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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독도에 올라
김학래
어느 해 여름날 나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독도땅을 밟았다. 울릉도 도동항을 출범한 유람선이 두 시간 반 달려 도착한 것이다. 잔잔한 바다였기에 우리들은 행운으로 독도에 접안했다. 놀이 심한 곳이기에 파도가 조금만 있어도 접안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늘 사진과 영상으로만 보아온 독도, 꿈에 그리던 독도에 오르는 감격은 자못 큰 것이었다.
우리들이 탄 유람선이 부두에 접안하자 독도수호대 해양경찰관 칠팔 명이 맞이해 주었으며, 역시 우리 땅 독도를 지켜주는 갈매기 떼가 선회하면서 기쁘게 맞이해주었다.
지금까지 독도는 서도와 동도 두 개의 섬인 줄만 알았는데 주변에 수십 개의 작은 바위섬들이 독도를 감싸고 있으니 말하자면 조그만 독도군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인공으로 선착장시설이 되어있는 곳은 동도이다. 동도의 상봉에는 하얀 등대가 우뚝 서있고 그 옆에 독도수호대 막사가 있다.
선착장에 올라 제일 먼저 살펴본 것은 ‘대한민국 동쪽 끝’이라는 표지석이었다. 이 석비 주변에서 독도를 살펴보고 사진촬영을 할 뿐 더 이상 오를 곳도 없고 머무를 곳도 없다. 등대까지 올라가는 아주 가파른 계단이 있지만 허용되는 계단이 아닌 것 같았다. 부두에서 독도수호대까지는 케이블이 설치되어 있다. 화물을 끌어올리는 시설이다.
독도는 울릉도에서 80km 떨어진 동쪽 끝 국토이다. 우람한 돌산이 솟아있을 뿐 평지는 없고 동도에 조성한 부두가 하나 있을 뿐이다.
최근 뉴스에 대한민국 농구협회에서 농구대를 설치해주었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독도에 있는 것은 수천 마리의 갈매기와 주변을 호위하고 있는 작은 바위들 그리고 상단에 보이는 천년 묵은 푸른색이끼이다.
그리고 서도에 어민숙소 건물이 있는데, 독도주민이 거주하는 집이다. 부두 앞에 있는 큰 바위 촛대바위가 명물이다. 촛대바위가 감싸주는 천연의 바다호수가 있는데 유리알처럼 맑은 바닷물이다. 갈매기섬에는 수천마리의 갈매기들이 앉아있고 물개바위와 독립문 등 천연의 동굴이 이색적이다.
우리들은 잠시 후 유람선에 올라서 도열하여 우리와 작별하는 독도수호대 대원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었다. 대한의 아들들이고 내 자식 같은 젊은이들이다.
그리고 유람선이 독도를 한 바퀴 돌았는데 안개가 갑자기 끼어 대한민국 지도형상은 볼 수 없었다.
독도는 460만년 전 화산폭발로 조성된 섬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우산도, 삼봉도, 가지도, 석도 등으로 불려왔으며 독도로 처음 쓰인 것은 1906년(광무10년) 울릉군수 심흥택의 울릉 보고서에서 부근 소속 독도라는 기록과 한말지사 황현의 ‘매천야록’에서였다.
울릉도 동남쪽 89km인데, 일본의 은기도로부터는 160km 떨어져 있다. 우산국이 울릉도와 독도로 구성된 사실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있으며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의 「조선왕국전도」에도 명기되어 있다.
일본의 고문헌에도 한국영토로 기록되어 있고 1946년 연합국 군령발표와 유엔군도 1948년 한국영토에 포함시켰다. 역사와 국제연합이 우리 국토임을 확실하게 명기하고 있는데 최근 일본은 또다시 광기를 부르고 생떼를 쓰고 있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내가 독도땅을 밟은 날 국회의원들이 독도를 방문했고, 애국청년들 수백 명이 독도를 찾아서 태극기를 휘날렸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큰 사랑과 영혼이 머무르고 있는 우리 국토 독도여! 영원히 빛나거라.
<수필>
탈곡사(脫穀史)
김학래
식탁에 오른 밥알의 진실은 알곡, 곧 곡식이다. 곡식은 수확된 농작물에서 탈곡한 것인데, 이 알곡을 추스리는 일을 타작이라고 하였다. 인류역사에서 타작(탈곡)의 변천과정을 더듬어 보는 것도 인류 발달사를 살펴보는 한 단면일 것 같다.
다 익은 곡식에서 알곡을 얻는 최초의 방법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 손바닥으로 부벼서 알곡을 골라내는 방법이었을 것 같다. 원시인들이 이런 방법으로 알곡을 골라 생식하였을 것 같은데 나의 추리가 맞는지 모르겠다.
나는 소년시절 농촌에서 자라면서 보리통금과 콩통금이란 서리를 해본 일이 있었다. 5월 중순경 보리밭이 누렇게 물들어질 무렵, 계곡이나 언덕 아래 으슥한 곳에서 풋보리를 꺾어다가 모닥불에 익힌 후 불에 탄 새까만 보리 모가지를 손바닥으로 부비면 뜨끈뜨끈한 통보리쌀이 손바닥에 모아졌다. 이 통보리쌀을 입에 넣으면 구수하고 맛이 좋았기에 배가 부르도록 계속 먹었다. 내 어린 시절의 봄은 언제나 춘궁기였으며 보리 고개라는 배고프고 어려운 고비였던 것이다.
또 가을이면 콩통금도 재미나게 해 먹었다. 그 당시에는 보리통금과 콩통금을 한다 해서 보리밭 주인과 콩밭 주인이 성화를 내고 쫓아다니는 일은 없었다.
6.25 당시 산 속으로 피신했던 어떤 인사들이 여러날 벼를 훑어 생식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말하자면 이런 방법과 수단이 원시 탈곡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 다음 탈곡법은 아마 후려치는 방법이었을 것 같다. 익은 벼 포기를 벽에다 후려치면 벼들이 떨어질 것이다. 실제로 수수 모가지를 방안에서 두들기는 타작 상황을 본 일이 있다.
그 다음 탈곡법은 몽둥이나 막대기로 두들기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콩을 수확한 후 잘 말려서 멍석 위에 늘어놓고 작대기로 두들기면 콩알이 우수수 떨어진다. 참깨나무를 모아놓고 두들기면 깨가 쏟아진다. 참깨농사를 잘한 후 수확을 하고 타작을 할 때에는 어린 애기 다루듯 아주 조심스럽게 해야만 손실을 면할 수 있다. 소중하고 귀하고 값비싼 참깨알이 쏟아지는 기쁨이 얼마나 좋은 것이기에 사람들은 금슬이 좋은 신혼부부들의 행복 치수를 깨가 쏟아지는 것에 비유하는 것일까? 수수나 깨와는 달라서 보리 모가지에서 보리쌀을 얻어내는 타작법으로는 몽둥이로 내려치는 방법이 있었다.
다음으로 도리깨 타작법을 들 수 있었다. 도리깨란 긴 장대 끝에 대나무 살들을 부착하여 장대를 휘두를 때 대나무 살들이 보리집이나 콩단을 사정없이 때리는 농기구다. 도리깨 타작법은 최근까지도 산간벽지에서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혼자서도 도리깨질을 하지만 옛날에는 서너 명의 장정들이 농요를 부르면서 재미있게 두들기는 것이 상례였다. 농요를 부르기에 흥을 돋을 수 있고 리듬감이 있기에 도리깨끼리 충돌하는 일이 없었다. 그 농요의 가사를 잘 모르지만 ‘옹해야! 옹해야! 어쩔시구 옹해야!’ 이런 것인 줄 알고 있다.
타작법의 다음은 훑태를 써서 벼나 보리 모가지를 훑어내는 방법이었다. 벼를 훑태로 훑으면 알곡이 쏟아지지만 보리 모가지는 다시금 두들기거나 쳐야만 보리쌀이 되었다. 그러기에 기계로 보리타작을 할 때에도 보리를 친다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보리 탈곡의 경우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보리집을 송두리째 집어넣는 기계가 있었으며 추려진 보리 모가지를 넣고 타작하는 기계가 따로 있었다.
벼훑태 다음으로 나온 타작 기계가 탈곡기였다. 발로 밟으면 웽 웽 비명을 지르면서 탈곡 원반이 돌아가고 볏단을 들이대면 벼가 쏟아졌다. 10분쯤 밟고 나면 땀이 나고 다리가 뻣뻣해지는데 농부들은 이 힘든 작업을 온종일 하였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밟아대는 중노동이었지만 수확 후 알곡을 뽑는 재미로 농부들은 지칠 줄 몰랐다.
요즘에는 탈곡도 기계화되고 현대화되었다. 콤바인이란 기계가 나락밭을 갈고 다니면 벼는 가마니에 담아지고 볏집은 논바닥에 깔리는 것이다. 벼 타작과 보리타작이 이렇게 되기에 옛날처럼 볏단과 보릿단이 집안으로 들어갈 일이 없다. 볏단이나 보릿단을 지게로 져 나르고 머리로 이고 다닐 일이 아예 없어진 것이다. 농부들이 등짐 때문에 골병들 일도 없고 부녀자의 머리가 벗어질 일도 없다.
마당 한 쪽에 나락배눌(낟가리)과 보리배눌이 쌓아질리 없고 타작 후 마당에 만들어지던 두 대(벼를 저장하는 시설)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요즘 현대인들이 옛날의 타작 방법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농업 박물관에 가면 훑내며 도리깨며 탈곡기를 볼 수 있겠지만, 그 용도를 다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도리깨질을 하면서 부르던 농부들의 노래와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를 아에 들을 수 없을 것 같다. 식량이 남아돌아가기에 늘 배가 부르고 군것질 감도 많은 오늘의 청소년들이 그 옛날의 보리통금 맛 콩통금 맛을 어떻게 알 수 있겠으며 어찌 감지할 수 있겠는가?
탈곡법이 기계화되었지만 농민들의 마음은 어둡기만 하다. 수매도 잘 안되고 농산물을 팔아봐야 생산비에 못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좋아졌다는데 농사를 짓는 재미도 보람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보리타작 벼타작을 수동으로 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이겠지.
<수필>
꽃무릇
김학래
가을이 오는 길목을 찾아 지난 9월 중순 함평군 해보면에 있는 용천사를 찾았다. 용천사가 가까워지면서 우리 일행은 빨간꽃 꽃무릇의 마중을 받았다. 꽃무릇은 9월초부터 10월 중순까지 피는 여인의 입술처럼 붉은 꽃잎과 속눈썹처럼 가냘픔 꽃술로 이루어지는 잎이 없는 꽃봉오리인데 학명으로는 석산화라고 한다.
꽃무릇은 한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한 스님이 죽어 그 고혼이 절 옆에 꽃으로 피어난 것이라는 전설이 내려온다는 것이며 애틋한 사랑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꽃무릇은 잎과 꽃과 줄기가 따로 솟는 특이한 꽃으로 무리지어 핀다고 해서 무릇이란 이름을 얻었으며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해 서로 그리워한다는 별리를 상징해 옛 어른들은 이 꽃을 담장 밖으로 뽑아 던지면서 개무릇이라며 비하해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요 근래 함평군이 친환경축제 ‘나비축제’와 함께 용천사의 꽃무릇 군락지를 관광명소화하면서 개무릇의 ‘개’자를 ‘꽃’자로 바꾸어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용천사 일대의 꽃무릇 군락지를 감상하기 위해 숲속을 헤매고 용천사를 주위 한 바퀴 돌았다. 숲속에서도 꽃무릇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숲속이라면 그늘진 곳이다. 햇빛을 못 받기에 잔디도 살지 못하는 곳이 나무 밑이고 숲속인데 꽃무릇은 이와 같은 악조건 하에서도 무성하게 피어있다. 빨갛게 불타는 숲속, 그 숲길을 거닐면서 꽃무릇의 장관을 찬미한다.
못 이룬 사랑이 저토록 빨간 꽃으로 화신할 것일까? 너무나도 정열적인 붉은 꽃이 이파리를 쫓아냈을까? 잎은 간 곳 없지만 붉은 꽃봉오리 군락을 지어 빨간 꽃바다를 이루니 아름다운 장관에 나그네는 넋을 잃게 된다.
용천사의 꽃무릇 군락지는 무려 46만평의 광활한 꽃동산을 이루었으며, 용천사의 진입로 5km 주변도 꽃무릇 가로꽃으로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함평군에서 해마다 9월 중순이면 사흘간의 꽃무릇 축제를 개회함으로써 이 희귀한 꽃 군락지에 전국의 관광객을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꽃무릇 구경이 좋고 용천사의 뒷산을 올라보니 쉬어가는 숲속 등 휴게소 시설과 등산로 안내가 매우 훌륭하게 되어있다.
일행 중 어떤 이는 내 고장의 원님을 용천사 등산로에 출장보내야 된다는 익살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꽃무릇 군락지는 영광 불갑사와 고창 선운사 주변에도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꽃무릇이란 아름다운 꽃이 어째 남도의 세 사찰 주변에만 자생한 것일까?
전설처럼 어떤 스님의 애절한 사연이 꽃이 되었기에 사찰 주변에 피는 것일까? 꽃무릇 군락지는 한국의 백경 중 48경으로 선정된 비경이라는 것이며, 한편 함평의 용천사 꽃무릇 축제와는 달리 영광군 불갑사에서도 9월 중순에 사흘간의 축제를 개회한다는 것이다.
용천사와 불갑사는 인접해있으며 고창 선운사도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남도의 꽃무릇 군락지 세 사찰은 가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며 빨간 꽃을 찬미할 수 있는 새로운 관광명소로 부상한 것 같다.
용천사의 빨간 꽃무릇 꽃에 가슴이 붉게 물든 날 사찰 입구에서 버섯 전골에 동동주를 진하게 마셨던지 내 얼굴은 금새 홍당무가 되었다. 잠시 아름다운 꽃무릇에 물들었으리라.
여보쇼 벗님네야! 오늘은 진정 꽃좋고 술맛나는 날이로구나.
<수필>
고향하늘에 띄운 연서
김학래
그 옛날 내가 살던 우리 동네의 모습을 회상해보자. 앞산과 뒷산에 병풍처럼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인데 당시 우리들은 앞까끔 됫뫼로 지칭했으며, 산골짜기에서 시작되는 계곡을 큰 굴형(큰굴)과 덤축굴이라고 불렀다.
이 두 개의 골짜기 물이 마을 입구에서 합류하여 동네 북판을 관통했는데, 놀이터도 무슨 장난감도 아예 없던 그 시절이었기에 동네 아이들은 산과 들 개울물을 따라 쏘다니면서 자연을 먹고 마시며 자라고 동심을 키웠다. 냇 건네(냇 건너), 도내기(냇가 마을), 큰 들, 강땅재(고개 이름) 등 토속적인 지명이 지금까지도 전해져 오는 것일까?
초가집과 돌담, 감나무와 살구나무로 조성된 너무도 초라한 마을이었지만 그러나 사랑과 웃음이 넘쳐흘렀으며, 대문이 없는 집, 자물쇠가 아예 없는 방들이었지만 도둑도 없었고 가증의 평화가 늘 유지되었다.
호박넝쿨 박 넝쿨로 뒤덮이던 초가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변모되고, 나무꾼들의 갈퀴 소리로 떠들썩하던 앞 뒷산은 이제 발을 들이밀 틈이 없을 정도로 우거지고 미꾸라지가 우글거리던 냇가가 시멘트로 단장되어 송사리 한 마리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마을의 윤곽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이다. 달리진 것이 있다면 빈 집이 늘어가고 젊은이와 아이들이 크게 줄고 사랑방에서 간단없이 흘러나오던 시골양반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고향 하늘을 생각하니 하나, 둘 고향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농부들의 단잠을 깨우던 새벽의 닭울음소리, 논둑을 달리는 송아지의 어미 소 부르는 소리, 풍년을 구가하던 농부들의 상사 소리, 눈이 오는 한 겨울밤 집안을 울리던 청아한 다듬이 소리, 이것들은 모두가 고향의 소리이며 소음과 공해로 찌들은 도시에서는 들어보기 어려운 소리들이다.
내 고향의 맑은 하늘과 신선한 공기가 그리워진다. 졸졸졸 시냇물 소리가 듣고 싶고 아침 이슬을 머금은 싱싱하고 수줍은 호박꽃으로 뒤덮인 초가지붕과 빨간 고추가 펼쳐진 마당 한 구석에서 목청 높여 홰를 치는 수탉 등 농가가 보고 싶다.
소음과 오염, 공해 속에 찌푸리고 사는 도시 사람과 차량이 넘쳐흐르고 부도덕과 무질서, 불신과 생존경쟁으로 찌들어가는 도시 한 구석에 사는 내가 염치 좋게 아름다운 향수에 젖는다. 그리고 고향 예찬과 고향을 그리는 내 마음을 달님에게 실어 보내 고향 하늘에 띄운다.
고향은 아름답고 순수한 곳, 고향 땅은 영원한 그리움의 터, 고향은 순박한 인심과 인정의 샘이 살아 움직이는 곳, 마음은 늘 그곳에 있으니 이 밤에도 아름다운 고향 꿈을 꾸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