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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먼저 '스스로sāmaṁ' 깨달으셨다는 부분을 살펴보자.
빠쩨까붓다Paccekabuddha, 벽지불은 스승의 도움 없이 스스로 사성제를 깨달은 분이시다.
그러나 일체지를 갖추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삼마삼붓다와 구별된다.
사와까붓다Sāvakabuddha, 부처님의 제자인 성문불들은 사성제를 올바르게 깨달으셨다.
그러나 스스로 안 것이 아니고, 일체지도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삼마삼붓다와 구별된다.
3.
다음은 일체지에 대해 알아보자.
일체지의 대상이 되는 '알아야 할 법'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²⁴⁾'알아야 할 법ñeyyadhamma'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① 형성saṅkhara은 조건 때문에 생겨나는 구체적 물질 18, 마음 1, 마음부수 52이다.
② 변화vikāra는 구체적 물질의 특별한 모습으로 몸 암시, 말 암시, 가벼움, 부드러움, 적합함이라는 추상적 물질 다섯 가지이다.
③ 특성lakkhaṇa은 물질·정신법의 무상, 고, 무아의 특성과 생성, 지속, 머묾, 소멸이라는 형성된 특성들이다.
④ 열반nibbāna은 모든 번뇌가 다한, 형성되지 않고 조건지워지지 않은 성품이다.
⑤ 개념paññatti은 여러 가지 명칭개념, 여러 가지 물질·정신 상속개념, 여러 가지 형체개념, 방향개념, 시간개념, 장소개념, 개인이나 중생개념 등으로 사람이나 천신이나 범천 중생들이 제정해 놓은 여러 가지 개념들이다. 허공요소라는 추상적 물질도 그 개념에 포함시켜 취해야 한다...
- 비구 일창 담마간다 지음, 『가르침을 배우다』 p.45, 도서출판 불방일(2021)
요약하자면 '알아야 할 법', 네이야담마는 빠라맛타와 빤냣띠를 포괄하는 일체의 대상들임을 알 수 있다.
Ñeyya-dhamma에서 ñeyya는 어근 ñā(알다, to know)와 -eyya(~해야 할)로 구성되어 '알아야 할(what should be known)'로 번역된다.
'알아야 할 법'이라고 번역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모르는 법도 있을 수 있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부처님이 알고자 마음기울이실 때 알지 못하시는 법은 없다.
모든 법들을sabbadhammānaṃ 아시기ñā 때문에 일체지Sabbaññutā-ñāṇa라고 말하는 것이다.
'알 수 있는 모든 법'과 '일체지자이신 부처님께서 아는 범위'는 같다. 알 수 있는, 알 만한 어떠한 법이라도 부처님께서는 모두 아신다.
단, 부처님께서 알고자 마음 기울이셨을 때 아신다. 마음 기울이기도 전에 미리 알고 계신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지자이시기에 알고자 했을 때 알 수 없는 법은 없다.
혹은 '알아야 할 법'을 '부처님이시라면 스스로 알아야 하는 법'이라거나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고, 부처님만이 가르칠 수 있는 법'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지 않은 일반인은 마음과 마음부수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일체지로만 마음과 마음부수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밀린다빤하>에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존자의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어려운 일을 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는 하나의 대상에 대해 정신법들이 일어날 때 '이것은 접촉, 이것은 느낌, 이것은 인식, 이것은 마음'으로 구분해서 설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십시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손으로 바닷물을 떠서 혀로 맛보고는 '이것은 야무나 강의 물이다. 이것은 아찌라와띠 강의 물이다. 이것은 마히 강의 물이다. 이것은 사라부 강의 물이다'라고 구분해서 아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정신법들을 각각의 법들로 구분해서 아는 것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게 매우 어려운 일을 부처님께서 하셨습니다."(Mil.93)
- 『아비담마 강설 2』 p.26, 우 소다나 사야도 강설, 담마간다 스님 편역 中
4.
다음은 사성제Cattāri Ariya-saccāni를 어떻게 바르게 깨달으셨는지 살펴보자.
삼마삼붓다께서는
그분은 모든 법을 바르게 그 스스로 깨달으셨다. 완전히 알아야 할 법들(즉, 사성제)을 완전히 알아야 한다고 깨달으셨고, 철저히 알아야 할 법들(즉, 고제)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고 깨달으셨고, 버려야 할 법들(즉, 집제)을 버려야 한다고 깨달으셨고, 실현해야 할 법들(즉, 멸제=열반)을 실현해야 한다고 깨달으셨고, 닦아야 할 법들(즉, 도제)을 닦아야 한다고 깨달으셨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완전히 알아야 할 것을 완전히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버렸기 때문에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buddha)다.(Sn.558)"
- 대림 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1권』 p.487, 초기불전연구원(2004)
① 둑카삿짜(고제)는 빠린녜야 담마pariññeyya dhamma, '철저히 알아야 하는 법'이다.
알아야 하는 법이 고통입니다. 고통을 붓다께서 확실하게 아셨습니다. 고통을 안다는 것이 고성제를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성제를 모르기 때문에 고성제를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고성제를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면 우리는 고성제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고성제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고통인 줄 모르고 행복이라고 착각하면 고통인 것을 자꾸 가지려고 하면서 애착하고 집착합니다. 그것이 어리석음이고 사견이고 욕심입니다. 알기 때문입니까, 모르기 때문입니까?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무지·무명입니다.
붓다께서는 어리석음이 없기 때문에 고통을 고통으로 압니다. 그것이 고성제를 아는 지혜입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아니까 고통을 버립니다... 우리 중생들은 고통을 행복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윤회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천신도, 범천도 고통을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착각하기 때문에 고통뿐인 삶을 계속 거머쥐고 욕심냅니다. 그러면 계속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을 모르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못 벗어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고통을 아는 것입니다. 내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질문조차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정답을 말하겠습니까? ...고통을 모르면 절대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간들 중에서 공부 잘하는 학자나 떵떵거리는 권세가나 재벌도 고통을 모르면 고통 속에서 사는 범부일 뿐입니다. 신이나 범천도 고통을 모르면 고통 속에서 사는 중생입니다. 그래서 고성제가 붓다를 아주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으로 만드는 이유입니다. 고성제를 아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삼마삼붓도(올바르게 스스로 깨달은 붓다)라고 말할 때 무엇을 깨달았는지 이해가 되나요? 둑카삿짜(고성제)를 깨달은 것입니다. '빠린녜에 담메 빠린녜야또'라고. 할 때 고성제를 남김없이 확실하게 안다는 것입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p.325~327, (사)법승 담마야나(2017)
② 사무다야삿짜(집제)는 빠하땁바 담마pahātabba dhamma, '버려야 하는 법'이다.
우리는 버려야 하는 것을 아직 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윤회에서 고통스럽게 끊임없이 빙빙 돌고 있습니다... 그러면 버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고통을 고통으로 모르고 있는 어리석음과, 고통을 행복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견과, 고통을 행복인 줄 알고 욕심 부리고 있는 갈애입니다. 갈애를 비롯한 모든 낄레사(번뇌)를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리어 욕심을 키우고 있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매일 밤낮으로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버려야 하는 욕심을 열심히 모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붓다는 버려야 하는 것을 버렸습니다. 그렇게 버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통을 고통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음이 없어 고통을 고통으로 알기 때문에 욕심을 내지 않고 모든 번뇌를 다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번뇌를 다 버렸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집성제를 버렸다는 말입니다. 집성제는 갈애입니다... 즉 알아야 하는 고성제를 다 알기 때문에 붓다이고, 버려야 하는 집성제를 다 버렸기 때문에 붓다입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328, (사)법승 담마야나(2017)
③ 니로다삿짜(멸제)는 삿치까땁바 담마sacchikātabba dhamma, '실현해야 하는 법'이다.
다른 사람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 같이 열반을 보고 열반에 도달하였습니다. 멸성제(닙바나, 열반)는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멸성제를 이론적으로 알고 직접 도달하지 못한 사람을 붓다라고 말한다면 그 붓다는 대단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이론적으로만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붓다는 그렇지 않고 체험해서 본인이 진짜 깨달은 것만 말씀하십니다. 붓다는 닙바나(열반)를 언제든지 즐길 수 있습니다. 붓다는 언제든지 과 선정으로 들어가거나 멸진정으로 들어가서 바로 열반을 누릴 수 있는 분이십니다... 멸성제를 성취했다면 고성제(고통)의 소멸과 집성제(고통의 원인)의 소멸을 알고 있는 분이란 말입니다. 대단하지요?
우리가 붓다를 대단하다고 하는 이유는 본인이 직접 모든 고통을 소멸시키는 길로 가셨고 또 모든 중생들도 고통의 소멸로 갈 수 있게끔 가르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스스로 깨달아 알고,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그 길로 잘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만큼 고맙고 귀한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p.329,~330 (사)법승 담마야나(2017)
8. (4) 왜 증득하는가?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머물기(diṭṭha-dhamma-sukha-vihāra) 위해서다. 마치 왕이 왕의 행복을 누리고 천신이 천상의 행복을 누리듯이 성자들도 '성스럽고 출세간적인 행복을 체험하리라'고 기간을 정하고는 언제든지 원하는 순간에 과의 증득에 도달한다.
- 대림 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3권』 pp.403~404, 초기불전연구원(2004)
불환자와 아라한은 도닦음에 의해서 알음알이의 흐름과 그 마음부수들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키는 수행의 증득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런 경지를 nirodha-samāpatti라 하고 중국에서는 '멸진정'으로 번역하여 우리에게도 알려진 용어이다.
여기서 '멸진'은 nirodha를 옮긴 것인데 이것은 ni(아래로)+√rudh(to obstruct)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로서 '아래로 내려 누름'이라는 문자적인 뜻 그대로 '소멸, 억압, 지멸' 등의 뜻으로 쓰인다. 경에서는 문맥에 따라서 '일어남'을 뜻하는 samudaya의 반대어로 '없어짐, 사라짐'의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열반의 동의어로도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anupubba-nirodha로 쓰여서 나타나는데 구차제멸로 4선-4처-상수멸을 뜻하기도 한다.
멸진정의 '정'은 samāpatti를 옮긴 것이다... saṁ(함께)+ā(이리로)+√pad(to go)에서 파생된 여성명사로 문자적으로는 '함께 받아들임'이며 '증득, 얻음, 획득'을 뜻한다.... samāpatti는 위 구차제멸로 표현한 4선 · 4처 · 상수멸의 경지 가운데 하나를 증득한 것을 뜻하는 전문용어이다...
'멸진정'으로 옮기는 nirodha-samāpatti는 초기경에 많이 나타나는 상수멸(saññā-vedayita-nirodha)과 완전한 동의어이다... 역자들은 본서에서 samāpatti가 단독으로 쓰이면 '증득'으로 옮겼고 nirodha-samāpatti는 '멸진정'으로 옮겼다.
이 경지는 몸은 살아있지만 인식과 느낌으로 대표되는 모든 마음작용, 즉 마음과 마음부수들이 멸해버린 상태이다.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들에 의하면 이 경지를 얻으려면 수행자는 모든 선의 경지, 즉 초선에서 비상비비상처까지 차례대로 들었다가 나와서 이런 경지에 존재하는 모든 요소들이 모두 무상이요 괴로움이요 무아라고 주시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소유처에 도달하였다가 그 경지로부터 나와서 수행자는 준비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점검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멸진정에 드는 것이다. 그러면 네 번째의 무색계선(비상비비상처)에서 두 개의 마음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나서 알음알이의 흐름은 끊어져 버린다.
- 대림 스님 · 각묵 스님 옮김,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권 pp.438~439, 초기불전연구원(2017)
23. "도반이시여, 수명이라는 것은 느낌과 동일합니까, 아니면 수명과 느낌은 서로 다른 것입니까?"
"도반이여, 그 수명은 느낌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수명이 느낌과 같은 것이라면 비구가 상수멸을 증득했을 때 그것에서 출정하는 것이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도반이여, 수명과 느낌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비구가 상수멸을 증득했을 때 그것에서 출정하는 것이 분명합니다."²⁸¹⁾
²⁸¹⁾ '상수멸(saññā-vedayita-nirodha, 인식과 느낌의 소멸)'은 불환자나 아라한만이 들 수 있는 증득으로 여기서는 모든 심소법들이 다 가라앉는다. 그러나 온기(usma)가 남아있기 때문에 죽은 자와 다르다. 그러므로 만약 수명(āyu)이 느낌과 동일한 것이라면 상수멸에서 수명도 가라앉아버려 다시 그 증득에서 출정할 수가 없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수명과 느낌은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상수멸은 멸진정(nirodha-samāpatti)과 동의어로 쓰인다.
- 대림 스님 옮김, 『맛지마 니까야』 제2권 p.305, 초기불전연구원(2012)
29. (4) 어디서 증득하는가? 다섯 무더기를 가진 존재에서 증득한다. 왜 그런가? 차제증득(anupubba-samāpatti)²⁶⁶⁾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무더기를 가진 존재에서는 초선 등의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증득할 수가 없다.²⁶⁷⁾ 어떤 자는 토대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²⁶⁸⁾
²⁶⁶⁾ '차제증득'으로 직역한 'anupubba-samāpatti'는 우리에게 구차제멸로 알려져 있다. 즉 색계의 네 가지 선과 무색계 4가지 선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이 멸진정 혹은 상수멸에 도달하는 과정을 차제증득이라 하고 「합송경」 (...D33) 등에서는 구차제멸(navaanupubbanirodhā)이라는 술어로 정착되었다.
²⁶⁷⁾ "네 무더기를 가진 존재(무색계 존재)에서도 무색계선으로써 순서대로 증득하지 않는가? 물론 순서대로 증득한다. 그러나 그것을 차제증득(anupubba-samāpatti)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차제증득의 일부분일 뿐이다. 오직 여덟 가지 증득으로만 차제증득에 든다고 말한다. 무색계선은 색계선인 초선 등이 없기 때문이다.(Pm.871)"
²⁶⁸⁾ "즉 심장토대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몸이라는 토대가 없다는 뜻이다. 만약 어떤 이가 무색계에서 멸진정에 든다면 마음과 마음부수법들도 없고, 또한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를 한정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무여열반에 든 것처럼 되어버리고 유여열반에 들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필요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색계에서는 멸진정에 들 수 없다.(Pm.871)"
30. (5) 왜 증득하는가? 상카라들이 일어나고 무너짐에 대해 역겨워하여 '지금 여기서 마음 없는 자(acittaka)가 되어 소멸인 열반에 이르러 행복하게 지내리라'고 생각하면서 증득한다.
31. (6) 어떻게 증득하는가? 미리 해야 할 일을 다 한 자가 사마타와 위빳사나로 정진을 하여 비상비비상처[의 마음을] 소멸하게 함으로써 그것에 도달한다. 오직 사마타로만 정진한 자는 비상비비상처의 증득에만 도달하여 머문다. 오직 위빳사나로만 정진한 자는 과의 증득에만 도달하여 머문다. 그러나 두 가지로 정진하고 미리 해야 할 일을 다 한 뒤 비상비비상처를 소멸한 자가 이것을 증득한다.
- 대림 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3권』 pp.413~414, 초기불전연구원(2004)
마음과 마음부수들의 흐름은 멸진정에 들어있는 기간 동안 완전히 끊어져버린다... 멸진정에 들면 마음과 마음부수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청정도론 XXIII]: "43. 이제 그가 이와 같이 무소유처에 들었다가 출정하여 이런 미리 해야 할 일을 하고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다. 그때 한 번 혹은 두 번의 심찰나가 지난 뒤 마음 없는 자(acittaka)가 된다. 그는 소멸을 체득한다. 왜 두 번의 마음들 뒤에 그에게 마음이 생기지 않는가? 소멸을 향한 노력 때문이다. 이 비구가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법들을 쌍으로 묶어서 여덟가지 증득에 오른 것은 차제멸(anupubba-nirodha)을 향한 노력 때문이지 비상비비상처를 얻기 위한 노력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소멸을 향한 노력 때문에 두 번의 마음 다음에는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²⁷¹⁾
²⁷¹⁾ 즉, 멸진정에 들려는 그 이유 때문에 노력하여 8가지 증득에 들었으므로 그런 소멸에 들려는 노력의 힘 때문에 마음이 완전히 소멸된 멸진정에 들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보듯이 『청정도론』 은 멸진정을 "금생의 열반이라 이름하는 것(diṭṭhe va dhamme nibbānam iti)"으로 표현하고 있다. 멸진정은 아라한의 사후에 체득되는 반열반(parinibbāna), 즉 무여열반(anupādisesa-nibbāna)의 경지를 금생에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경지이기 때문에 초기불전의 여러 곳에서 상수멸(saññā-vedayita-nirodha, 인식과 느낌의 소멸)로 강조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청정도론 XXIII]: ..."50. 출정한 자의 마음은 어느 곳으로 기우는가? 열반으로 기운다... 상수멸의 증득에서 나온 비구의 마음은 멀리 여읨(viveka)²²⁵⁾으로 향하고, 멀리 여읨으로 기울고, 멀리 여읨으로 기댑니다."...라고."
²²⁵⁾ 주석서는 이 멀리 여읨(viveka)을 열반이라고 설명한다...
- 대림 스님 · 각묵 스님 옮김,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2권 pp.387~391, 초기불전연구원(2017)
④ 막가삿짜(도제)는 바웨땁바 담마bhāvetabba dhamma, '닦아야 하는 법'이다.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사실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알아야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붓다께서 끊임없이 수행해 왔습니다. 한 생만이 아닙니다... 무수한 겁을 지나는 동안 꾸준히 수행을 해 오셨습니다. 붓다께서는 그렇게 수행하셔서 마지막 생에 싯닷타 태자로 태어나서 부처로 깨달았습니다. 붓다께서 이 법을 알기 위해서 얼마나 고군분투 하셨는지를 아셔야 합니다... 혼자 깨닫는 것 보다는 붓다로 크게 깨달아서 모든 중생들에게 회향하고 싶다고, 모든 중생들을 돕고 싶다고, 깨달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 깨달을 수 있는 길을 가르치고 싶다고 원을 세우고 붓다께서 고군분투하신 세월이 무수한 겁이 네 번이 지난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고 하늘에서 누가 던져 주는 것이 아니고 누가 창조해 준 것이 아니고, 붓다께서 직접 배우고 실천했던 것입니다... 뭔가 하나를 잘 하려면 그것을 반복해서 많이 해야 합니다. 시간적으로도 엄청나게 많이 투자하고, 마음의 행동과 입의 행동과 몸의 행동으로도 엄청나게 반복해서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얼마나 수행했습니까? ...우리는 붓다에 비하면 아주 조금만 한 것인데, 왜 안 되느냐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붓다께서는 무수한 겁을 지나면서 '바웨땁베담메 바위땁바또', 해야 하는 도성제(팔정도)를 끊임없이 실천 수행했습니다. 팔정도를 끊임없이 수행해 왔기 때문에 고통을 고통으로 알고, 고통이 갈애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알고 갈애를 버리니 저절로 닙바나(열반)에 도달하였습니다. 고통과 고통의 원인을 소멸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이 도성제(팔정도)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도성제를 끊임없이 수행해야 고성제를 알고 집성제를 버리면서 멸성제에 도착한다."
붓다가 깨달은 것이 사성제이고 우리도 수행하여 깨달아야 하는 것이 똑같이 사성제입니다. 매순간 우리가 보고 있는 고통이 바로 몸과 마음입니다. 이 몸과 마음이 오온이고 고성제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고통을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수행입니다. 끝없이 생로병사로 윤회의 굴레를 빙빙 돌고 있는 고성제라는 몸과 마음을 계속 관찰하는 것이 도성제입니다. 도성제 때문에 번뇌가 사라지고 어리석음이 사라지기 때문에 고를 고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관찰하는 순간에 어리석음이 사라지기 때문에 고에 대한 사견이 없어집니다. 고통을 행복이라고 착각하지 않습니다. 고를 고로 알고 고를 행복이라고 착각하지 않을 때 집성제를 버리게 됩니다. 고를 아는 것은 도성제를 수행하기 때문이고 집을 버리는 것도 도성제를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한순간 한순간 관찰할 때마다 고를 알고 집을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간적인 욕심의 소멸이 있게 됩니다. 그것이 따당가니로다(찰나소멸)입니다. 십이연기로 볼 때는 어리석음(아윗자)이 소멸하면, 행(상카라)이 소멸하면, 식(윈냐나)이 소멸하면, 명색(나마루빠)이 소멸하면, 촉(팟사)이 소멸하면, 수(웨다나)가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되면, 마침내 생이 소멸한다는 말입니다. 생이 소멸되는 것이 바로 열반입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순간 십이연기를 역방향으로 돌면서 찰나소멸을 이루게 하는 것이 바로 도성제입니다. 붓다께서 올바르게 특별하게 안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빈녜에 담메 아빈녜야또 붓도'에서 확실하고 특별하게 알아야 하는 법이 사성제입니다. 사성제를 특별하게 알고 나서 붓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혼자만 깨닫고 혼자만 행복하다면 전혀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붓다께서 그런 진리를 발견하여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붓다께 절하고 붓다를 따르고 붓다를 모시는 것입니다.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우리는 붓다가 너무 감사하여 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붓다의 은혜를 아무리 열심히 갚아도 모자라기 때문에 불상을 만들면서까지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붓다는 이 세상에서 모든 중생들에게 제일 은혜로운 분입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p.329~330, (사)법승 담마야나(2017)
이렇게 알아야 하고, 버려야 하고, 실현해야 하고, 반복해서 닦아야 하는 사성제를 삼마삼붓도께서는 어떻게 깨달으셨을까?
붓다께서는 ① 사성제의 구절을 ② 모든 법들에 적용시켜 ③ 개별 법들 각각에서 사성제를 드러내시면서 스스로 사성제를 완벽하게 깨달으셨다.
27. 더욱이 '눈은 괴로움의 진리이고, 그것의 근본 원인으로 그것을 생기게 하는 과거의 갈애는 일어남의 진리이고, 이 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소멸의 진리이고, 소멸을 잘 아는 도닦음이 도의 진리다'라고 이와 같이 [눈과 눈의 일어남 등의] 구절을 낱낱이 드러내면서 모든 법을 바르게 그 스스로 깨달으셨다. 이 방법은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마노에도 적용된다.
28. 이와 같은 방법으로 [위 구문을 다음의 법수들에도] 적용시켜야 한다.
형상 등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
눈의 알음알이 등 여섯 가지 알음알이의 무리
눈의 감각접촉 등 여섯 가지 감각접촉
눈의 감각접촉 등에서 생긴 여섯 가지 느낌
형상의 인식 등 여섯 가지 인식
형상에 대한 의도 등 여섯 가지 의도
형상에 대한 갈애 등 여섯 가지 갈애의 무리
형상에 대해 일으킨 생각 등 여섯 가지 일으킨 생각
형상에 대한 지속적인 고찰 등 여섯 가지 지속적인 고찰
물질의 무더기 등 다섯 가지 무더기
열 가지 까시나
열 가지 계속해서 생각함
부풀은 것의 인식 등 열 가지 인식
머리카락 등 서른두 가지 형태
열두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
열여덟 가지 요소
욕계의 존재 등 아홉 가지 존재
초선 등 네 가지 선
자애를 닦음 등 무량함
네 가지 무색의 증득
역관으로 늙음 · 죽음으로부터 시작하고 순관으로 무명으로부터 시작하는 연기의 구성요소들.
29. 이제 이것이 [연기의] 한 구절을 결합한 것이다. 늙음 · 죽음은 괴로움의 진리이고, 태어남은 일어남의 진리이고, 이 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소멸의 진리이고, 소멸을 잘 아는 도닦음이 도의 진리이다. 이와 같이 [사제의] 구절(필자 주 - 사성제의 구절)을 낱낱이 들어 모든 법들을 바르게 그 스스로 깨달았고 적절하게 깨달았고 원만하게 깨달으셨다. 그래서 설하였다. '바르게 그 스스로 모든 법들을 깨달았기 때문에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라 한다'라고.
- 대림 스님 옮김, 『청정도론 제1권』 pp.487~489, 초기불전연구원(2004)
붓다께서는 어떻게 사성제를 깨달았습니까?
Cakkuṃ dukkhasaccaṃ
눈이 고성제이다.
...눈이 고통이라고 어떻게 알아요? 붓다도 우리처럼 위빳사나 수행해서 알게 됩니다. 매순간 볼 때마다 '봄, 봄..'이라고 관찰하고, ...볼 때마다 사띠(sati)하는 것입니다. 사띠는 잊지 않음, 기억하고 있음, 놓치지 않음, 주의깊음, 조심스러움, 깨어있음 입니다. 볼 때마다 눈을 관찰하니까 눈의 실재를 알게 됩니다. 눈을 관찰하니 '아! 이 눈이 있음이 고통스럽구나. 눈의 물질이 계속 생기고 사라지고 생기고 사라지고 하는구나. 눈으로 보면서 번뇌가 일어나는구나.'라고 알게 됩니다. 또 눈이 하나 생겨서 계속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눈이란 눈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눈알 안에 형상을 잡아낼 수 있는 눈의 감성물질(맑은 물질)을 말합니다. 눈의 감성물질이 계속 생기고 사라지고 있는 것을 지혜의 눈으로 봅니다.
눈의 감성물질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되나요? 형상을 보게 됩니다. 형상을 보기 때문에 어떻게 되나요? 보고 즐거운 느낌이 나면 욕심이 생기고, 괴로운 느낌이 나면 화가 납니다. 또 덤덤한 느낌이 나면 어리석음이 생깁니다... 눈이 존재하는 자체가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짝쿵 둑카삿짜(눈이 고통이다)라고 압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고통임을 아니까 눈이 생기기를 바라는 욕심이 사라지고 더 이상 눈을 가지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눈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는 태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태어나고자 하는 생의 욕심이 없어지고, 욕심이 없어지니까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되고 싶은 것이 많으면 고통이 많아집니다. 되고 싶은 것을 줄이면 고통이 줄어듭니다. 되고 싶은 것이 전혀 없으면 고통이 아예 없습니다. 이렇게 갈애가 없으면 태어남이 없고 태어남이 없으면 늙음도 병듦도 죽음도 없어 고통이 없습니다. 조금의 고통도 없는 것이 닙바나(열반)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갈애가 집성제이고, 현재 있는 눈이 고성제입니다. 현재의 눈을 생기게끔 한 과거의 원인이 갈애이지만 갈애 속에 어리석음도 있습니다. 어리석음이 있다면 취착이 있습니다. 거기에 모든 번뇌가 들어갑니다. 그래서 전생에 있었던 갈애를 비롯한 모든 번뇌가 이번 생에 사람으로 태어날 업을 만든 집성제입니다. 그 집성제로 인해서 고성제인 눈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지금 눈을 관찰하는 순간에 고성제와 집성제가 같이 있는 것입니다.
Ubhinnaṃ appavatti nirodhasaccaṃ
두 가지(고성제, 집성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 멸성제 (필자 주 - ubha: both, pavatti: existed)
...붓다께서 어떻게 깨달으셨는지 이해가 되나요? 눈을 관찰하면서 눈이 고성제임을 알았고, 눈을 생기게 하는 이유가 전에 있었던 번뇌인 집성제임을 알았고, 이 두 가지가 소멸하는 것이 멸성제이고, 멸성제인 소멸로 갈 수 있는 길이 도성제라고, 붓다께서 실제 눈으로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들으면서 깨달았습니다. 들으면서 어떻게 알았습니까? 귀가 고성제이다... 이렇게 매순간 6문에서 사성제를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앎을 더 확대시키면 눈과 형상과 안식이 고성제입니다. 그리고 그때 생긴 촉(팟사, 감각접촉)과 느낀 수(웨다나, 느낌)가 고성제입니다. 수(느낌)에서 갈애를 일으키면 갈애가 새로운 집성제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수행하고 있으면 매순간 사성제를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볼 때는 보는 것을 관찰하면 수(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취착이 없기 때문에 번뇌가 없고 번뇌가 없으면 업이 생기지 않아 과보도 없습니다. 즉 미래의 태어남이 없습니다. 이것을 찰나소멸이라고 하지요. 과보가 생기지 않게 업장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뿐입니다. 현재의 업장소멸과 위빳사나 수행은 이렇게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의 힘이 100% 차서 깨달음의 도가 될 때 과거의 업장까지 소멸시킵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이야말로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선업이지만 업장이 쌓여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위빳사나 수행은 업을 쌓지 않게 하고 오히려 위빳사나 지혜가 힘이 꽉 차서 도 지혜가 될 때는 과거의 업장까지 소멸시킵니다. 그래서 수다원은 사악처를 윤회하지 않고, 사다함은 욕계 선처를 딱 한 번만 윤회하고, 아나함은 범천으로만 윤회하고, 아라한은 윤회를 종식시킵니다.
...이런 식으로 귀 · 코 · 혀 · 몸 · 마음에서도 사성제를 깨달았다.
...이와 같이 형상 등 여섯 가지 대상에서도 사성제를 깨달았다.
...안식 등 여섯 가지 식에서도 사성제를 깨달았다.
...안촉 등 여섯 가지 촉에서도 사성제를 깨달았다.
...안촉수 등 여섯 가지 수(느낌)에서도 사성제를 깨달았다.
...형상 등 여섯 가지 대상들에 대한 갈애에서 사성제를 깨달았다.
느낌에 따라 갈애가 생깁니다. 느낌에서 즐거운 느낌이 오면 욕심이 생기고, 괴로운 느낌이 오면 성냄이 생기고, 덤덤한 느낌이 오면 어리석음이라는 번뇌들이 생깁니다. 이런 식으로 형상 · 소리 · 냄새 · 맛 · 감촉 · 법들에서 마음이 딴하(갈애)를 일으키면 그 갈애에 대해서도 붓다께서 사성제를 깨달았습니다.
...형상 등 여섯 가지 대상에서 일으키는 생각이 있으면 거기에서 사성제를 깨달았다.
위딱까(일으키는 생각)는 이것저것 마음을 계속 일으키고 생각을 자꾸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형상 등 6가지 대상에서 지속적 고찰이 있으면 거기에서도 사성제를 깨달았다...
여섯 가지 대상에 마음이 가서 자꾸 살피고 있는 것이 위짜라(지속적 고찰)인데, 위짜라에 대해서도 사성제를 깨달았습니다.
...색온 등의 오온에 대해서도 사성제를 깨달았다.
...열 가지 까시나를 수행하셨다.
...열 가지 계속해서 생각하는 수행을 하셨다.
...부푼 것 등의 열 가지 부정(필자 주 - 더러움)을 보는 수행을 하셨다.
...머리카락 등 몸의 32 부분상을 보는 수행도 하셨다.
...12처를 알고...18계를 알고...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존재 등 아홉 종류의 존재도 알고
...초선정 등 네 가지 선정을 닦고... 자애 등 사무량심을 닦는 수행을 하고... 네 가지 무색계 선정을 증득하고
...늙음 죽음 등에서 역순으로 숙지하고
십이연기를 역방향으로, 늙음 병듦 죽음으로부터 내려오면서 왜 죽었는가? 태어났기 때문에. 왜 태어났는가? 업이 있었기 때문에. 왜 업을 지었는가? 취착했기 때문에. 왜 취착했는가? 갈애 때문에. 왜 갈애를 가지는가? 수(느낌)가 있었기 때문에. 왜 수가 있었는가? 촉(정신적 접촉) 때문에... 이런 식으로 십이연기를 역방향으로 숙지하면서 사성제를 깨달았습니다.
...무명 등에서 시작하여 그로 인해서 생기는 연기법을 순방향으로 숙지해서 알고
십이연기를 순방향으로, 어리석음 · 무지 · 무명 때문에 행업을 하고, 그렇게 행했기 때문에 식이 태어나고, 태어나는 식이 있기 때문에 명색(물질과 정신)이 생기고, 명색이 생기기 때문에 눈 · 귀 · 코 · 혀 · 몸 · 마음의 육입이 생기고, 그것이 형상 · 소리 · 냄새 · 맛 · 감촉 · 법과 촉하고, 촉하기 때문에 괴로움 · 즐거움 · 쾌감 · 불쾌감 · 덤덤함 등등의 느낌(수)들이 생기고, 느낌 따라 갈애(번뇌)를 일으키고, 갈애를 일으키니까 취착하고, 취착하니까 다시 업을 짓고, 업을 지으니까 다시 태어나고, 이런 식으로 십이연기를 순방향으로 숙지하여 사성제를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하나로 묶어 말하면, 늙음과 죽음이 고성제이고, 태어남이 집성제이고... 두 가지가 모두 꺼져 버리는 것이 멸성제이고... 소멸을 잘 아는 수행법이 도성제이고
...이와 같이 사성제 구절을 낱낱이 들어 모든 법을 바르게 스스로 깨달았고 알아야 하는 법들을 추론해서 알았고 또 직접 수행해서 깨달음으로 완벽하게 알았기 때문에 삼마삼붓도이다.
...이렇게 지혜로 알고 믿어야 우리의 믿음이 제대로 됩니다. 지혜가 바탕인 믿음이 아주 중요합니다... 업과 과보, 연기법, 24조건, 사성제, 팔정도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을 잘 알고 실천 수행하는 지혜 불자가 있습니다. 이 중 지혜 불자의 공덕이 최고입니다. 불자들은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 아신 빤딧자 사야도, 『여래가 오신 길 보물산 둘레길』 pp.334~352, (사)법승 담마야나(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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