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는 형주로 와 신야에 주둔하자 형주의 호걸과 선비들 중 그에게 귀부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유비는 천하 영웅으로 이름이 높았으므로 많은 형주의 사인들은 조조를 대적할 유일한 인물로서 그에게 기대를 걸었다. 사인들뿐만이 아니었다. 무장이나 호걸들도 유비에게 새로 의탁해 왔다. 풍습이나 장남 등은 유비가 신야에 주둔하고 있을 때 새롭게 의탁해 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후일 유비가 촉으로 들어갈 때 함께 종군했다.
유비는 또 형주에 체류하는 기간 중에 양자를 들였다. 유비가 장년에 이르렀음에도 후사를 이을 자식이 없자 주변의 권고에 의해 장사(長沙) 군에 사는 유씨(劉氏)의 조카이며 나후(羅侯) 구씨(寇氏)의 아들인 구봉을 양자로 입양했다. 당시 구봉은 나이 이십의 건장하고 무용이 뛰어난 젊은이였는데 이름을 유봉(劉封)으로 바꾸었다.
유비에게 의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유표와 그의 측근들은 점차 경계심을 품게 되었다. 이들은 유비가 행여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까 의심하고 은밀히 그를 견제하고자 했다.
이런 형편이다 보니 유비에게는 그가 기대했던 것과 같은 중책은 주어지지 않았다. 특히 대군을 지휘할 기회는 철저히 봉쇄되었다. 유비에게는 조조의 침략을 막는 번병 역할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병력으로서 삼천 명 정도의 병력 보유만 허용되었다. 유비가 형주에 의탁하고 있던 팔년 동안 유표가 유비를 군사적으로 활용한 것은 박망파의 싸움이 유일했다. 사실은 이것도 유표가 유비를 활용했다기보다는 유비의 강력한 요청에 유표가 마지못해 출병을 허용했을 뿐이었다. 관도대전 시에 유비의 권유에 따라 유표가 전력을 기울여 조조를 공격했다면 천하의 형세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유표는 단 한 명의 병사도 유비에게 보태주지 않았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한 유비가 자신의 휘하 병력만으로 단독 출병해 보았다가 조조의 후방에 대한 대비가 단단한 것을 보고 후퇴한 것이 박망파 싸움의 본질이었다.
건안12년(207년) 조조가 북쪽으로 오환족을 정벌하러 가자 유비는 다시 유표에게 허도를 습격하자고 설득했다. 유표는 능히 이 제안을 채택하지 못했다.
조조가 유성(柳城)에서 돌아온 후에야 유표는 후회하며 유비에게 말했다.
“그대의 계책을 사용하지 않아서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구려.”
유비가 태연히 그를 위로했다.
“지금 천하는 분열되어 매일같이 서로 창칼을 맞대고 있는 형국입니다. 대업을 이룰 기회가 어찌 이번이 마지막이겠습니까? 다음 기회를 맞이해 잘 활용하면 될 것이니 그리 한스러워 하실 것 없습니다.”
유표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조조에게 사자로 보냈던 한숭에 대한 처사를 보면 이를 알 수 있었다. 한숭은 아직도 투옥되어 석방되지 않고 있었다. 조조 역시 원씨의 남은 세력들을 척결하느라 남방은 돌아볼 틈이 없었다.
유비의 역할은 한가롭게 유표와 한담이나 나누며 가끔씩 손님이나 접대하는 의례적인 일에 한정되었다. 유표는 과거 조정에서 활약하면서 팔준의 하나로 꼽히던 명사였던 만큼 과거 한나라 조정의 중신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으나 천하대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정보수집 차원에서 이들에 대한 인물평을 나누기를 좋아했다.
한때 중원을 종횡하면서 천하의 영웅들과 쟁패했던 유비는 그에게는 좋은 담론 상대였다. 수시로 불러서 담론하면서 북방인사들에 대한 인물평을 나누었다. 한번은 연주에서 조조의 종사로 있었던 허사(許汜)가 형주목 유표를 찾아왔다. 유비도 자리를 함께 했다. 허사는 진궁, 왕해 등과 함께 여포를 맞아들여 조조를 위기에 빠뜨렸던 인물이었다. 그는 여포와 함께 서주로 망명했었으므로 유비와는 안면이 있었다. 허사는 서주가 패하고 난 후 구명도생하기 위해 유랑하는 처지가 되어 형주로 유표를 찾아왔다. 유표는 유비와 천하의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나누고 있던 참에 허사를 보자 진등의 사람됨에 대해 물었다. 허사가 대답했다.
“진원룡(陳元龍)은 호탕한 기풍이 있는 야인입니다. 호기가 넘쳐 잘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호해지사(湖海之士)란 고사성어가 여기서 유래되었다. 유비가 이 말을 듣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유표에게 물었다.
“허군(許君)의 논의가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유표가 대답했다.
“틀렸다고 하자니 허군이 훌륭한 선비여서 헛말을 했을 리가 없을 것 같고, 맞다고 하기에는 진원룡의 명성이 천하에 너무 자자한 것 같군.”
유비가 허사에게 물었다.
“그대가 진원룡이 거드름을 피운다는 말을 했는데 그대와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소?”
허사가 대답했다.
“지난 날 난을 만나 하비(下邳)를 지나가게 되어 원룡을 만나보았습니다. 원룡은 주인으로서 손님을 제대로 대접할 의사가 없는지 서로 오래 말을 나누지도 않고 나서는 자신은 큰 침상 위에 눕고 저에게는 침상 아래서 자게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유비가 말했다.
“그대는 국사(國士)로서 명성이 있소. 지금 천하는 대란에 빠져 천자께서는 몸 둘 곳이 없으니 사람들은 그대가 사사로운 일을 잊고 나라를 걱정하고 세상을 구하겠다는 뜻을 가질 것이라 기대하고 있소. 그런데 그대는 일가를 데리고 살 전답이나 구하고 주택이나 달라고 요청하니 그대의 말에서 채택할 것이 없소. 이것은 진원룡이 꺼려하는 바이므로 어떤 이유로 그대와 말을 나누고자 하겠소? 나였다면 백 척의 높은 누각 위에 눕고 그대는 맨 땅에서 자게하고 싶었을 것이오. 어찌 단지 침상 위와 아래 정도의 차별 정도였겠소?”
유표가 크게 웃었다. 유비가 말했다.
“원룡은 문무를 겸전하고 담대하고 뜻이 커 옛 사람의 사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와 같은 인물은 잠시도 얻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처럼 한담이나 나누는 일이 그의 역할이었다.
유비가 형주로 간지 수년이 지나 한번은 유표가 베푼 연회에 참석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 자리에서 일어나 측간에 갔다가 허벅다리 안쪽에 살이 붙은 것을 보니 절로 슬퍼 눈물이 나왔다. 유비가 자리에 돌아와 앉자 유표가 그의 얼굴에 눈물 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다. 유비가 대답했다.
“저는 항상 말을 타고 전진을 누빈 탓에 허벅다리에 살이 붙은 적이 없었습니다. 세월이 살같이 흘러 이미 노장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이루어 놓은 공업이 없으나 이래서 슬퍼한 것입니다.”
여기서 비육지탄(髀肉之嘆)이란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유비는 술기운에 저도 모르게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었다. 유표와 그 측근들은 유비가 야심이 있는 인물이라 생각해 더욱 경계하고 의심했다. 유비가 번성에 주둔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유비는 박망파에서 후퇴한 후 군대의 주둔지를 번성(樊城)으로 옮겼다. 별달리 중요한 군무가 없는데다가 유표가 자주 찾았기 때문에 양양과 가까운 곳에 군진을 옮긴 것이었다. 양양과 번성은 한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