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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천청을 동북에 보내다.
1947년 8월, 장제스는 참모총장인 천청을 동북행원 주임으로 파견하였다. 천청은 장제스의 심복 중에서 첫손에 꼽히는 애장이었다. 천청은 장제스와 동향인데다 군벌들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28세의 약관에 사단장이 되었다. 32세에는 18군 군단장이 되어 국민정부군 내에서 이른바 토목계 파벌이 이 시절에 조성되었다. 토목계란 18을 한자로 파자하면 토목(土木)이 된다하여 붙은 이름이었다.
천청은 장의 주선으로 본처와 이혼하고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수양딸인 탄샹(譚祥)과 결혼하였다.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사위가 된 것이다. 탄샹은 국민당 원로인 탄옌카이(谭延闓)의 딸이었다. 탄옌카이는 장제스와 쑹메이링의 결혼을 주선했던 인물로 1930년 뇌일혈로 죽었다.
그는 생전에 딸의 결혼을 두 사람에게 부탁하였는데 자신의 딸을 전도유망한 군인이나 정치가와 결혼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장제스는 탄샹의 남편감으로 천청과 후쫑난을 꼽았다. 그런데 천청은 이미 결혼하였고 후쫑난은 아직 미혼인 상태였다. 당연히 후쫑난이 결혼 적임자였지만 장제스의 판단은 달랐다.
후쫑난이 충실한 장제스의 직계인 반면 천청은 장제스의 경쟁자이던 덩옌다(鄧演達)와 관계가 깊었던 것이다. 장제스는 자신의 품으로 방금 들어온 천청의 충성심을 굳히기 위해 탄샹과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장제스가 이 결혼의 증인을 섰으니 부부의 후견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천청은 이 부인과 말썽 없이 해로하였으며 참모총장이 되기까지 승승장구했다.
장제스는 천청에게 참모총장을 겸임하면서 동북지역 군사 및 정치, 행정을 장악하라고 한 것이다. 장제스는 천청이라면 동북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으로 희망하였다. 또 동북을 시찰하며 국민당 군정의 부패와 난맥상을 질타했던 미국 특사 웨드마이어를 만족시키려는 뜻도 있었다. 웨드마이어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특사였으므로 그의 불만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천청은 국군 지휘관 가운데 축재를 하거나 첩을 두지 않은 얼마 안 되는 인물이었다. 성실하고 근면하며 장제스에게 가장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었으니 장제스가 믿고 맡길만한 적임자였다.
하지만 그것은 장제스의 생각이었다. 천청이 동북에서 참모총장직을 함께 수행하기는 어려웠다. 동북의 정세가 국군에 불리한데다 상대가 해방군에서 ‘전술의 천재’로 손꼽히는 린비아오였다. 마오쩌둥은 린비아오를 가리켜 “논할 필요가 없는 상승장군”이라고 불렀다. 장제스조차 “린비아오는 황푸 출신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지휘관이다. 황푸 교관은 물론 학장들을 모두 이겼다. 내가 린비아오에 좀 더 관심을 가졌어야 하는데 교장으로서 큰 잘못을 했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천청이 동북으로 떠나자 전국의 내전 지휘는 장제스가 직접 하게 되었다.
천청과 린비아오는 과거에 두 번이나 크게 싸운 일이 있었다. 1933년 천청은 장시성의 홍색 소비에트에 대한 4차 포위토벌에서 중로군 사령관을 맡았다. 천청은 12개 사단 16만명을 이끌고 호호탕탕하게 쳐들어갔다. 그때 린비아오는 홍군 1군단의 연대장으로 주더와 저우언라이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천청이 자랑하는 18군 부대는 주더가 짠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대패하였다. 천청은 첫 번째 전투에서 휘하 2개 사단을 잃고 사단장 두 명은 포로로 잡히는 등 참패했다.
두 번째 전투에서 천청의 부대는 린비아오가 지휘하는 연대의 매복에 걸려 휘하 연대장 네 명이 사살당해 죽고 사단장 두 명은 들것을 타고 간신히 탈출하는 참패를 당했다. 1934년 5차 포위토벌에서 홍군은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중국명 리더李德)가 진지전을 고집하는 바람에 광창에서 패배하였다. 그때 천청은 북로군 총사령관으로 5차 포위토벌을 지휘했으며 린비아오가 지휘하던 홍군 27사단을 밀어내고 루이진까지 밀고 들어갔다. 그 결과 홍군과 중공 중앙은 장정에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제 9살 차이가 나는 사제는 세 번째 대결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황푸군관학교에서 천청은 교관이었으며 린비아오는 4기 학생으로 천청의 지도를 받았다. 1947년 당시 천청의 나이는 49세, 린비아오는 40세였다.
천청, 동북에 수술 칼을 들이대다
1947년 들어 린비아오의 동북 민주연군 부대는 동북의 광대한 농촌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동북 민주연군은 실력이 급속도록 발전하였고 린장을 둘러싼 싸움과 하계공세에서 국군을 계속 밀어 붙였다. 국군은 병력의 손실이 너무 커서 전장을 수축시켜야 하였으며 창춘, 선양, 진저우 등 대도시를 겨우 방어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철도 등 교통선이 수시로 차단당하여 국군의 보급은 사실상 공중투하에 의존하는 형편이었다.
천청이 부임할 무렵 국군은 완전히 피동적 국면에 빠져 있었다. 군사적으로도 열세였지만 정치와 인사, 행정도 엉망이었다. 1945년 8월,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장제스는 숑스후이(熊式辉)를 동북행영 주임(나중에 행원으로 개칭하였다.)으로 파견하여 동북의 군정을 접수하게 하였다. 숑스후이는 국민당 파벌 중 정학계의 대표인물 중 한사람이었다. 국민당에는 대체로 세 개의 파벌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천리푸, 천궈푸가 대표적인 CC계와 후쫑난, 다이리 등의 황푸계, 그리고 외국 유학 후 국민정부에서 고관을 맡았던 정학계였다. 정학계의 대표인물로는 숑스후이와 장췬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장제스는 숑스후이를 믿지 못하고 직계인 두위밍을 동북 보안사령관으로 보내 군사 쪽을 책임지게 하였다. 숑스후이는 동북 행영주임으로 명목상으로는 동북지역의 최고 군사책임자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두위밍과 사이가 좋을 리 없었고 당연히 협력도 하지 않았다. 국민당 상층 인사들이 권력을 놓고 다투는 동안 하층에서는 이익을 놓고 다퉜다. 적산을 놓고 다투었으며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다. 그런 돈으로 사치를 일삼아 동북의 상태는 뒤죽박죽이 되었다. 두위밍조차 중정대학을 세운 일로 축재를 했다고 비판을 받았다.
장제스는 동북의 지휘계통을 통일하기 위해 동북 보안사령 장관부를 동북행원에 병합시켰다. 그리고 천청에게 둥복 행원 주임 숑스후이의 자리를 인계받게 하였다. 장제스는 천청에게 강력한 권한을 주어 동북지역의 치안유지는 물론 군사지휘를 통일하도록 하였다. 장제스는 천청의 부임과 함께 관내에서 5개 정편사단을 이동하여 동북을 증원하였다. 천청에게 권한을 주는 한편 병력도 보충하여 동북의 전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천청을 일급 상장(대장에 상당)으로 진급도 시켰다. 천청은 용기와 자신감을 더하여 동북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천청은 부임하여 곧바로 군정을 장악하였다. 그는 숑스후이와 두위밍이 재직하던 기간에 국군의 위아래 할 것 없이 부정부패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1947년 9월 11일, 그는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숑이 2년간 동북에 있는 동안 아무 계획이 없었소. 제대로 한 일도 없고 동북 인민들의 반대 여론만 만들어 내었소. 부패와 낭비가 심한 것이 완전히 옛날 군벌들의 작태 그대로요. 돈이 되지 않으면 하는 일이 없고 인민들의 생사에는 전혀 관심도 없소. 내가 가지 않으면 타이완의 일(2.28 사건을 가리킨다.)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소.” 그는 9월 17일 부인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오늘 한 가지 보고를 받았소. 어떤 연대장은 중국 마누라가 두 명이고 일본인 마누라가 두 명이오. 나는 부패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느냐고 물어 보았소.”
천청은 동북의 국면을 바꾸려면 먼저 군기를 바로 세우고 부패를 일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직무를 시작하며 숑스후이 시절에 횡행하였던 동북의 잔재를 일소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국군이 “군대를 방임하여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고, 백성을 핍박하고 도적질을 하였으며, 도적을 병사로 받아 들였다.”고 생각하였다. 동북에서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중점 임무를 “군대를 정돈하고 민생을 보살펴 실력을 양성한다.”고 정하였다. 천청은 마음먹은 것을 곧 실행하였으며 말한 것은 반드시 관철하였다. ‘병학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사설 도박장을 개설해 운영하던 텐샹판(田湘藩) 중장을 체포했으며 번시(本溪) 보안사령관 리야오츠(李耀慈)를 전장에서 도주한 죄로 처형하였다. 일본군 포로의 관리를 책임졌던 리슈예(李修業) 소장은 직권을 남용하여 축재한 죄로 구금되었다. 그밖에도 괴뢰군을 국군으로 재편하며 부정을 저지른 죄로 직위에서 쫓겨난 자도 있었다.
천청은 부패한 장군들을 다스리는 데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71군 군단장 천밍런은 쓰핑 방어전의 영웅으로 ‘청천백일 훈장’까지 받았으나 군량을 착복했다고 하여 면직 당했다. 그리고 남만주를 한창 공격하고 있던 52군단장 량카이(梁愷)와 부군단장 류위장(劉玉章)도 면직처분을 당했다. 천청은 군대의 기강을 잡는 한편 성과 국민정부 각 기관의 정비에도 힘을 썼다. 쓸데없이 재정을 축내는 관리들을 쫓아내며 동북의 정치를 쇄신하려 하였다. 과단성 있고 인정사정 가리지 않는 조치는 효과를 발휘하였다. 그는 9월 17일 편지에서 부인에게 이렇게 썼다. “이제 군대를 어느 정도 쇄신하였소. 여러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조금은 귀에 거슬리지 않소. 하지만 싸우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판단은 달랐다. 밀려났다고 생각한 숑스후이는 천청의 성과를 폄하하였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일기인 ‘해상집(海桑集)’에 이렇게 썼다. “천청이 동북에 와서 여러 조치를 하였는데 나는 왜 그러지 못했던가. 권력이 그와 달랐기 때문이다. 내가 재임할 때 군대의 통솔은 이름뿐이었다. 따롄, 선양 시장의 임명과 같은 중요한 인사문제도 나는 사전에 들은 바가 없었다. 이처럼 행영은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천청은 참모총장을 겸하고 있었으니 그런 일을 처리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숑스후이가 보기에 천청의 조치는 권한이 있기에 가능했지만 부하들이 심복한 것도 아니었다.
천청의 강력한 처방은 부패한 군정인사들을 겁먹게 하였지만 과격하다 하여 많은 이들의 불만을 샀다. 특히 천밍런처럼 전공이 큰 장군들까지 가리지 않고 처분하니 수많은 장교들이 불만을 품었다. 언제 자기 머리에도 그런 벌이 떨어질지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소극적으로 보신하기 급급하여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싸움에 임하면 될 수 있는 한 회피하여 천청이 최종 목표로 한 ‘전력의 강화’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였다.
천청의 행동은 보는 이에 따라 자신의 파당을 짓는 것이라는 인상을 가졌다. 그는 선양에 취임할 때 측근인 추시춘(楚溪春)을 대동했으며 대대적으로 인사 개편을 시도했다. 두위밍이 가장 신임하던 정동궈(鄭東國)는 실권에서 물러나 이름뿐인 행원 부주임직을 받았다. 그에게 심복하지 않던 1군단장 쑨리런(孫立人)도 인사 이동을 당했다. 휘하 사단도 마찬가지였다. 1군 휘하의 50사단과 6군의 14사단은 토목계라 부르는 천청 직계 18군 출신들을 임명하였다.
쑨리런이 참모본부로 간 뒤 군단장들도 측근으로 채웠다. 천밍런이나 쑨리런, 정동궈 같은 인물들은 일 년 전 두위밍이 남만주를 석권할 때 동북 민주연군을 밀어붙였던 맹장들이었다. 정동궈는 나중에 천청의 인사를 이렇게 평하였다. “천청은 야심이 커서 기회만 되면 다른 사람들의 부대를 먹어치운다. 경쟁자들을 배척하고 온갖 방법으로 자신의 측근들만 감싼다. 자신의 세력을 키우니 다른 이들이 두려워 하지만 한편으로 그를 미워한다.”
천청의 부패 척결과 조직 개편은 효과를 보기는 하였지만 뿌리 깊은 국민당 내의 모순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국민당의 문제는 몇몇 사람들을 처단하거나 특출한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단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천청은 9월 25일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과거의 부패를 살펴보니 죽여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오.”
부대의 개편과 병력의 확충
군대와 정치의 숙정을 단행하는 한편 천청은 동북 국군의 병력강화도 꾀하였다. 동북 전장의 형세를 바꿔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부임 뒤 동북의 9개 보안사령부와 11개 보안지대 등 지방 수비부대를 신3군, 신5군, 신7군, 신8군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그리고 청년군 207사단을 제6군으로 편성하였다.
또 49군을 동북으로 이동시켜 본래 있었던 6개 군을 포함하여 동북의 총병력은 14개군 55만명에 이르렀다. 두위밍이 재직하던 시절에 48만명이 있었으므로 7만명을 증원한 셈이었다. 부대를 확대한 뒤 천청은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다. 그는 “6개월 안에 동북의 형세를 만회하고 그동안 빼앗긴 땅을 모두 되찾겠다.”고 다짐하였다.
천청은 동북의 국군 주력부대를 진저우, 선양, 쓰핑, 창춘을 중점으로 한 철로 연선에 배치하였다. 베이닝 철로(베이핑-선양간)와 중창철로(하얼빈-만저우리-쑤이분허-따롄)를 확보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하이커우(海口)를 수비하는 한편 관내에서 병력을 증원하면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할 생각이었다. 천청이 채택한 방침은 대도시를 먼저 수비한 뒤 필요에 따라 외부로 출격하는 기동방어 방침이었다. 움직일 기동병력이 부족한 국군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작전이었다. 천청은 국군 병력을 대도시에 집중시키고 각 철도선을 소통시키면 국면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비해 동북 민주연군은 기동력과 작전의 신축성에서 훨씬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동북 민주연군은 야전군 9개 종대 27개 사단, 10개 독립사단, 2개 기병사단과 지방부대를 합하여 총병력이 51만명에 이르렀다. 동북 민주연군은 창춘 따스차오, 선양에서 잉지(永吉) 철로 양쪽과 랴오닝 서부지역에 집결해 있었다. 불과 일년 전 쓰핑에서 패하여 하얼빈까지 밀리고 남만주의 압록강 부근에 손바닥만한 근거지를 가지고 있던 것과 비교하여 상전벽해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동북 민주연군 추계공세로 동북의 주도권을 확립하다
천청이 부임한 지 한 달 남짓 지난 1947년 9월 하순, 린비아오는 ‘추계공세’를 시작하였다. 천청이 전열을 정비를 마치기도 전에 50일에 걸친 대규모 공세를 펼친 것이다. 9월 14일, 동북 민주연군은 진시(錦西: 후루다오葫蘆島의 옛 이름이다.) 서쪽 지역에서 출격하여 추계공세의 서막을 열었다. 하계공세가 끝난 뒤 겨우 두 달 만에 다시 공격에 나선 것이다.
동북 민주연군의 공세는 9월 1일 중공 중앙이 발령한 “해방전쟁 2년차 전략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이 지시에서 해방군의 2년차 작전임무를 명확히 지적하였다. “해방군은 전국적 반격을 실시한다. 주력은 외선작전으로 전쟁을 국민당 통치지역으로 끌고 간다. 외선에서 적을 대거 섬멸하고 일부 주력과 지방부대는 계속 내선작전을 펼쳐 적을 섬멸하여 실지를 회복한다.”
중공 중앙은 이 지시에서 “해방군은 국민당 지역에서 전기를 잘 포착하여 더 많은 승리를 거두라.”고 명령하였다. 두 번째로는 “군중을 쟁취하는 정책을 견결히 집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즉 광범위한 군중이 이익을 얻도록 하여 아군의 편에 서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전기 포착을 잘하라는 말은 싸울 기회를 잘 잡으라는 것이니 구체적인 작전은 현지 지휘관들의 능력에 달린 것이었다.
광범위한 군중의 이익이란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에게 ‘경자유전’ 정책을 펼치라는 뜻이었다. 이에 따라 각 지역의 해방군 지휘관들은 곳곳에서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동북 민주연군 총사령겸 정치위원인 린비아오와 부정치위원 뤄롱환은 추계공세의 작전방침을 수립했다. 먼저 국민당군 병력이 취약한 남부전선에서 공격하고 북쪽의 민주연군 병력으로 남쪽을 지원하게 하였다. 그뒤 기회를 보아 북쪽 전선으로 출격하여 적을 섬멸할 계획이었다.
9월 상순, 진저우(錦州)와 푸신(阜新)지역의 국민당 군대는 러허 동쪽 해방구로 진출하여 진저우-청더 간 철로 개통을 꾀하였다. 그러자 9월 14일, 동북 민주연군 제8, 제9종대가 출격하여 먼저 진저우 서쪽의 양자장즈의 국군 거점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해방군은 국군 3개 사단 1만 5천여명을 섬멸했다.
해방군은 또 대규모 철로 파괴전을 벌여 산하이관과 진저우간의 베이닝루를 차단했다. 10월 1일, 동북 민주연군 주력 7개 종대가 중창루 전구간을 공격했다. 동쪽 전선 부대는 궈자덴(郭家店) 지역에서 국군 116사단을 섬멸한 뒤 시펑(西豊), 이통(伊通), 공주링(公主岭) 등을 점령했다. 서쪽 전선부대는 리수(梨树), 빠멘청(八面城)을 점령한 뒤 파쿠(法庫)를 기습하여 국군 1개 사단을 섬멸했다. 그리고 창우(彰武), 신리툰(新立屯), 헤이산(黑山), 푸신을 점령했다.
그뒤 차오양(朝陽)을 점령하고 이현(義縣) 서쪽에서 국군 1개 사단을 섬멸했다. 남쪽 전선부대도 부하이청(復海城), 다스차오(大石橋)를 점령한 뒤 잉커우(營口)에 접근했다. 북쪽 전선의 해방군은 지린, 창춘 외곽거점을 소탕하고 지창루(吉長路)를 장악했으며 농안(農安), 더후이(德惠)등을 점령했다.
동북 민주연군은 11월 5일 추계공세를 끝냈으며 국군 6만 9천명을 섬멸했다. 동북 민주연군은 도시 15개를 점령하고 농안에서 테링간, 진저우에서 산하이관까지의 철로를 파괴했다. 국민당군은 창춘, 지린, 쓰핑, 선양, 잉커우, 진저우 등 거점과 그 주위 지역으로 압축되었으며 더욱 피동적인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국군은 천청이 생각한 만큼 움직이지 않았다. 정동궈가 회고록에 쓴 대로 본래 만주에 있던 지휘관들은 천청을 경원하고 미워하였다. 특히 천밍런이나 쑨리런 같은 맹장들을 내친 것은 국군 지휘관들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 천청은 군단장 등 고위 지휘관에 자신의 측근을 중용하였지만 기층 간부들은 모두 두위밍 시절의 사람들이었다.
지휘도 졸렬하여 린비아오가 의도한 대로 말려들었다. 린비아오가 지휘하는 동북 민주연군은 천청이 용맹을 날리던 시절의 군벌부대가 아니었다. 린비아오는 국군 가운데 전력이 약한 부대나 고립된 부대를 선제 공격한 뒤 구원 오는 부대를 이동 중에 공격하였다. 철도선을 파괴하여 국군의 이동을 막으니 천청의 부대들은 더욱 피동적인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국군은 더욱 위축되어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증원한 병력은 민주연군의 공격 아래 허무하게 소모되었다. 천청이 구상했던 기동방어는 꿈도 꾸기 어려운 형편이 된 것이다. 철도의 확보나 개통은 더욱 힘들어졌다. 전투가 끝난 뒤 선양 사람들은 이렇게 조소했다고 한다. “천청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선양 남역에서 북역까지는 확보하지 않았나?” 천청은 비로소 린비아오가 끊임없이 국군 병력의 소모를 꾀하고 있으며 동북에서 국군이 우세를 차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동북 민주연군의 동계공세
12월초 동북지역의 기온이 영하 20도 아래로 떨어졌다. 하천이 얼어붙어 짐수레가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동북 민주연군은 두터운 솜옷을 입고 새로 만든 오랍초(1) 신발을 신었다. 땅에는 한자가 넘는 눈이 쌓여 있었지만 린비아오는 출격을 결심했다. 이른바 동계공세를 시작한 것이다. 12월 15일을 전후로 동북 민주연군 2종대와 10종대가 선양 북쪽의 파쿠(法庫)를 포위했다. 7종대는 파쿠 북쪽의 창우(彰武)를 포위했으며 8종대는 창우 남쪽의 신리툰을 포위했다. 그밖의 병력은 주변에 배치하여 선양을 압박했으며 국군의 출격에 따라 증원할 준비를 하였다.
린비아오는 다시 병력 일부로 베이피아오(北票), 헤이산(黑山), 따후산(大虎山), 타이안(台安)을 급습했다. 천청은 이에 대응하여 1948년 1월 1일, 가능한 모든 기동부대를 이동시켜 선양, 테링, 신민(新民)에서 랴오허 서안으로 출병케 하였다. 천청이 동원한 병력은 모두 10개 사단이었다. 천청은 출격한 부대를 100킬로 정면에서 서북 방향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동북 민주연군 주력과 제대로 한판 결전을 하고자 한 것이다. 천청의 이 결정은 해방군에게 운동전의 좋은 기회가 되었다. 1월 3일, 출병한 국군 좌익부대는 천린다(陳林達)의 신5군 2개 사단이었다. 이 부대는 파쿠의 포위를 풀고자 출동한 것이었다. 신5군이 신민 북쪽의 공주툰(公主屯)에 이르렀을 때 동북 민주연군 주력 4개 종대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천청은 이 소식을 듣고 우익인 제 9병단 사령관인 랴오야오샹에게 신3군을 이끌고 신6군을 구원하여 포위를 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랴오야오샹의 부대는 도중에 동북 민주연군의 강력한 저지에 막혔다. 구원군은 공주툰 10킬로 지점까지 도달했지만 한 발자욱도 전진할 수 없었다. 1월 7일, 신5군 2만여명의 병력이 전멸하고 군단장인 천린다는 포로로 잡혔다.
천청은 기울어가는 동북의 형세를 바로 잡겠다는 심정으로 부임하였다. 지난 5개월 동안 그는 부패를 일소하고자 하였으며 병력을 확대해 왔다. 그러나 형세를 만회하기는커녕 잇따라 패배하여 크게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긴장된 나날과 상심 속에서 천청의 심신은 날로 피폐해졌다. 천청은 본래 위출혈에 시달려 왔다. 천청은 나중에 “나는 원래 위가 고질이다. 1943년부터 위병을 앓아왔는데 선양에 온 뒤로 크게 악화되었다. 신5군이 전멸 당하자 위병이 크게 발작하여 병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고 술회하였다.
신5군이 전멸 당했다는 소식이 동북행원과 난징에 전해졌다. 장제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다. 1월 11일, 장제스는 국방부 작전차장 류페이와 육군 부총사령 판한지에(範漢杰)를 대동하고 비행기로 선양에 왔다. 장제스는 동북행원에서 회의를 주재하며 공주툰 패배를 검토하였다. 그때 장제스는 천청이 병든 몸으로 겨우 버티며 정신이 혼미한 모습을 보았다.
장제스는 그날 일기에 “비감함이 두 배는 더한 것 같다.”고 썼다. 하지만 싸움의 패배에 누군가 책임을 져야 했다. 천청은 장제스에게 9병단 사령인 랴오야오샹과 신6군단장 리타오(李濤)가 제때 구원하지 못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랴오야오샹은 천청이 부임하여 자기 사람을 심는 것을 보고 불만을 표시한 일이 있었다. 이제 천청이 자신을 속죄양으로 삼으려 하자 분노를 참을 길이 없었다. 그는 장제스에게 “신5군을 구원하라는 지시를 받은 일이 없으며 책임을 지기 어렵다.”고 호소하였다. 천청은 참모인 뤄쭤잉(羅卓英)을 시켜 전화로 명령했다고 주장하여 두 사람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장제스는 고급 장교들이 서로 책임을 미루는 모습을 보고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청과 랴오야오샹은 장제스의 직계 부하들이었다. 어쨌든 천청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지 않는가. 그는 일기에 “천청은 지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군단장 천린다가 거점을 지키지 못한 잘못이 있고 랴오야오샹이 힘써 구원하지 못한 잘못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랴오야오샹이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썼다. 장제스가 그렇게 생각하니 천청도 부득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모든 책임이 있으며 공주툰 전투 지도에 문제가 있었다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일어나 장제스에게 “자신은 선양과 존망을 함께 하겠다. 만약 선양을 지키지 못하면 권총으로 자결하겠다”고 맹세하였다.
회의가 끝난 뒤 장제스는 병력 이동과 기구 개편 등 여러 결정을 하였다. 54군의 2개 사단을 산둥으로부터 선양으로 이동시키고 ‘동북 초비사령부’를 설립하였다. 진저우에 기열료(허베이, 러허, 랴오닝성등 관할) 작전기구를 설립하여 동북 및 화북과 호응하게 하였다. 그리고 1948년 1월 17일에는 육군 부총사령관인 웨이리황(衞立煌)을 동북 행원 부주임 겸 동북 초비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웨이리황은 항일명장으로 장제스의 ‘5호 상장’(2)가운데 호장(虎將)으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정동궈와 판한지에 등 4명을 초비 부총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판한지에는 기열료 변구 사령관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 인사는 군사작전에서 천청을 사실상 배제한 것이었다.
장제스는 난징으로 돌아가서 동북의 전황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신리툰에서 민주연군에 포위당했던 49군 26사단이 맹렬하게 공격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49군은 1개월 동안 포위를 당해 탄약과 식량이 다 떨어진데다 동상환자가 속출하여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1월 26일 사단장 펑공잉(彭鞏英)이 세 방향으로 포위망을 돌파하고자 했으나 500여명만 탈출하고 나머지는 해방군에 포착되어 모두 투항하였다. 천청은 더욱 좌불안석이 되었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태도를 고쳐 동북의 군정 인사들에게 친근하게 대하였다. 그리고 정동궈를 대동하여 난징으로 가서 장제스를 만났다. 그는 장제스에게 “동북의 지휘관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아 패배하였다.”고 토로하였다. 그는 “동북의 지휘관들이 부대이동에 제대로 따르지 않고 자신의 보신에만 급급하다. 모두 부패하고 타락하였다.”고 호소하였다. 그는 “정 부총사령에게 확인하시라.”고 하였으나 정동궈는 난감한 표정으로 묵묵할 뿐이었다.
장제스는 천청의 말을 듣더니 “안심하고 병부터 살펴라. 다른 일에 관여할 필요 없다.”고 대답하였다. 천청은 부득이 장제스에게 사의를 표하는 수밖에 없었다. 1948년 2월 5일, 천청은 아무 말 없이 선양을 떠났다. 그가 동북에서 군정을 주재한 것은 겨우 6개월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국민당 내 일각에서 “천청을 죽여라. 천하에 사죄하라.”는 소란이 일었다.
천청은 상하이 육군병원에 입원하였으며 육군 참모총장직도 사임하였다. 천청은 그 뒤 1948년 10월, 타이완 경비총사령으로 부임하여 장제스의 후일을 대비하였다. 장제스가 타이완에서 총통으로 있을 때 부총통으로 장을 보좌하였다. 천청은 타이완의 토지개혁 등을 주도하며 자신의 소신을 실천하였다. 그리고 소작료 상한을 37.7퍼센트로 제한하는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지방자치를 계획하는 등 타이완 현대사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동북 민주연군은 동계공세 중 첫 단계 작전을 마치게 되었다. 동계공세에서 해방군은 국군 5만 8천명을 섬멸했으며 베이닝 철로를 차단하여 국군을 선양으로 압축시켰다. 이때,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떨어져 민주연군도 작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동상 환자가 속출했으며 기관총이나 소총에 얼음이 얼어 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동계공세 이후 보름 동안 해방군 동상 환자가 8천여명에 달한다.”고 쓰여 있다. 신5군을 섬멸하며 동북 민주연군도 1만명이 사상하여 부득이 전선에서 후퇴하게 되었다. 동북 민주연군은 추계 및 동계 공세를 통해 동북의 주도권을 완전히 쥐게 되었으며 국군은 선양, 진저우,창춘 등 몇 개 거점에 몰렸으며 철로선의 차단으로 보급과 병력 보충에도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각주>
1. 중국 둥베이 지방에 나는 방동사니과의 다년생 초본의 일종. 방한용 신 속에 깔기도 하고 물건을 매는 데 사용하기도 함
2, 5호상장(五虎上將)이란 장제스가 중용한 상장급 지휘관으로 간장(干將)인 천청、충장(忠將) 구쭈통(顾祝同), 복장(福將) 류즈(劉峙) 비장(飛將) 장딩원(將鼎文), 호장(虎將)인 웨이리황을 가리킨다.
이영민/철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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