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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글을 올리지 않고 한부분 한부분 채워나갈 생각입니다.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제목 : 때가 차매(When the set time had fully come)
성경 : 갈라디아서 4장 4절
성탄절은 죄와 사망권세 아래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그저 하나의 축제로서 분위기에 빠져 육신의 즐거움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육신의 즐거움을 위한 절기가 아니라 죄인들을 구하러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오셨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1. 때가 차매 - "호테 엘뗀 토 플레로마 투 크로누(Ὅτε ἦλθεν τὸ πλήρωμα τοῦ χρόνου)"
"때가 찼다."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으로 "호테 엘뗀 토 플레로마 투 크로누(Ὅτε ἦλθεν τὸ πλήρωμα τοῦ χρόνου)"라는 문장으로 직역한다면 "시간의 충만함이 도래했을 때"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든 조건과 상황이 충분히 무르익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표현을 한 이유는 이어진 문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때가 차매, 즉 모든 조건과 상황이 충분히 무르익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조건과 상황이 충분히 무르익도록 하나님께서 상황을 조성하셔서 적절한 시기를 만드시고 죄와 사망권세 아래 허덕이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님을 구세주로 보내시기 위해 모든 조건과 상황이 무르익도록 하시는 데 있어서 어떻게 하셨을까요? 즉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시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2,007년에 김명혁 교수는 그의 글에서 때가 차서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시게 된 배경에 대해 세가지로 설명했습니다. 그는 그의 글에서 정치적, 사상적, 종교적 배경으로 예수님께서 적절한 때에 오셨다고 설명합니다. 저는 좀 더 세분해서 문화적 배경을 추가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2. 정치적 배경 -
하나님께서는 유럽의 그리이스에서 알렉산더를 일으키셔서 유럽 전역과 북 아프리카 그리고 페르시아에서 인도 변경까지 정복 전쟁을 일으켜 헬라 대제국을 건설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헬라 제국을 통해 헬레니즘이라고 하는 문명을 정복지마다 심었습니다. 이 헬레니즘 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이 제국 안의 모든 나라들이 의사소통을 쉽게 할 수 있는 코이네 헬라어(Koine Greek)가 사용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헬라 대제국에 이어 등장한 것은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통일된 대제국을 확립해 놓았는데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27-A.D.14) 황제가 즉위했던 당시의 로마 제국의 판도는 서쪽의 스페인에서 동쪽으로 소아시아와 팔레스틴에 이르는, 그리고 남쪽의 북아프리카 연안 지역에서부터 북쪽으로 라인강 및 도나우강 이남의 가울, 이태리 및 마케도니아 지역을 포함하는 지중해 세계 전역에 뻗쳤습니다.(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155372에서 인용한 글)
또한 로마 제국은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했는데, 이 법률이 잘 만들어져서 오늘날까지도 로마의 법체계는 서방세계는 물론 지구상의 여러 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은 제국의 식민지역을 잘 통치하고 의사소통을 통일하기 위해 알렉산더 대제가 이루어 놓은 헬레니즘을 이용했습니다. 특히 코이네 헬라어가 제국의 공식적인 언어가 되게 하여 제국 내에 어디를 가든지 의사소통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국 내에서 반란이나 폭동이 일어나게 되면 신속히 진압하여 제국의 안정을 도모하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에 로마 군대의 이동을 쉽게 하기 위해 제국 내의 모든 곳이 연결되도록 도로망을 건설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도로에 대한 기록은 3세기 말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당시의 것으로 당대의 가장 큰 도로는 29개로, 제국의 113개 속주에서 국영도로(간선도로)는 총 372개로 도로 길이를 합치면 8만 5천㎞에 달합니다. 또, 로마제국의 포장된 간선도로 총 길이는 8만 5천 ㎞지만 지선도로(支線道路)까지 합치면 40만 ㎞ 이상에 달했습니다.
(https://namu.wiki/w/%EB%A1%9C%EB%A7%88%20%EA%B0%80%EB%8F%84)
이 광대한 로마 제국은 제국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25개의 군단(각 군단은 6,000여명의 장교와 보병으로 구성)과 수개의 함대가 지키는 역사상 유래 없는 강대국을 형성하였고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루어 놓았습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155372에서 인용한 글)
이러한 당시의 정치적 배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 제국 전역에 신속히 전파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도들은 이러한 로마 제국에 의한 평화(Pax Romana)로 어디든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고 또 로마 제국의 군대 이동을 신속하게 하기 위한 도로로 인하여 신속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으며 로마 군대에 의해 제국내에서 여행하는 사람들의 안전한 여행을 보장하므로 복음 전도자들이 안전하게 여행하여 복음을 로마 제국 내에 신속히 전할 수 있는 정치적 바탕이 되었습니다.
3. 사상적 배경 -
예수님께서 오시던 당시 로마 제국 내에 존재하던 철학은 스토아학파(Stoicism)와 에피쿠로스학파(Epicureanism)였습니다.
⑴ 스토아학파(Stoicism) - 스토아학파는 키프로스(Cyprus)의 제논(Zenon)이 만들었는데, 아테네 광장의 공회당 기둥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기둥(스토아, Stoa)을 뜻하는 스토아학파로 불렸습니다. ①
스토아학파의 철학은 크게 자연학과 논리학, 윤리학의 세 부분으로, 그 근본은 자연학이지만, 목적은 윤리학의 실현이었습니다. 자연학, 논리학, 윤리학으로 철학을 구분한 것은 형이상학을 배제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형이상학적 물음, 추상적 · 계산적 사고를 비판하고 삶의 깨달음과 지혜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②
스토아학파의 모든 견해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불 철학 즉 변화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학에 기초합니다. 세계는 물질로 되어 있고, 변화를 일으키는 모든 운동과 작용도 물질의 성질을 갖습니다. 존재의 근원적 근거를 탐구할 때 존재 자체를 넘어서는 시도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세계의 근거는 세계 자체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주와 자연에 어떠한 목적도 부여하지 않는 순수하고 철저한 유물론자는 아니었습니다. 우주와 자연을 지배하는 통일의 원리가 있다고 보았고, 이를 로고스(Logos)라고 생각했습니다. ③
이 로고스(Logos, ὁ λόγος)는 우주와 인간을 함께 지배하는 보편적인 “세계 이성”으로 해설되었습니다. ④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던 1세기에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에서 이 로고스(Logos, ὁ λόγος)라는 이 용어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주와 인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며 절대자이시고 구원자이심을 설명했습니다. 이와 같이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 속에서 유행했던 스토아 철학을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스토아 철학에서 보편적인 “세계 이성”이라는 로고스(Logos, ὁ λόγος)라는 용어의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⑵ 에피쿠로스학파(Epicureanism) - 이 학파의 창시자는 사모스 섬 출신의 에피쿠로스(Epikuros, B.C. 341~270)입니다. 그는 헬레니즘(Hellenism) 시대의 그리스 철학자이며 유물론자입니다.
이 학파는 에피쿠로스가 B.C.306년에 아테네에 있는 자신의 정원(Garden)에서 학교를 세우고 시작되었으므로 이 학교는 정원학교라고 불리어 졌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당시의 다른 학파와 마찬가지로 수신처세(修身處世)의 윤리학(倫理學)을 주로 논했으며 특히 쾌락(快樂)을 중시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선(善)으로 고통(苦痛)을 악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아무런 쾌락이나 취하여 도리어 그 부작용으로 일어나는 고통에 빠지지 않고 쾌락과 고통을 비교하여 선택함으로 영속적인 쾌락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쾌락은 일시적인 환락(歡樂)을 취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욕망을 제어함으로 생기는 불만이 없는 생활에서 얻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⑤
⑶ 스토아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영향력이 쇠퇴해질 즈음에 출현한 기독교
기독교는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이 쇠퇴해질 즈음에 출현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이 사람들 중에서 힘이 약해질 즈음 사람들은 사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새로운 것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토아 철학이 이후에도 계속 힘을 지속했고 나중에 스토아 철학자 중의 한사람이 로마 황제에 의해 교회가 핍박을 받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이러한 철학들을 대신하여 사람들의 정신적인 면을 채워주는 충분한 역할로 기독교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그러한 필요를 채워주는데 기독교는 완벽하게 채워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시기에 (때가 차므로) 오셨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신속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참고문헌
① (https://ko.wikipedia.org/wiki/스토아_학파)
②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83XX66200059)
③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83XX66200059)
④ (https://blog.naver.com/wksr0702/223237151238)
⑤ (https://blog.naver.com/wksr0702/223237151238)
4. 문화적 배경
서양 특히 유럽의 문화를 논하자면 보편적으로 두가지를 언급합니다. 하나는 헬레니즘이며 다른 하나는 헤브라이즘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두 문화를 바탕으로 기독교문화를 언급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배경으로 생겨나서 성장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헬레니즘(Hellenism)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지중해 전역에 있는 나라들과 동방의 인도의 변경까지 진행되었던 그의 정복전쟁으로 인하여 전해진 그리이스 문화가 당시 세계의 문화가 된 것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정복 전쟁을 하면서 순순히 복종한 나라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며 그리스 문화와 조화를 꾀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이러한 알렉산더 대왕의 시도는 많은 나라들의 문화가 헬레니즘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결과를 갖게 되었습니다. 헬레니즘 문화에서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는 언어입니다. 당시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한 땅에서는 그리스 언어인 헬라어가 전해졌고 그 영향으로 인해 지중해 연안에 있는 그의 정복지에서는 헬라어가 전해져서 많은 사람들이 헬라어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헬라어는 오늘날의 영어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의 국제적인 언어로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언어는 높은 계급의 특수한 사람들만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통속적인 헬라어, 즉 코이네 헬라어(Koine Greek)였습니다. 즉 알렉산더의 정복과 헬라어의 보급은 후에 사도들이 매우 신속하게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헤브라이즘(Hebrism)은 이스라엘 종교인 유대교로부터 전해진 문화입니다. 앗시리아에 의해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했고, 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유대가 멸망했습니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유대를 멸망시킨 후에 예루살렘과 유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바벨론 지방으로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물론 그들 중에 일부는 후에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유대 땅으로 돌아왔지만 많은 사람들은 바벨론 제국에 속한 도시들과 후에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세워진 페르시아(메데와 파사) 제국의 영지 이곳저곳에 퍼져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나타난 로마 제국이 지중해 연안의 모든 국가들을 정복하여 로마 제국의 영토로 만들었습니다. 역시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모든 영토에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 흩어진 유대인들을 보통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곳곳에 흩어져서 살아가면서 회당을 짓고 그곳에서 유대인들의 신앙과 문화적인 전통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제국 곳곳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물론, 다른 이방인들보다 도덕적으로 성결하게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도덕적인 귀감이 되었고, 이러한 유대인들을 바라보는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삶을 동경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회당에 모여 예배하는 것을 보고 예배하는 공간 외부에 참석하여 유대인들의 예배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이 경건한 사람들이라는 용어를 쓰는 신약 성경, 특히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중에 기독교가 유대교와 결별할 때 이런 경건한 이방인들에 의해 교회가 설립되어 확장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기독교회는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와 헤브라이즘의 문화를 바탕으로 로마 제국 전역에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설립하여 로마 제국에서 인정하는 종교 중에 하나가 되었고 결국은 주후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로마 제국에서 인정하는 국교 중에 하나로 공인될 뿐만 아니라 중세의 유럽에서 유일한 종교가 되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5. 종교적 배경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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