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우거진 봉우리가 해를 가려 속진을 멀리 하니, 정결하여 더러움을 모른다(정암사 사적기)’는 절 정암사(淨巖寺)-. 그 절은, 첩첩히 깊고 깊어 ‘냇물이 일백 번 굽이쳐 흐르고, 절벽이 천 층’이라는 강원도 정선땅의 고한읍 남쪽 끝자락에 있습니다. 산 높고 골 깊어서 오늘 우리들에겐 피서지나 휴양지로 먼저 떠올려지는 곳입니다만, 한때 그곳은 ‘막장 인생’들이 ‘검은 노다지’에 생사를 의탁했던 눈물의 땅입니다.
서울에서 제천, 영월을 지나 사북, 고한을 지날 때 만나는 삶의 풍경들. 아직도 붉은 철분과 검은 석탄의 흔적이 남은 개울, 생채기난 산허리, 폐가에 가까운 광부들의 사택들. 못 배우고 가난한, 너무 일찍 늙어버린, 이악스런 동생들이 감추고 싶어 안달인 초라한 큰형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의 부황 든 풍요는 그 기억들을 ‘카지노’라는 분칠로 서둘러 지우고 있습니다. 이른바 사북사태-. 1980년 동원탄좌 광부들의 벼랑 끝 절규는, 아직도 계속되는 진규폐증의 기침소리는, ‘잭팥’의 환호에 묻혀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의 위태로운 부는 졸부의 건망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진정 이 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쓸개 빠진 ‘웰빙’족이 아니라면, 정선 땅을 지나면서는 잠깐이라도 한국 근대화의 비가(悲歌)에 귀 기울일 일입니다.
일찍이 자장 스님이 정암사를 세울 때, 이곳 석탄 산업의 흥성과 쇠락, 그리고 이어지는 카지노 산업을 예견했던 것일까요. 절묘하게도 고한읍에서 정암사 가는 길은 카지노 입구에서 함백산 기슭으로 갈라집니다. 예토(穢土)가 없으면 정토 또한 없는 도리 때문일까요. 정암사는 욕망의 극한에 이른 세상의 맨얼굴을 보여주는 ‘텅 빈’ 거울로 거기에 있습니다.
세속 가운데 정토로서의 정암사의 상징성은 창건 연기보다는 창건주 자장 스님의 출가 이야기와 더 잘 어울립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의 진골 출신인 자장 스님은 조정으로부터 재상의 물망에 올라 부름을 받았지만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에 왕은 “나오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고 명령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자장 스님은 “내 차라리 하루 동안 계율을 지키다 죽더라도, 백 년 동안 계율을 어기며 살기를 원치 않는다”고 단호히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더 이상 출가를 만류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자장 스님은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깊은 산으로 듭니다. 그러자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어다 바쳤습니다. 이어서 꿈에 천인(天人)이 나타나 오계(五戒)를 주므로 비로소 산골짜기에서 나오니, 향읍의 사녀(士女)들이 다투어 와서 계를 받았다고 합니다.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에 자리한 정암사는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입니다. 정암사 사적기에 의하면 자장 스님이 645년(선덕왕 14)에 진신사리를 이 절의 수마노탑에 봉안하고 적멸보궁을 지으며 창건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사실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데, 그 대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장 스님이 만년에 강릉에 수다사를 세우고 거기서 살았는데, 꿈에 이상한 승려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 너를 대송정(大松汀)에서 만나겠다.”
이에 자장 스님이 송정에 나아가 문수보살을 만나 법요(法要)를 물으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태백산 갈반지에서 다시 만나자.”
그러나 문수보살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자장 스님이 태백산에서 그를 찾다가 큰 구렁이가 나무 밑에 서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시자에게 “이곳이 갈반지다”고 이르고 석남원(오늘의 정암사)을 세우고 문수보살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자장 스님은 문수보살을 만나지 못합니다. 남루한 거사로 변장한 문수보살이 칡으로 만든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메고 왔으므로 자장 스님이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원효 스님이 낙산사로 가는 길에 관음보살의 진신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대국통 자장 스님이 한낱 속물에 지나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때 문수보살의 꾸짖음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는가.” 1,300여 년 전에 준비된, 오만과 탐욕의 현대문명에 대한 경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로부터 절은 산이름을 앞세워 자신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함백산 서쪽 기슭, 더 구체적으로는 은대봉 남서쪽과 중함백 북서쪽 기슭이 만들어내는 계곡이 다하는 지점에 자리한 정암사는 일주문 편액에 ‘태백산 정암사’라 새겨 놓고 있습니다. 측지 기술이 오늘과 달랐던 옛 사람들의 지리 인식으로는 태백산과 함백산이 뭉뚱그려 하나의 산으로 인식된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볼 수도 없는 것이 산경표에도 태백산 위에 대박산(大朴山·오늘의 함백산)을 적어 두고 있습니다. 대박(大朴)이 왜 함백(咸白)으로 바뀌었는지 그 까닭은 모르겠으되, 태백(太白) 대박(大朴) 함백(咸白)이라는 말이 모두 ‘크게 밝다’는 뜻이고 보면, 보통명사로서 태백(太白)이 고유명사화하면서 그 모든 이름을 아우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측량 기술이 밝혀낸 높이는 함백산(1,573m)이 태백산(1,566m)보다 높지만, 옛날에는 두 산 모두 ‘크게 밝은 산’의 봉우리였을 것입니다.
김장호 선생이 쓴 글에 따르면 오늘날 두 산을 명확히 갈라놓는 화방재도 일제의 산물로 사이토 총독 시절 설치한 방화선(防火線)에서 비롯된 것이라 합니다. 한편 태백문화원에서 펴낸 태백의 지명 유래에는 고갯마루에 철쭉과 진달래가 무성하여 화방재(花房峙)라 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정암사의 창건 설화는 유난히 칡과 관련이 많은데, 그 한 토막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 자장 스님이 사북의 불소(佛沼) 위 산꼭대기에 불사리탑을 세우려 하였으나 계속 무너지므로 간절히 기도를 하였더니 눈(雪) 위로 세 줄기 칡이 뻗어나가 지금의 절터를 점지했다 합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갈래(葛來) 했다는 것입니다.
다 알다시피 정암사는 적멸보궁으로 이름 높은 곳입니다. 자장 스님이 수마노탑(水瑪瑙塔·보물 제410호)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안치했기 때문입니다. 자장 스님이 643년(선덕여왕 12)에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서해 용왕으로부터 받은 마노석으로 탑을 세웠다는데, 동해 울진포까지 물길로 왔다하여 수마노탑이라 한다고 합니다.
중함백 북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선 수마노탑은 6단의 화강암 지대석 위에 벽돌처럼 다듬은 석회암으로 쌓은 모전석탑입니다. 전체 높이는 9m에 이르고 7층의 처마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이 탑의 본래 형태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는데, 1713년 중수 이후 여러 차례 손질을 해 왔고, 1972년에 대대적인 해체 보수를 했으나 계속 균열이 생겨 1995년에 다시 해체 복원 작업을 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정암사의 공간 구성은 은대봉(상함백)과 중함백 사이의 계곡을 경계로 두 영역으로 나눠집니다. 계곡 왼쪽에는 육화정사, 관음전, 요사, 범종각이 배치돼 있고, 관음전 뒤에는 산신각과 자장각이 있습니다. 극락교로 계곡을 건너면 수마노탑 아래에 주불전인 적멸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엔 부처가 없습니다. 부처의 진신을 수마노탑에 모셔둔 까닭입니다.
정암사가 정녕 ‘정결하여 더러움을 모르는 절’인 것은 사철 도량을 흘러내리는 청량한 계곡물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계곡이 바로 천연기념물 제73호인 열목어 서식지입니다. 열목어는 한여름에도 수온이 20℃이상 오르지 않는 찬 물에서만 사는 고기로 깨끗함을 재는 지표어종이기도 합니다. 이 계곡에는 또 종각이 기둥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종소리가 널리 울려 퍼지지 못한다고들 하는데, 계곡 물소리를 종소리로 듣는 발상을 해 보면 오히려 그 입지가 근사해 보입니다.
정암사는 서늘함으로 우리네 몸과 마음을 청신하게 해 주는 절입니다. 그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만항재에 서 봐야 합니다. 함백산 서남쪽의 낮은 산등으로 사람들이 넘나든다하여 동네 말로 늦은목이(晩項)라 불린다는 만항재는 포장도로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고개(1,341m)입니다. 함께 취재를 갔던 한 선배는 전날 밤 그곳에서 ‘바람 맛에 취해’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더군요.
‘자연과 바람나고’ 싶은 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절, 그곳이 정암사입니다.
/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