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잠시 떴을 때 시폰 소재의 커튼 너머로 먼동이 터오는 것을 느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마 너댓시 쯤 되었으리라 생각하면서, 대여섯 시간을 잤음에도 피로가 가시지 않는 몸을 뒤척여 부드러운 오리털 베게 속으로 더욱 파고 들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더 잤다고 생각하고 일어났을 때 시계는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몸이 그렇게 개운하지는 않았지만 더 잘 수는 없었다. 비엔나에서 주어진 시간은 그 날 하루밖에 없었으니까.
전날 암스테르담에서 빈으로 비행기를 갈아타고 도착하니 밤 10시였고 호텔에 들어오니 11시가 가까웠던 것이다. 사실 저녁 늦게 들어오는 비행기가 시차 적응하기에는 좋다. 비행기 안에서 피로에 절긴 하지만 숙소에 도착해서 바로 쓰러져 자면 이미 절반 정도는 시차 적응에 성공하는 셈이니까. 비행기에서 보낸 하루가 아까우니 어서 일어나 하루를 알차게 보내야만 했다.
마린을 깨우니 일어나기는 일어나서 옷을 갈아 입고 조식 뷔페에 갈 준비를 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오빠, 어제 잃어버린 물건이 또 떠올라."
하지만 어쩌랴, 이미 잃어버린 물건이요, 엎질러진 물인 것을.
전날 공항에 도착하여 도심으로 들어오는 교통수단을 찾고 있을 때, 우리 곁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친절한 말씨에 단정하게 입은 드레스 셔츠, 목에 걸고 있는 붉은 줄에 달린 신분증은 마치 공항 직원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이 도심까지 가는 버스가 있는 쪽으로 안내를 하겠다며 우리를 인도했고, 우리는 어리둥절 헤매고 있던 시간이 괴롭던 참에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따라갔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도심까지 가는 셔틀이라며 인도한 버스는 일반 봉고차처럼 보였다. 그래서 물었더니 호텔에서 운영하는 셔틀이라고 했다. 아, 그런가 보구나. 깊이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그는 우리의 무거운 트렁크들을 봉고차에 따로 달려있는 은빛의 고급스러운 트레일러에 실었다. 그리고는 차문을 열며 타라고 했다. 차문을 닫고는 자신이 직접 운전석에 앉아 운전을 하고 공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마린은 뭔가 이상하다며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앞에 타고 있는 남녀 커플이 갑자기 돌변하는 것을 아니냐는 둥, 우리를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는 것 같다는 둥 온갖 불행한 추측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버스 안에서 두려움에 떨기를 이십여분, 버스는 우리를 힐튼 앞에 내려놓았고 나는 버스 요금 18유로로 20유로를 내밀었다. 그는 잔돈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는 앞자리 승객을 데려다 주러 급하게 차를 몰고 비엔나의 어두운 길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난리를 치고는 호텔 방으로 올라와 씻고 화장품을 바르려는데 화장품 가방이 없는 것이었다, 롯데 면세점에서 산, 포장도 안뜯은 화장품이 가득 들어있는 가방이. 트렁크 뚜껑을 이리저리 들치다가 아까 그 봉고차에 두고 내렸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얼마어치던가. 마린의 지인들에게 줄 선물까지 모두 포함된 것이었으니. 그날 밤 마린은 나의 남성용 스킨은 차마 바를 수 없어 아이크림을 얼굴에 바르고 자야 했다.
여행 도착부터 낭패를 겪고 난 우리의 기분은 적쟎이 다운되어 있었다. 하지만 깔끔한 호텔 조식 뷔페를 먹고 나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우리는 걸어서 비엔나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일단 호텔 앞의 공원을 가로질러 가기로 했다.
공원에는 시민들이 mp3 플레이어를 하나씩 귀에 꽂고 가끔 달릴 뿐, 인적은 드물었다. 우리처럼 쌍쌍의 관광객이 눈에 조금 띄었고 일본인 커플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슈베르트 동상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자, 눈여겨 보더니 자신들도 우리를 따라 사진을 찍고 있었다.
공원 내의 식당 겸 공연장을 찬찬히 둘러보고는 바로 빠져나와 벨베데레 궁으로 향했다. 벨베데레란 'beautiful view' 정도의 뜻으로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이 떠오르는 곳이었는데 그보다는 훨씬 작고 아담한 궁전이었다. 터키와의 전쟁에서 빈을 구한 오이겐(Eugene)공의 여름 별궁이었으며,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었고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Klimt가 그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미술에 조예는 없지만 인터넷 상으로 그의 작품을 보면서 감탄하고는 했는데 두 눈으로 감상을 할 수 있게 되다니. 이리 저리 방을 지나며 여러 작가, 사조의 작품들을 지나서 마침내 클림트의 작품이 있는 방으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클림트의 'Kiss'가 유리 액자 안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클림트구나. 클림트 외에도 에곤 쉴레(Egon Schile) 같은 작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어느 나라를 가던지 미술관에서 좋은 느낌으로 관람하고 나오기가 쉽지가 않다. 내 느낌 아닌 그림 수백, 수천점을 본 들 무슨 감동이 있겠는가마는 이 곳 벨베데레 미술관은 달랐다. 고전과 현대가 적절히 조화된 컬렉션들이 무척 흡족했다. 단, 이곳도 미술 작품에 대한 사진 촬영은 불가했다. 특이한 점은 어느 누구도 사진촬영 불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심지어 카메라 뚜껑을 열고 들고 있는 데도 직접 촬영을 하는 이도 없었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이제는 상호 불문율이 된 것 같았다. 단 제한적으로 작품이 걸려 있지 않은 샹들리에 방 등에서는 허용이 되었다.
벨베데레 궁의 미술관을 나와서 조금 걷다가 우리가 만난 것은 한 무리의 곰들이었다. 형형색색의 곰들이 분수대를 중심으로 죽 늘어서 있었다. United Buddy Bears 2006이라는 행사였다. 각 나라 별로 개별 디자인된 무늬의 곰들을 나라 이름표와 대조해가며 감상하는 게 큰 재미였는데, 서로 독특한 디자인을 뽐내고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르헨티나와 그리스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은 작품들을 감상하고 마음에 드는 곰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곰도 있었다. 알 수 없는 황금색 바탕에 배에는 태극무늬를 두른 이상한 곰이었다. 이렇게 만들어가지고 사람들이 사진이나 찍어 가겠나. 왜 우리나라 것은 늘 멋이 없는 것일까.
buddy bears. 맨 끝에 태극 무늬를 두르고 있는 황금색 우리나라 곰이 살짝 보인다.
곰무리를 지나서 우리는 나슈 마르크트(Nasch Markt)로 향했다. 지도와 실제 거리를 대조하며 걷기가 생각보다 용이해서 놀랐다. 비엔나는 그 크기가 아담해서 지도를 보며 돌아보기에 적당한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차례 길이 헷갈려서 길거리의 인부에게 길을 물었는데 그는 유창한 영어로 방향을 알려주었다. 오스트리아는 다들 영어를 잘 하는구나.
그가 알려준 방향으로 오분 정도 걸어가서 조금 헤메다보니 좌측에 웬 상점들이 즐비한 것이 보였다. 나슈 마르크트였다. 나슈마르크트는 16세기부터 내려온 재래 시장으로서 원래는 우유 용기를 파는 곳이었으나 18세기 말부터 야채나 과일 등을 판매하는 곳으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약 1.5킬로미터 길이로 상점이 길게 늘어서 그 골목을 헤치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많은 볼거리가 되었으며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관광객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시장의 매력에 빠져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가 시간을 보니 어느새 12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고 슬슬 출출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길가의 케밥집에 들어가서 점심을 떼우기로 했다. '케~밥~, 케밥, 케밥, 케밥' 하는 추임새가 인상적인 집이었다. 케밥을 하나씩 시키고 망설이다가 맥주를 한 잔 시켰다. 유럽에서 과도한 수분의 섭취는 짜증나는 유료 화장실의 방문으로 이어지게 마련이었지만... 어떻게 되겠지.
첫댓글 화장품 가방 잃어버려서 너무 속 쓰리셨겠어요. 재밌는 여행기! 잘봤습니다~ 황금빛 태극 모양 곰;;;; 넘 웃겨요 ㅎㅎㅎ
흠, 제 차례군요, 답 여행기로 더욱 상세한 여행 day 1을 올리겠나이다, ^ ^;;;
우와...드뎌 여행기가 올라오는군여..마린이는 화장품 가방을 잃어버렸다니..정말 속상했겠다. 나도 예전에 유럽에 갔었을때 비엔나에선 단 하루만 있었기에 별다른 기억은 없지만 슈테판성당이 무자게 컸다는 기억만 납니다...
정말 속상하셨겠어요.역쉬~~시장의 볼거리는 사람을 더욱 사람답게하는 뭔가가 있어요.존재의 의미가 느껴진다고나 할까....먹는 사진들이 다 훌륭하구요 맛나보여요....
마린언니의 속상한 마음이 여기까지 전해지네요..어째어째~ 하루밖에 안계셨던 빈을 전 3박 4일을 있었으니..ㅎㅎ 근데 기억나는건...빈 거리에 있던 스타벅스뿐...ㅋ
마린 언니 정말 속상했겠어요..나도 출발전 면세점에서 화장품 샀는데 옮겨다닐때마다 제일 신경쓰이더라구..사실 여행도 좋지만 면세점에서 물건 사는맛이 어딘데..사실 슈테판 성당이랑 벨베데레 빼면 별로 볼 건 없지만 전 이상하게 빈엘 세번(모두 합쳐 7일)이나 갔네요..(한번은 역에만 잠깐 들렀지만..)
여행에서 이런 경험은 누구나 있는 것 같아요. 속은 쓰리지만 그래도 나중에 추억이 되더군요.
그르게요..왜 우리나라는 머든 멋이 없을까요 --;;;
저 곰돌이들 사진은 우리집에도 있는데 ㅋㅋ 같이 만세하면서 찍었는데 볼때마다 웃음이나요
정말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