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조모 풍창부부인 조씨 묘표(外祖母豐昌府夫人趙氏墓表)
숙종 7년 신유년(辛酉年,1681)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중전의 지위에 오르니, 우리 외조부 민 문정공(閔文貞公) 휘 유중(維重)은 겸 병조 판서(兼兵曹判書)에서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문정공은 세 번 장가들었는데, 해풍부부인(海豐府夫人) 이씨(李氏)와 은성부부인(恩城府夫人) 송씨(宋氏)는 규례에 따라 추증되었고, 정경부인 조씨(趙氏)에게도 풍창부부인(豐昌府夫人)의 봉호가 내려졌다.
7년이 지난 정묘년(丁卯年,1687, 숙종 13) 문정공(文貞公,閔 維重)이 세상을 떠났다. 기사년(己巳年,1689)의 변란 때 봉호와 고신을 모두 환수하였다가 갑술년(甲戌年,1694)에 도로 돌려주었다. 조 부인(趙夫人)은 60여 년간 존영(尊榮)을 누려 국가의 길흉대사(吉凶大事)에 왕왕 명을 받들고 대내(大內)에 들어갔다.
문정공의 두 아들 충문공(忠文公) 진후(鎭厚)와 좌의정 진원(鎭遠)은 당세의 명신으로, 부인을 섬김에 있어 정성과 봉양을 극진히 하였다. 부인이 항상 충문공을 칭찬하기를,
“옛날의 이른바 효자가 이 아이에 비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하였다.
충문공이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항상 의정공을 따라 살았으니, 원주(原州)로 귀양 갈 때나 여주(驪州)에서 광주(廣州)로, 광주에서 서울로 갈 때 매번 모시고 갔다. 의정공이 또 세상을 떠나자 부인은 스스로 남은 날이 얼마 없다고 생각하여 돌아가 문정공의 무덤을 지키고자 하였다.
성상께서 이를 듣고 가엾게 여겨 손자들에게 손수 쓰신 글을 내려 떠나는 것을 만류시키게 하였다. 자주 액례(掖隷)를 보내어 기거를 묻고 병이 들면 끊임없이 의원을 보내 병세를 살폈으며 매년 세초에는 은혜로이 보살피는 물품을 넉넉히 보냈다. 올해는 봉작된 지 60주년 되는 때라, 경연에서 누차 은혜로운 말씀이 있었다.
부인이 우연히 작은 병에 걸려 3월 22일에 하사받은 안국방(安國坊) 집에서 생을 마쳤으니 춘추 83세였다. 성상께서 슬퍼하며 의식대로 조문(弔問)하고 치제(致祭)하였고 중사(中使)를 보내어 장례를 돕게 하였으며 경종께서 매월 내렸던 월름(月廩)을 3년 동안 지급하게 하였으니, 은졸(隱卒)의 은전이 아, 지극하도다!
풍양 조씨(豐壤趙氏)는 고려 시중 맹(孟)에서 비롯되었다. 증조 휘 방량(邦亮)은 참봉을 지내고 승지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인형(仁亨)은 정랑을 지냈으며, 부친 휘 귀중(貴中)은 성균 생원이다. 모친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장령 진(縝)의 딸로, 뛰어난 행실로 정려(旌閭)되었다.
부인은 효종 기해년(己亥年,1659, 효종 10) 2월에 태어났다. 병진년(丙辰年,1676, 숙종 2)에 18세의 나이로 문정공에게 출가하였는데, 문정공은 당시 이미 높은 지위에 있었다. 관찰사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광훈(光勳), 부윤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기(機), 장흥고 영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휘 여건(汝健)이 문정공의 3대이고, 그 외조부는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 이공(李公) 휘 광정(光庭)이다.
부인은 단정하고 조용하여 어렸을 때부터 ‘여자 중의 군자’라는 칭찬이 있었다. 정신과 기운이 안정되어 창졸지간에도 말소리와 얼굴빛이
갑작스럽지 않았으며, 항상 엄숙하여 말과 웃음이 적었으나 노년에는 온화하고 완곡하게 바뀌었다.
병들었을 때에도 반드시 옷과 이불을 단정히 정리하였으며 비록 곁에 어린 손자가 있을지라도 몸을 드러내지 못하게 하였다. 의복과 기용이 간소하여 가난한 선비의 집과 다름없이 생활하였다. 80세의 나이에도 손수 바느질하면서,
“사람은 한가로이 앉아 날을 보내면 안 된다.”
하였다.
일은 독단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반드시 물은 뒤에 행하였다. 여러 아들이 내외의 관직을 차례로 거쳤지만 일찍이 털끝만큼도 사사로이 관여하지 않았다. 누차 대궐을 출입했으나 친숙하게 지내는 궁인이 한 사람도 없었으며 절대 궐내의 일을 남에게 발설하지 않았다.
부인의 덕이 이루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근면하고 검소하며 치밀했던 것이 부인의 가장 큰 덕목이다. 또 본성이 겸손하여 평생 입으로 자신의 장점을 말하지 않았기에 집안사람이나 자손조차도 다 알 수 없었다. 부인은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진영(鎭永)은 정랑을 지냈고, 딸은 진사 이장휘(李長輝)와 참봉 홍우조(洪禹肇)에게 출가하였다.
정랑의 아들은 직장을 지낸 낙수(樂洙)와 각수(覺洙)이다. 사위 이장휘의 아들은 윤(潤)과 황(潢)이고, 사위 홍우조의 아들은 계승(啓承)과 계능(啓能)이다. 은성부부인(恩城府夫人)이 실로 인현왕후를 낳았는데 돌아가신 우리 모친과 충문공과 의정공이 모두 그 소생이다. 충문공의 아들은 장령 익수(翼洙)이다.
5월 21일에 용인현(龍仁縣) 동쪽 수원동(壽院洞)에 1등(等)의 예법으로 장사 지냈다. 장사 지낸 뒤에 즉시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고 묘표를 지어 비석 뒤에 새기니 또한 성상의 은혜로운 돌보심 덕분이다. 문정공의 묘는 여주(驪州) 섬락리(蟾樂里)에 있는데 두 부인을 합장하였다. 숙종께서 일찍이 비석 전면에 큰 글씨를 써서 표식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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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외조모 …… 묘표 :
이 글은 민유중(閔維重)의 부인 풍양 조씨(豐壤趙氏)의 묘표로, 1659년(효종 10)에 태어나 1741년(영조 17) 3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주02] 경종께서 …… 월름(月廩) :
최석항(崔錫恒)이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부인이 이전에는 두 아들의 관질이 높고 봉록이 많아 조정에서 물품을 내리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었지만, 지금 장남 진후는 죽었고 차남 진원은 배소(配所)에 있습니다. 듣자니 부부인의 생활이 어려워 조석거리가
부족하다고 하니, 월름을 지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라고 아뢰어 경종이 허락하였다.《承政院日記 景宗 3年 2月 5日》
[주03] 은졸(隱卒) :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는 일을 이른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