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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245p
※ 제5장의 <어머니 같은 고향> 중 '부후겐토(武夫原頭)에 새싹이 돋고'와 '차죽사(茶竹舎=チャチクシャ)의 추억'은 모두 나의 이력서로, 1980년 3월 니혼게이자이신문(日本経済新聞)에, '과단(果断)과 선견지명' 은 1954년 2월 동 신문 "가사이 신죠(笠井真三)전(伝)" 에, '노구치(野口)씨와 구도군(工藤君)'은 1982년 8월 "일본 요업사(窯業史)에의 증언" 편집위원회 원고에서, '쇼팽을 생각하다'는 1980년 10월의 "일본경제신문 레코드 예술" 이란 원고에 가필 보정한 것임. '니시나 요시오(仁科芳雄) 선생님을 추모하다' 와 '과묵한 후타바야마(双葉山)' 와 '시게미쓰 외무상(重光外相)의 알려지지 않은 면모'는 모두 1984년 6월에 집필한 것임.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어머니 같은 고향 (247p)
● 24 어머니 같은 고향
제가 태어난 고향은 오이타현 미나미아마베군 우메마치 오아자 시게오카(大分県南海部郡宇目町大字重岡)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의 호칭이며, 제가 태어난 메이지 30년(1897년) 무렵의 명칭은 오노군 시게오카무라(大野郡重岡村)였다.
그것이 1950년에 시게오카무라(重岡村)와 오노이치무라(小野市村)가 오노군에서 미나미아마베군(南海部郡)으로 옮겨갔고, 이어 1955년, 시게오카무라와 오노이치무라가 합병하여 우메무라(宇目村)로, 다시 1961년, 우메마치(宇目町)로 바뀌었다.
나에게는 고향이라고 하면 지금도 오노군 시게오카무라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 시게오카무라의 촌장을 했던 나의 아버지 히데요시(秀吉)가 20대 때 우리동네는, "보기에는 많아 보였는데 막상 따서 담아보니 바구니에 별로 안 차는구나, 무카고(덩굴마 열매)여" 라는 시구(詩句)로 표현 되었다.
또한 그 후 마찬가지로 촌장이었던 이케다(池田) 씨는 "해마다 되풀이되는 농사이지만 올해의 나는 아직 새 도구처럼 낯설다"라고 하였고, 그 후 촌장을 지낸 처남 야노(矢野)는 "사물은 변하지 않았는데 환경이 바뀌자 존재감이 생겼다." 라고 읊었으며, 1972년 새해 칙제(*勅題: 천황이 내린 시선)에 입선한 마을 의사 이소카와(五十川)선생의 단가(短歌)는 "폐교가 결정된 산속 분교의 아이 둘을 데리고 검진을 받으러 간다."이었다.
이것들을 봐도 시게오카무라가 얼마나 산간벽지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한촌도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도로는 사통팔달, 비록 몇 가구의 취락으로 통하는 도로라도 모두 포장되어 있다. 수천 대의 자가용은 동네에 가득 차 있다.
마을사무소도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의 분교도 모두 현대적인 철근 콘크리트이다. 대부분의 집은 모두 신축으로 넓이와 구조 모두 현대식으로 되어 있다. 개울까지 콘크리트 제방으로 되어 있는 것은 다소 쓸쓸하지만, 이것은 홍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논밭의 안전을 생각하면, 이것 또한 꽤나 좋아진 상황이다.
호화로운 공회당 못지 않은 산림센터라는 것이 몇 촌락 공동의 훌륭한 시설도 있다. 국도, 대임도(大林道), 현도(県道) 등 큰 도로도 현재 한창 공사 중이다. 유명한 표고버섯산, 삼나무 히노키 대조림(大造林), 여러 곳의 양돈 센터 등이 마을 전체에 걸쳐 조성되어 있으며, 전 마을 녹음 속에 머지않아 다가올 대임업 대축산지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어머니 같은 고향
● 24-1 아버지는 힘이 장사인 촌장
저는 옛 시게오카무라의 옛 촌사무소가 있던 시게오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메이지 30년(1897년) 1월의 18일이다. 아버지 이름은 히데요시(秀吉)이고, 어머니 이름은 치와(チワ)라고 한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시게사부로(茂三郎)의 장남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소위 미목수려(眉目秀麗)한 시골 신사로, 큰 키에 흰피부(長身白皙)로 남들 보다 힘이 쎘다.
마을 최고 힘장사와 겨루어도 질 것 같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아버지의 할아버지, 즉 저의 증조부에 해당하는 사람 중에 쥬조(重蔵)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계명(戒名: 죽은 후의 法名)이 '일권전도거사(一拳全倒居士: 한주먹으로 전부 쓸어뜨리는 사람)'라는 대력무쌍(大力無双)의 남자였다고 한다.
워낙 시골이라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나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구마모토 체신 관리 양성소 입학시험에 합격한 것을 보면 상당한 수재였던 것은 틀림없다. 스무 살 전후부터 촌사무소에 근무를 했고, 그 무렵 자주 군청 소재지인 미에마치(三重町)로 출장을 갔다고 한다.
그 당시 오노군수는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1887~1957)씨(후의 외무대신)의 부친이었고, 그 부친과 저의 아버지가 바둑을 두는 도중에 응아~ 하고 태어난 것이 시게미쓰 대신이었다고 한다. 그 탓에 아버지는 몹시 시게미츠를 좋아하셨고, 나도 시게미츠 씨와는 왠지 모르게 친밀한 마음으로 교제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쨌든 시골의 유지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 같고, 또한 성실한 정당원이었던 것 같다. 다이쇼 시대 촌장 시절, 와카쓰키(若槻礼次郎: 1866~1949) 총리가 우연히 오이타현에 왔을 때, 아버지는 매우 자연스럽게 "와카쓰키 군"이라고 부르며 태연하게 담소했는데, 당시 현 지사가 매우 난처해 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런 아버지가 나를 제5고등학교(*第五高等学校)에 보냈을 때, 나에게 "도요로쿠, 안도 가문이 결코 부유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하지만 너는 학교 생활에서 결코 가난한 처신은 하지 마라. 그렇다고 사치를 부려서도 곤란하다. 열 명이 있으면 세 번째나 네 번째 생활을 하라." 고 훈시했다. 이것은 저에게 매우 고마운 가르침이었다. 나는 이것을 어찌 됐든 지켜냈다고 생각한다. (*第五高等学校:1887년 긍사모토(熊本)에 설립한 제국대학(도쿄·교토 등) 진학을 위한 엘리트 예비학교로 현 구마모토대학(熊本大学)의 전신)
할아버지 시게사부로는 앞서 언급한 대력무쌍
(大力無双)의 쥬조(重蔵)의 장남으로, 내가 여섯 살 때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할아버지는 농업과 함께 목탄 제조업을 시작하여 십여 가족의 숯 굽는 사람들을 모아 목탄을 구워 오사카로 출하, 상당한 규모로까지 발전시켰다. 또한 스스로도 당시 군의원이 되어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듯했지만, 52세에 사망하고 말았다.
나는 그때 아직 초등학교 1학년이라 어려서 그랬는지, 별로 슬픔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출입을 신기해 했을 정도였다. 우리 어머니는 와타나베라는 권세가의 딸이었다. 주변의 말로는, 매우 거들먹거리며 시집왔다고 한다. 샤미센과 노래가 매우 능숙했던 것을 기억한다. 어머니의 아버지, 즉 나의 외할아버지는 세이난전쟁(西南戦争) 시기에 마을의 관리로서 상당한 공로가 있었던 분이라고 한다.
세이난전쟁 당시, 우리 마을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1828~1877)의 마지막 거점, 에노타케(可愛岳)를 공략하는 관군의 본영이었던 곳으로, 절에는 다니 소장(谷少将), 우리 어머니 집에는 노즈 연대장(野津連隊長)이 있었고, 막하에는 구로키(黒木), 노기(乃木), 가와무라(川村) 등 후년의 러일 전쟁의 명장들이 즐비하게 있었다고 한다. 사이고 군도 관군이 들어가기 전, 두세 달 동안 시게오카에 체류했다. 그 두령은 기리노 도시아키(桐野利秋1839~1877)였다고 들었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어머니 같은 고향
● 24-2 가슴 설레게 한 초등학교 시절
초등학교는 우리 집에서 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당시 초등학쿄는 심상소학교(尋常小学校)라 하였으며 4년제였지만, 워낙 인구가 적은 시골이라 복식 교실, 즉 1학년과 2학년, 3학년과 4학년이 각각 한 반이 되어 총 2반, 그것을 교장 선생님과 차석 선생님이 맡고, 그 외에 여자를 위해 재봉 여선생님, 합쳐서 세 명이라는 교사단이었다. 이것으로 실제 교육은 의외로 잘 되었던 것 같았다.
마침 러일 전쟁이 한창 때였고 엄동은 꽤 추운 분지였음에도 결코 버선을 신지 않았다. 가끔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전선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귀를 기울여 열심히 들었던 것을 떠올린다. 한 달에 한 명 정도는 전사자의 마을 장례가 있었다. 물론 초등학교는 전부 참석한다.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라는 가사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잊을 수 없다.
뤼순(旅順)함락은 메이지 38년(1905년)의 설날이었지만, 그때까지 세 번이나 함락기념 제등행렬을 했다. 1905년 5월 동해 해전의 대승은 시골이었지만 그야말로 최고의 기쁨이었다. 그해 겨울에 개선(凱旋) 축하가 있었던 것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요컨대 러일 전쟁은 오이타현의 시골 초등학생들에게 매우 큰 인상을 주었다.
메이지 40년(1907년) 3월에 심상소학교 4학년을 졸업하고, 우메(宇目) 고등소학교(高等小学校)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우리 집에서 약 5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가는 길이 산길이라 아이들 발로는 약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이듬해 학제 개혁이 있어, 심상소학교는 6년제가 되었으며, 우리는 다시 6학년을 거쳐 고등과 1년을 종료하고 우스키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런데 시게오카(重岡)는 해안까지 3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서 바다를 볼 기회가 흔치 않았다. 보통학교 6년 정월, 처음 바다를 볼 목적으로 사이키초(佐伯町-현재의 사이키시)에 갔다. 마을에 사에키초에서 와서 염색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그 사람에게 데려가 달라고 했다. 여행에 즈음하여 아버지로부터 세세한 주의서(注意書)를 받았다. 내용은 "학교나 시장을 둘러봐라, 공중목욕탕에도 가보고, 정미소에도 가봐라" 등등이다. 그리고 여비 사용 명세를 기록하라고도 했다.
첫 여행은 놀라움뿐이었다. 바다에 나가 과연 물이 짠지 확인했다. 배를 타고 노를 다루는 것에 감탄했다. 어시장에서의 많은 물고기에도 놀랐다. 인력거도 처음 타봤다. 기선 견학에서는 큰 기적 소리에 놀랐다. 배는 미야자키마루(宮崎丸)라는 오사카 상선의 700톤 기선이었다.
그 무렵 일기에, 700톤이라도 이렇게 크니까 2만 톤이나 되는 몽골리아마루는 얼마나 클까, 하고 쓰여 있다. 아마 어떤 잡지에 몽골리아마루가 실려 있어서,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또한 학교, 읍사무소, 군청도 가보았는데, 그중에서도 새해에 군청에 출근하는 군수님의 실크햇에 프록코트(서양식 예복 차림)의 위용에는 크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사이키쵸(佐伯町)는 모리(毛利) 씨 2만 석의 성하마을(城下町)이다. 성을 쓰루가성(鶴谷城)이라고 하며, 수영(水泳)으로 10년 이상 일본 제일을 이어온 사이키가쿠죠(佐伯鶴城)고등학교의 이름은 이 성에서 유래한다. 모리 가문의 묘소는 보리사(菩提寺)인 요켄지(養賢寺)이며 이 절은 규모가 큰 것으로 임제종 묘심사파의 규슈 명찰로서 칠당가람(七堂伽藍) 전부를 갖추고 있다. 절 자체의 위용도 그렇지만, 모리 가문의 묘소도 호화로운 것이었다.
또한, 호린(芳林)이라는 곳에 세이난전쟁(西南戦争)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묘지가 있어, 참배하고 조의를 표했던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처음 바다를 본 사이키초 여행은 6박 7일이었다.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여비사용 명세서를 기록하였다. 받은 돈이 4엔이고, "마차 왕복임 50전, 모자 76전, 신발 75전, 버선 16전, 합계 2엔 19전"으로 나머지 1엔 81전은 아버지에게 돌려드렸다.
아버지의 여행에 관한 명령서(라고 쓰여 있다)는 300자가 넘는 것으로, 마지막에 조금이라도 아프게 되면 즉시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그 의사는 미타라이(御手洗) 선생님이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지금 봐도 부모의 고마움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해 3월, 이번에는 초등학교 6학년부터 고등과 2학년까지 총 25명이 약 8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사가노세키(佐賀ノ関)까지의 수학여행이었다.
이때, 720톤의 오이타마루(大分丸)라는 배를 타게 되었는데 배를 타는 것이 처음이라 뱃멀미를 해서 먹은 것을 모두 토했다. 이때도 여행 후 아버지께 일기와 여행 경비 명세서를 제출했다. 그에 대한 아버지의 평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적절한 평가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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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3 두번이나 체험한 죽음의 심연
초등학교 시절, 죽을 뻔한 적이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5학년 여름, 대홍수 이후 매우 무더워서 동네 악동 서너 명과 금지된 강변에 가서 위험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 수영하다가 실수로 중심부로 떠내려갔다.
여기는 엄청난 급류라서 살아날 수가 없었다.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 가며 어머니의 말씀을 헛되이 한 것을 마음속으로 사과하며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더니, 어느샌가 강의 가장자리로 와 있었다. 눈을 뜨보니 위에 수양버들 가지가 늘어져 있었다. 그것을 붙잡아 살아났다.
또 한 번은 6학년 때였다. 수영이 금지되지 않은 늪에서, 혼자 수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왼쪽 다리가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푹푹 빠졌다. 이번에야말로 목숨은 없다고 체념하고 있었더니, 또 운 좋게도 동네 젊은 사람이 근처에 있었고, 뛰어들어와 도움을 받았다.
나는 이 두 사건으로 어린 나이에도 인생관이 바뀐 기분이 들었다. 운명, 생명, 인은(人恩), 포기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 후, 내 일생은 몇 번의 위험이 있었지만, 그때 마다 대체로 그다지 당황하지 않아도 된 것은 이 초등학교 시절의 경험 덕분인 것 같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어머니 같은고향
● 24-4 우스키(臼杵)중학교 시절
그런데, 중학교 진학인데, 그 무렵 아직 사에키 중학교는 생기지 않았고, 시게오카에서 50킬로미터나 되는 우스키 중학교에 진학했다. 보통학교 6년을 졸업(改制第一号의 증서를 받았음), 곧바로 중학교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고등과 1년 정도는 다녀온 후에 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고등과 1년을 마치고 시험을 봤다.
입학 시험에는 사에키 팀에서 다섯 명이 응시하여 전원 합격했다. 지원자 수에 채용자 수가 같았으니 합격하지 못할 리가 없다. 다만 기묘하게도 2년이 되어 보니, 이 사에키조 다섯 명 중 네 명까지가 1번부터 4번을 차지하고, 한 명만 낙제했다. 게다가, 나중에 네 명이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남은 사람은 나 혼자였다.
우스키 중학교에서는 기숙사에 들어갔다. 기숙사는 남·북 양쪽 교정에 나뉘어 있었고, 단층 건물로 차라리 바락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정도의 시설이었다. 각각 방이 열 개씩 있었는데, 다다미 8조의 방에 네 명이 함께 지냈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좁다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보리밥은 딱히 낯선 음식도 아니었고, 게다가 많은 양을 한꺼번에 지은 것은 의외로 맛이 있었다. 저녁에는 생선도 나왔다. 부족함은 없었다.
하지만 곤란했던 것은, 상급생으로부터의 하급생에 대한 차별이 심했다는 것이다. 1학년은 신병이라 실내외 청소부터 램프 손질까지, 심한 경우에는 상급생의 잠자리까지 깔아주었다. 아침에는 우물가에 가서 손 펌프를 누르고, 선배가 내미는 세숫대야에 물을 붓는다.
우물쭈물하다보면, 점호에 불려 나가, 세수할 틈이 없을 때도 많았다. 정말 분주하게 뛰어다니다가 지쳤다. 나는 군대에 들어간 적이 없어서 병영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신병의 괴로움은 이 기숙사 생활에서 일단을 맛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해가 끝났을 때, 동료 십여 명과 부근 산에 올라, 아, 이걸로 신병, 1학년은 끝났구나, 하고 진심으로 기뻐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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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5 대선배 "야마모토 장상(山本蔵相)"
우스키 중학교 1학년 3학기에 당시 대장대신에 취임한 야마모토 다쓰오(山本達雄1856~ 1947) 씨가 고향에 금의환향했다. 우리 중학생은 마을 외곽까지 마중을 나갔다. 1학년은 맨 앞줄, 저는 을반의 급장이었기 때문에 대열의 맨 앞에 섰다. 야마모토 대신은 인력거 위에서 1학년 꼬마인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그래, 공부는 잘하고 있나?" "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 됐어." 이것이 고향 제일의 대선배, 야마모토 남작을 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야마모토 씨에게는 오노다 시멘트가 큰 신세를 졌다. 현재, 저희 회사 최대의 보고인 츠쿠미(津久見) 공장도 야마모토 씨의 도움으로 오노다에 합병하게 되었다.
종전 후, 야마모토 씨가 옛날 농상무대신이었을 때의 비서관이었던 코사카 준조(小坂順造
1881~1960) 씨가 주도하여, 다케케이카이(竹渓会)라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다케케이(竹渓)는 야마모토 씨의 아호(雅号)이다. 여기에는 총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1878~ 1967) 씨와 대장차관을 지낸 후 일본석유 사장이 된 하시모토 케이자부로(橋本圭三郎1865~1959) 씨 등 아사노(朝野)의 명사 수십 명이 이름을 올리고, 1년에 한두 번 모여 야마모토 씨를 추모한다.
그 모임의 장소는 도쿄 마루노우치, 제2철강 빌딩의 오노다 시멘트의 강당을 사용하고 있었다. 저는 회원 중 최연소자(安藤豊祿1897~ 1990)였지만, 야아모토 씨와는 회원 중 가장 먼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어서, 조금은 콧대를 높히고 있었다.
야마모토 씨는 러일 전쟁 전에 일본은행 총재를 맡고 있었다. 러일전쟁 돌입 직전인 메지36년(1903년), 부족한 군함을 보충하기 위해 아르헨티나에서 막 영국에서 만들어진 두 척의 순양함을 구입했다.
닛신(日進)과 카스가(春日) 두 척으로 둘다 7천톤급의 우수한 장갑함이었다. 당시 일본 군함에 장비되어 있던 대포는 부앙각이 20도였지만, 이 두 척은 30도여서 높은 산을 넘어 건너편에 있는 적을 공격할 수 있다. 뤼순구(旅順口)를 해상에서 공격할 때 항두(港頭)에 노철산(老鉄山)이라는 산이 있어 일본의 다른 군함으로는 항내의 공격이 어려웠다.
그래서 닛신, 카스가의 30도 고각포가 주효했고, 그것이 뤼순 함락의 큰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 두 척이 1903년 12월, 일본에 도착했을 때, 영국의 취급 회사에서 당시의 대장대신과 일본은행 총재 야마모토 다쓰오(山本達雄1856~1947) 씨에게 응접 세트 각 1조가 증정되었다.
그 세트는 야마모토 저택에 있었지만, 종전 전에 야마모토 씨의 조카 요시토(義人)씨가 받았고, 전후에 인연이 깊은 당사가 양도받았다. 그 긴 의자는 현재 저희 도쿄 지점의 제 방에 놓여 있으며, 80년이라는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하며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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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6 질실강건(質実剛健)한 기풍
우스키쵸((臼杵町)는 현재 우스키시(臼杵市)가 되어 인구 3만여 명의 이나바 가문 5만 석(稲葉家五万石)의 성하 마을(城下町)이다. 이나바 번은 예로부터 견실함을 모토로 하는 기풍이 있었고, 마을과 학교에도 질박하고 강건한 기운이 넘쳐 유쾌한 중학교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우스키 중학교의 첫 번째 특징은 수영을 잘한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야마우치류(山内流-무예 영법 중의 한가지)의 영법을 채용, 우스키 사람들은 초등학교부터 이 기본을 배운다. 중학교는 그 연장선상에서 꽤 힘든 연습을 했다. 스이후류(水府流-강에서의 무예영법)와 간카이류(観海流-바다에서의 무예영법)의 중간, 즉 크롤과 평영의 중간 같은 영법(泳法)으로, 특히 수중 무예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여러 기술이 있다.
우리는 초보였지만, 그래도 나중세는 중학교 수영 조교를 맡았다. 실제로 우스키 고등학교에서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도 있었다. 테니스도 꽤 활발했고, 나는 중위권 챔피언이었다. 물론 그 무렵은 연식테니스였다. 야구도 활발했지만, 나는 인연이 멀었다. 특이했던 것은 보트가 있었다는 것이다.
보트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중학교에서 이것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마 야마모토 씨 같은 선배가 기부한 것 같았다. 당시 보트 레이스라고 하면, 서쪽 지방에서는 기껏해야 비와호(琵琶湖) 정도밖에 없었다.
우스키에서 원정을 가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고 한다. 노는 고정식 여덟 자루였고, 슬라이드 같은 장치는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다.
기숙사 생활도 3학년이 되니 꽤 편해졌다. 다만 담력 시험이라는 것이 있어서, 심야에 헨비나 신사에 가는데, 3학년이나 되었는데 무섭다고는 할 수 없었고, 억지로 허세를 부려야 할 정도의 고생은 있었다. 당시, 카르타(게임의 한 종류)가 유행하여 우리도 기숙사에서 시내로 원정했다. 밤에는 문을 피하고 담을 넘어 드나들었다.
근처에 고구마밭이 있어서, 저녁밥을 먹고 나면 자주 훔치러 가곤 했다. 그 무렵 츠치노 산로쿠(土野三六)라는 현의원이 있었는데, 현의회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 “우스키 중학교 기숙사 학생들은 대단히 품성이 나쁘다. 근처의 고구마밭에서 고구마를 훔치는 따위는 결코 ‘아침밥 먹기 전쯤의 일’이 아니라, 저녁 식사 후의 소행이다.” 이 일로 학교는 발칵 뒤집혔고, 우리는 선생님에게 아주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3학년 2학기에 수학여행이 있었다. 우스키에서 시코쿠의 마쓰야마(松山)로 건너가, 다시 구레(呉), 에다지마(江田島)의 해군병학교, 히로시마 시내, 미야지마(宮島)의 이쓰쿠시마(厳島)신사에 참배하는 3박 4일의 여행이었다. 히로시마의 니키츠(饒津-にきつ)신사에서 처음 노 쿄겐(能狂言)을 감상하고, 웃겨서 여러번이나 웃음을 참지 못했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이 여행에서 감기에 걸려 40도에 가까운 고열이 나 늑막염에 걸려 4개월 휴학하게 되었다.
그 요양 때문에 고향에 머물고 있던 무렵,
초등학교 교사의 신축 낙성식이 거행되었다.
아버지는 건축위원장이어서 낙성식 축사를 낭독했다. 그 원고의 문장은 내가 살을 붙여 다듬고, 정서까지 맡았다. 내용은 ‘갑론을박하여 그칠 줄을 모른다’ 따위의 한문 투성이에다 몹시도 근엄한 것이었지만, 글이 좋다고 크게 평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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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7 하이칼라 교장 배격
4개월의 휴학은 있었지만, 병휴로 인정 받아 4학년으로 진급했다. 그 해, 교장이 기데라 야나기지로(木寺柳次郎)라는 훌륭한 콧수염을 기른 교장에서, 도쿄대 문과 출신의 하이칼라한 스즈키 노부유키(鈴木暢幸)라는 교장으로 바뀌었다. 시골 중학교 교장이라고 하면, 당시 특히 세간의 이목을 끄는 존재로, 이른바 일거수일투족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너무 하이칼라였던 탓인지, 허실(虚実)은 불분명하지만 신임 교장의 언행에 대해 여러 소문이 나왔다.
그러는 사이에 교장의 부덕함(도덕적 결함)을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사람들까지 나타나기 시작했고, 학생들 사이에서도 “이건 정말 용납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점점 강해져 갔다. 다이쇼 3년(1914년) 4월의 일이었다. 파업을 벌여서 교장이 반성하도록 촉구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고, 상급생들만 실행에 옮기기로 결정되었다. 시 외곽에 있는 진난산(鎮南山)이라는, 높이 약 500미터쯤 되는 산 정상에 있는 신사에 농성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는 파업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반장이라는 입장상 앞장서서 깃발을 흔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표가 되어 교장을 만나, 지금까지의 경위를 선언하듯이 알렸다.
물론 교장은 크게 분노하여 즉각 중지를 명령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자 엎질러진 물이 되어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2·3학년생들까지 가세한다는 이야기가 되어, 사태는 완전히 큰일이 되어 버렸다.
하필이면 전대미문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마을에서도 큰 소동이 일어났고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협의한 끝에, 당시 가장 유력한 인물이던 정우회 소속 현의원 히라야마 씨와 역시 민정당의 가이 씨가 중재자로 나서
우리들에게 사정을 따져 물으러 왔다. 이런저런 경위를 설명하는 사이에, 그들 역시 학생들의 주장에 찬성하게 되었고, 상벌은 없을 것, 그리고 장차 교장의 전보(교체)도 고려하겠다는 조건으로 서너 시간에 걸친 교섭은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다음 날 등교하여 다시 교장 선생을 만나, 다소 의기양양한 기분으로 일을 매듭지었다. 2학년에서 5학년까지 가운데 불참자는 단 한 명뿐이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질서정연하기까지 한 파업이었다. 그런데 7월이 되자 교장에게 호출을 받아 “안도, 네가 파업을 선동하다니 언어도단이다. 본래라면 퇴학을 명해야 마땅하나, 한 등급을 감해 강제 전학을 명한다”는 말을 들었다.
전학이라고는 해도, 5학년 2학기부터라면 장차의 진학에도 문제가 생긴다. 아버지께 상의하는 편지를 보냈더니, 오는 길에 사이키 중학교(佐伯中学校)에 들러 전입학 내정까지 받아 놓고 곧바로 찾아오셨다. 아버지가 교장을 만나니, “아드님은 성적도 매우 우수하니, 우스키 같은 나쁜 학교에 그대로 두었다가는 다른 불량 학생들에게 물들 우려가 있으니 히로시마의 고료(広陵) 중학교 같은 곳으로 전학시키는 것을 권하고 싶다"는 취지였다고 한다.
지금은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의 고료 중학교는 평판이 그리 좋은 학교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완전히 노하여, 곧바로 사이키 중학교로의 전학 절차를 서둘러 끝내 버렸다. 그런 연유로 다이쇼 3년(1914년) 8월 3일, 나는 사이키 중학교의 하타 세이지로(秦政次郎) 교장 선생을 만나기 위해 사이키 마을로 향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날이었다. 마을로 나와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는데, 길모퉁이에 호외가 붙어 있었다. 즉, 세계대전에 돌입했다는 호외였다. 태평성대의 시절이라, 전쟁 따위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터라 나는 멍하니 서서 그 호외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날, 나에게는 또 하나 새로운 일이 있었다. 비행기라는 것의 실제 모습을 처음으로 본 것이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미국에서 돌아왔다는 30대 초반의 남자가 몰고 온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복엽 단발기로, 아마 모리스 파르망(Maurice Farman)이라 불리던 기종의 작은 비행기였다. 사이키 중학교 운동장에서 약 100미터 정도 미끄러지듯 활주만 보여 주었다. 그 정도였지만, 그래도 분명히 감격스러웠다. 오후에는 교장 선생의 자택을 찾아뵙고, 학교 생활 전반에 관한 기본적인 마음가짐에 대해 훈시를 받았다. 친절한 노교장이어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어머니 같은 고향
● 24-8 뜻밖의 사이키 중학교로 전학
대정 3년(1914년) 9월 1일, 나는 사이키 중학교 5학년에 전학했다. 사이키 중학교는 사이키 마을에 처음으로 세워진 중학교였고, 게다가 지역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기관이었다.
그만큼 마을 사람들이 이 학교에 거는 기대도 컸고, 학생들 또한 의기양양한 분위기였다.
게다가 사이키는 내 고향과도 가까웠고, 왕래하던 친척 집도 몇 채 있어 마음은 매우 편안했다.
다만, 5학년 2학기에 전학 오는 사람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듯이, 어쩐지 반 친구들이 나를 곁눈질하며 보는 것 같았다. 5학년은 제1회 졸업생에 해당했기 때문에 학생 수는 고작 17명, 한 반뿐이었다. 개교 전에 1학년 과정을 운영하다가 2학년으로 편입한 학생들이 절반, 나머지 절반은 다른 학교에서 전학 온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어딘가 서로 완전히 어울리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사이키 중학교는 5년제로 지금의 중고통합형태임)
그 불협화음을 메워 주고 있던 사람이 졸업 후 유도 8단이 된 이마이 군이라는 학생이었다. 그는 완력과 학력 모두가 뛰어났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그에게 연락하면 일이 원만히 해결되었고, 그 역시 적극적으로 전체를 통솔하고 있었다.
초대 교장은 이전에 학습원에서 국어 교수로 재직했던 하타 세이지로(秦政治郎) 선생이었다. 물론 독자적인 소신을 지닌 분으로, 학교뿐 아니라 마을 전체를 지도하겠다는 각오였기에, 교풍 또한 자연스레 극도로 엄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많은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행운이었다.
이마무라(今村)선생은 국어·한문을 담당하였는데 국사풍(國士風)의 인물로, 학생들은 한결같이 그 덕을 흠모했다. 교감인 시게토미(繁富) 선생은 수학을 맡았는데, 가르침이 매우 뛰어났고 인품 또한 중후한 분이었다. 또 재미있다고 할 수없는 물리와 화학을 실로 흥미진진하게 가르쳐 주셨다. 나 역시 선생님의 화학 수업 덕분에 완전히 화학을 좋아하게 되었고, 결국 대학에서도 응용화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기시노(岸野) 선생은 3년 동안 사이키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뒤, 다시 교토대학교 이학부에 들어가 졸업한 후 후루카와전공(古河電工)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전무가 되었으며, 이후 현재의 일본 제온(日本ゼオン: 화학제품업체)을 창립해 사장에 취임했다. 일본의 PVC 산업과 석유화학의 기초를 세웠다.
반 친구들은 전반적으로 성적이 우수했고, 각자 자기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한 학년 아래에는 훗날 유명한 영문학자가 된 구도 요시미(工藤好美 1898~1892)군이 있었고, 세 학년 아래에는 캐논 회장이 된 미타라이 다케시(御手洗毅1901~1884) 군이 있었다. 미타라이 군은 의학박사 출신으로 카메라 사업에 뛰어든 이채로운 인물이다.
하타 교장은 생활태도 점수(操行点)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품행을 갑·을·병·정으로 나눈다면 갑이 최고다. 최고라면 공자, 석가, 혹은 그리스도가 이에 해당한다. 이런 성인을 갑으로 둔다면, 보통 인간은 을도 병도 아니다. 모두 정으로 해야 옳다. 그러나 중학교에서 정을 주면 규정상 낙제를 시켜야 한다. 어쩔 수 없어서, 본의는 아니지만 전원을 병으로 한다.” 이런 이유로 제1회 졸업생은 전원이 ‘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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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9 "5고(五高)" 무시험 입학에 당했다(参った)
그런데 다이쇼 연간(1912년 7월 30일 ~ 1926년 12월 25일)에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무시험 입학 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다행히 나는 성적이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무시험 입학 신청 절차가 진행되었고, 그 서류는 구마모토의 제5고등학교로 제출되었다. 성적을 보면 당연히 무시험 입학이 허가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불가라는 통보가 왔다.
이유는 품행 점수가 ‘병(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통지가 온 것이 5월 중순이어서, 나는 그때부터 크게 허둥대며 7월에 치러질 시험 준비를 하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이 일을 계기로, 이후에는 전원 품행 병(丙)이라는 제도를 폐지했다. 시험은 7월 중순에 실시되었는데, 구마모토의 여름 더위는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체중이 약 4킬로그램이나 줄어들었고, 그 때 여윈 몸은 서른 살이 될 때까지도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시험준비에서는 수학 때문에 크게 혼쭐이 났다. 어쨌든 짧은 준비 기간이었지만, 준비에는 수백 문제에 손을 대기는 했다. 다만 정답을 따져 보는 데 딱 한 문제만, 귀찮아져서 게을리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실제 시험 문제지를 받아보니, 하필이면 그 문제가 제1문으로 나와 있는 것이었다. 수백 분의 일에 불과한 게으름. 그 벌을 받은 셈이다. 그 일로 몹시 낙담했지만, 어쨌든 시험은 끝까지 치렀다. 다행히 결과는 꽤 상위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나는 이때, 운명이라는 것을 참으로 뼈저리게 느꼈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부후들판에 새싹 솟아나다 (264p)
● 25-1 부후들판(武夫原頭)에 새싹 솟아나다
'부후들판(武夫原頭)에 새싹 솟아나다---' 이것은 5고(*第五高等学校)의 교가이다. 5고(五高)가 있는 구마모토는 대도시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사이키 같은 시골 마을에서 막 올라온 나로서는 모든 것이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무엇보다도, 같은 학년 학생들 모두가 도시 사람처럼 보였다.
물론 ‘촌스러움 기풍을 자임하는’ 오고(五高) 학생들이니,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을 터이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어딘가 그런 분위기가 느껴져서 매사에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모두들 꽤나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대로라면 나는 낙제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했다.
그래서 낙제만은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이른바 ‘공부’라는 것을 열심히 했다. 그 덕분에 2학년이 되었을 때는 내가 수석이 되어 있었다. 이런 일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 자신도 몹시 놀라고 말았다. 그 무렵에는 최상위 성적자에게는 수업료를 면제해 주는 특대생(特待生) 제도가 있었다.
나는 이것(特待生) 에 해당한다고 생각해 기뻐하며, 곧바로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나 사무국에서 온 답장은 특대생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제도(製図) 과목의 평점이 병(丙)이었고, 하나라도 병이 있으면 특대생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 조금 성급하게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아버지에 보고했기 때무에 이후로 아버지에게 수업료를 청구하는 데 무척 곤란을 겪었다.
대체로 고등학교 생활만큼 유쾌한 일은 없다. 이를 몸소 겪은 사람들, 특히 다이쇼(大正) 한 자릿수 연도(大正1년~9年: 1912~1921)에 이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그 느낌이 더욱 깊을 것이다. 더구나 오고(五高)처럼 고등학교가 그 도시의 최고 학부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그 즐거움은 한층 더 배가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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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2 '학문이 능숙하다'
구마모토 사람들은 제5고(五高) 학생들을 무척 소중히 여겼다. 당시 구마모토에서는 “학문을 잘한다”는 말로 "학문이 능숙하다(学問が上手だ)"라는 표현을 썼다. 학문을 잘한다고는 말하지만, ‘능숙하다’라고 하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보통 ‘능숙하다’라는 말은 기술이나 기능에 쓰이는 말이지, 학문에 사용하는 표현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구마모토에서는 학문 그 자체에 경의를 표하기보다는, 그보다 조금 다른 것, 이를테면 윈기왕성한 기풍이나 호방하고 대범하며 사욕이 없는 성품 같은 것에 더 큰 존경을 보내는 풍토가 있었고, 5고 학생들은 바로 그런 이유로 사랑받았던 것이리라 생각된다.
입학과 동시에 습학료(習学寮)라는 기숙사에 들어갔다. 습학료에는 제1부터 제4까지 네 동이 있었는데, 1·2·3동은 막 신축한 건물이라 한 방에 두 명씩 배정되었다. 이에 비해 제4동은 메이지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오래된 기숙사였다. 게다가 내가 들어간 제4동의 4호실은 다다미 열다섯장 넓이의 방에 여섯 명이 함께 기거하는 방이었다.
‘사(四)의 사(四)' (*4동의4호실)라니 아무래도 너무 흉하니 이름을 바꾸자는 말도 나왔지만, 나는 이것을 ‘요시(よし-좋음)’라고 읽으면 오히려 길하지 않느냐고 주장했고, 결국 이름은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두게 되었다. (*四의四는 死의死와 음이 같음/よし-좋음: 四를 요라고도 시라고도 읽음)
그리고 다이쇼 10년(1922년)이 되어 뒤돌아보니, 이 여섯 명은 단 한 사람도 병에 걸리거나 낙제하는 일 없이 모두 무사히 대학을 졸업했다. 여섯 사람이 모두 별다른 탈 없이 지냈다는 것은 드문 일이라며, 우리는 크게 기뻐했다.
오다(小田-규슈공업대학 교수), 에자키(江崎-조선철도국 기술관), 오자키(尾崎-압록강기선 중역), 야마시타(山下-신의주 지방법원 소장, 구 성은 에토-衛藤), 오카모토(岡本-히로시마 고등검찰청 검사장), 그리고 나까지가 여섯 명의 멤버였는데, 지금(*1984년) 와서 보니 생존해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 되고 말았다.
그 ‘사(四)의 사(四)’에 있었던 것도 한 학기뿐이었고, 2학기부터는 제3기숙사로 옮겼으며, 3학기부터는 하숙으로 바꾸었다. 하숙을 처음 시작한 곳은 구로카미무라 고마쓰바라(黒髪村小松原)였고, 그 다음은 쓰보이의 데라하라(坪井の寺原), 그리고 다시 다쓰다산(立田山)기슭의 어느 집으로 옮기는 식으로, 1년 3개월 사이에 무려 세 번이나 거처를 옮겼다.
그래서 학업성적이 아주 좋았다고까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하숙집들은 모두 개인 주택의 방 한 칸씩이었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날라다 주었고, 세탁까지 해 주어 참으로 고마웠다. 2학년 1학기, 다이쇼 5년(1916년) 10월에 ‘발화연습(発火演習:군사연습)’이라는 훈련이 있어 전교생이 아소(阿蘇) 방면으로 원정을 갔다. 나는 총감부 소속으로, 도자와(戸沢) 선생 곁에 붙어 다녔다.
도자와 선생은 영어 교사로, 영국 유학에서 막 돌아온 터라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레인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이 무척이나 모던하게 보였다. 이에 이 연습에 동행했던 법제경제 담당의 사카타(坂田) 선생이 즉석에서 한 수 읊었다. "양행(洋行)을 레인코트에 번뜩이게 하고" 그러자 일동이 야단법석으로 박수를 보냈다. 사실 그 무렵 구마모토에서 레인코트를 입고 다니는 사람은 도자와 선생 한 사람뿐이었을 것이다.
이 연습에서 묵은 곳은 아소의 도치노키(栃の木) 온천이었다. 이 온천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소설에 자주 등장한다. 소세키가 오고(五高)의 교사로 재직했던 인연 때문이었는지, 학생들에게도 각별한 추억이 깃든 온천이다. 소세키가 직접 5고를 소재로 지은 하이쿠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큰 문을 나서면 곁에 메밀꽃, 화학이란 불꽃놀이를 만드는 기술이려나" 라는것이었다.
어느 것이나 풍경을 그대로 옮긴 듯한 작품이다. 하이쿠 자체의 우열은 잘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정겹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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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3 밤샘 선거 운동
오고(五高)에는 ‘교우회(校友会)’라 불리는 조직이 있었는데, 그 안에 총무, 잡지, 연설, 테니스, 야구, 유도, 검도, 궁도 등의 부가 마련되어 있었고, 각종 행사는 각각 해당 부의 위원들이 주관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총무부 위원 두 사람은 전체 사업의 기획과 집행을 맡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이들 위원은 1년 임기였으며, 선출은 먼저 열 명 단위로 대표를 맡은 선거대의원에 의해 이루어지는 간선 방식의 선거였다. 총무위원은 1부(갑·을·병과)에서 1명, 그리고 2부(갑·을과)와 3부(医科)를 합쳐 1명을 뽑는 구조였는데, 2·3부 연합 측에서는 먼저 2부에서 1명, 3부에서 1명을 각각 선출한 뒤, 최종적으로 그중 1명으로 압축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뜻밖에도 2부(部) 전체가 미는 후보가 되어, 3부에서 선출된 사카이 요시오(酒井由夫) 군과 경쟁하게 되었다. 선거라고 하면 자기 부의 표를 확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마지막에 승부를 가르는 것은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파벌이다. 여기서 말하는 파벌이란, 다름 아닌 출신 현(県)에 따른 파벌이었다.
5고(五高)에서는 구마모토현과 후쿠오카현의 세력이 단연 강했다. 그 밖의 현들은 연합하지 않으면 표를 얻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때는 분명히 히로시마현, 야마구치현, 오이타현이 연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령관은 오이타현 출신으로 내 선배였던 사사야마 타다오(笹山忠夫1896~1974) 씨였던 것 같다. 사사야마 씨가 크게 힘을 써 준 덕분에, 나는 2·3부 대표로 당선될 수 있었다.
1부에서는 갑과의 히라야마 료키치(平山良吉) 군이 당선되었다. 이 선거운동이란 것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동분서주하는 연속이었는데, 엽서 크기의 큼직한 명함에 총무위원 후보자 안도 토요로쿠(安藤豊緑1897~1990)라고 2호 활자로 인쇄한 것을 들고 다니며 나눠 주곤 했다. 대대적인 축하연, 비분강개(悲憤慷慨)조의 열혈 지원 연설 등, 즐거운 추억도 참으로 많다.
총무위원이 되기는 했지만, 직무 권한과 의무·책임이 막중하여 몹시 바빴고, 예산을 정할 때 같은 경우에는 의회 못지않게 시끄러워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행사는 보트 레이스였는데, 이는 대개 5월 무렵에 열렸다.
여덟 좌석 고정형 보트 세 척이 준비되었고, 1부·2부·3부가 각각 한 척씩 맡아 500미터를 돌아 나오는 왕복 1,000미터 코스를 두고 경쟁했다. 장소는 에즈호(江津湖)라는 호수로, 스이젠지(水前寺)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이 모여 이루어진 곳이며, 경치가 수려한 훌륭한 경기 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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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4 나카무라 테이죠씨의 젊은 시절
레이스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코스 경계(警戒)였는데, 이는 상상 이상이었다. 레이스가 가까워지면 선수들은 한 달쯤 전부터 이 호수 주변에 합숙하며 맹훈련을 한다. 우리 2부의 합숙지는 에즈(江津)마을 촌장 댁이었다. 촌장에게는 소문난 미인 딸이 있었는데, 당시 열여섯이나 열일곱쯤 되었을 것이다.
구마모토 여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평판이 대단해서 선수들 사이에서도 “어제 그 미인과 말을 나누었대”라는 말만 돌아도 큰 행운이라며 축배를 들 정도였다. 몰래 연정을 품은 사람도 여럿 있었으리라. 나는 이 합숙에 몇 차례 갔지만, 끝내 한 번도 얼굴을 볼 기회가 없이 세월만 흘렀다.
이 미인이 바로 현재의 여류 하이쿠 시인 나카무라 테이죠(中村汀女 1900~1988)이다. 그녀는 2부 선수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고, 훗날 대장성 관료가 된 4년 선배 수재인 나카무라(中村) 씨와 결혼했는데, 이는 실로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3학년이 되고 나면 첫 번째 큰 행사는 창립기념일 운동회였다. 최대의 볼거리는 800미터 경기로, 각 부(部)에서 세 명씩, 합계 아홉 명의 선수가 동시에 출발했다. 아무 탈 없이 네 바퀴를 도는 데 걸린 시간은 2분 18초, 순조롭게 우리 2부가 우승했다.
그런데 혼다(本田)라는 국한(國漢) 담당 교사가 “방금 레이스는 네 바퀴를 돈 게 아니라 세 바퀴였다”고 중얼거렸다. 이 말을 다른 부의 학생들이 듣는 바람에 난리가 났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2부 선수들에게 우승기를 건네주었다. 그러자 분이 풀리지 않은 학생들이 “안도를 응징하라!” 라며 몰려들었고,
나는 2부 학생들의 보호를 받아 겨우 화를 면하는 한바탕의 소동을 겪었다.
흥분 상태는 밤이 되어도 가라앉지 않았다.
그 무렵에는 총무위원은 반드시 기숙사장(寮長)을 맡는 관례가 있었고, 나는 제3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자 제2기숙사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집단 난입하여 소란을 피웠다. 이렇게 되면 3기숙사 쪽도 가만있 수 없어, 곧바로 2기숙사에 보복 난입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때는 정말 난폭하기 이를 데 없어 상식을 벗어난 난동이 극에 달했다. 물을 뿌리는가 하면 방뇨를 하는 자도 있었고, 창유리 240장을 깨뜨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실로 참혹한 꼴이었다. 이때의 ‘무사들’ 가운데에는 훗날 경단련 부회장을 지낸 바코시 데이조(場越禎三) 군, 해외전력조사회 회장이 된 신도 부자에몬(進藤武左衛門 1896~1981) 군 등도 포함돼 있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부후들판에 새싹 솟아나다 (264p)
● 25-5 대식가의 감찰자로
당시 도쿄대학 농학부의 혼다 세이로쿠(本多静六 1866~1952) 박사라고 하면, 학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상당히 이름난 인물이었다. 그의 장남은 혼다 히로시(本多博) 군이라 했는데, 오고(五高) 제3기숙사에서 나와 함께 생활했다. 제3기숙사의 사감장인 호리 선생은 어느 날 나를 불러 “혼다 군의 감찰을 맡아주게”라고 말했다. 혼다 군은 키가 여섯 자(약 180cm)를 훌쩍 넘는 거구로, 식욕이 왕성하여 보통 사람 두 명 분은 거뜬히 먹어치우는 대식가였다.
그의 매달 식비 지출이 30엔을 넘었는데, 보통은 8엔 정도가 일반적이었다. 너무나 많은 액수였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호리 선생도 걱정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박사로부터 편지가 도착해 “아이는 원래부터 대식이니, 네 배 정도의 비용이 들더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라고 적혀 있었다. 그 편지를 보고 호리 선생은 완전히 안심하며 “안도 군, 역시 유명한 박사는 다르구먼. 이제부터 혼다 군의 감찰은 필요 없네” 라고 하셨다.
그 혼다 군과는 종전 후에 다시 만나 여러모로 신세를 졌다. 혼다 군은 변호사로 활동하는 한편 학교를 경영하며, 도쿄의 유력 인사로 군림하고 있었는데, 그가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1901~1975) 총리의 숨은 브레인이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만 아는 일이었다. 그의 장남 또한 학위를 두 개나 가진 도쿄대 공학부의 저명한 교수이다.
정치평론으로 활약하고 있는 호소카와 다카치카(細川隆元1900~1994) 군은 나보다 두 기수 아래였다. 이 난폭한 무사 타입의 인물도 그 무렵에는 아마 얌전하고 선량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무용담 같은 이야기는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 몇 해 전 오고(五高) 70주년(1957년-창립1887년) 기념식 때 구마모토대를 방문했을 때, 유명 인사들의 졸업증서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호소카와 군의 것이 있었고, 거기에는 '구마모토현 평민' 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호소카와번(細川藩藩)의 조다이 가로(城代家老) 가문 출신인 이노우에 하루시게(井上春成1893~1981) 선배가 말하기를, 다카모토(隆元) 씨는 틀림없이 호소카와 가문의 본가 계통이며, 가문으로만 따지면 호소카와 후작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야 할 사람이라고 했다.
한편, 제1부내과(一部内科) 동기 가운데에는
현 사회주의협회 리더인 무코사카 다쓰로(向坂達郎) 군이 있었다. 성적이 우수하면서도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공산주의에는 매우 열성적이었다. 그 무렵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에 대해 특별한 탄압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비교적 자유롭게 '자본론' 같은 책들을 읽으며, 나름대로의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부후들판에 새싹 솟아나다 (264p)
● 25-6 마르크스와 재판
후년(昭和 6년, 1931년)에 독일 유학을 마친 뒤 영국으로 건너가 대영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마르크스는 이곳에서 수십만 점에 이르는 자료 속에서 반(反)자본주의의 사례들을 크게 배웠을 것이라 생각하니 감개무량했지만,
한편으로는 반공산주의에 관한 전시 또한 무수히 존재하여, 이것은 거꾸로 이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서 깊이 실감했던 바였다.
또 소와 28년(1953년), 한 거물 정치인(故 사토 수상)의 형사재판이 열렸는데, 그때 나는 증인으로 소환되었다. 재판장은 증거 서류로 오노다 시멘트의 잡비(雜費) 본장부를 제시했는데, 그 페이지에는 붉은 표식이 일곱 개 붙어 있었다. 그 것은 모두 피고의 유죄를 입증하는 항목이었다. 재판장은 이 붉은 표식들에 대해 “증인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물었다.
그때 문득 대영박물관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피고의 무죄를 입증할 만한 기장(記帳)사례는 없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찾아보니, 놀랍게도 같은 페이지에 무려 열한 가지 사례가 있었다.
이 사실을 재판장에게 제시하자, 변호사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고, 결국 이 재판은 무죄 판결로 끝났다. 이것도 오고(五高) 시절 공산주의를 공부한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우스이(臼井)중학교 시절의 동급생으로 야마다 고이치로(山田鴻一郎) 군이 있다. 그와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매우 친밀하게 지냈고, 산책도 자주 함께했다. 어느 날 작은 과자 가게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나는 시골에서 군것질 과자를 사먹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기며 자라왔다. 그래서 솔직하게 “과자를 주세요”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만 “친구에게 선물할 과자를 주세요” 라고 말해버렸다. 야마다 군은 배를 움켜쥐고 웃었고, 그 덕분에 나는 말년까지 "안도의 친구에게 줄 과자" 라며 놀림감이 되었다.
테니스 위원은 오오가미 하지메(大神一 : 전 야마이치 증권 사장)군이었다. 꽤 재능 있는 사람이었고 총무위원인 저를 많이 지지해 주었다. 그 대신 테니스부 예산은 많이 책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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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7 "신우(神友)”의 추억
나와 총무위원 자리를 두고 선거에서 맞붙었던 사카이 요시오(酒井由夫)군은 성적이 우수하고 활달하며 토론을 좋아했고, 궁술에 뛰어나 어딘가 신들린 듯한 면까지 지닌 수재였다.
도쿄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마나베(真鍋) 물리요법 내과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때는 1930년, 내가 독일 유학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갑자기 손에 심한 통증을 느끼게 되었다. 여러 의사에게 보여도 “두세 달은 걸릴 겁니다”라는 말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혼자서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문득 사카이 군이 떠올라 진찰을 받아 보았다. 진료는 불과 1~2분. 그는 “전혀 걱정할 것 없다. 아스피린을 처방해 줄테니 이걸로 나을 거다.” 라고 말했다. 곧바로 한 번 복용했더니,
거짓말처럼 통증이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사카이 군의 신기(神技)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7년 조선에서 일본 본토로 귀환하던 무렵의 일이다. 오노다(小野田)의 수석 상무인 미쓰타니(光谷) 군이 헤르페스(疱疹)병으로 보이는 병에 걸려 몹시 고생한 끝에 어느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더니, “짐작하신 대로 헤르페스입니다만, 이 약을 드십시오.” 라는 말을 들었다. 그 의사의 처방대로 했더니 그 난치병이 거짓말처럼 말끔히 나아 버렸다. 사람들은 그를 신과 같은 의사였다고 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의사는 다름 아닌 사카이 군, 바로 그 사람이었다.
친구인 사카이 요시오(酒井由夫) 군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의료에 대해서는 아직도 할 이야기가 있다. 확실히 1939년~1940년경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하마나코(浜名湖: 静岡県浜松市)에서 집단 중독 사건이 발생하여 약 300명가량이 중태에 빠진 일이 있었다. 그 무렵 사카이 군은 주둔군의 의무부장으로서 중국에 체류 중이었다. 그 방면의 권위자였던 그는 곧바로 일본 본토로 소환되어, 환자 가운데 약 절반의 치료를 담당하였다. 다른 의사들이 진료한 환자들 가운데서는 많은 사망자가 나왔으나, 사카이 군이 맡은 환자들 가운데서는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암에 걸린 지인, 요통으로 걷지 못하던 사람 등 수많은 사람을 사카이 군에게 소개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역시 사카이 군을 극찬하였다. 우리들은 사카이 군을 위해 어떻게든 연구소를 세우고자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宣仁親王たかまつのみや のぶひとしんのう1905~1987황족)전하를 중심으로 노력하던 중, 안타깝게도 사카이 군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참으로 단순한 친우라기보다 ‘신우(神友)’라 불러야 할 존재였다.
다른 동급생으로는 규슈대학 내과의 구스노키(楠) 군, 유리 특히 렌즈 분야의 권위자 다카마쓰(高松 전 오사카 공업시험소 소장) 군, 공학을 전공했음에도 의학박사이자 영양학자였던 시모다(下田) 군 등이 있었다. 한 학년 아래로는 오이(追 전 후지은행 총재) 군이 있었고, 한 학년 위로는 사사야마(笹山 전 알래스카 펄프 사장) 군, 오타가키(太田垣 전 간사이 전력 사장) 군 등이 있었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료쿠치구샤(菉竹舎)의 추억
● 26-1 물리영점이지만 도쿄대 합격
나는 5고(五高)를 대정 7년(1918년) 7월에 졸업했다. 대학에 진학한다고 해도, 그 무렵에는 대학 전체의 수용 인원이 고등학교 졸업생 수보다 많았기 때문에, 어디든 한 곳에는 반드시 입학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흥분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제도(製図)를 몹시 못했으므로, 당연히 제도가 포함된 학과는 피하고 도쿄대학의 응용화학과를 지망했다. 그런데 응용화학과는 경쟁률이 두 배가 되어 시험이 치러졌다. 물리 문제는 나로서는 어렵지 않게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공과 전체를 통틀어 아마 수백 명의 수험생 가운데 절반 이상을 풀어낸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영점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영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나는 합격했다.
당시 도쿄대학의 총장은 야마카와 겐지로(山川健次郎1854~1931) 선생이었고, 공학부장은 쓰카모토 야스시(塚本靖1869~1937) 선생, 응용화학 주임교수는 가와키타 요시타다(河喜多能道1853~1925) 선생이었다. 이분들은 모두 우리나라 학계의 태두(泰斗)로서, 관록과 풍격에 있어 한 시대를 압도하기에 충분한 분들이었다.
대정 7년(1918년) 이라 하면, 쌀 소동(米騒動)이 일어난 해이면서 동시에 제1차 유럽대전이 종결된 해이기도 하다. 독일 항복의 소식이 전해지자, 야마카와 총장은 전 학생을 운동장에 집합시켜 연설을 했다. “독일은 육식국가이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십여 분에 걸친 대연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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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2 남자유곽 같은 하숙집에서 료쿠치구샤로
나는 다이쇼 7년(1918년) 9월부터 익년 3월까지 혼고 후지미켄 본점(本郷富士見軒本店)이라 불리던 하숙집 2층에 살고 있었다.
방은 다다미 4장반(4畳半)의 크기였고, 아침·저녁 식사 포함 하숙비가 35엔이었다. 한 달에 한 번쯤은 큰맘 먹고 고급 고기 스키야키를 먹기도 했는데, 그것도 1엔 60전에 불과한 지출로 해결되었다. 그 하숙집에는 긴 복도가 있었고, 그 양옆으로 열 개가 넘는 방이 줄지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요시와라 유곽을 닮았다 해서, 사람들은 이를 ‘남자 요시와라(男吉原)’라고 불렀다.
나는 5고(五高)에서 올라온, 소세키가 말한 ‘산시로(三四郎)’ 같은 풋내기였다. 불에 그을린 삼나무로 만든 나막신을 신고 다녔는데, 너무 허술해 보였던 탓인지 하숙집 여자 하인이 제멋대로 뒷문 쪽으로 치워버려 찾지 못해 곤란했던 적도 있었다. 아사쿠사(浅草)로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다. 혼고에서 나막신을 신고 걸어서 갔다. 이는 전차를 갈아타는 것이 초보 시골뜨기에게는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산시로(三四郎) :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 속 순진한 지방 출신 도쿄 유학생의 이름]
다이쇼 8(1919)년 1월 6일 이른 아침, 요란한 호외(號外) 소리에 잠에서 깨어 나가 보니 여배우 마쓰이 스미코(松井須新子1886~1919년)의 자살을 알리는 호외였다. 그녀가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시마무라 호게츠(島村抱月1871~1918년)의 뒤를 따라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으로 신문 지면은 그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다이쇼 8년이란 시대는 참으로 태평성대였던 것일까.
같은 해(다이쇼 8년: 1919년) 3월, 나는 고이시카와 하야시초(小石川林町: 東京 文京区) 에 있는 소다(荘田) 저택 안의 료쿠치구샤(菉竹舎)로 거처를 옮겼다. 소다 헤이고로(荘田平五郎1847~1922) 옹은 당시 일흔셋으로, 미쓰비시(三菱)의 최고 원로이자 이와사키 가문(岩崎家)과도 인척 관계에 있었다. 물론 오이타현 우스키 출신의 거물 실업가이기도 했다. 저택은 부지 5천여 평에 달했고, 정원 한쪽에 기숙사를 두어 같은 고향 사람이나 지인들의 자제를 받아들였다.
내가 들어갔을 때는 아홉 명의 사생(舎生)이 있었고, 소다(荘田), 기라(吉良), 오카자키(岡崎), 모토무라(元村) 군 등이 함께 있었다. 취사부(炊事婦) 한 명이 있었고, 집세를 제외한 모든 비용은 각자 부담하였다. 소다 어른의 지시에 따라 식비는 일반 하숙비보다 다소 높게 책정되어 있었는데, 그 진의는 기숙사 안에서 충분히 잘 먹게 하면 밖에서 술이나 외식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이상적인 환경에서 2년을 보낸 셈이다.
대학에 다니려면, 고이시카와 하라마치(小石川原町: 東京 文京区) 에서 혼고도리(郷通り)로 나가야 했다. 그 길 도중에 미인으로 이름난 자매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인력거를 타고 가쿠슈인(學習院: 귀족학교)으로 통학하고 있었다. 등교길에 그 인력거와 마주치는 것을 더할 나위 없는 행운으로 여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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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3 자신도 모르는 학생 사장 직함
그런데 대학 3학년 때,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전혀 모르는 사이에, 자본금 50만 엔짜리 주식회사의 사장에 취임해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신사가 료쿠치구샤(菉竹舎)로 나를 찾아왔다. 명함에는 주식회사 다이쇼제약소(大正製薬所) 전무이사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정말 안도 씨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맥이 풀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실은 당신은 이미 몇 달 전부터 우리 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해 등기까지 마쳤고, 월급도 250엔으로 정해 두었습니다. 작년부터의 불황으로 회사가 도산 직전에 몰렸을 때, 도쿄대 응용화학과 학생으로 ‘안도’라 이름을 쓰며, 대부호 아소 다이키치(麻生太吉1857~1933) 씨의 친아들이라는 사람이 있어 그분을 사장으로 모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인 아소 가문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 ‘안도’라는 분은 풍채도 좋고 여유가 있어 보였으며, 몇 차례나 후쿠오카에 다녀오게 했지만 자금 조달의 가닥은 전혀 잡히지 않았습니다.그래서 도쿄대 사무국에 주소를 문의해 오늘 이렇게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나는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것임이 분명하니 즉시 사임 절차를 밟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 신사는 “회사의 신용에도 관련된 문제이니
몇 달만 절차를 미뤄 달라”며 고개를 숙이고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나는 아홉 달 동안 사장직에 있었던 셈이다. 물론 월급은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그래도 그런 회사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 고덴마초(小伝馬町) 근처에 적힌 주소로 가 보았더니, 의외로 제법 규모를 갖춘 회사가 제대로 실재하고 있었다. 종전 후, 아소 다이키치(麻生太吉)옹의 손자 아소 다카키치(麻生太賀吉1911~1980) 씨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함께 크게 웃었던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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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4 그림의 마음을 배우다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지만, 나는 학생 시절에 회화(絵画) 같은 것은 한가한 사람들의 소일거리쯤으로 여기고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중학교 동창으로서 우에노(上野)의 미술학교에 다니던 에토 준페이(江藤純平1898~1987) 군을 찾아가 놀게 되었고, 그의 열정과 성실하고 진지한 정진의 모습에 완전히 감동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 나는 미술가라는 존재와 미술 그 자체에 대해 경의를 품게 되었다. 지금 내가 조금이나마 그림을 감상하는 것을 좋아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 에토 군이 몸소 보여준 꾸준한 수양 덕분이다. 이제는 내 아내 또한 그림을 즐기는 여생을 보내고 있는데, 이 책의 표지 그림은 아내의 작품이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과단(果断)과 선견지명
● 27 가사이 신조사장을 추모하며 -1-
가사이 신조(笠井真三1873~1939?) 사장을 추모하며--- 나는 다이쇼 10년(1921년) 4월에 입사했는데, 처음으로 스테이션 호텔에서 사장님을 뵈었을 때, 그 용모와 태도, 몸가짐이 나의 아버지와 무척 닮아 있어 첫 대면부터 온화한 인상을 받았다. 사장님은 나에게 “오노다에 들어오면 오래 근무해 주었으면 한다. 금방 그만두면 곤란하다. 십 년이 지난 후 좋은지 나쁜지를 생각해 보게. 그전에는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씀했다.
나는 처음에 제조계로 배치되어 가노 씨의 지도를 받았는데, 가사이 사장은 가끔 공장에 들러 십 분, 이십 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내 곁에 서서 지켜보곤 했다. 그때는 왠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느 날 분석 업무를 맡아 그 결과를 중역실의 가노 씨에게 가져갔는데, 가노 씨는 부재중이었고 사장님이 의자에 앉아 계셨다.
인사를 하고 물러나려 하자 “자네, 잠깐 그걸 보여 주겠나” 라고 하셔서 내밀었더니, 가사이 사장은 빙긋 웃으며 “최고 학부를 나온 자네가 이렇게 열심히 분석한 것에 대해 내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미안하지만, 어딘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드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라고 말씀했다. 정성을 다해 한 일에 흠을 잡힌 것 같아 다소 불쾌하기도 했지만, 다시 면밀히 조사해 보니 과연 큰 오류를 발견했다.
젊은 혈기에 잠시나마 불쾌하게 여겼던 일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 뒤 나는 한국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사장님은 해마다 두세 번쯤 공장을 시찰하셨다. 평양에서는 늘 클럽에 묵으셨는데, 그 클럽에는 젊은 사원들도 합숙하고 있었다. 젊은 직원들이 외출해 자리를 비우면, 사장님이 직접 전화를 받거나 전보를 수령하곤 하셨다.
전보 담당자는 꼭 있어야 했지만, 몰래 놀러 나가거나 자리에 있어도 게으름을 피워 잠든 척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 가사이 사장은 전보 내용을 정성스럽게 적어 두었다가 담당자에게 “자네, 전보가 와 있었네.” 하고 건네셨다. 그러면 누구라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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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가사이 신조사장을 추모하며 -2-
공장을 돌아본다고 해도 결코 간략하게 돌아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라면 한 시간 반이나 두 시간이면 공장 전체를 둘러볼 텐데, 가사이 사장은 분쇄공장이나 석탄공장 같은 공장의 한 부분만을 두세 시간씩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고 계신다.
공장 간부들조차도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세세한 기계의 움직임까지도 정확히 살펴보시고, “저건 저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하나하나 지적하며 지도하시는 것이다. 이런 식이니 공장 하나를 살피는 데만도 일주일이 걸렸다. 현장에서 직접 이루어진 ‘기술에 대한 교육’에는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이었다.
나는 응용화학을 전공했는데, 평양에 근무하던 시절(다이쇼 12년, 1923년)에 가사이 사장으로부터 제 전공과는 거리가 먼 터빈에 관한 연구 과제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공장의 증기 터빈 조속기에 보내는 기름이 제대로 흐르지 않는데, 이를 어떻게 하면 원활하게 통하게 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였다.
이것은 기계 전문가가 할 일이지, 응용화학을 전공한 내가 맡을 문제가 아니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고 말씀드리자, 가사이 사장은 “서둘 필요는 없으니, 천천히 침착하게 해보게” 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 연구에 착수하게 되었다.
기계로서는 지극히 중요한 문제였지만, 상당히 난해했다. 그런데도 가사이 사장은 “책을 봐도 좋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도 좋다. 급할 것은 없다”고 하신다. 그래서 기계를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정작 제대로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1년이 지나가 버렸다. 사장님을 뵙기라도 하면 “안도 군에게 뭔가 부탁해 둔 일이 있었지…” 라는 말씀을 하시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 어떤 계기로, 교토대학의 니시하라 선생이 하신 말씀에서 힌트를 얻어 기계의 방향을 조금 바꾸어 보았더니, 거의 기적이라고 할 만큼 빠르고 원활하게 기름이 흐르기 시작했다. 곧바로 사장님께 보고하며 그 경위를 말씀드렸더니, “바로 그거다. 기계라는 것은 대단히 복잡해 보이지만, 아주 작은 조정 하나로도 잘 돌아가는 법이야. 자네는 이 일로 기계 공부도 했으니, 이제 진짜 시멘트 기술자가 될 수 있겠네” 라고 칭찬도 하시고, 격려도 해주셨다.
가사이 사장은 조선(朝鮮)에서 석회석을 조사하기 위해 산을 자주 다니셨다. 나도 가끔 동행했는데, 결코 서두르지 않고 항상 같은 보폭으로 천천히 걸으셨다. 오십이삼 세 무렵이었을 것으로 기억하는데, 길이 험하든 험하지 않든 언제나 같은 속도였다. 걸음이 아주 경쾌해서 산행 솜씨가 대단히 뛰어났다. 그때마다 반드시 지팡이를 짚고, 여유가 넘쳤다.
그리고 말씀이 또 유난히 재미있었다--- “자네, 걸을 때는 늘 오십 미터 앞을 보고 걸어야 하네. 남자가 오십 미터 안쪽만 보며 걷는 건 비굴한 짓이야.” 과연 가사이 씨의 ‘50미터 전방 주시’식 보행은 보기만 해도 실로 당당했다. 시멘트의 품질에 대해서는 대단히 엄격한 사람이었다. 품질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가 보이면, 마치 불길이 치솟듯 격노하여 호되게 꾸짖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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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가사이 신조사장을 추모하며 -3-
다이쇼 14년(1925년), 마침 도쿄의 지진(1923 09 01) 복구 공사가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평양 공장에서 매달 약 1만 톤가량을 배로 도쿄에 보내고 있었는데, 그때 출하된 시멘트에 의결(擬結) 문제가 있어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저는 평양공장 공무과 부주임으로, 품질의 책임자였습니다. (*関東地震: 1923年9月1日に南関東を中心に発生した巨大地震.関東大地震. 의결-擬結 : 시멘트가 너무 빨리 굳거나 비정상적으로 응결하는 품질 결함)
이 일에는 저 역시 크게 놀라 해결을 위해 애를 태우며 조사했지만, 도무지 명확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기진맥진해 있던 차에 본사에서 소환 전보가 와, 곧바로 일본 본사로 가서 가사이 사장을 뵈었습니다. 그러자 시작부터 호된 질책이 쏟아졌습니다.
“이처럼 중대한 품질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사용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이 상식이다. 더구나 자네는 품질의 직접 책임자 아닌가. 그 책임자가 도쿄 현장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보지 않고, 공장에 틀어박혀 애만 태우고 있다니, 이게 무슨 꼴인가. 그런 생각이라면 차라리 그만두는 게 낫다.”
‘그만두라’는 말에는 나도 깜짝 놀랐다. 나 역시 다소 언짢아져서 “이 문제가 해결되면 그만두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그래도 송구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사이 사장은 한 차례 격노한 뒤 말을 누그러뜨리며 이렇게 차분히 타이르셨다. “앞으로도 이런 일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무엇보다도 재빨리 현장으로 가야 한다. 자네가 어떤 보고를 받고 있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자네 자신이 공장에 앉아 있는 것은 잘못이다. 나라면 짐도 제대로 챙길 틈 없이 곧장 현지로 달려갈 것이다. 앞으로는 자네도 그렇게 마음에 새기도록 하게.” 이 가르침은 이후 내 인생에 실로 큰 도움이 되었다.
(*剣もホロロ-けんもほろろ: 매우 냉정하게, 인정사정없이, 매몰차게 부탁이나 말을 칼로 자르듯 단칼에 쳐내는 태도. 剣-けん: 칼, 날카로움. ほろろ: 새가 날아가며 내는 소리라는 설도 있고, 무엇인가가 스치듯 사라지는 모습을 나타내는 의태어라는 설도 있음. 합쳐서 “칼같이 냉정하게 쳐내 버리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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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가사이 신조사장을 추모하며 -4-
다이쇼 15년(1926년)에 나는 양행(서양유학)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마침 그 해에 한국 함경남도의 천내리(川内里)에 공장 신설 이야기가 나왔고, 가사이 사장이 평양에 와서 "자네는 예정대로 양행할 것인가, 아니면 공장 건설 조사를 할 것인가"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양행은 나중에 하고, 공장 신설을 도와드리겠다"고 즉답하고, 양행은 연기했다.
곧바로 서너 사람이 현장 조사를 실시해 그 보고서를 제출하고, 가능한 한 자세히 설명했다.
가사이 사장은 결단력이 대단한 분이었는데, 이 조사 보고서를 훑어보고 내 설명을 듣자마자 “좋다, 공장 건설을 결정한다!” 고 단을 내리더니, 이어 즉시 “당장 인사를 해!” 라고 지시했다. 다른 중역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곧바로 인사를 단행하라니, 너무나도 전광석화 같아 나 역시 다소 얼떨떨했지만, 망설임없는 사장의 과단성에는 가슴이 시원해졌다.
가사이 사장은 또 지극히 감각이 예리한 분이기도 했다. “자네 보고에는 하나도 흠잡을 데가 없다. 다만 공장 부지를 1미터만 더 높여 두게. 이건 단순한 내 감이다. 공장이란 것은 계산으로 위치를 정해도, 실제로 지어 보면 늘 낮아지기 마련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지, 이론이 있어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속는 셈 치고 그대로 해 두게.” 라고 하셨다.
부지를 1미터 높이면 당시 돈으로 1만 엔이 더 든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속으로는 생각했지만, 사장의 말이니 그대로 따랐다. 쇼와 3년(1928년) 말에 공장이 완공되었고, 나는 쇼와 4년(1929년) 말 독일로 건너갔다.
그런데 1930년 여름, 조선은 유례없는 대홍수를 겪었고 천내리 공장도 침수되었으나, 정말 아슬아슬한 차이로 공장은 살아남았다. 만약 부지를 1미터 높여 두지 않았다면, 공장은 거의 전멸했을 것이다.
나는 베를린에서 공장이 무사하다는 전보를 받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사장의 선견지명에 새삼 감탄하며, 위대한 인물의 기술적 ‘감’이라는 것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것임을 절감했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과단(果断)과 선견지명
● 27 가사이 신조사장을 추모하며 -5-
나는 쇼와 7년(1932년)에 독일에서 귀국해 천내리(川内里)공장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듬해인 쇼와 8년(1933년) 무렵 한국 북부에 공장을 세우고자 하여 가사이 사장의 동의를 얻어 세 차례 정도 서로 다른 후보지를 조사해 보고했다. 그러나 사장은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고는 “안도 군도 한 번 더 조사해 보게. 이것마저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라고 말하셨다. 그래서 다시 한 곳을 조사해 보고했더니, 전보로 “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곧바로 공사에 착수했는데, 이것이 바로 고무산(古茂山) 공장이다.
그런데 사장을 제외한 다른 중역들은 모두 반대했다. 그런 곳에 시멘트 공장을 지어 봤자 팔릴 리 없다고, 특히 영업 부문에서 반대가 극심했다. 하지만 사장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공장이 완공될 즈음에는 반드시 영업 면에서도 유리해질 것이다.” 라며 나를 격려하고 공사를 서두르게 했다. 결과는 역시 예측대로였다. 이 선견지명에는 반대하던 중역들조차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고무산을 떠올리면 늘 생각나는 것이 석회석과 부지 문제다. 이곳에는 석회석이 풍부하고 품질도 좋다고 해서 산을 매입했는데, 막상 조사해 보니 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문제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공장 부지도 약 10만 평을 사 두었고, 산도 매입한 뒤였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인접한 지역에 좋은 석회석 산이 있었기에, 그 산을 매입할 수 있도록 전보로 사장에게 요청했다. 곧 “좋다.”는 회신이 와서,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해(쇼와 9년, 1934년) 가을, 사장이 현지 시찰을 오셨다. 이미 매입해 둔 10만 평의 공장 부지 맞은편에 훨씬 훌륭한 공장 부지가 있었지만, 새 석회석 산도 이미 샀고, 이제 와서 다시 부지를 사자고 말하기도 어려워 나는 속으로만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런데 가사이 사장이 석산을 둘러보다가, 내가 속으로 그토록 바라던 지점에 이르러 “여기는 참 훌륭한 부지군. 여기로 사면 되지 않겠나.”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의 기쁨이란---나는 속으로 손을 모아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장은 토지 매입에 대해서도 매우 이해가 깊은 분이었지만, 늘 이렇게 당부했다. “결코 무리해서 사서는 안 된다. 다소 비싸더라도 좋다. 농민을 속이는 일만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나 역시 토지를 사는 것을 꽤 좋아해서, 사장에게 상의하지 않고 조금씩 사들인 적도 있었지만, 그때는 꾸중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때는 무려 12만 평이라는 광대한 토지를 상의도 없이 매입한 적이 있다. 다른 회사에 빼앗길 우려가 있어 서둘러 산 것이었다. 매입 비용은 3만 엔이었다. 나중에 사장은 “자네, 12만 평이나 살 때는 한마디쯤 상의하는 게 도리 아니겠나.” 라며 살짝 핀잔을 주었지만, 본래 토지 매입을 좋아하는 분이어서
“송구합니다.” 한마디로 가볍게 넘어갔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과단(果断)과 선견지명
● 27 가사이 신조사장을 추모하며 -6-
쇼와 12년(1937년), 중일전쟁이 막 시작되던 무렵에 나는 사장과 함께 경성의 한 호텔에 묵은 적이 있었다. 그때 가사이 사장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중일사변을 어떻게 보나? 이건 일본에 대단히 불리한 사변이네. 일본은 이 일로 틀림없이 망하고 말 거야.” 그래서 나는 “이미 시작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황허(黃河) 선까지는 나아가는 게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가사이 사장은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거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자원이 풍부한 나라다. 명실상부한 세계의 대국으로, 그 자원에 눈독 들이지 않는 나라가 하나라도 있겠나. 일본은 중국만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세계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다. 영국도 미국도 모두 중국의 자원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중국을 침공한다는 것은 곧 세계에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계를 상대로 해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다. 황허 선까지 가면 된다는 게 무슨 말인가.”
그리고 가사이 사장은 “끝내 반드시 패배로 귀결될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참으로 곤란한 일이지” 라고 하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한숨 섞인 말을 되풀이하셨다. 과연 중일사변이 도화선이 되어, 일본은 마침내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고, 그토록 비참한 결과를 맞아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중일사변의 초기에 이미 일본이 멸망하게 될 것을 분명히 예견했던 가사이 사장의, 마치 신과도 같은 선견지명에는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경성(京城)에 체재 중이던(1937년 무렵) 무더운 여름날의 일이었다. 내가 가사이 사장에게 온천에 가보자고 권했더니, 얼굴빛이 확 달라지며 불쾌해한 채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만주에서 30년이나 살았네. 만주에도 좋은 온천이 있지만,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한국에도 훌륭한 온천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도무지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네.” 그리고는 덧붙여 이렇게까지 말씀하셨다. “더운 때에는 벌거벗어도 역시 덥네. 웃옷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있어도, 덥지 않다고 생각하면 덥지 않은 법이지.” 그야말로 훈계 아닌 훈계를 한바탕 들은 셈이었다.
우리들은 셔츠 한 장만 입고도 “덥다, 덥다”를 연발하고 있었는데, 가사이 사장은 웃옷은 물론 조끼까지 껴입은 채로 땀을 폭포처럼 흘리면서도, 별로 괴로운 기색 하나 없이 태연히 지내고 있었다. 그 인내심에는 정말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그 무렵, 조선시멘트의 한 간부를 박천(博川) 온천에 안내하게 된 것을 빌미로 가사이 사장에게도 동행을 부탁했더니 “그렇다면 가도 좋겠네” 하고 승낙해 주어, 마침내 내 바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초대했던 손님이 열차 고장으로 오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가사이 사장은 별다른 불평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이럴 때가 아니면 온천에도 오기 어렵지”라며 기분 좋게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한가롭게 쉬었다. 신경통이 있던 분이라 온천이 잘 맞기는 했지만, 좀처럼 쉽게 응하지 않고 끝까지 참는 쪽을 택하는 사람이었다. 자, 이제 독일 유학 시절의 이야기를 한두 가지 예로 들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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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가사이 신조사장을 추모하며 -7-
가사이 사장이 브라운슈바이크에서 공부하던 시절, 멜러라는 박사의 집에 기숙하고 있었는데, 1930년 여름에 내가 멜러 박사 댁을 찾아갔더니 부부가 매우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멜러 박사는 자신만만한 어조로 “일본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은 틀림없이 미스터 가사이일 겁니다” 라고 단언했다.
나는 이에 대해 “가사이는 훌륭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가장 위대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했더니, “아니요, 반드시 최고입니다” 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곁에 있던 노부인도 “일본에는 훌륭한 사람이 많다고 들었지만, 독일에는 헤어 가사이 같은 인물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라고 거들었다.
그 이유를 묻자, 멜러 박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사이가 만 열아홉 살이었을 때의 일이었다. 브라운슈바이크 시에서 ‘브라운슈바이크 시의 장래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현상 공모했는데, 수많은 응모작 가운데 S. KASAI라는 이름이 있었다. 열아홉 살의 일본 청년이 독일어로 논문을 써서 응모했을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가사이에게 물어보니 바로 자신이라고 했다.
논문을 읽어 보니 내용이 실로 훌륭했고, 심사 결과 만장일치로 1등에 당선되었다. 외국인에다 겨우 열아홉 살, 독일에 와서 1~2년 공부한 정도라면 보통은 독일어를 조금 이해하는 수준일 텐데, 그런 청년이 당당하게 현상 논문의 1등을 차지했으니, 일본에 이런 수재가 둘이나 있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멜러 박사의 이야기였다. 내가 귀국 직후 이 사실을 가사이 사장에게 물었더니, 평소 자기 자랑을 한 적이 없던 가사이 사장은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이라고만 대답했다. 그 태도를 보아, 멜러 부부의 말은 사실임이 틀림없다고 느꼈다.
1937년 여름의 일이었다. 담소 중에 내가 가사이 사장에게 “지금까지 만나신 분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신 인물은 누구입니까?”
라고 묻자, 한동안 생각한 뒤 “역시 비스마르크겠지” 라고 말했다. 어떻게 비스마르크를 만나셨느냐고 묻자, “이건 조금 자랑 같은 이야기라 지금까지 한 번도 남에게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자네가 물었으니, 본의 아니게 그 이유를 말하지 않을 수 없겠군” 이라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비스마르크는 1815년 4월 1일생이므로, 1895년 4월 1일은 그의 만 80세 생일에 해당했다. 당시 그는 빌헬름 2세의 미움을 받아 빌헬름스 회에라는 별장에 은거하고 있었지만, 명성은 황제를 압도할 정도였기에 생일에는 축하객이 끊이지 않았다.
각 대학에서도 최우수 학생이 대표로 나서 축사를 하고 악수를 하게 되어 있었는데, 그때 가사이는 뮌헨 이과대학의 최우등생이었기 때문에 대표로 선발되었다.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한 차례 사양했지만, “최우수생이 대표가 되는 것은 정해진 일이니 꼭 가야 한다”는 권유를 받아 결국 비스마르크를 방문해 축사를 하고 악수를 했다.
그때의 인상은 이러했다. 비스마르크 공은 특유의 커다란 눈을 크게 부릅뜨고, 거대한 손으로 꽉 움켜쥐며 “단케(Danke)” 라고 우렁차게 외쳤다. 과연 명성 높은 독일의 대원훈(大元勲) 답게, 위엄이 사방에 넘쳐흘렀다. 일본의 젊은 학생이 몹시도 신기했던지 시선을 떼지 않고 응시하는데, 오히려 두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나는 그 큰 손에 쥐어졌던 손이 아팠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정말 우연한 담소의 자리에서였고, 그때 가사이 사장의 나이는 예순다섯이었다.
(*笠井真三1873~1939?. 오노다시멘트 창업자의 아들. 4대 사장. 재임 기간: 대략 1900년대 초~1930년대 말. 경험이 풍부한 경영자, 일본 최대 수준으로 성장시킴. 오노다시멘트 역대사장: 初代社長 笠井順八 2代 長河北勘七 3代 福原栄大郎 4代 笠井真三 5代 狩野宗三 6代 河内通祐 7代 安藤豊祿--)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과단(果断)과 선견지명
● 27 가사이 신조사장을 추모하며 -8-
카사이 사장이 독일 민요를 부르신 이야기---
1934년 가을, 한국의 장진강수전(長津江水電) 댐을 만드는 데 천내(川内) 공장의 시멘트를 사용했는데, 불행히도 콘크리트가 굳지 않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저희는 전력을 다해 조사했지만, 도저히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카사이 사장은 그때 경성에 계셨지만, 전보를 보고 바로 천내 공장에 오셔서 분석 시험장에 펼쳐져 있던 연구 결과를 전부 훑어보았습니다. 바로 그 무렵 모래에 유기질 성분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해결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카사이 사장은 "이걸로 됐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라며 매우 기뻐했고, 그날 밤 직원들과 함께 소고기 회식을 하며, 마음껏 마시고, 마음껏 먹고, 크게 노래하는, 격식없는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사장님의 고마운 배려에 우리도 크게 한껏 들떠 마시고 떠들었는데, 사장님께서도 “나도 한 곡 해볼까” 하고 마음을 고쳐먹으시더니 부르기 시작한 노래가 독일 민요 "로렐라이" 였습니다. 솜씨가 꽤나 좋았습니다. 워낙 보기 드문 광경이라 모두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여 들었는데, 직원들 앞에서 사장님이 노래를 부른 일은 아마도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한국 내 마음의 고향" 제5장 잊을 수 없는 사람들 - 과단(果断)과 선견지명
● 28 노구치(野口) 씨와 구도(工藤) 군
"韓国わが心の故里" 第五章 忘れ得ぬ人々 - 28 野口さんと工藤君
● 28 野口さんと工藤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