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송이눈 내린 해, 웃는 해는 붉은빛으로 타오르고 나는 오늘도 꽃을 하아름 들고서 대흥사 부처님 전을
찾는다. 사천왕문을 넘어 해탈문 지나 대흥사 가는 길 온통 하이얀 눈빛이다. 까달음과 자비의 성전을 향하는
여정에 황소한마리 웅크리고 앉아 나를 바라본다. 황소 언저리에 앉아 있던 새해 까치는 좌정한체 침묵과 명상의 날개를 접는다.
춘삼월인가! 눈색이꽃은 수북눈을 온기삼아 노오란 얼굴을 내밀어 나를 환영한다.
이 모든 풍광이 온통 아름다운 내 생이요 내 손으로 그려질 눈부신 미래를 예고한다.
승무(僧舞)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을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 는 별빛이라
.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전주 한옥마을로 이사한 늦깎이 ‘백발의 화가’ 김숙자 화백(81). 이분을 찾고 싶다.
김숙자 화백은 ‘백발의 소녀’. 언제나 존댓말을 쓰는 말씨와 목소리, 흰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모습 또한 소녀다. 1930년생인 한숙자 할머니의 머리카락은 그야말로 백발이다. 환하다. 우리 나이로 여든두 살이니 고령이기도 하지만 이미 40대 중반부터 흰머리였다고 한다.
“한번은 염색을 하려다 부작용 때문에 고생을 했어요. 얼굴이 붓고 그래서 그때부터 그냥 뒀어요. 마흔여섯 무렵부터였으니 남편이 먼길 떠난 뒤부터 오늘까지 내내 백발이었네요.”
어쩌면 그리움은 흰색일지 모른다. 김숙자 화백의 말처럼 남편 사후의 ‘백발’이 또 하나 ‘일생의 획’을 그은 셈이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그는 1·4후퇴 때 두 동생과 잠시 인천으로 내려왔다가 북쪽의 부모형제와 헤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다행히 고향 출신 오승세씨를 만나 결혼했으며 금실 좋은 부부로 4남매를 낳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76년에 남편과 사별하고 말았다. 그 뒤부터 4남매와 손자·손녀를 기르는 일에만 전념하며 바깥나들이 한번 제대로 못해본 전업주부로 살아왔다. 그때까지는 비교적 평온했다. 그러나 또 한번 위기의 파도가 밀려왔다. 69세에 뇌출혈로 쓰러진 것이다.
한고비 넘으면 또 한고비, 그녀의 몸을 비집고 들어선 뇌의 몸부림과 출혈은 생사의 탑이라도 붙잡고 아직 남아있는 목숨을 붙잡고 생의 기원을드린다. 서방정토에 계신 무량수불의 전당에서 전설을 춤을 추고 있는 칼라빈가가 생영의 숨을 되찾아주지는 않을까하여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몸부림친다. 하늘을 나는 인면조 역시 나타나 생을 여의기만을 기다리는 듯하다.
하지만 이마저 전화위복이랄까. 그 무렵 전남 해남 대흥사에서 요양을 할 때부터 서서히 또 하나의 다른 생이 다가오고 있었다. 심심할 때면 손녀가 쓰다 남긴 물감으로 혼자 뭔가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지만 은근히 재미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습작을 하기 시작했다. 뇌출혈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한 그림 그리기는 74세 때부터 본격화됐다. ‘국자 대신 붓을 들기 시작한 것’이다. 김숙자 화백은 국자대신 붓을 들고 나면서 화백의 길을 가게 되었다. 다시금 김숙자는 주부의 한생을 놓고 부활의 생을 찾게 된것이다.
그분의 삶의 궤적이 어릴적 꿈꾸던 그림 속에 느낌이요 풍광 그대로다. 산사, 소, 꽃, 촛불, 부처, 탑, 물고기, 사람,
대흥사의 대적광전의 비로자나 부처님께 드리는 꽃다발 한다발이다.
깊은 나무 숲 속에는 노랑 단청, 붉은 단청, 푸른기와 절간
자신을 닮은 소한 마리 견우, 심우, 견성을 하고자 근심과 소망 부둥켜 안고 탑을 돈다,
가파른 소나물 절벽을 비껴 외동떨어진 정자처럼 위태로운 자신의 처지를 살핀다.
딸의 응원과 역할이 컸다. 여성학자이자 명강사인 오한숙희씨(53)가 바로 그의 딸이다. 74세라면 일반인들에겐 생을 정리하는 시기가 아닌가. 그런데 김숙자 할머니는 마침내 열망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억누르고 내재화시켰던 것들을 색으로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놀라운 집중력이었다. 오한숙희씨는
“그 무렵부터 부엌을 옮기고 화실을 차렸지요. 싱크대 대신 이젤이, 양념통 대신 물감이, 수저통 대신 붓통이 어머니 일상의 파트너가 됐지요. 그동안 전업주부로만 살아오던 어머님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고 저도 깜짝 놀랐지요. 밥과 국과 나물 대신 산과 꽃과 나무와 얼굴들이 어머니 손끝에서 태어났죠. 그림들의 색도 현란할 정도로 자유로웠고요. 그래서 나 또한 응원자가 되었지요” 라며 놀라워했다.
그렇게 국자 대신 붓을 든 한숙자 할머니는 말 그대로 언제나 ‘싱크대 대신 이젤을, 양념통 대신 그림물감을, 수저통 대신 붓통을’ 옆에 두고 마음속에 깊이 담아두었던 추억과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그림으로 펼쳐내기 시작했다. 가슴 깊숙이 눌러 두었던 남편 오승세씨와 무덤을 그리기도 했다. 그것은 또 다른 해방을 의미했다. 오한숙희씨 또한 어머니의 새로운 재능을 알게 된 뒤부터 작품 활동을 전적으로 지원했고, 어머니의 전시회를 직접 기획하느라 동분서주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2009년에는 생일잔치 대신 김숙자 팔순기념 그림전 ‘여든, 봄날이 왔다’, 2010년에는 첫 초대전이자 자선 전시회 ‘오늘도 봄날이다’를 열어 호평을 받기도 했다. 관람객들은 한결같이 “그림에서 어머니 품 같은 온화함과 따스함이 느껴진다. 잃어버린 고향의 냄새를 맡는 듯 그림이 참 따뜻하고 좋다”며 진심어린 찬사를 보냈다. 굳이 말하자면 전문 화가들의 그림에는 못 미치지만 ‘기교가 넘쳐나는 그림이나 전형화된 그림’이 아니라 마치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붓끝으로 살려낸 ‘어머니의 마음’이 그림 앞에 선 이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던 것이다. 전시 수익금은 약속대로 모두 사회운동단체에 기부했다.
“아이고, 저는 아직 그림을 잘 몰라요. 다만 좋아서 그릴 뿐이에요. 늙은이가 장난 논 걸 잘 봐주니 고맙지요. 아직은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참 좋아요. 나도 남들처럼 베풀고 싶었지만 가진 게 없어 늘 마음뿐이었지요. 그런데 그림을 그리다보니 그것 참, 그림도 나눔이 될 수 있더라고요. 밤잠을 줄이고 작품에 매달리는 일이 나눔과 소통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대견할 뿐입니다. 가난한 단체들의 ‘후원의 밤’에 돈은 못주더라도 나의 못난 그림 한 점을 갖다 주어도 많이 좋아하니 그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김숙자 화백은 지난해 전시회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폭탄선언’을 했다.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74세의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선 것도 만만치 않은데 81세의 나이에 주거생활의 독립을 선언해 ‘쟁취’했다. 그리하여 마음에 두었던 전주 한옥마을 근처의 원룸 하나를 얻어 독립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간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스스로 끼니를 챙겨먹으며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길, 외로운 화가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한옥마을이 참 좋아요. 주말 말고는 조용하고, 산책하기에도 좋고요. 이따금 손자·손녀들이 보고 싶고 외롭기는 하지만 내 곁에는 언제나 그릴 게 있으니 좋아요. 어떨 때는 그림에 빠져 끼니를 거르기도 하지요. 지난번 전시회 마치고 생각하니 열 달 동안 죽어라 그렸더라고요. 아기가 태어나는 세월이잖아요. 처음에는 그림들이 나의 아기 같았지만, 다 그려진 그림들을 쭉 훑어보니 새로 태어난 아기는 바로 나였어요. 날이 가면 갈수록 날마다 새로 태어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저기 흙담을 보세요. 새 봄빛이 너무 좋잖아요. 기침이 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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