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론 – 나의 객관화, 대상의 주관화 그리고 ‘왜’
이동민
책을 읽으면 나를 붙잡아 두는 책도 있고, 한 두 페이지를 읽고는 놓아버리는 경우도 있다. 책을 쓴다면 독자들이 끝 페이지까지 읽어주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의 공통된 마음이다. 첫 장 몇 페이지를 읽고 책을 놓는다면 여간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다.
책도 자기의 책장을 끝까지 넘겨주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독자에게 물을까. 자기를 탄생시킨 작가에게 물을까. 일차적으로는 작가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책의 책무는 독자에게 읽히는 것이다. 독자가 끝까지 읽지 않는다면 독자보다는 책무를 완수하지 못한 책의 절못이 크다. 책보다는 책을 탄생시킨 작가가 책임의 몫을 떠맡아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작가는 독자를 책에 붙잡아 두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독자를 책에 붙잡아 두는 방법으로, 독자가 책의 내용에 ‘왜?’라는 의문을 가지도록 한다. ‘왜?’라는 의문을 가지면 독자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호기심을 가진다. 사전에서 호기심을 설명하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쏟는 마음의 태도이다.’ 또 ‘호기심을 가진 사람은 왜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런지 질문한다. 라고 했다. 역으로 말하자면 작가는 독자가 책의 내용에 대해서 왜 이러한지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도록 써야 한다.
그렇다면 독자가 우리 수필을 외면하는 이유는 수필의 내용에 의문을 가지지도 않고, 질문하지도 않는다 하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필의 속성을 찾아보자. 우리 수필은 회상 형식이 90% 이상을 차지한다고 했다. 회상은 개인의 과거사를 현재로 불러내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개인의 과거사는 개개인마다 다르다. 그러나 하나로 뭉뚱그려서 보면 같은 시대를, 같은 지역에서 같은 가치관을 갖고 살아왔기 때문에 개개인이라 하더라도 회상으로 불려오는 과거사가 유사하다. 개인의 과거사이지만 모두 시대가 요구하는 틀 속에서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그 틀을 벗어나려 몸부림치며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수필을 쓰는 기법마저 동일하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석가님의 말씀을 인용하면 법이라는 하나의 용범에서 빠져나온 물건처럼 이 작품이나, 저 작품이나 내용의 이야기를 같은 구성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회상‘의 심리적인 작용은 작품을 천편일률적으로 만드는 경향을 띄게 한다.
과거를 사실성이라는 수필의 법칙에 갇히어서 상투적으로 표현하다 보면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작품의 내용들이 어슷비슷해진다. 결과적으로 글의 내용이나 표현 기법의 차이가 없다면 첫 머리만 읽고서도 뒷 이야기가 떠오르므로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 책을 놓아버린다.
호기심을 가지게 하려면 위에서 본 사전적인 뜻을 새겨보자. 위의 설명을 반대로 시행해 본다. 독자가 작가의 이야기에 끊임없이 질문하도록 구성하는 것이 방법이다. 수필 구성은 독자가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도록 이야기의 틀을 짜는 일이라 하겠다. 더 요약한다면 이야기 만들기이다. 이야기는 우리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속성 상 호기심이 생기도록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필로 쓴다면 이야기를 소설보다는 좀 더 수필에 가깝도록 구성한다.
표현 기법을 먼저 살펴보자.
수필적인 요소들 중에 우선 화자부터 살펴보자. 수필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임으로 1인칭 화법을 구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1인칭 화법에서는 화자가 있고, 이야기의 대상이 있다. 1인칭 화법은 화자의 생각이 언어의 중심이 된다. 화자의 언어는 화자의 생각을 풀어내므로 바로 수필이다. 이것은 오늘에 통용하는 수필 일반론이다.
1인칭 화법은 대상이 아닌 자신의 생각이 중심이 된다. 이래서 수필은 1인칭 서술법이라고 말한다. 최근에 와서 문학사에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라면 소소한 자기 이야기가 하나의 흐름을 이루었다. 소설에서도 자전소설이 유행했고, 자전소설이 성공을 거두었다. 2022년인 금년의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는 자기가 경험한 사건을 소설로 발표한 작가이다. 바로 그 이유로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자기 이야기가 중심인 수필은 문학의 변방으로 밀려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특이한 일이다. 우리 수필이 변방으로 밀려날 만큼 잘못된 것이 무엇일까? 우리 수필가들이 시대의 흐름을 올바르게 읽지 못하여 흐름을 타지 못한 탓일까?
일인칭 기법으로 자전 형식의 소설을 써서 2022년도 노벨상 수상작가가 된 아니 에르노의 소설 기법을 참고삼아서 우리의 수필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가늠해 보자.
그는 자기의 감정을 일인칭으로 표현할 때도 주관적 관점이 아닌, 객관화하여 표현하였다. 3인칭의 대상물도, 대상물이 1인칭으로 말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물론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형식을 취했다. 지금의 우리 수필이라면 작가가 대상물을 보고 느낀 점을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형식이 될 것이다. 주관적 관점에서 글쓰기를 하는 것은 우리 수필이 늘상 해온 서술기법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노벨상 수상작가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구해서 읽어보았다. ’단순한 열정‘을 구해서 읽었다.
’단순한 열정‘은 60페이지 쯤의 짧은 소설이었다. 내용은 유부남과 불륜의 사랑을 다루었다. 소설이라면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으며, 갈등을 일으키는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며 어떻게 결말을 지을까로 구성하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이야기라고 할 만한 전개가 없었다. 이야기래야 어떤 남자와 사랑을 나누었다, 라고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작가는 한 남자와 나눈 사랑을 그의 사유를 통하여 언어로 끊임없이 구술하였다. 유부남과 불륜이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갈등 구조의 이야기를 만드는데 좋은 원인의 제공자이어야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갈등이나, 불륜의 문제 같은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1인칭 화법으로 그 남자에 대한 자신의 사랑 감정을 격렬하게 표현하였다.
하나의 예로서, 자신의 행위를 어떻게 표현하였는가를 보기로 하자. ’침대에서 일어서서 벌거벗은 몸으로 냉장고의 문을 열고 맥주를 꺼냈다.‘ 자신의 행위를 마치 제 3자의 행위를 표현하듯이 했다. 주어를 3인칭인 ’그‘ 또는 ’그녀‘로 하더라도 문장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주어가 생략되어 있지만 문맥상으로는 1인칭인 ’나‘가 주어이다.
언어나, 사고의 대상을 표현할 때도 1인칭 기법으로 하였다. 대상이 1인칭 주어가 되어서 말한다. 사실은 대상이 하는 말은 작가가 하는 말과 다름 아니다. 화자나, 화자가 말하는 대상이 모두 1인칭 화법이라면 소설의 흐름으로 글을 썼지만 수필의 기법과 하나 다르지 않다. 수필도 이런 형식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수필쓰기에서 나를 객관화하여 1인칭으로 표현하면 어떨가? 나는 재미 있는 화법이 되리라 믿어진다.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든다면 이야기가 사건의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사고를 표현하는 방식의 이야기가 되리라. 나는 우리집 옆의 범어동산 산책로를 일년 내내 운동삼아 다닌다. 범어동산의 나무 색상은 사시사철 철따라 변한다. 나는 수필에서 변화를 주관적 관점에서 표현했다. 단풍이 곱게 물드면 단풍이 나에게 던져주는 감정의 실마리를 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풀어나갔다. 그러나 단풍으로 단장한 나무들 사이의 오솔길을 내가 걸어갔다. 라는 방식의 서술을 한다면, 독자의 느낌도, 분위기도 달라질 것이다. 작가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독자 스스로 분위기에 빠져서 자기 나름의 감정을 느낄 것이다.
대상물의 주관화도 생각해보자.
대상물도 자기의 사고와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수필에서는 그들의 사고나 감정을 나의 관점에서 해석하면서도 나의 주관적 서술이 마치 그의 사고이고, 감정인 듯이 표현한다. 독자도 그렇게 생각하게 한다. 수필은 개인의 독백이고, 고백이니 하는 것은 잘못된 서술 이론이 아니다. 그러나 작가의 서술이 대상을 올바르게 읽고 표현하였을까. 올바르게 읽지 못한 서술이라면 독자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오히려 혼란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1994년에 샘터사에서 ’어머니에게 쓰는 짧은 편지‘라는 제목으로 공모전을 하였다. 그때 대상을 받은 작품은 부산에 사는 29세의 주부가 쓴 편지였다. 이랬다.
“생선장사 비린내 엄마
버스 차창 너머 하교길의 날 보셨다지!
당신을 보고도 얼굴 돌리던 딸년이 서러워
그렇게 우셨다면서요.
그날! 정말 엄마를 본 게 아니었어요.”
화자인 작가가 자기의 관점에서 어머니를 서술하였다. 주관적인 표현이다. 작가는 어머니를 보지 않았다는 자기 이야기이다. 그러나 대상인 어머니를 1인칭으로 하여 이 상황을 기술한다면 어떤 글이 될까. 작가는 오해라고 하였지만 어머니 자신이 느끼는 슬픈 마음을 1인칭으로 표현한다면 이것도 재미있는 수필이 되리라 싶다.
내가 아는 유명한 변호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수필이 아니고 이야기로) 어머니는 대구 서문시장에서 난전을 하여 자기를 학교에 보냈다. 판사가 되어서 어머니를 모시고 비싼 식당에 가서 음식을 주문했다. 상이 그득한 음식물을 보고 ’이건 얼마나 하느냐‘고 물었다. 가격을 말했더니 어머니는 수저를 들지 않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면도 있지만 어머니를 1인칭으로 하여 글을 썼다면, 변호사가 전해준 이야기와는 다른 내용이 표현될 것이다. 어쩌면 훨씬 더 가슴이 찡한 이야기로 전개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문예이론으로는 그런 글을 수필이 아닌 소설로 분류하리라 싶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그런 글이 반드시 소설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얼마든지 수필이 될 수 있다.
생선장수 엄마도, 난전의 어머니도 작가와는 분명히 다른 사유 세계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우리 수필은 작가의 주관적인 사고만을 표현했다. 대상의 태도를 1인칭 화법으로 빌려온다면, 내가 경험하지 않았던 세계에 대해서도 더 깊고, 넓게 표현해낼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을 수용하는 마음의 자세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