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도마호음 15 에관한 토론을 보면서 아쉬움 점과 느낀 점이 있어..
넓은 아량으로 저의 글을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선악적 판단이겠지만,
형상과 글의 모임에 참석하시는 분들에게 꼭 하고픈 말이 있습니다.
이번 토론은 토론이기 보다는
휘오스님의 설교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면,
토론의 주관을 돌아가면서 하시면 어떨까요?
답이 없고 각자의 나눔이라면 모임에 계신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너무나 기독교적인 행태에 질려 버린 저에게 주입식이나 설교식의 모임은 서로의 생명자람에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토론에 대한 일정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모임에 모이는 분들도 각자 일주일간 깊은 묵상을 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지식이 모임의 주된 목적이 아니라.
각자안의 실존의 하나님이 본질이라면
각자안에 도마호음 15에 관한 자신의 실존의 모습을 드러냄이 생명의 나눔이라 생각되어집니다.
인간의 말이 부족하고 어눌하여도
각자가 자신의 입으로 말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실존을 드러냄이며
그 드러냄을 통하여 생명의 만찬이 이루어진 다고 생각됩니다.
비록 지식적인 부족함이 있는 참석자들(저의 개인적인 생각)이시겠지만,
서로 돌아가면서 토론의 리더가 되어
휘오스님과 조도재님이 뒤에서 보조(?)해 주시면 더 진지하고 온라인 상의 다른 회원들에게
정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토론이 산만하게 진행되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 또한 형상과 글의 현재 모습이 아닐까요?
한번쯤 아니 앞으로 지향해야 할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모임에 오시는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그분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현재의 형상과 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울이라 생각되어집니다.
형상과 글을 이끌고 계시는
휘오스님과 조도재님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 같은데요...
이끄는 자가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듣는 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죄송하지만!
항상 질문을 던지시는 휘오스님과
짤막한 답을 하시는,, 또는 침묵하시는 상황을 보면서.
의문이나
자신의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가 저리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시간적인 제약 때문인지.
아니면
휘오스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함인지.
아니면
말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져서 인지 ...
죄송합니다.
이런 글을 올려서
다 알아서 듣고만 계시는 것인지.
오늘은 마음이 그렇습니다.
비판에 익숙해져버린 저의 첫사람인가 봅니다.
온라인 상의 회원들은 정제된 깨달음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 보다
그 본질을 향하여 찾아가는 열띈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첫댓글 샬롬!! 모임에서 한자리를 지키는 자로 답변을 드리면 생명의 언어는 세상의 언어를 빌려쓰고 있지만 각자의 내면의 상태를 유창하게 흘러보내지는 것이 아니라봅니다. 모임에서 각자의 내면의 몸짓을 주어진 감각기관 넘어로 공명과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가는 순례자로 서로 서로 부족함을 담론하며 온전함에 도달하기를 내 자신은 소원하고 있습니다. 세상언어로 유창하게 진리를 논하기는 각자의 삶의 여정이 다르므로 이해를 요한다 봅니다.
필그림님의 글, 어느정도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서로 서 있는 위치는 다를지언정, 같은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것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서로 서 있는 곳의 풍경과 경치를 또 다른 나에게 소개해 주는 것도 어느정도 의미있다 봅니다. 다만 서로가 서로 '된'이야기를 해야지, '들은'이야기를 해서는 무익한 것이 되겠죠. '됨'자체를 서로 나누고 즐기는 것.. 또 다른 예배의 형태 아닐까 합니다. 초가집님의 말씀처럼 삶의 여정이(서 있는 위치가..) 다르므로 이해를 요하는 부분이 있을 순 있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됨'을 이야기 할 때에는, 그저 서로간의 끄덕거림(긍정, 동의)만이 있을 뿐입니다.
내 이야기가 그의 이야기이고, 그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되어져서 존재하는' 그 말씀을 나누는 것, 나쁘지 않습니다..
같은 목표라 함은 그리스도의 형상(삶)을 닮아 가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겠지요.[빌] 3: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빌] 3: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 필그림
죄송합니다.
이런 글을 올려서....저도 죄송합니다 이런댓글을 드려서...
사실 나그네 여정에서 그 무엇들을 선후(?)로 구분지으며 해대던 자질은 이전 동네에서 질리도록 해서인지
김창호님이 독파하든 지식이 부족해서 즉 표현력이 부족하거나 말주변이 없어서 참석하신 분들이 침묵하든 저 같은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올리신 내용의 의미..필그림님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 했습니다. 하지만 저 개인에게는 전혀 무익(무관)한지라 걍 지나치면서,,,,,이처럼 완곡한 글을 올리신 필그림님은 무엇을 얻으려(?) 하심인지....................무지 궁금해지네요(무엇이란 표현이 다소 모호 합니다만 --;)
오랜만에 토론이 활성화 된 느낌이군요 ㅎㅎ
토론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니 첫사람의 세상에서 어떤 명제에대하여 보편 타당성을 추구하며 결국에는 숫자와 힘의원리에 함몰됨을 많이 겪었습니다.
하늘차원의 그 곳은 토론이 필요없음을, 생명의 향기를 각자가 흘러보내지만 생명의 향기에 서로가 취하여 생명의 하모니를 만든다 봅니다.
선악나무가 베어진 다음에야 생명나무의 싹이 움트겠지요.
ㄷ
육신의 생각은 사앙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하셨으니 모두가 생각의 문제이겠지요
다양한 의견 감사합니다. 입이 있고 눈이 있고 귀가 있고 마음이 있는지라.. 입으로 이야기 하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움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을 위해 말을 하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끼고자하는 발로가 아니라! 생명이기에! 실존이기에! 말을 흘러내고 호라오의 눈으로 보고 들음의 귀로 듣고 주님의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의 '타흐레마'가 긍정과 공감의 차원을 벗어남을 생각해 봅니다....
^^ 이야기가 토론방식에 집중되어 있군요. 물론 그 점도 얼마든지 논의해도 좋습니다. 시사토론(?)이 아닌지라 찬반토론의 열띤 형태가 되기는 어렵구요. 언제든 치고 나와야 토론이 왕성해지는데, 그 때 그 때 다를 수 있고, 하나의 방법으로 정형화될 수 없지요. 구성원에 따라서, 그리고 각자의 그 때 그 때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방법론은 그쯤하고 이 곳에서는 토론주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자'에대한 논의와 여자, 그리고 아버지, '나' 등, 이미 언급된 개념들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보이는 만물이 보이지 않는 생명의 본질을 나타냄이라면, 아무튼 생명이란 자연스러운 신진대사 처럼 '활동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안의 충만함은 넘침으로 표현 되어질 것이고, 생명의 호흡으로 나타날 것이라 생각합니다. 말씀에 대한 실존이 이루어지는 것은 이런 보이는 생명의 활동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 보이지 않지만 실존하는 것을 아는 우리(?)에게 보이는 세상을 사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실존의 모습이 보이는 것으로도 흘러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우리안에 거하시는 것도 --- 로고스(보이지 않는 실존) 육신(보이는 실존) --- 육신의 예수의 보여졌던 삶은!!!!!!!!!
여인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 배꼽없는 존재(?)는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일까요? 분명 알에서 태어나면 배꼽은 없을테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존재(?)가 아닐테지요. ㅋㅋ 기왕이면 이 곳 온라인에서 토론을 확장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님들의 이야기를 해보시길 바랍니다. 님들의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보이지 않는 실존이 보이는 실존으로 살아감을 징조함이 아닐까! 생각되어집니다. -- 바라보는 사람이야 어떤 시각으로 보던 간에 -- 나는 나가 아닙니까! -- 나는 나로서 살아가고, 그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다른이에게 생명의 나눔이 되겠지요..
자유광장 도마호음 15 온라인 토론광장으로 올려 놓았습니다. 그쪽으로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