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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인, 사회, 자유
1.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
사회가 먼저인가 개인이 먼저인가 하는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와 같다. 이 문제를 논리적인 문제로 대하든 역사적 문제로 대하든 여러분이 어차피 이쪽이다 저쪽이다 말할 수 없고, 똑같이 일방적인 또 하나의 의견에 의해 수정되기 마련이다. 사회와 개인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사회와 개인은 서로 필요한 상호보완 관계에 있는 것이지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도 그 자신이 완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본토의 한 부분이다.」 이것은 존던 (John Donne, 1573~1631)의 유명한 싯귀로서, 진리의 일면이 거기에 담겨 있다. 한편 고전적인 개인주의자인 밀(J. S. Mil)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들을 함께 모아 놓았다고 해서 다른 종류의 실체로 바뀌지는 않는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모아 놓기 전에 사람이 존재했다든지 어떤 실체를 갖고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세계는 우리에게 작용해서 우리를 단순한 생물학적 단위로부터 사회적 단위로 바꾸어놓는다. 역사시대나 선사시대의 어떤 단계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한 사회 속에서 태어나는 것이고 또 태어난 직후부터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개인적 상속물이 아니라 그가 자라고 있는 집단에서 받은 사회적 획득물이다. 뿐만 아니라 초년기의 관념조차도 우리는 타인에게 받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만일 사회에서 유리된 개인이 있다면, 그에게는 말도 없고 정신도 없을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의 한결같은 매력은, 그것이 사회에서 독립된 개인을 상상해보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시도는 깨어지고 만다. 로빈슨은 추상적인 개인이 아니라 요크(York)에서는 영국인이었으며, 성서를 가지고 있으며, 자기 종족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리고 그는 곧 프라이데이(Friday)라는 부하를 얻게 되고 하나의 새로운 사회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에 관련된 다른 또 하나의 이야기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 나오는 키릴로프(Kirillv)의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완전한 자유를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개인에게 알려진 완전한 자유 행위는 자살뿐이며, 그 밖에 모든 행위는 어떤 형태로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뒤르껭(Durkhein)은 자살이 결코 사회적 조건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주었다.)
-E. H. 카아 '사회와 개인'에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는 늘 개인의 자유의 범위와 그 한계에 대한 문제가 대두한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된 가장 전형적인 논제 중의 하나가 '99 중앙대 논술(사회계열)의 경우이다. 영국의 사상가 J. S. Mill의 「자유론」 제1장에서 발췌한 제시문을 주고 밀의 주장이 지닌 '효용과 한계'를 현대사회의 관점에서 논술하라는 논제이다. 제시문에 따르면 밀은 자유를 규제하는데 대한 원칙을 이야기한다. 즉, 문명사회의 구성원에 대하여 그의 의사에 반해서 권력을 행사해도 정당시되는 유일한 목적은 다른 성원에게 미치는 위해(危害)를 방지하는 것에 있다. 어떤 개인의 행위 중에서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할 유일한 부분은 타인과 연계되어 있는 부분이고, 단순히 자신에게만 연관된 부분에 국한한다면 개인의 독립성은 당연히 절대적이다. 즉, 개인은 타인의 행복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국가권력의 간섭 없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여기서 밀은, 당시의 여론이 인간의 개별성(individuality)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규범에 개인을 순응시키고자 한다고 비판하면서, 인간 개인이 엄격한 이성과 양심적인 의지를 통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밀의 주장은 현대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대단히 가치가 있다. 저자 자신도 '자유의 본래의 영역'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사상ㆍ 감정의 자유, 스스로 원하는 바 생활방식을 누릴 자유,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단결의 자유는, 근대 민주사회의 기본이념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내용이다. 더욱이 단결의 자유는 이후 노동자의 단결권에 길을 열어준 단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밀의 주장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밀이 인간 개인의 이성과 도덕적 판단력에 지나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기인한다. <제시문>에서도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듯이, 「자유론」에 나타나는 인간관은 예컨대 공리주의자 벤담의 인간관과는 판이하다. 즉, 밀은 인간을, 결코 쾌락과 고통의 충동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의식하여 자유로이 취사선택할 수 있는 이성자(理性者)로 보고 있다. 또한 벤담이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행복을 일치, 조화시키기 위하여 외부적 제재인 정치적ㆍ법률적 제재에 중점을 둔 반면, 밀은 양심과 의무의식(義務意識)에서 우러나오는 내적 제재로서의 사회적 감정을 중시한다. 그러나 밀이 주장하는 바인 ‘엄격한 이성’과 ‘양심적인’ 의지라는 기제(機制)만으로 사회가 유지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회는 물질이나 사회구조ㆍ제도적 변화를 통해서도 유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만 아니라 밀이 ‘타인과 연관된 부분’과 ‘자신에게만 연관된 부분’을 구분하여 전자에게는 사회적 책임이 있지만 후자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개인이 독립성을 가지고 있다는 대목도 문제가 된다. 과거와는 달리 개인과 개인의 이해관계와 상호교섭이 더욱 복잡해진 오늘날 개인의 행위를 둘로 명쾌하게 구분하기란 사실상 어려운 것이다.
밀은 사람이 바뀌어야 사회도 변화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자본주의의 바다에 고립된 섬을 통해 세상을 바꿔 나가고자 했던 그에 대해 K. 마르크스는 “가능하지도 않은 일은 꿈꾼다.”고 비아냥거렸다. 이성이 해체되는 지금의 시점에서 본다면, 밀은 분명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만인 대 만인의 투쟁’
‘99학년도 이화여대(인문계), 연세대(인문계), 그리고 서울대의 논술도 개인과 사회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조망할 수 있는 논제이다. 몽테스키외의 「페르시아인의 편지」에서 출제한 이화여대 논제는 최소한의 사회적 통치제도까지도 거부하고 각자가 목적의 이익을 추구하다 파멸을 자초하게 되는 한 부족에 관한 제시문을 주고 이러한 삶이 초래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논술하라는 문제이다.
<문제>
다음 글은 어떤 부족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삶이 초래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논술하시오. (’99 이화여대 인문계)
와서 공격을 했고, 혼자서 두 사람을 방어하기에는 힘이 너무 약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입을 것이 없었던 한 사람이 상인이 팔려고 내놓은 양털을 보았다. 가격을 물어보니 상인은 “보통은 밀 두되 값만 받는데 지금은 여덟 되를 사야겠으니 제 배를 쳐서 받아야겠고.”하고 말했다.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그는 달라는 대로 값을 지불했다. 상인은 돈을 받아 챙기면서 말했다.
“좋아요. 이제는 밀을 좀 사야겠군요.”
양털을 샀던 사람이 말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밀이 필요하다고요? 내게 팔 것이 조금 있는데,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값입니다마는, 밀 값이 아주 비싸다는 것은 아셔야 합니다. 굶어 죽는다고 온데서 난리입니다. 하지만 아까 받았던 제 돈을 다시 주시면 밀 한 되를 드리지요. 당신이 굶어 죽는다 해도 그 값 아래로는 못 팝니다.”
그러는 동안 이 지역에 몹쓸 병이 창궐했다. 이웃 나라에서 유능한 의사가 와서 그에게 오는 모든 환자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 병이 다 지나간 뒤에 의사는 환자들 집을 돌며 치료비를 요구했지만 모두에게서 거절당했다. 의사는 오랜 여독에 지쳐 빈손으로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오래지 않아 같은 병이 전보다 더한 기세로 그 지역을 휩쓸었다. 이번에는 트로들로다이트 부족 사람들이 직접 그에게로 와서 병을 고쳐주기를 빌었다. 그러나 의사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돌아들 가시오. 당신들은 정의롭지 못합니다. 당신들의 영혼 안에는 당신들이 치유 받고자 하는 병보다 더한 독이 있습니다. 당신들에게는 아무런 인간성도 없고 공정한 규칙도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 자격이 없습니다. 당신들을 벌하고 있는 신의 정당한 분노를 어기고 당신들을 치료한다면 나는 신을 거역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몽테스키외, 「페르시아인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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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문은 부족들의 사악함과 관련된 몇 가지 에피소우드 〔삽화〕로 구성되어 있다. ① 왕과 행정관의 살해 ② 가뭄과 홍수로 인한 굶주림과 이웃 간의 무관심 ③ 이웃 남자 부인의 납치 ④ 이웃 사람의 땅 강탈 ⑤ 부도덕한 상거래 행위 ⑥ 전염병의 창궐 : 치료비 지불 거절→전염병 재발→의사의 치료 거부, 가 그것이다. 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의사의 말처럼 이 부족의 구성원들은 최소한의 ‘인간성’도 ‘공정한 규칙’도 없기 때문에 결국 자기 파멸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우화적(寓話的)인 이야기이지만 이런 사태를 주목한 사상가가 있다. 이른바 ‘만인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인간의 자연 상태로부터 벗어나 계약 상태에 이르러 국가가 발생한다고 본 T. 홉스의 견해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오늘날 문명사회도 위와 같은 사례에서 교훈으로 삼을만한 내용이 있다. 자본주의 그 중에서도 이른바 ‘천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기주의가 불공정한 경제행위, 독점과 투기, 경제력의 과도한 집중 등을 초래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공동체 의식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결국 장기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값비싼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동선의 추구라든지 공동체의식의 회복 등 다양한 방안들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인간이 사회적 존재자로서 사회의 규칙과 도덕을 준수할 때 사회가 존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민족과 개인
’99 서울대 논술은 그동안 논술문제가 인문, 사회 분야에만 치중되었다는 지적에 따라 자연과학적 지식을 인간 사회의 문제와 결부시킨 논제로 출제되었다. 동물들의 행동 특성을 설명한 사회 생물학 관련 논저와 신채호의 논설문 <大我 와 小我>(대한매일신문 1908. 9)에서 발췌한 복합 제시문으로 출제된 논제는 자연과학적 지식을 인간사회의 문제와 결부시켜 통합적ㆍ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가하는 점을 평가하려 하고 있다.
제시문 (가)에서는 혈족 보존을 위해 개체의 이익을 ‘희생’하는 동물들의 행동특성이 설명되어 있다. 꿀벌과 개미, 설치류인 프레리도그라, 그리고 야생칠면조와 메추리의 사례를 통해 이들이 혈족 보존을 위해 개체의 이익을 포기하거나 협력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예컨대, 꿀벌사회에서는 여왕벌과 수벌이 생식기능을 담당하고, 암컷이지만 생식기능이 없는 일벌은 동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평생토록 일만 한다. (여왕벌이 낳은 알 중에서 수정되지 않는 알에서는 수벌이 태어나고 수정된 알에서는 암컷이 태어난다. 태어난 암컷은 여왕벌이 분비하는 페르몬에 의해 난소 발달이 억제되어 생식능력이 없는 일벌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동물의 이러한 이타행동(利他行動)도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많이 갖는 근연(近緣)개체들을 남기고 그 개체들을 통해서 자신의 유전자와 동일한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도킨스에 의하면 동물들의 그런 행동은 ‘현상적인 이타주의’일뿐 결국 자신과 공통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이기적 행동일 뿐이다. -「이기적 유전자」-) 만약에 일벌이 생식이 가능하여 자손을 본다고 하는 경우 자손에게는 자신의 유전자가 반만 전달되는데 비해, 한 여왕벌에게서 태어난 일벌자매는 유전자의 ¾이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일벌은 자식을 낳아 키우는 것보다, 여왕벌이 낳은 자매를 열심히 키우는 것이 자신의 유전자와 동일한 유전자를 후손에게 더 많이 전할 수 있다. 즉 여왕벌과 일벌의 분업 조직이 꿀벌의 혈족 보존에 더 유리하고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제시문 (나)는 ‘아(我)’의 개념을 ‘대아(大我)’와 ‘소아(小我)’로 나누고 민족애로 수렴하는 대아를 강조함으로써 자아가 민족공동체로 확장돼야 한다고 주장한 글이다. 신채호는 모든 국민이 애국심을 갖고 애국자가 되는 방법으로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살리는 길을 제의한다. 소아는 육체적ㆍ물질적 아로서 ‘진아(眞我)’가 아닌 ‘가아(假我)’이며 필사(必死)의 아이다. 대아는 죽지 않는 정신적인 아로서 큰 것을 위하여 일체가 되어 영생불사하는 아인 것이다. 풀어 말하면 국가와 국민과 같은 더 큰 것과 하나가 되는 나, 아가 대아인 것이다. 대아는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제시문> 발췌)
‘아’가 국가를 위하여 눈물을 흘릴진대, 눈물을 흘리는 ‘아’의 눈만 ‘아’가 아니라 온 천하에 유심(有心)한 눈물을 흘리는 이는 모두 ‘아’이며, ‘아’가 사회를 위하여 피를 흘릴진대, 피를 흘리는 내 몸만 ‘아’가 아니라 온 천하에 가치 있는 피를 흘리는 이는 모두가 ‘아’이며, ‘아’에게 철천지원수(徹天之怨誰)가 있으면 온 천하에 칼을 들고 떨쳐 일어나는 이는 모두가 ‘아’이며, ‘아’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큰 치욕이 있으면 온 천하에 총을 들고 모이는 이는 모두가 ‘아’이며, ‘아’가 무공(武功)을 사랑하면 천백 년 전에 나라를 세우거나 영토를 확장했던 동명성왕(東明聖王)ㆍ부분노(扶芬奴)ㆍ광개토왕ㆍ을지문덕ㆍ연개소문ㆍ대조영ㆍ최영ㆍ이순신이 모두 ‘아’이며, ‘아’가 문학을 좋아하면 천만 리 밖에서 문필활동을 했던 루소ㆍ칸트ㆍ볼테르ㆍ셰익스피어ㆍ해밀턴ㆍ마치니ㆍ다윈ㆍ스펜서가 모두 ‘아’이며, ‘아’가 불빛을 즐기면 수풀 가운데 꽃 사이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벌과 나비도 모두 ‘아’이며, ‘아’가 자연 속에서 술 마시고 읊조리면 수초(水草)사이에서 유유히 헤엄치거나 뛰어오르는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아’이다.
지금 내가 인간 세상을 유랑한 지 이십 여 년에 사람들을 살펴보니, 필사(必死)의 ‘아’를 위하여 구구하게 애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런 사람은 결국 필사(必死)하리니, 혹 굶어 죽고, 혹 배불러 죽고, 혹 근심하여 죽고, 혹 즐거워 죽고, 혹 말라죽고, 혹 발광하여 죽고, 혹 신음하여 죽거나 낭패하여 죽을 것이다. 어찌 내 눈앞의 사람만 이렇게 죽겠는다. 과거 사람도 이렇게 죽었으며, 미래의 사람도 장차 이렇게 죽을 것이다.
…(중략)…
그러니 필사(必死)의 ‘아’에 연연해하지 말고 불사(不死)의 ‘아’를 보아야 할 것이다. 필사(必死)의 ‘아’를 보면 ‘아’는 끝내 필사(必死)할 것이고, 불사(不死)의 ‘아’를 보면 ‘아’가 길이 불사(不死)할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나의 이 주장이 어찌 철학적 공상으로 염세적(厭世的) 비관을 고취하려는 것이겠는가. 다만 우리 뜻있는 대중들을 불러서 본래의 진면목을 분명히 깨달아 생사(生死)의 관문을 꿰뚫어보게 하고, 이 세계에 씩씩하게 전진하다가, 저 소아(小我)가 칼에 찔려 죽으면 이 대아(大我)는 그 앞에서 축하하여, 몹시 기쁘게도 ‘아’가 길이 불사(不死)함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위의 인용한 부분의 내용을 쉽게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大我’란 각 부문에서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 역사와 자연과 일체가 되어 국권회복에 헌신하는 애국적인 주체세력을 말한다. 그리고 신채호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소아’에 연연해하고 불사(不死)의 민족적인 자아에 눈뜨지 못함을 개탄하면서, 대아를 찾을 것을 촉구하고 있다.
신채호는 이후 다시 <我란 관념을 확장할지어다>(대한매일일보 1909. 7)라는 글을 통해 ‘아’의 관념을 확장하여 ‘대아’의 애국적인 주체세력을 형성할 것을 주장한다. 즉 주권회복의 기틀은 세계대세가 변동하는 날에만 마련되는 것이 아니라, 애국적 주체세력이 시세를 ‘능동적’으로 만들어 ‘주체적’으로 이용하는 데서도 마련된다는 것이다.
논제는 동물들의 행동특성을 설명한 (가) 제시문을 고려할 때, ‘대아’를 강조하는 (나)의 견해에 어떤 의의와 문제점이 있는지 논술하라는 것이다.
개인의 이해관계를 넘어 선 민족정신이나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요구하고 있는 신채호의 입장은 피지배 약소국의 해방이라는 대명제하에서는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신채호는 다른 글 <금일 대한민국의 목적지>(대한매일신보 1908. 5)에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수행해야 할 역할을 밝히기도 했다. 신채호는 당시의 한국민족과 한국 민족주의의 최대급무와 목표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물리치고 국권을 회복하여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신채호가 말하는 민족주의의 구체적인 특성과 의의가 이러한 데 있다.
신채호가 역설한 민족애는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J. G. Fichte)의 민족애에 닿아 있다.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은 상당부분 피히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신채호의 국사상(國史像)인 국혼(國魂)개념은 독일 민족주의 사학에서의 “Geist"에 해당하며 피히테의 ‘민족이념(die Nationale Idee)과 유사하다.
피히테는 프랑스의 나폴레옹군에게 독일연방이 유린당하고 있던 1807년 당시 베를린 아카데미에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강연을 통해 독일이 처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반성을 촉구했다. 이 강연의 요점은 독일 국민을 패망에 이르게 한 근본적 원인을 이기심에서 찾고, 이 이기심을 새로운 국민 교육에 의해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국민 교육은 주체적인 정신활동을 중요시하는 페스탈로치의 교육 사상과 결합되며, 이러한 교육에 의해 참된 민족적 공동체 의식이 각성될 때, 독일 국민은 잃어버린 독립을 되찾고 세계사적인 민족으로서의 참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피히테의 연설문은 그 내용의 문제점을 떠나 그 존재자체가 무척 감격스런 교훈이다. 특히 지식으로서, 침략군이 점령한 상황에서 국민이 반드시 들어야 할 말을 서슴지 않고 떳떳이 절규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외에도 민족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약소국가들로 하여금 강대국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주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점이나, 국가발전을 위한 근대화의 초기단계에서 민족주의가 가장 유력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시문을 통해 보더라도 ‘대아’를 강조하는 신채호의 사상에는 개인성을 외면한 이른바 전체주의(全體主義)적 발상이 있다. 피히테의 연설문이 그러한 것처럼 신채호가 말하는 개인은 인류나 신과 같은 보편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 또는 국민이라는 한정된 보편에 대해서 존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한정된 보편인 국가에 대해서 자기동일화(自己同一化)한 상태가 신채호가 말하는 국가애(國家愛)이다. 이 사랑의 대상은 국가로서의 대아(大我)이며 이것은 국학자들이 추구해온 민족얼에 해당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가) 제시문에 나타난 동물들의 행동특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동물들의 행동특성에는 집단을 위한 이타주의와 개인적 이기주의가 절묘하게 결부되어 있다. 결국 개인성을 무시한 전체주의가 초래할 수 있는 다양한 폐단이 지적되어야 하는 것이다.
※참고한 책
ㆍE. H. 카 (박종국 옮김) 「역사란 무엇인가」 육문사
ㆍJ. S. 밀 (이극찬 역) 「자유론」 삼성출판사
ㆍR. 도킨슨 (홍영남 옮김)「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
ㆍ신용하 「신채호의 사회사상 연구」 고대출판부
ㆍJ. G. 피히테 (황문수역) 「독일 국민에게 고함」 범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