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나무의 눈물
이 향 숙
빗방울이 제법 굵어졌다. 가로등 사이의 플라타너스가 바람에 거칠게 흔들린다. 비에 젖은 둥치가 섬뜩하기까지 하다. 봄을 시샘하는 바람의 차거움에 서러웠던 그날이 떠오른다.
내가 태어나기 아주 오래 전부터, 언제부터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비자나무가 마을 어귀에 서 있었다. 나무 아래엔 돌탑이 쌓여 있었고 농사 일로 지친 아낙들이 가족의 건강과 풍년을 기원하는 치성이 끊이지 않았다. 딸 부잣집이었던 우리 집도 어머니가 새벽마다 아들 낳게 해달라고 백일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한참 적응해 갈 무렵이었다. 새마을 운동으로 길을 넓히고 지붕을 개량하며 농지정리를 할 때이다. 미신타파의 일환으로 비자나무를 베어야 한다는 이장과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어른들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다. 몇 년을 그렇게 논쟁을 했고 국가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이장에게 이끌려 택일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대나무로 울타리를 삼아 스산한 분위기가 풍기는 만신의 집은 마을 끝자락에 있었다. 그녀는 다 저녁때 맨발로 마을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신령한 비자나무를 베면 일곱 자녀가 죽을 것이여……”
마을 사람들은 두려웠지만 만신의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믿었다.
집에서 논둑길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외딴집인 큰어머니 댁이 보인다. 거기까지 한 달음에 달려가면 늘 반겨주는 사촌언니가 있었다. 하얀 얼굴에 꽃무늬 블라우스와 무릎아래까지 내려오는 검정색 치마를 즐겨 입었었다. 큰언니는 시집가고 오빠와 작은언니는 도시로 공부하러 가서 늘 집을 지키는 것은 언니의 몫이었다. 외로웠기 때문인지 나를 너무나 귀여워해주었다. 재봉틀 앞에 앉아서 한 나절을 보내면 원피스를 만들어 입혀주었다. 언니의 손길이 닿으면 아카시나무 잎줄기로 파마한 것처럼 곱슬머리가 된 나는 거울 앞을 차지하고 앉았다. 마당 한 켠에 부추를 자르고 담 벼랑에 호박을 따다가 잘게 채 썰어 부침개도 지져주었다. 여름에는 봉숭아물도 곱게 들였다.
농사일을 본격적으로 하기 전 마을에서는 거사가 이루어졌다. 성황당이었던 비자나무를 베고야 말았다. 만신은 정신 줄을 놓고 뛰어다니며 애걸복걸했지만 요즘 세상에 무슨 말이냐며 핀잔을 주었다. 며칠째 비가 내리고 거세게 바람이 불어 내심 걱정하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나고부터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지만 서울로 공부하러 간 어느 집 아들은 연탄가스로 죽고 저녁에 잠자리에 잘 들은 이가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교통사고로 죽고 물에 빠져 죽은 젊은이도 있었다. 그렇게 여섯 자녀가 고개를 넘어갔다.
자녀를 둔 집들은 무당의 말을 떠올리며 두려워하고 심지어 베어진 비자나무 앞에서 치성을 드리는 이도 있었다. 무속인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이장을 탓하며 마을은 술렁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어머니가 아침상을 차려주며 빨리 밥 먹고 학교 가라고 하셨다. 할머니를 모시고 있던 부모님은 식사도 안하시고 밭에 가신다며 나가셨다.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집안에 일이 생긴 것을 알았다. 그토록 예쁘던 언니가 죽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월이 흐른 후에 알게 되었지만 언니에게는 정인이 있었다고 한다. 부모님의 반대로 어리석은 선택을 했단다. 안타까운 언니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만신의 예언은 맞아 떨어진 것일까.
어둡고 칙칙했던 유년의 기억이다. 그날의 느낌은 괴기하다는 표현이 맞을게다. 그리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우연의 일치인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그 후 마을에서 비자나무가 있던 자리에 작은 묘목을 심어 단장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아이들은 그 앞을 지날 때면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궂은 날은 절대로 혼자 지나가지 않았다. 얼마 전 고향을 찾았을 때 벌써 반백년이 다 된 소나무들이 울창해져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마을은 평화로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비가 뚜적뚜적 내리는 저녁은 세월이 지나 흔적 없이 지워졌을 것 같지만 언니와의 애착만큼 큰 상실감이 비자나무의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첫댓글 이번 과제로 예전의 글을 수정하여 올려 보았습니다. 처음 이 글을 쓸때의 기분과 지금의 마음이 약간 변한것 같고 이해가 깊어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리움의 깊이가 더 깊어 진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것이 분명합니다.
님들께서도 가슴속의 유년의 추억, 아픔을 한번씩 꺼내어 보시길요~~
저절로 치유의 시간이 되는듯 합니다.
이런 무선 야기들이 마을마다 있었지요 ㅋㅋ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