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상 뒤에 비밀의 방이 있었다. 지난해 여름 특검이 건진법사의 강남 법당을 압수수색했을 때, 거실에서 나온 것은 일본 신 '아마테라스'를 모신 신당이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신토(神道)의 주신이자 일본 황실이 시조로 받드는 황조신(皇祖神)이다. 대통령 부부와 가깝다던 사람의 법당 한복판에, 일본 황실의 조상신이 앉아 있었다는 얘기다.
사람들이 분노한 것은 당연하다. 이 땅에서 '아마테라스'라는 이름이 어떤 기억과 붙어 있는지 생각하면 더 그렇다.
1925년 일제는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우고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을 제신으로 앉혔다. 그리고 조선인에게 참배를 강요했다.
신사참배는 개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신토(國家神道)'라는 통치 장치였다. 그러니 이 분노는 감정 과잉이 아니다. 민족의 정체성과 주체적 세계관에 대한 감수성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다만 짚을 것은 짚어야 공정하다. 신앙 자체는 죄가 아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에는 일본 신을 섬길 자유도 들어 있다. 문제는 그 신당이 국정 최고위와 얽힌 비선의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 더,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는 질문이 남는다. 남의 신을 섬긴 이들에게 이만큼 분노하는 우리는, 정작 우리의 국조(國祖) 단군을 어떻게 대해 왔는가.
단군은 옛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끝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역사요, 뿌리요, 사상의 근원이다.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이화세계(理化世界).
'홍익인간'은 '뜻'이다. 아직 아무것도 행하기 전, 환인이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며 세운 근본 목적이다.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왜 하는가에 대한 답이다. 모든 일의 씨앗이 되는 발원(發願)이다.
'재세이화'는 '행함'이다. 뜻만 하늘에 두지 않고 환웅이 직접 세상에 내려와(在世), 그 안에 머물면서 이치로 다스렸다(理化)는 것. 여기서 중요한 건 '재세' 두 글자이다. 세상 밖에서 내려다보며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들어와 함께 살면서 교화한다는 실천의 자세이다. 방법 또한 힘이나 강제가 아니라 이치, 곧 도리로써다.
'이화세계'는 '이룸'이다. 홍익의 뜻이 재세이화의 실천을 거쳐 마침내 도달하는 완성된 상태, 이치가 두루 미쳐 교화가 이루어진 세상이다.
재세이화가 과정이라면 이화세계는 그 과정이 완결된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 문장으로 꿰면 이다.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뜻을 품고(홍익인간), 세상 속에 들어가 이치로 다스리는 실천을 통해(재세이화), 마침내 이치로 교화된 세상을 이룬다(이화세계). 뜻이 실천을 낳고 실천이 세상을 완성하는, 목적과 방법과 결실이 하나로 이어진 길이다.
현행 교육기본법 제2조는 지금도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2024년 가을 대법원은 교사의 지도행위가 학대인지 가리는 판결문에서 바로 이 조항을 판단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단군의 언어는 지금도 대한민국 법정에서 쓰이는 현행법의 언어다.
제헌 국회는 한 걸음 더 나가 있었다.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에 만든 연호법은 대한민국의 공용 연호를 '단군기원'으로 정했다. 관보와 공문서가 단기로 날짜를 적던 시절이 실제로 있었다. 그 연호가 서력기원으로 바뀐 것은 1961년 말의 일이다.
국제 관행과 행정 편의라는 명분은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남는 사실은 남는다. 정부수립의 설계자들은 나라의 시간을 단군에서부터 세었고, 우리는 그 시간을 스스로 접었다.
그 뒤로 단군의 자리는 조금씩 좁아졌다. 교과서에서 고조선은 몇 쪽으로 지나가고, 본격적인 역사 서술은 삼국시대부터라는 인상을 준다.
개천절은 국경일로 남아 있으나 그 의미를 묻는 사람은 드물고, 정작 단군을 진지하게 말하면 국수주의자나 사이비로 의심받기 십상이다. 얄궂은 일이다. 일제 식민사학은 단군을 역사 바깥의 신화 영역으로 밀어냈고, 단군을 받들던 대종교는 만주에서까지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지우려던 쪽은 그만큼 집요했는데, 지켜야 할 쪽이 무심했다.
다만, 역사학이 단군조선을 신중하게 다루는 것은 홀대가 아니라 사료비판의 결과라는 지적이 있다. 단군 기록을 담은 현존 최고(最古)의 문헌인 '삼국유사'는 13세기 말의 책이고, 고조선의 실체는 청동기 문화와 문헌·고고학 자료를 교차 검증하며 조심스럽게 재구성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 신중함은 존중받아야 하고, 부풀린 상고사는 오히려 단군을 욕보인다.
그러나 더 근본을 말하면, 단군은 애초에 실증의 도마 위에서 판가름날 존재가 아니다. 탄소연대 측정기로 믿음의 뿌리를 재는 법은 없다.
우리가 가진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따로 있다. 이 공동체는 문헌으로만 따져도 칠백 년 넘게, 입에서 입으로는 그보다 훨씬 오랜 세월, 단군의 이름을 물려받아 왔다는 사실이다.
고려는 몽골의 압제에 신음하던 시기에 단군을 나라 기원의 첫머리에 적었고, 조선 왕조는 평양에 사당을 두어 단군에게 국가 제사를 올렸으며,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개천절을 지켰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로부터,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그 시간을 우리는 반만년이라 불러왔다. 단군을 기린다는 것은 연대를 조작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전승 그 자체가 이미 역사적 실재이며, 한 공동체가 자기 기원의 서사를 어디에 두고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 곧 기억의 정치에 속하는 문제라는 뜻이다.
일본이 아마테라스의 실재를 고고학으로 증명해서 이세신궁을 받드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박은식은 나라를 빼앗긴 직후 '한국통사'에 "나라는 형체요, 역사는 정신"이라고 썼다. 형체가 무너져도 혼이 살아 있으면 나라는 다시 선다고 그는 믿었고, 그 국혼(國魂)의 첫 자리에 단군을 두었다.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라 정의했을 때, 그 '아'의 출발점 역시 단군이었다.
두 사람은 망국의 한가운데서 같은 것을 목격했다. 국조의 기억이 비면 그 자리는 그냥 비어 있지 않다. 반드시 다른 무엇이 들어와 앉는다.
백 년 전에는 남산의 조선신궁이 그 자리에 들어섰고, 지금은 강남 법당의 신당이 들어섰다.
그래서 이 사건이 던지는 진짜 질문은 한 개인의 기이한 취향이 아니다. 우리의 분노가 정당하려면, 그 분노의 크기만큼 우리 뿌리를 돌보는 일에도 진심이어야 한다.
남의 황조신을 섬긴 이들을 꾸짖는 목소리와 제 국조를 잊고 지내는 일상이 한 몸에 있다면, 그것은 '내로남불'이다.
'홍익인간'은 '법전'에 살아 있고 '개천절'은 '달력'에 살아 있다. 죽은 것은 제도가 아니라 관심이다. 부처상 뒤의 비밀 방보다 무서운 것은 우리 기억 속에서 단군이 밀려나 앉은 구석방인지도 모른다.
이참에 물어야 한다. 우리는 누구이고 그 뿌리는 어디서 왔는가. 그 답의 첫 줄에 단군을 다시 적는 일, 거기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