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靑葡萄) / 이육사(李陸史)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문장] 8호(1939. 8)
제목: 청포도(靑葡萄) 작가: 이육사(李陸史) 님의 詩 발표: [문장(文章)] 8호(1939. 8) |
(* 1939년 2월 1일에 창간한 문예잡지인 [문장(文章)]을 '동인지'로 하는 청
록파에는,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시인 등이 있으며, 특징은 자연회귀이다.)
| 본명은 이원록. 필명은 이활, 이원삼..등을 쓰다가 일제 저항 으로 수감되었을 때 수인 번호가 264번이어서 육사(陸史), 이육사(李戮史), 二六四 등을 썼으며, 후에 이름을 이육사 (李陸史)로 개명했다.
경북 안동에서 출생. 부친은 퇴계 이황의 13대손(이가호)이며 모친은 의병장 허형의 딸(허길)이다. 유년기에 조부에게서 소학을 배우고 도산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16세 무렵 대구로 이사. 1921년 결혼 후 백학학원에서 수학.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고등예비학교에서 1년간 재학. 1925년 귀국,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항일단체 에 입단했다. |
1926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중국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중퇴 하고 귀국. 그해 장진홍 의거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소. 1930년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입사, 기자활동을 하면서 은밀히 항일활동을 펼치다가 1932년 다시 중국행.
항일활동 인사들과 접촉 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 귀국 후 다시 구속되었다가 석방,
문필활동을 펼치던 중 1943년 피검, 북경으로 압송되어 1944년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다.
선생의 첫작품은 '황혼'('신조선',1933)이며, '절정', '광야', '청포도', '꽃', 등의 대표시를 남겼고,
1946년 비평가인 아우 '이원조'의 편집으로 유고 시집 [육사시집]이 출간되었다.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