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 고속도로
전국 일일생활권
“길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한남대교가 놓여 있는 곳까지 어렵게 지프를 몰아갔는데, 다리가 건설되기 전이라 한강을 건너는 일조차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국가기간고속도로계획조사단장을 맡았던 윤영호씨가 한국도로공사 40년사에 남긴 증언이다. 박정희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고속도로건설을 발표한 1967년 4월 29일부터 경부고속도로를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당시 야당에선 세계은행(IBRD)의 조사결과처럼 강원도와 서울을 잇는 동서간 고속도로가 더 시급하다 주장했고 박대통령측은 경부선 철로가 있는 곳에 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하며 논란이 더욱 커진 것이다. 정부는 1968년 2월 1일,논란 속에 경부고속도로를 착공했다.
온 나라가 들썩인 경부고속도로 건설
해방 직후에 우리나라의 도로는 총 2만 4,031km였다. 그나마 5,263km의 국도 가운데 포장된 도로는 746.4km에 불과했다. 일제가 수탈을 위해 만들기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 도로의 시작이었고 이어진 6.25를 거치면서 그마저도 황폐해져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당시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경부선 철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12시간이 꼬박 걸리는 거리였으니 이런 때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목표인 서울과 부산을 5시간 내로 달릴 수 있는 길을 건설하는 것은 공사의 적합성을 떠나 실로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경부고속도로는 총 429억 원이 투입돼 2년 5개월 만에 완공됐다. 놀라운 속도였다. 시공에 16개 업체를 비롯해 3개 건설공병단까지 참여해 마치 군사작전처럼 진행된 사업이었고 연인원 892만 8,000명과 165만 대의 장비가 투입된 대형 사업이었으며 77명의 숭고한 희생자를 낳기도 한 사업이었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순전히 우리 기술로 다른 나라에서 만든 고속도로에 비하면 훨씬 싼 값에 가장 빨리 완공하였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꼽힌 경부고속도로 충북 옥천구간은 평균 1.6km마다 터널을 뚫거나 다리를 세워야 하는 최대의 난공사 구간이었다. 하루 종일 수백 명이 노력을 해도 불과 30cm밖에 뚫지 못하는 공사는 작업자들이 공사를 포기하고 달아날 만큼 힘든 지역이었다. 결국 1970년 6월 27일 당재터널(지금의 옥천터널) 공사를 끝으로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됐다.
‘산업전사’의 희생과 과속공사의 경험을 남기고
경부고속도로는 전 구간이 완공된 1970년에 총 368만 9,000 대의 차량이 이용했다. 꾸준히 늘어난 이용량은 1985년에 3천 400만 대를 넘기면서 10배의 통행량이 됐고 지금은 완공 당시의 100배가 넘는 3억 4,000만 대가 도로를 이용하고 있다. 고속도로 완공은 무수한 이야기와 사건을 남겼다. 그중에 고속도로 중앙 지점에 만들어진 두 개의 비석은 당시를 되돌아보게 한다. 하행선 금강휴게소에는 고속도로 공사에 피를 흘려 목숨을 바친 77명의 ‘산업전사’에 대한 위령비가 놓여있다. 위령비에는 ‘세상에 금옥보다 더 고귀한 것은 인간이 가진 피와 땀이다. ~중략~ 그들은 실로 조국 근대화를 향한 민족 행진의 산업전사요, 자손만대 복지사회 건설을 위한 거룩한 초석이 된 것이니 우리 어찌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은혜와 공을 잊을 것이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당시 우리나라의 여러 상황을 종합했을 때 16년 걸린다는 공사를 2년 5개월 만에 끝냈으니 경부고속도로는 이후로 부실과 보강의 문제에 시달렸다. 당초 계획한 24m의 노폭을 22.4m로 줄였다. 비용과 기간을 줄이기 위해 중앙분리대를 비롯한 안전시설을 갖추지 못해 차후 대형사고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개통 1년 만에는 전 노선에 대한 덧씌우기 공사가 착수됐다. 야당의 한 국회의원은 “경부고속도로가 누워 있으니 망정이지 서 있었다면 벌써 와우아파트처럼 무너졌을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개통 후 10년간의 유지보수비용은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을 넘는 수준이었으니 초고속 건설의 후유증은 실로 만만치 않았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의 효과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꼬박 10년이 지난 1980년 7월 7일 언론들은 이른바 ‘10년의 경제효과’를 분석해냈다.경향신문은 사설을 통해 ‘효용성에 대한 회의와 막대한 재정부담으로 해서 건설 초기 상당한 비판도 없지 않았던 이 고속도로가 10년이 지난 오늘 명실상부한 국가산업과 국민생활의 대동맥으로 그 중요성이 인식되게 되었음은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고 동아일보는 ‘산업 대동맥 10년’이란 기사에서 ‘건설 초기 그 타당성 여부를 두고 국내는 물론 외국기술진들마저 회의를 보여 상당한 논란을 벌였으나 10년이 지난 지금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어색할 지경이다.’라고 말했다. 초기 10년간 경부고속도로는 26.9%의 여객수송 증가를 이뤘고 수송인 거리에서는 35.2%의 증가를 가져왔다. 화물 수송은 16배가 증가했다. 개통 당시 50%가 넘었던 승용차의 비율이 10년이 지난 시점에선 화물차 위주로 확대됐다. 또한 서울 인근 지역의 발전과 함께 유통조직의 변화를 가져왔다. 40년 전 경부고속도로를 시작으로 우리나라엔 총 25개 노선, 2천 922km의 고속도로가 건설됐다.(2005.12.31기준)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간 도로는 국가 대동맥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고 이제는 북한을 넘어 중국,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는 아시안 하이웨이를 바라보고 있다.
가는 길
서울특별시 서초구의 한남대교 남단에서 부산광역시 금정구까지 이어지는 총연장 416.05 km의 도로다. 1970년 7월 7일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는 서울과 부산의 중간지점이자 가장 높은 지역인 추풍령에 기념비를 세웠다. 충북 옥천에서 이어지는 금강 주변 구간은 경부고속도로 건설당시 최대의 난공사 지역으로 타 지역의 최대 1.8배에 가까운 인력과 비용이 들어간 지역이기도 하다. 상행선 추풍령 휴게소로 진입하면 기념비를 볼 수 있다. 또한 하행선 금강휴게소에는 고속도로 건설에 생명을 바친 77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위령비를 세웠다.
출처:(길숲섬, 이다일, 경향신문)
경부고속도로 첫 발파기념비[京釜高速道路-發破記念碑]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과 서울시 서초구 경계의 상행선 고속도로변 우측에 세워져 있는 기념비.건립경위 1968년 2월 1일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시작을 알리는 첫 발파 지점에 당시 공사에 최초로 투입되었던 국군 용사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80년 2월 15일 한국도로공사 사장 박기석(朴基錫) 명의로 건립하였다.
위치
경부고속도로 판교인터체인지에서 서울 방면으로 직진하다 달래내고개를 넘으면 성남시 수정구 상적동과 서울시 서초구 경계의 고속도로변 우측에 세워져 있다.
형태
2단의 기단석과 방형의 비대 위에는 ‘총화건설(總和建設)’이라 새겨진 대형 화강석이 얹혀져있다. 비대의 앞면에는 별도의 오석(烏石)[검은색의 바윗돌]에 ‘이곳은 1968년 2월 1일 서울-부산간 428킬로미터 고속도로 건설의 시작을 알리는 첫 발파 지점으로서 이 공사에 최초로 투입된 육군 제1201건설공병단 제220대대 용사들의 빛나는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여기 이 비를 세운다. 1980년 2월 15일 한국도로공사 사장 박기석’이라 새겨놓았다.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남파랑길 39코스를 트래킹하고 종착지 남해군 독일마을에서
뒤풀이를 하고 빗속을 질주하는 서울행 버스안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2022-08-14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