함을 주시는 분이다. 환난을 당하나 기쁨을 회복시키신다.
어제도, 오늘도, 장래에도 영원히!
유대교 랍비들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도록 가르쳤다.
어떤 사람이 랍비를 찾아와서 하소연하였다. “어젯밤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와 은수저를 훔쳐갔습니다. .. 그런데 금잔은 두고 갔습니다”. 랍비가 뭐라고 말했을까? “뭐라구? 그건 대단한 행운일세!”
마음먹기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 성경은 감사의 마음을 절기를 정하여 표현하라고 하신다.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출 23:16).
맥추절 ‘하그 하카츠르’는 ‘거두고 수확하는 절기’라는 의미이다. 농경시대의 절기이다.
현대인에게는 뜬금없이 들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평소 감사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다시 되새기는 절기는 특별하다. 우리는 인류 이후 가장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는 사람들인데, 역설적으로 감사를 잃어버린 세대가 되었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제프 딕슨, '우리시대의 역설').
우리 집 한규가 미국에 있을 때 호스트 해 주신 아빠가 목수이다. 지난 봄에 가서 만났을 때 목수 모자를 쓰고 왔다. 모자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Carpenters for Christ’. 카펜터스의 ‘t’와 크라이스트의 ‘t’가 한 글자로 연결된 빨간 십자가였다. 그런데 처음에 나는 카펜터스의 ‘t’만 읽었다. 그래서 ‘Carpenters for Chris’라면서 농담을 했다. 당신은 아내를 위한 목수인가? 참 훌륭하다. 그의 아내 이름이 크리스였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그가 곧 나의 오독을 수정해 주었다. 아니다. 크리스가 아니라 크라이스트라고. 와우! 그리스도를 위한 목수! 얼마나 멋있는가? 나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다음날 한규를 데려다 주려고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목수 모자를 내게 선물해 주었다. 이 모자는 그가 목수로서 일하는 직장의 브랜드 작업모였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자기 직업을 위해 살지 않고, 직업을 주신 하나님을 위해 살았다’고. 감사는 즉흥성이 아니다. 성경에서 감사는 항상적이고, 또 역사적이다.
‘기억하며 감사하라’.
1)
시 30편은 본래 개인의 감사 기도문이다. 죽음에 이를 뻔 한 무서운 병에서 회복된 데 대한 감격을 담고 있다. 그런데 감동과 감사가 민족 전체에게로 확장된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2).
시편 30편은 부제가 붙어있다. ‘성전 낙성가’ 즉 성전을 봉헌하며 부르는 찬송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헬라 왕조인 셀류커스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면서 이스라엘에게 시련이 닥쳤다. 기원전 165년, 안티오쿠스 4세는 노골적인 유대교 말살 정책을 펼쳤다. 안식일, 할례, 성경 두루마리 소유를 금지하였고,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하였다.
특히 지배자는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성전예배를 드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대신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숭배하도록 강요하였다. 성전은 더럽혀졌고, 많은 유대인들이 저항하다가 희생되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독립운동을 한다. 독립운동을 주도한 주인공은 마카비 가문이었고, 마침내 독립을 실현한 영웅은 유다 마카비였다. 구약성경 외경 마카베오 상, 하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이제 해방이 찾아왔다. 예루살렘 성전은 회복되었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성전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성소 등대의 불을 켜는 일이다. 그런데 기름이 낭비되어 겨우 하루 분량밖에 남지 않았다. 새 올리브기름을 얻으려면 약 8일이 걸린다고 하였다. 유다 마카비가 등대에 불을 붙였는데, 이것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무려 8일 동안 불을 밝혔다. 이러한 등대의 불이 꺼지지 않는 기적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가 ‘하누카’ 곧 ‘빛의 절기’이다.
이렇듯 감사는 기억하며 지킬 역사적 사건이다. 기억하는 사람에게 감사는 늘 역사적인 사건이요, 오늘 내게 반복될 하나님의 은혜이다. 시편 30편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한 사람의 감사시는 이제 온 백성이 부르는 성전 낙성가가 된 것이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4).
2)
본문은 한 사람의 자기 고백을 담고 있다. 그는 커다란 아픔 때문에 사경을 헤메던 사람이다. 그런데 마침내 기적같이 회복되었다. 그는 이렇게 찬양한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5).
오죽하면 죽을 자리가 찬양의 자리가 되었다고 찬양할까?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11).
감사 찬양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성도들아’라고 복수로 부른다. 즉 하나님께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한다. 둘째는 ‘저녁은 울음으로 시작하나 아침에는 반드시 기쁨으로 마무리 될 것’을 고백하며, 증언한다. 얼마나 큰 감격인가?
기도자에게는 한창 형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참 잘 나갔다. 그 때는 자신이 잘나서 안전하고, 건강하고, 일이 잘 풀리는 줄 알았다. 아무런 겁날 것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장담하였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6).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을 잊어버린 순간, 졸지에 형통함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회고하며 고백한다. 기도자는 근심하며, 이제 하나님께 탄원한다.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10).
기도자는 실패 속에, 고통 중에, 죽을 고비를 넘기며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구하며, 도우심을 요청하였다. 그가 하나님께 간절히 졸랐더니 마침내 하나님이 그를 회복시켜 주셨다.
하나님은 기도자를 마치 우물에서 건져내듯, 죽음에서 건져내셨다. 그의 감사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도우심 때문이다. 이제 기도자는 찬송을 부르며 회중에게 함께 감사드리자고 권유한다. 신앙공동체에서 한 사람의 감사는 모든 성도의 감사가 될 수 있다.
3)
이러한 감사를 드리는 역사적 절기가 맥추절이다. 맥추절은 여름 감사절인데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밀 수확 감사제사이다. 이 절기는 유월저녁을 시작으로 안식일이 일곱 번 지난 50일 째 되는 날에 맞이하기 때문에 칠칠절, 오순절이라고 불린다.
무교절과 칠칠절은 절기 분위기가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무교절은 430년간 종살이를 했던 애굽의 억압으로부터 고난과 해방을 기념하고 기억한다. 유월절 저녁에 이어서 일주일간 계속되는데, 누룩을 넣지 않은 딱딱한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며 과거의 수치와 아픔을 되새긴다. 이렇듯 무교절은 ‘종의 고난’을 기억한다.
그러나 칠칠절은 ‘자유인의 감사’를 의미한다. 이 날은 누룩을 넣은 맛있는 빵을 먹는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쌀밥을 먹는 것이다. 이 날 제사장은 새로 수확한 밀로, 누룩을 넣어 만든 “떡 두 개”(레 23:17)를 하나님께 바친다. 하필이면 두 개의 떡일까?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유대인들은 맥추절(칠칠절)에 다섯 두루마리(메길롯) 중 하나인 룻기를 읽는다. 룻기는 한 이방인 모압 여성에 대한 이야기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먹고 살만해지자 애굽에서 해방 시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잊었다. 광복의 기쁨을 잊고 또 12지파 동맹의 정신에 등을 돌렸다. 모두가 쉽게 배교하던 시대였다.
칠칠절에 룻기를 읽는 까닭은 다름 아닌 이방인 룻이 유대인과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룻은 이방 여성이었지만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오면서 이렇게 고백한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룻은 마침내 보아스와 결혼하였고 다윗의 할머니가 된 입지전적 여성이다. 오늘 강단꽃꽂이는 이러한 룻을 추억하게 한다. 룻의 꽁지머리 같지 않은가?
칠칠절에 제사장이 드리는 ‘두 개의 떡’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상징한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을 예표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내가 독일한인교회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면 모두 감격해 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이방인, 디아스포라에게 특별한 관심과 은혜를 베푸시는구나! 그러나 자기 조국과 고향에 사는 사람은 별로 감동이 없다. 사실 이 세상에서 평생, 주인 노릇하고 살 것 같지만 과연 누군들 그런 자신이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바로 나를 주님의 자녀요, 주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음 기억하며 감사드린다.
시편 30편은 고작 12절 밖에 안 되는 데, 이 안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여호와”가 10회, “내 하나님”은 2회 그리고 “주”는 13회나 된다. 기도자에게 하나님의 이름은 기도 그 자체이다.
왜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많이 부를까? 구약 셰키나 사상에 따르면 하나님의 ‘이름’ 속에는 인격과 본질이 담겨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면, 하나님은 몸소 거기 계신다. 성전을 가리켜 ‘하나님의 이름의 거처’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내 삶은 하나님이 머무시는 현장이 된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내게로 향하시고, 나는 하나님께 다가설 수 있는 길이 된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증한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께 호소한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시작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끝을 맺는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먼저 내게 주
신 감사이고, 기도하는 순간 감사의 마음이 이미 우리에게 임한다. 여기에 풍성한 생명이 열려있다. 여기에 넘치는 은혜의 창고가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라. 감사란, 늘 내 삶에서 느끼는 ‘과분함’에서 비롯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언제나 여러분의 삶 속에서 기억되고 감사를 드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