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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썽피워도, 대학 중퇴해도… IT천재 부모는 자식 믿었다" 잡스·게이츠·저커버그… 3人의 천재 키워낸 부모들의 '4가지 교육법'
1972년 9월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Reed)대학. 폴 잡스와 클라라 잡스 부부는 아들을 차에 태우고 캘리포니아주 서니베일에서 1000㎞를 달려왔다.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날이었다.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지난 24일 발간된 자서전에서 '나를 위해 평생을 희생하신 분들인데, 내 인생에서 가장 부끄러운 순간이었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IT(정보기술)로 세상을 바꿔놓은 천재(天才)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어려서부터 '컴퓨터 도사'급 실력을 자랑했지만 인간관계는 서툴고,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건 이들의 부모가 자녀의 천재성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남다르게 교육했다는 점이다.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던 부친은 아들이 9세 때부터 프로그래밍을 가르쳤다. 아들의 실력이 자기보다 뛰어난 걸 알고는 11세 때 소프트웨어 전문 개발자를 가정교사로 채용했다. 아들이 중학생이 되자 집 근처 머시 칼리지(Mercy College)대학원의 컴퓨터 강좌에 보냈다. 당시 교수가 "강의실에 아이를 데려오면 안 된다"고 하자 저커버그 아버지는 "내가 아니라 우리 아들이 학생"이라고 답했다. 잡스가 전자회로에 관심을 보이자 아버지는 주말마다 아들 손을 잡고 중고 부품상을 찾아가 라디오·전축 등을 만드는 데 필요한 부품을 구해줬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잡스 부모는 이웃에 사는 엔지니어에게 초등학생 잡스를 보내 마이크와 스피커의 작동 원리 등 전자공학의 기초를 배우게 했다. 나사(NASA)연구소에 데려가 대형 컴퓨터를 보여주자 잡스는 첫눈에 반해 장차 컴퓨터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변호사 아버지, 교사인 어머니를 둔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그는 7세 때 집에 있던 백과사전을 다 외워 부모를 놀라게 했다. 게이츠 부모는 1967년 학부모회를 통해 이 학교에 컴퓨터 단말기를 기증했다. 그 덕분에 다른 아이들이 컴퓨터를 본 적도 없었을 때 게이츠는 학교 전산실에서 밤늦도록 컴퓨터를 만지며 놀 수 있었다. 저커버그는 최고 명문 기숙학교 중 하나인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도 아들을 보냈던 명문. 그는 프랑스어·히브리어·라틴어·고대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컴퓨터 천재였다. 대학 시절엔 호머의 일리아드를 자주 인용하는 컴퓨터 괴짜로 통했다. 아버지의 영재교육 덕분이었다. 성폭행 사건이 빈발하자 지역의 명문 학교로 전학시켰다. 이를 위해 집을 팔고 이사를 가야 했다. 친부모에게 "아들을 꼭 대학에 보내겠다"고 약속했던 양부모는 잡스를 사립 리드대학에 입학시키기 위해 10년 넘게 모아둔 적금통장을 깼다. 교사 책임이지 아이가 잘못한 게 아니다.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하면서 바보 같은 내용만 달달 외우게 하는 학교가 문제"라고 오히려 야단을 쳤다. 의사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고 아들이 하고 싶은 대로 믿고 내버려뒀다. 둘 다 명문 하버드대를 중퇴하고 각각 MS와 페이스북을 창업한다고 할 때도 반대는커녕 사업자금을 대줬다. 빌 게이츠는 "당시 아무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소프트웨어 사업을 한다고 하버드대를 때려치울 때도 부모는 나를 믿어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남에게 보이는 앞부분만 신경 쓸 게 아니라 숨겨져 있는 뒤쪽도 잘 다듬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잡스의 완벽주의는 어려서부터 잉태된 셈이다. 사실과 경험, 논리와 이성적인 근거를 대고 설명해줬다"고 말했다. 부모가 자녀의 가장 훌륭한 역할 모델이었던 것이다.
"모두 떠날때 뚝심으로 버틴 남자… 5천억 대박" 유통업계의 '스티브 잡스' 코스트코 창업자 짐 시네갈
시애틀 시내에서 승용차를 타고 동쪽으로 30㎞쯤 달리니, 나무들로 빽빽하게 둘러싸여 있는 세계 최대 창고형 할인점 기업인 코스트코(Costco) 본사가 보였다. 미국 유통업계의 ‘스티브 잡스’ 또는 ‘전설(legend)’로 불리는 코스트코 창업자이자, 29년간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짐 시네갈(Sinegal·76)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복도를 걷는데 한 칸막이에서 누군가 “안녕하세요, 짐입니다”라며 손을 불쑥 내밀고 나왔다. 하얀 콧수염이 트레이드마크인 시네갈 창업자다. 그의 집무실에는 유리창과 문이 없었다. 그래서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은 누구나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크기도 일반 임원 사무실과 거의 똑같았다.
시네갈 창업자는 “저희 회사는 신입사원이든 CEO든 따로 방이 없습니다. 또 서로 이름으로만 부릅니다”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티셔츠에 붙은 명찰에는 ‘짐, 1983년부터 직원(JIM, employee since 1983)’이라고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매주 평균 50여 통씩 고객들에게 직접 편지 답장을 보낸다. “매일 최소 6~7번에서 최대 12차례 매장을 직접 찾아가 현장을 지켜보는 게 너무 즐거워요.” 그래서 그의 별명은 ‘진솔하고 실천적인(down to earth)’ CEO이다. 마이크로소프트(37위·매출 699억달러)나 아마존(56위·480억달러)보다 높다. 지난해 이런 ‘성적표’를 달성한 코스트코는 미국 기업 역사상 가장 짧은 시기인 6년 만에 매출 30억달러를 달성했고, 주가와 매출은 상장 당시인 1992년과 비교해 각각 800%, 700% 올랐다. 코스트코의 서울 양재점 연간 매출(약 5000억원)은 세계 코스트코 매장을 통틀어 1등이다. 하지만 코스트코는 어떻게 하면 가격을 더 낮춰 이익을 최소화할지 고민하는 역발상으로 성공했다.”(존 뮬린스·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
시네갈 창업자에게 직접 성공 비결을 물었더니, 대답으로 4가지가 돌아왔다.
첫째, ‘법에 복종(obey the law)’이다. 편법을 동원한 로비와 관시(關係)가 절대적인 중국 시장에 코스트코가 아직 진출하지 않은 중요 이유 중 하나는 이 원칙의 훼손을 우려한 때문이다.
둘째는 ‘고객을 정성껏 대우하라’이다. 코스트코는 창업 때부터 ‘마진 15%룰(rule)’을 엄수한다. 마진이 더이상 생길 때는 가격을 낮춰 고객에게 혜택을 나눠준다. 월마트 등 대형할인점(20~25%), 백화점(50%)의 마진율보다 크게 낮다.
다음은 ‘직원에게 최고의 혜택을 준다’이다. 코스트코 직원들의 연봉은 유통업계 평균보다 40% 정도 더 많다(시간당 평균 20달러). 매출의 1.25%(지난해 11억1200만달러·약 1조1391억원)를 직원 건강의료보험 및 복지혜택에 쏟아붓는다.
그는 마지막으로 “제품 공급업자를 똑같은 비즈니스 파트너로 존중한다”고 했다. 월가는 매주 월~목요일까지 실적으로 회사를 평가하지만, 저희는 50년 뒤까지 평가받고 싶습니다. 장기적인 성공을 위해 고객이 구입하는 제품의 품질을 희생시킬 수 없고 직원들의 행복도 절대 양보할 수 없습니다.” 올 1월 CEO에서 물러난 후에도 이사회 멤버로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영원한 ‘코스트코 맨’인 그를 통해 세계 5위 소매기업 코스트코의 ‘정신’과 ‘비즈니스 세계’를 해부했다.
짐 시네갈 코스트코 창업자는 매일 아침 스타벅스 커피 두 잔을 마시는 스타벅스 열혈 팬이다. 그는 손에 든 스타벅스 컵을 가리키며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CEO는 둘도 없는 친구지만 다툰 적도 있다"고 말했다. 스타벅스에 '제품 매입을 중단하겠다'고 직접 통보했다는 것. 그랬더니 슐츠 CEO가 "나한테 이럴 수 있나? 당신이 '가격 경찰'(price police)인가?"라고 펄펄 뛰어 몇 개월간 냉전을 벌였다고 한다. 하지만 시네갈 창업자는 "내가 이겨 결국 가격을 낮췄다"고 했다. 또 깎는 '비즈니스 마인드'가 뼛속 깊이 박혀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적자였던 페드마트의 여러 매장을 흑자로 전환했고 창고형 할인점의 효시(嚆矢)인 프라이스클럽(Price club)에서 수석 부사장까지 지냈다. 그는 47세에 투자가인 제프 브로트먼(Brotman)과 함께 750만달러를 들여 시애틀 시내에 코스트코를 창업했다. "뒤늦게 창업 전선에 뛰어든 이유가 궁금하다"고 묻자, 그는 5초 정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와 한 가지 닮은 것은, 저도 제 일을 무척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죽기 전날까지 일한 그처럼, 저도 제 일에 몸과 열정을 다 바치고 있습니다." 사무실 벽에 '매장에서 연락이 오면 모든 일을 멈추고 매장 일에 집중하라'는 문구를 써 붙였을 정도다. 나는 지금도 매장의 계산대 현금 출납기에서 울리는 '링링!' 소리가 가장 즐겁다." 물론 건강이나 가족도 챙긴다. 1주일에 3차례 라켓볼을 치고 일요일엔 반드시 가족과 저녁을 먹는다. 휴가도 간다. 하지만 가족과 저녁 먹기 전에는 문서 작업에 몰두하고 휴가지에서도 코스트코 매장을 꼭 방문한다." 그 이상 이익을 남기면 기업의 규율(discipline)이 사라지고 탐욕을 추구하게 된다. 나아가 고객들이 떠나고 기업은 낙오한다."
―코스트코의 이익률은 2%대인데 어떻게 성장이 가능했나?
"월마트는 14만개 아이템을 진열해 놓지만 우린 4000개만 판다. 품목별로 가장 품질 좋고, 값이 싸며, 큰 사이즈 하나만 제공하는 것이다. 비슷한 제품 4~5개를 고객이 고르다가 결국 안 사가는 것보다, 확실한 제품 하나가 잘 팔리는 게 낫다. 이런 방식으로 코스트코는 1년에 재고가 13차례 소진된다. 월마트 등 경쟁 기업은 연간 9차례 재고가 소진된다. 재고 없이 끊임없이 팔아치우는 게 우리의 힘이다." 그러나 우리는 3~4달러로 가격을 낮춘다. 중요한 건 가격을 최대한 낮추면서 제품 규모를 키우는 일이다. 제품 공급자들을 설득해 이들이 먼저 양질 제품을 내놓도록 유도한다. 예컨대 과거 우리는 대니시 쿠키(danish cookie) 1파운드를 3~4달러에 팔았다. 그 뒤 해당 공급 업체를 잘 설득해 쿠키 2파운드를 5달러에 내놓았다. 그러자 상품이 불티나게 팔렸다. 그러더니 그들이 먼저 5파운드짜리 쿠키 제품을 7달러로 만들어 찾아왔다." 한쪽 벽에 '제품 공급자들에게 : 어떤 비판과 조언도 환영합니다. 다만 최대한 낮은 가격의 품질 좋은 제품을 부탁합니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이들은 매일 코스트코 제품 담당자와 만나기 위해 평균 1시간 30분을 기다린다고 했다. 제품 선별 과정은 '낙타의 바늘 구멍 통과'를 연상케 한다. 500대 1에서 1000대 1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익률이 낮아지니 인력을 줄이고 마진을 높여라'는 압박이 극심했다. 그러나 진짜 훌륭한 기업은 경제 상황이 어려울 때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기업이라고 믿었다. 경제가 어렵다고 가격을 높이는 것은 '공든 탑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금융 위기 때는 가격을 내려도 어차피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동일한 가격으로 제품을 구매하는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가격을 조금이라도 높이면 즉각 거부반응이 온다. 결국 우리는 위기를 극복했다." (코스트코는 2010년과 지난해 각각 9.13%, 14.07%의 매출 성장률을 기록했다) 중요한 것은 고객과 기업이 '충성심'(loyalty)을 만들며 서로에게 지속적으로 충실해진다는 점이다. 회비를 내면 지속적으로 방문하게 묶어놓는 효과도 있다(웃음). 연간 멤버십 경신 비율은 90% 정도다." 코스트코의 계산대 직원(정규직)의 연봉은 4만9000달러이다. 월마트 등 경쟁 유통 기업 직원들은 연봉의 25%를 건강보험료 같은 의료 비용으로 지출하지만, 코스트코 직원은 연봉의 8%만 낸다. 차액(差額)을 회사에서 전액 지원하는 덕분이다. 직원 정년(停年)도 없어 코스트코 매장에는 60~70세의 '정정한' 노인이 점원으로 상당수 활동 중이다. 우리는 후배를 칭찬하는 문화 못지않게 후배가 상관을 칭찬하는 문화도 있다.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내 상관이 잘 돌봐줬다'는 칭찬들이 회사 안에서 매일 생겨나 회자된다. 적자가 나더라도 기업은 직원들에게 가는 혜택을 줄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 의무의 일부다."
◇"CEO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직원들에게 회사 가치관을 전하고 훈련시키는 일이다" CEO는 조직의 '선생님'일 뿐입니다. 저는 항상 중간 관리자 이상급 직원들에게 '만약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깨닫지 않는다면, 그 직업을 그만둬야 한다'고 말합니다. CEO의 열정만큼 직원들이 현장에서 똑같은 열정으로 일해줘야 하는데, 그러려면 CEO의 1순위 과제는 직원들에게 회사 정신과 가치관을 가르치고 훈련시켜 이를 공유하는 '코치(coach)'가 되는 일입니다." 24명을 뽑아 직접 본사로 1년에 4차례씩 불러 교육한다. 세계적 경영사상가 짐 콜린스의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How the mighty fall) 같은 경영 서적을 읽고 몇 시간씩 토론하기도 한다. 외부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우리 사람만 생각한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일리 있다. 하지만 그게 우리의 장점이다. 절대 물러서면 안 되는 원칙 중 하나다." 코스트코 매출의 절반에 불과한 코카콜라의 켄트 CEO는 당신보다 연봉(1447만달러)이 47배나 많다. 너무 적은 연봉을 받은 게 아닌가. CEO가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 보다 100배, 200배나 더 많은 연봉을 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코스트코는 한국에서 1994년부터 2002년까지 8년간 적자를 견뎠다. 그 후에 흑자로 만들었다. 경영진 회의 때마다 '한국 시장은 잠재력이 있다. 포기하지 말고 성공의 때를 기다리며 끈기있게 버티자'고 다독거리면서 살아남았다."
"경쟁자가 없었다면 성공 못했을 것… 한국에서도 신세계·롯데가 있기에 우리가 존재" 코스트코가 세계 1위의 창고형 할인점포로 승승장구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올 1월 CEO에 취임한 크레이그 젤리넥(Jelinek·60) CEO는 세 가지를 핵심 전략으로 꼽았다. 지난해 봄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코스트코에 사업허가를 내렸지만 미국 내 1위 유통기업인 월마트의 진입은 불허했다. 이에 대해 코스트코는 '월마트도 똑같이 허가해달라'며 강력 호소했다. 젤리넥 CEO는 이에 대해 "최고의 매출을 올리는 매장은 오히려 월마트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경쟁은 고객을 위한 최고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지름길입니다. 예컨대 한국에선 신세계와 롯데가 쉽지 않은 경쟁자이죠. 그러나 그들이 있어 우리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코스트코는 현재 '무제한 이중(二重) 보증제(unconditional double guarantee)'를 실시하고 있다. 상품에 문제가 없더라도 고객이 만족하지 못한다면, 일정 기한이 지나지 않은 범위에서라면 언제든 100% 환불해준다. 연간 회비도 고객이 코스트코 상품과 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전액(全額) 돌려준다. 당시 11개월 동안 회원을 유지하다가 회원 기간이 한 달 남은 고객에게도 우리는 연회비 전체를 환불해 줬습니다." 일례로 코스트코는 지난해 28만달러짜리 다이아몬드를 인터넷으로 팔았다. 그는 "코스트코 고객의 30%는 연소득 10만달러가 넘는 고소득층"이라며 "이들을 겨냥한 인터넷 판매를 늘리겠다"고 말했다. 코스트코는 인터넷으로 아마존이나 월마트보다 저렴하게 TV·명품(名品) 가구 등을 팔아 지난해 20억달러의 매출(미국 인터넷 소매부문 17위)을 거두었다. 현재 미국과 해외 매출 비중이 7대 3인데, 10년 안에 5대 5로 만들 겁니다. '30년 성장 방안'도 만들어 공개하겠습니다." 코스트코에서 각 부문의 중간관리자 이상급 직원들은 모두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2~3명의 후보를 정해놓고 평소에 늘 후계자 양성에 진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계자 관리'는 글로벌 기업의 존망을 좌우하는 열쇠입니다. 소니(Sony)를 예로 들어볼까요? 2 005년 소니는 외국인인 스트링거를 CEO로 영입한 다음 후계자 양성에 실패해 제품 품질까지 나빠졌습니다."
"불치의 근육병 앓는 형제, 그들을 홀로 키운 아버지… 3부자의 특별한 제주 여행" 형제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첫 가족여행…
20대 초반을 넘기기 어려운 병이라고 했다.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굳어 폐 근육까지 마비돼 질식하듯 죽어가는 근이영양증. 박승훈 씨(51)의 두 아들은 모두 이 병을 앓고 있었다. 현민(25) 현진 씨(19) 형제는 모두 이 근육병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다. 천형(天刑)이나 다름없었다. 형제에게 이제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폐가 상당 부분 굳어 하루 14시간을 산소호흡기에 의존한다. 앉아 있기도 어렵다. 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자”고 한다. 현진 씨는 형의 6년 전 모습이다. 형은 동생의 미래이고 동생은 형의 과거였다. 이들은 늘 집에 누워 함께 지냈다. “사방이 뚫린 곳에서 바다 냄새를 맡고 싶다”는 말을 수백 번 되뇌었다. 동생은 5월 형의 소망을 담아 소원성취 기관인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에 “제주도에 가고 싶다”고 사연을 보냈다. 두 달 만에 당첨 소식이 왔다. 평생 병마와 싸워야 하는 두 아들을 바라보기 힘들어 하던 엄마가 14년 전 집을 떠난 뒤 세 부자(父子)가 함께하는 첫 여행이었다. 세 남자는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게 됐다. 기자도 그들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여행을 함께했다. 어른 가슴 높이의 짐 가방이 3개나 나와 있었다. 가방 안에는 산소호흡기, 호흡조절기 등 의료장비와 환자용 매트가 담겨 있었다. 트럭까지 불러 짐과 휠체어를 싣는 아버지에게 아파트 경비원이 물었다.
“오늘 이사 가시나 봐요.” 아버지는 34kg가량의 현민 씨를 안고 기내에 들어갔다. 좌석 3개를 확보한 뒤 오른쪽 끝에 아버지가 앉고 왼쪽 두 자리에 현민 씨를 뉘었다. 아버지 무릎에 머리를 파묻은 현민 씨는 왕방울만 한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정상적인 비행 중 사고에 대해서는 보호자가 책임을 진다는 서약서였다. 죽음을 앞둔 자식에게 이런 서약서가 무슨 의미란 말인가. 다른 불치병 환자 가족처럼 아들에게 허락된 시간이 더 소중했는지 아버지는 주저 없이 서류에 사인했다. 그들은 이미 살기 위해 마음 졸이지 않는 방법을 터득한 듯했다.
○ 바다를 가슴에 품다 힘겨운 비행 끝에 도착한 제주도. 서귀포시에 있는 해안휴양지인 섭지코지가 이들의 첫 행선지였다. 아버지는 관광에 앞서 미리 얼려온 생수통을 형제들 품에 안겼다. 땀이 많이 나면 식으면서 감기에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소변이 급하다는 신호였다. 아버지는 휠체어를 후미진 곳으로 옮긴 뒤 페트병을 꺼내 능숙하게 소변을 받아냈다. 휠체어에 누워 있는 형은 곁눈질로 바다를 내려다봤다. 아버지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 형 현민 씨를 아기처럼 끌어올렸다. 제주의 푸른 바다는 그렇게 맏아들의 품으로 들어왔다. “바다 향기를 담아 가겠다”며 지그시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얼굴이 빨개지도록 기침을 했다. 병으로 쇠약해진 호흡기 근육이 경련을 일으킨 것이다.
“저도 몇 년 전엔 저렇게 돌아다녔는데…. 동생이 부럽기도 하지만 저 녀석도 곧 저처럼 될 것 같아서 그게 참 불쌍해요.”
○ 큰아들의 유일한 효도 덥고 습한 날씨 탓에 두 아들은 땀에 젖어 있었다.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다. 아버지는 현민 씨 먼저 욕실로 안고 가 옷을 벗겼다. 뼈만 남은 앙상한 몸이 드러났다. 다리는 아버지 손목보다 가늘었다. 새하얀 피부엔 핏기가 없었다. 척추측만증까지 겹쳐 등은 S자로 휘어 있었다. 박 씨는 큰아들이 초등학생 때 찍은 사진을 지갑에서 꺼내 기자에게 보여줬다. 아동복이 꽉 낄 만큼 통통했던 그가 이렇게 변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 욕조에서 미끄러진 아들이 옴짝달싹 못한 채 질식사할 뻔한 기억 때문이다. 현민 씨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아빠, 여기까지 와서 힘드시죠”라고 했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슬픈 미소’가 번졌다. 두 아들 입에 밥 한 숟가락을 먹일 때마다 그는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지독한 불면증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평소 매 시간 일어나 두 아들의 근육이 뭉치지 않도록 수시로 자세를 바꿔준다. 산소호흡기를 끼고 자는 현민 씨의 상태도 살펴야 한다. 그러다보니 10년 넘게 깊은 잠을 자 본적이 없다. 현민 씨는 “그것 외에 아버지에게 효도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 수없이 떠올려본 자살 불치병에 걸린 두 아들을 떠안아야 한다는 부담감뿐 아니라 간병을 위해 공무원 생활까지 그만둬 경제적 궁핍도 심각했다. 수입은 기초생활수급비 100만 원이 전부였다. 높은 곳만 가면 뛰어내릴 생각이 들까봐 한동안 베란다에도 나가지 못했다.
“술에 취하면 애들한테 ‘베란다에서 함께 점프할까’라고 말하곤 했어요. 그럴 때마다 둘째가 형 손을 꼭 잡습디다. 목숨이란 게 그렇더군요.” 하지만 그는 두 아들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글쎄요…. 애들한테는 좋을지 몰라도 저는 혼자 못 살아요.” 현민 씨에겐 산소호흡기를 씌웠다. 현진 씨는 호흡 조절기를 물린 채 숨쉬기 훈련을 시켰다. 이 연습을 열심히 해야 형처럼 되는 날을 늦출 수 있다. 연습을 조금만 해도 가슴 통증이 심해진다. 현진 씨가 못 하겠다고 투정을 부리면 형이 나서서 “나처럼 되고 싶냐”고 했다. 여행중 형이 화를 낸 건 그때가 유일했다. 비장애인이 평소 느끼지도 못하는 숨쉬기가 이들에겐 매일 밤 생사를 걸어야 하는 일이다. 두 아들을 잃어가고 있는 것을 심장도 안 것일까. 아버지도 아들을 돌보느라 몇 년 전 심장에 병을 얻었다. 지난해에는 심장 판막수술까지 받았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고 있다.
○ 아버지의 편지 여자친구를 사귀어 보겠다는 꿈을 꿨다. 하지만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 뒤부터는 마음을 비웠다. 그 대신 매일 같은 옷만 입는 아버지를 위해 직접 돈을 벌어 옷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에게는 마지막 꿈인 셈이다. 현민 씨는 “아버지한테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고 가야 할 텐데…”라고 혼잣말을 했다. 현민 씨는 자신을 품어준 세상에 ‘자신의 마지막’을 남기기로 했다. 지난달 동생과 함께 장기기증서약을 한 것이다. 아버지는 이미 15년 전 기증서약을 했다. 남자끼리 지내다 보니 평소 깊은 대화가 없었는데 모처럼 용기를 내 쓴 편지였다. 아빠가 너희 나이 땐 참 꿈이 많았는데 너희들이 온종일 집에만 누워있는 걸 보면 다 내 죄인 것 같아 가슴이 메도록 쓰리구나.’ 눈물로 그렁그렁해진 두 눈을 계속 깜박였다. 자식에게 큰 짐을 지운 것을 자책하는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버리지 않고 키워준 것에 대한 감사함…. 그들의 ‘아름다운 여행’ 마지막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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