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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김 정 한
“경찰서에서 좀 나오라 캅니더.”
눈이 동그랗게 생긴 상고머리 소년 직공이 나를 보자마자 수인사(修人事) 겸 이렇게 말했다.
“와?”
내가 다그쳐 묻자, 소년이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구둣방 주인인 친구 장군(張君)이 깜빡 잊었다는 듯이 얼른 받아서,
“참, 그런 일이 있었다캤제? 이유사 삔한 거 앙이겠나. 가보게. 그러나 어설푸게 굴어서는 안 댄다잇!”
좁은 구둣방 안이 저렁저렁 울릴 정도로 그는 허우대 따라 목소리가 굵었다.
내가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인수한 지 꼭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소위 일장기 말소 사건(日章旗抹消事件)으로 무기 정간을 당했다가 근 일 년이 되어 겨우 복간이 된 뒤에도, 내처 고분고분 말을 잘 안 듣고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해오던 동아일보는 당시 총독부로부터 자진 폐간을 강요받고 있었다. 오라는 곳은 물론 한국인의 사상 관계를 다루는 고등계란 데였다. 이름만 들어도 정나미가 떨어지는 곳이다.
물론 나는 그들이 부르는 이유를 십분 짐작하면서 갔다. 그 배코머리를 한 계장이란 사람은 내가 간 뜻을 말하자, 그 배코머리를 더욱 인상 깊게 새겨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두어 번 끄덕끄덕해 보이더니,
“당신이 새로 온 지국장이오? 거기 좀 걸치시오, 지국장님!”
이렇게 능청을 부렸다. 직업에서 얻은 버릇일 테지만 잠깐 흘겨보는 듯한 그의 눈초리에는 식민지 백성을 대하는 소위 본토인의 티가 완연히 나타나 있었다.
명함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나는 그저 그렇다고 했다.
“지국을 맡았음 한번쯤 들러주셔야죠. 물론 바빠서 못 오셨을 테지만·…‥”
배코머리는 내처 능글맞게 이런 투의 자문자답을 하면서 담배를 꺼내 물더니, 내게도 권했다. 나는 아니꼬워서 내 걸 피워 물었다.
“교원을 했다지요? 교원보다 신문 장사가 나을까요, 돈벌이가……”
그는 드디어 이상한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이쪽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글쎄요, 해봐야겠죠.”
내 과거와 또 신문을 인수한 동기 같은 걸 미주알고주알 다 알고 하는 소리라고 짐작되었기 때문에 그저 이런 식으로 얼버무려 넘겼다.
“신문도 물론 장사에 속하겠지만 정확한 걸 써줘야 되겠더군요.”
그는 일부러인 듯 커다랗게 벌린 입에서 담배 연기를 한 번 무덕지게 내뿜고는 말을 계속했다.
“가령 독자가 갑자기 줄어든다든가, 수송 도중에 일부 분실이 된다든가, 또는 배달원이 누구에게 얻어맞는다든가 할 경우 말입니다. 그런 걸 마치 관이나 그런 데서 방관하고 있다든가, 더 심한 예로는 일부러 시켜서 그러리라는 듯한 느낌을 주는 논조로 비뜰어지게 보도하는 따위 말입니다!”
그래서야 되겠느냐는 일종의 으름장 비슷한 말을 했다. 그러고는 은근히 내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는 어설피 굴어서는 안 된다는 장군의 말이 문득 생각나기도 해서 적당히 말했다.
“정확한 보도ㅡ그렇지요. 사실을 사실대로 정확하게 보도하는 것이 신문의 사명일 테니까요.”
이럴 때 나는 방 안의 모든 눈초리가 나를 노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종의 탐색전이었던지 상대방에서는 그 이상 더 묻지도 않았고 이쪽에서도 더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곧 그곳을 물러나왔다.
‘하필 배코머리가…….’
기분이 아주 언짢았다. 어릴 때부터 일본인들의 배코머리를 싫어해온 탓이리라. 군인 출신의 일본인들에게 그런 게 많았고, 또 내가 만난 배코머리의 일인들 가운데는 유달리 표독한 성깔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럽게 걸렸다는 생각과 아울러 적개심도 한결 치밀었다. 능글맞게 사람을 쏘아보는 놈의 눈초리도 얼른 잊혀지지 않았다.
지국― 이라기보다 지국 간판이 한쪽에 걸려 있는 장군의 구둣방에 돌아오자, 장군은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행내기¹가 앙이제? 일본군 특무대 냄새가 안 나더나? 그래 머라 카더노? 내 말도 하제?”
장군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쏟아놓았다. 그의 부리부리한 눈에는 이상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자네 얘긴 안 하데.”
나는 우선 그를 안심시키듯 해놓고, 특무대 출진이란 그 배코머리가 하던 말을 그대로 옮겼다.
“달〔닭〕 잡아묵고 오리발 내놓는 격이지. 즈그가〔저희들이〕 신문 방해를 안 했다꼬? 쳇! 사무실 얻는 데까지 온갖 심청을 다 부리 놓고서도…….”
장군은 코웃음을 쳤다. 코웃음을 치는 장군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그가 부하들을 들볶아서 동아일보 독자 명단을 만들어서 우선 말랑한 사람들부터 찾아가 신문을 끊도록 들쑤신다든가, 심지어 술도가(都家) 같은 데서 신년 축하 광고 내는 것까지 방해를 했다는 것은 이미 동래 사회가 다 아는 일이었다.
사무실 문제만 하더라도 바로 내게 빌려주겠다고 약속했던 친구가 갑자기 찾아와서 다른 델 구해 달라고 되레 사정을 하지 않았던가? 놈들의 압력 때문에 사업에 지장이 많다는 것이었다.
“사무실 빌려주는데 자네 사업에 무슨 지장이 있노?”
나는 알면서도 헛말삼아 이렇게 빈정거렸더니,
“말 말게, 이 사람. 경제 경찰을 보내서 장부 압수를 해가지, 세무서를 통해서 온갖 지랄을 다 하지…… 말 못 하네, 말 못 해.”
이밖에도 얼마든지 음성적인 박해 방법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제국주의나 독재 정권들의 언론에 대한 음성·양성의 탄압은 어딜 가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내가 동아일보의 지국을 맡은 1940년은, 우리 민족을 완전히 말살시키려던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동아공영권(束亞共榮圈)의 자유와 번영을 위한다는 얼토당토않은 구실을 내걸고서 중국 본토까지 마구 짓밟던 무렵이다.
일제는 자유와 번영이란 말을 무슨 보도처럼 내두르면서도 우리가 자유 언론이란 말만 해도 마구 잠아다가 족치던 판이다.
사실 동아일보의 자진 폐간 강요만 하더라도 저들이야 무슨 핑계를 하든 우리 민족의 완전 말살과 소위 대동아전쟁의 총알받이로 우리 청년들을 내몰기 위한 수작의 하나였다.
그러니까 비록 사무용 책상 하나 만만히 들여놓을 수 없는 방에나마 동아일보의 간판을 걸어놓게 된 것만 해도 군 특무신의 배코머리로서는 안달이 나서 담배 연기를 확확 내뿜을 만큼 아직은 다행한 일 일는지도 모른다.
“가세!”
나는 선걸음에 장군의 손을 끌었다. 배코머리의 얄미운 태도가 자꾸만 머리에 떠올라서만이 아니라, 그런 세월인 데도 불구하고 가뜩이나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이란 일제의 올가미에 묶여서 줄곧 감시를 받고 있는 장군이 관에서 그렇게 싫어하는 동아일보의 간판까지 자기의 구둣방에 걸게 해준 것이 한없이 고맙고 어엿하기도² 해서 별안간 한잔 하고 싶은 생각이 났던 것이다.
“벌써?”
그는 다소 망설였다. 아직 이르지 않느냐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육척 거구를 조그만 나무의자에서 일으켰다. ‘가세!’라면 벌써 서로 통하게 돼 있었다.
장군의 구둣방이 마침 시장 입구짬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부근에는 허름한 목로집들이 많았다. 양산집이란 순댓국집이 장군의, 아니 우리들의 단골집이었다.
“오늘은 좀 일찍이네요?”
서른 남짓한 나이의 양산댁은 나와도 벌써 친숙해져 있었다.
“이지국장님이 아마 양산댁한테 쫄딱 반한 모양이지. 이렇게 일찍부터 사람을 끌고 오는 걸 보면…….”
장군은 이런 농담을 하며 먼저 털썩 걸쳤다. 의자가 약간 휘청했다.
“오늘은 좋은 일이 있어서…… 자, 우선 한 되.”
나는 술부터 청했다.
“또 무슨……?”
우리가 좋은 일이라면, 양산댁은 벌써 그 반대로 곧이들을 만큼 돼 있었다. 그것은 장군이 들인 버릇이라고 생각되었다. 식민지의 옳은 천더기³들은 술로써 그날그날의 억눌림과 불평을 새기개 마련이었으니까.
“신문 맡은 거 후회 안 되나?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더니 구 년 근무한 퇴직금까지 몽땅 털어 넣고서…….”
장군은 또 이런 식으로 나왔다. 벌써 몇 번째 그로부터 듣는 소리다. 그는 일찍부터 청년동맹에 가담하는 등 그런 의미의 사회적 활동에 있어서는 나보다 훨씬 선배의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후회는! 이 길밖에 내게는 없잖았나?”
사실 우리말, 우리 역사 못 가르치게 될 바에야 교육계에 더 남아 있을 필요도 정도 없었던 것이다.
장군과 나는 이내 술이 거나하게 되었다. 꽤 시간이 흘렀다.
“인자 그만 돌아가세. 처가살이하는 사람이 밥이나 지때 [제때] 묵우 주야지.”
장군은 또 이런 농담을 했다.
“이왕 늦었으니 저녁은 여기서 순댓국으로 때우고 말란다. 장모 눈칫밥보다는 그 편이 나을 끼니까.”
처가살이란 말이 약간 귀에 거슬렸던 것이다.
“천벌 맞을 소리 말아라. 자네 장모님이 어떤 분이라고 함부로 그런 소릴 하노? 내 같은 젠장 사우란 놈이 땡전 한 푼도 없이 자식 새끼만 넷이나 줄느런히⁴ 데리고 와 봐. 미쳤다고 그걸 에우고 싸고 해주겠나? 당장 모두 내쫓아버리지!”
장군은 내가 취중에 한 소리를 진정인 줄로 들었는지 이렇게 버럭 화를 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양산집을 나와서 옛날 나무전 골목을 돌아 처가댁 대문 가까이 왔을 때 나는 수채를 향해 웅크리고 앉았다. 손가락을 목구멍 깊숙이 집어넣었다. 술을 조금만 과히 해도 곧 게우는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몇 번 웩웩 하고 막 손수건을 꺼내 손과 입을 닦고 있자니까, 별안간 등 뒤에서 웬 발소리가 자박자박 들렸다. 순간, 나는 일어서는 것을 잠깐 멈추고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있었다. 다행히 골목 안이 어둠침침했다. 지나가던 발소리가 웬일인지 가만가만 되돌아오는 것 같더니,
“아이고마, 우리 김서방 앙이가? 와 여게서 이라고 있노. 어서 집에 들어가자.”
장모의 놀란 목소리였다. 하필 그날에야 어딜 갔다 늦게 돌아오던 길인 모양이었다.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장모는 부리나케 나를 껴안듯 해서 일으켜 세웠다.
“죄송합니더.”
“죄송할 게 멋고, 이 사람아! 집에 가서 토하지, 와 여게서 이라고 있노, 응?”
제 집이 아니라서 만만찮아 그럼을 촌탁⁵했던지 나무란다기보다 오히려 위로하는 듯한 말눈치였다.
“죄송합니다.”
“또 그런 소릴 하제?”
장모는 내 손을 꼭 쥐고 따라왔다.
대문을 들어서자 나는 바른총으로⁶ 우물가로 갔다. 손만 씻고 막 일어서려니까 뒤에서 누가 윗도리에 손을 댔다. 아내였다. 그녀는 내 허구리를 한 번 가볍게 찌를 뿐 말이 없다. 어두우니까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틀림없이 조금은 화를 냈거나 아니면 찡그린 상이리라 싶었다. 내 집 같음 그냥은 안 있을 텐데……! 쳇, 이게 다 처가살이의 덕이려니 생각하고 양복 윗도리를 벗어주고 다시 세수를 했다.
내 식구가 거처하는 방은 안채의 곁방이었다. 네 아이 중 위의 두 놈은 아직 채 잠이 안 들고 있었다. 두 눈이 말똥말똥해가지고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아마 제 어미가 또 내 얘기를 하고 있지 않았나 싶었다.
장모가 잠시 건너와서 내 저녁 걱정을 하고 돌아갔다.
“채리〔차려〕 오끼요?”
아내는 별 내색도 않고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괜찮아, 묵고 왔다 캐도.”
나는 윗목으로 가서 드러눕기가 바빴다. 자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럴 때는 그저 그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한 십오 분쯤 지났을까, 모두들 잠이 든 것 같아서, 나는 다시 일어났다. 속이 별안간 답답해졌다. 자리끼를 거의 한 사발이나 들이켠 다음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내는 수잠⁷을 자고 있었던지 이내 저쪽으로 돌아눕는다.
“조국이 없는 백성들!”
나는 부지중 이렇게 중얼거려 버렸다. 내일의 운명을 모른 채 나비처럼 조용히 잠이 든 네 어린것들의 천진난만한 얼굴과 곱게 빗겨진 아내의 꼭뒤짬을 무심히 번갈아보고 있던 내 눈두덩은 느닷없이 뜨거워오기 시작했다.
‘내가 학교만 그만두지 않았더라도…….’
술 기분인지 나는 점점 슬퍼졌다―학교만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아쉬운 대로 남처럼 그럭저럭 우리끼리 살아갈 수는 있었을 텐데. 이렇게 다섯 식구나 데리고 처가살이를 하게 됐으니…… 아내 보기에 미안하다기보다, 자연히 기가 죽어갈 아내와, 아이들의 처지가 자꾸만 가엾게 생각되었다. 나이든 부모는 고사하고라도 젊은 올케 대하기도 창피할 아내의 심정이라든가, 벌써부터 어딘지 모르게 기가 죽어가는 듯한 위 두 딸애의 심중이 생각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헤아려져 가슴속이 답답해졌다. 아내가 자존심을 송두리째 잃게 된 것도, 아이들이 어딘지 모르게 기가 죽어가는 것도 모두 다 내 죄라고 생각하자 주기 (酒氣)마저 사라지는 듯 했다.
아이들의 잠든 모습에 또다시 눈이 갔다―어쩜 조렇게도 머리카락이랑 이마랑 눈언저리들이 어미를 닮았을꼬? ‘두 귀가 얼룩져 엄마 닮았네’라고, 고것들이 곧잘 부르던 「송아지」란 노래가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만으로 끝나지를 않았다. 이상하게도 맑아져가던 내 기억 속에는, ‘우리 새끼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한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고 흐느낀 정지용의 「백록담」의 한 구절까지가 잇달아 떠오르지 않았던가.
‘그렇다, 내가 택한 이 길도 결국은 조것들을 위한 길이 아니던가?’
나는 이렇게 자위를 하면서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잠은 내처 청해지지 않았다. 지나온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계속 머리에 떠올랐다.
삼일운동 이후 한동안 누그러지듯 하던 일제의 무단 정치가 ‘미나미(南)’ 총독의 부임을 계기로 다시 고개를 쳐들 무렵이었다. 일본 안에서도 군국주의 거물로 손꼽히던 그는 부임 즉시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이란 걸 선포해서 반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옴짝달싹 못하게시리 감시와 단속을 강화하는가 하면, 내선일체란 구호 하에 우리 민족 말살 작업에 한결 박차를 가했다―저들의 소위 신사 참배, 조선어 교육 폐지, 일본식 창씨개명 따위를 우격다짐으로 밀고 나갔다. 한편 그런 일들을 추진하기 위한 온갖 단체와 제도와 행사들이, 그야말로 극소수의 친일파 민족 반역자들에 의하여, 저들의 말을 빌리면ㅡ전국적으로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소학교 교원으로 있던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역시 조선어 교육 폐지에 관한 일이었다.
당국의 계획이야 저희들이 멋대로 짜는 거니까 어쩔 수 없다더라도 당시의 우리들의 유지인사란 사람들의 소행은 한마디로 배족적(背族的)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당시 ‘미나미’가 자진해서 민의를 들어보겠다고 마련한 소위 명사(名士) 면회일이란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초대받은 우리 명사란 사람들의 조선어 교육에 관한 의견이란 정말 끔찍스러운 것들이었다.
일제가 패망한 뒤에도 우리 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하는 사람도 끼여 있기 때문에 아직은 이름을 밝히기가 곤란하지만, “내선일체는 신(元申)의 의사요 동양 정신의 핵심” 이라느니, 혹은 세계를 통일하는 것이 일본 제국의 이상이라고 전제해놓고는, “이러한 세계적인 이상을 생각할 때 내선일체 따위는 간단한 일입니다. 조선인이 완전한 제국 신민이 되게끔 하기 위해선 우선 조선말 사용부터 전폐하는 것이 좋을 줄 아뢰오” 등등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말들을 서슴없이 뇌까려댔다. ‘미나미’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을 것은 상상하고도 남을 만하다.
그러나 당시 신문을 통해서 안 이러한 일들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내가 직접 몸담고 있던 교육계에서 저질렀던 일이다. ‘일부 극소수’가 소위 ‘절대 다수’로 둔갑했던 해괴망측한 사실이다.
―학무 당국이 조선어 수업 폐지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전국 소학교에 지시를 내려, 조선어 교육에 대한 학부형들의 찬반의사를 학생들을 통해 조사 보고케 한 일이 있었다. 결과가 걸작이었다. 누가 묻더라도 조선 사람이 자기 아이들에게 조선말 가르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을 텐데,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구우일모⁸에 불과한 ‘일부 극소수’의 친일파 민족 반역자들뿐이었을 텐데, 사실은 그와는 정반대로 ‘절대 다수’의 학부형들이 조선어 수업을 원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여당지인 매일신보 같은 데서는 보아란 듯이 크게 다루었지만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조작이다! 거짓이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를 들어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록 조작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자신이 만든 조작이 아니었을까? 우선 내가 근무하던 학교만 해도 그렇지 않다고 단언하기가 어려웠다.
“내선일체를 위한 중대한 일이니까 그렇게들 알아서 일을 해주시오.”
얼굴이 럭비공처럼 생긴 교장이 임시 직원 회의를 열고서 이렇게 부탁하였다. 이럴 때의 부탁은 대개 명령과 같은 효과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몇몇 교사는 따로 불러서 타이르기까지 했다.
일본인 교사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거니와 그럴 경우 대부분이 꼭두각시 구실밖에 못하는 우리 교사들도, 방과 후 늦게까지 학생들을 교실에 잡아두고서 소위 ‘교육’이란 걸 실시했다.
“요게〔여기에〕 찍으라 캐래잇, 요 동그래미 있는 데 말이다. 알겠나?”
하급 학년 교실들에서는 이런 날카로운 목소리가 밖에까지 들리기도 했다. 그러니까 결과는 짐작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조선 놈부터 다 죽어야 한다!’
당국만을 저주할 것이 못 된다 생각했다. 물론 나도 공범임을 면치 못하리라. 나는 더 이상 교사랍시고 어린 학생들 앞에 얼굴을 쳐들고 나설 용기가 점 점 사라져갔다.
나는 그날, 동아일보 지국을 내놓고 있던 중학 선배에게 지국을 인수하겠다는 편지를 띄우고 학교에는 사표를 냈다.
당시 동아일보는 폐간 종용을 받은 지 벌써 넉 달째에 접어들었다. 그러니까 강제 폐간의 아슬아슬한 고비에 처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내는 그러한 신문을 맡기로 했다는 내 말을 듣고는 그저 어리둥절해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당분간 고생은 되겠지만―”
위로 겸 이런 말을 하면서 은근히 동의를 구했다. 당분간이란 건 물론 내가 꾸며댄 거짓말이다.
“……”
아내는 내처 말이 없었다.
수삼 분 지난 뒤 그녀는 겨우 입을 떼었다.
“거처는 어데서 할라꼬?”
이사할 집이나 있겠느냐는 뜻이리라.
“할 수 있나, 당분간 처가 신세를 지는 수밖에……”
나는 별 자신도 없으면서 또 당분간이란 말을 썼다.
순간, 아내의 얼굴에는 수심기가 얼씬 갑도는 것 같았다. 여자는 출가외인이란 교육을 받아온 그녀로서는 사십 넘은 친정살이가 딴은 몹시 언짢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그 이상은 말이 없었다.
이튿날 아이들은 외가곳에 간다고 철없이 부산했지만, 아내는 여기저기 꾸어 쓴 빚 갚기에 바빴다.
내키지 않았던 친정살이가 아내에게는 첫날부터 고달팠다. 구 년 동안이나 교편생활을 해오던 섬을 떠나오던 날에 하필 궂은비가 질금거렸기 때문이다. 얼마 되지 않는 이삿짐이라 객선 갑판에 실었는데 오는 도중에 풍우가 갑자기 심해져서 온통 물에 적셨다 꺼낸 것처럼 속속들이 젖었던 것이다. 그릇 조각들이야 젖으나마나지만 책과 옷가지, 그리고 이불이 탈이었다. 당장 입고 덮을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물에 팅팅 불은 짐덩이들을 처가댁 식구까지 달라붙어서 안팎청 위에 올려놓았을 때는 떡심이 풀려서⁹ 한동안 손도 대기가 싫었다. 그러다가 대강 풀어만 주고 나는 이내 밖으로 나와 버렸다.
비는 계속 질금거렸다.
저녁에 돌아와 본즉 청, 방 할 것 없이 구지레한 옷가지들이 마치 세탁소의 헛간처럼 줄줄이 널려 있지 않은가. 물론 이 방에도 이리저리 줄을 쳐놓고……나는 아내의 입장에 비로소 동정이 갔다.
‘제기랄, 이럴 줄 알았음 짐일랑 차라리 선창가에 맡겨 두고 올 걸……!’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는 웬 봄장마까지 길어서 비가 여러 날을 추적거렸다. 따라서 옷가지 말리는 것도 그랬고, 더더구나 이불솜은 더 오래 걸렸다. 아내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구두덜거렸다.
“말도 마소. 당신은 신문에 미쳐서 날만 새면 어데로 돌아다녔지…… 메칠을 두고 그놈의 빨래를 치댈라 카이 ―”
어지간히 진저리가 났던 모양이다.
안청에 걸려 있는 벽시계가 새벽 세시를 알렸다. 젖먹이가 또 칭얼거린다. 아내는 억지로 젖꼭지를 물린다. 젖먹이의 울음소리가 건넌방에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나는 또 제물에 짜증이 나서 후닥닥 일어나 앉았다.
“와, 애기가 잠을 잘 안 자는가베?”
장모가 또 건너왔다.
“이 사람도 안 잤는가베?”
이번에는 내 걱정이었다.
“저녁도 안 자시고 우짤라 카노?”
사위는 백 년 대객이란 구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래 인정이 많은 할머니 였다.
“저녁은 먹었심더.”
“그래? 나는 또 한밥 채리라기 미안해서 그런 줄 알았지. 있는 밥 채리기싸 머 어렵노. 늦더라도 꼭꼭 자시도록 하게.”
역시 저녁을 혹 거르지나 않았나 걱정인 모양이었다.
“어서 좀 자도록 하게.”
장모는 이내 또 큰방으로 건너갔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장군으로부터 급히 좀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조반을 드는 둥 마는 둥 하고 지국ㅡ아니 장군의 구둣방으로 나갔다. 장군은 거기에 없었다.
“배달 나갔던 아아〔아이〕가 또 맞았답니더. 신문도 다 뺏기고.”
열심히 구두칼을 갈고 있던 상고머리 소년공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 주인은?”
“그 아아하고 옆에 갔심더.”
옆이란 양산집을 가리키는 말이다.
“많이 상했더나?”
나는 먼저 지국장 때 역에서 신문 뭉치를 찾아오던 애가 깡패 같은 놈들에게 결려서 신문도 뺏기고 머리에 상처가 나도록 얻어 맞은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연상하고 가슴이 섬뜩했다.
“머 그런 포〔표〕는 없데요. 옷만 쫄딱 젖어 있입디더.”
나는 곧 양산집으로 갔다.
“또 터졌네 !”
장군은 내 얼굴을 보자 이렇게 해 던졌다.
순댓국을 훌훌 마시고 있던 소년이 나를 돌아보자마자 미안한 듯이 고개를 꾸벅 해 보였다. 소년은 학생복 겉저고리까지 수챗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신문 배달을 해서 학비에 보태 쓰고 있는 고학생이었다.
“세상에 더러분 종자들도 있지요. 돈을 얼매나 받아 처먹었기에 이런 아아들을 이렇구로 해가며 신문을 몬 돌리게 하는공!”
양산댁은 소년에게 더운 국물을 한 국자 더 떠 부어주며 중얼거렸다.
“암매, 왜놈들이 발가락으로 맨든 개새끼 같은 놈들이겠지.”
장군은 이런 욕지거리를 뇌까리며, 벌써 석 잔째란 식전 소주를 훌쩍했다.
“어데서 그랬노?”
나는 장군으로부터 빈 잔을 받으면서 눈은 소년에게서 떼지 않았다.
“경방단(警防團) 옆 골목에서 그랬심더.”
경방단이란 건 일제의 경찰 보조 기관이다. 검정 빛 제복이 수시로 들락날락하는 경방단 사무소 옆 다리목에서 당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대강 짚이는 곳은 있었다. 배달 시간은 아직 어둑어둑한 이른 아침이다.
“그놈의 얼굴을 기억 할 수 있겠나?”
소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뒤에서 갑자기 신문을 낚아채고 냇고랑으로 밀어버렸기 때문에 미처 돌아볼 새가 없었다고 했다.
“경방단 옆 골목뿐인가, 조선 천지가 인자 온통 감옥같이 돼가는 판인데 머!”
장군은 내가 꼬치꼬치 묻는 걸 도리어 부질없는 일이라고 나무라기라도 하듯이 뭉클했다.¹⁰
소년을 돌려보낸 뒤에도 장군과 나는 얼마 동안 더 거기에 남아 있었다.
“한 분 두 분도 아니고…… 놈들이 그렇게 나오는 바에야 우리도 무슨 대책이 있어야 안 대겠나? 우짤래.”
장군은 약간 충혈이 된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얼른 무슨 생각이 나질 않았다.
“내일부터 우리가 그만 배달을 안 해볼래?”
그는 불쑥 이런 제의를 했다. 그와 나 사이에는 어느덧 ‘공동경영’이란 생각이 굳어져 있었다. 이해관계가 아니다. 일종의 사명 같은 것으로서였던 것이다.
게다가 농담으로 들어 넘기기에는 장군의 태도가 너무나 무뚝뚝했다.
“한분 그래 볼까? 시위도 댈는지 모르니깐.”
“그래 그래, 내 월급은 물론 소주에 순댓국이대잇!”
그는 남아 있는 소주잔을 훌쩍 비우면서,
“수염 난 놈들이 신문 배달할라문 좀 창피는 할는지 모르지만 대신 역사에 남을 일이지. 신문이 탄압받는 걸 보고서 그저 불평만 하는 거는 신문을 뺏기고 울고 돌아오는 아이들보다 더 못난 바보들이 아니겠나?”
속이 틀리면 당장 확 하는 성미였다.
남이 들으면 우스개처럼 들릴 장군의 말이 이튿날부터 곧 실천에 옮겨졌다.
물론 배달하는 소년들을 돕는다는 뜻일 테지만 장군은 기어코 자기가 신문을 챙겨 들고 소년들을 앞세우고 나섰다. 그 장대한 허우대에 어울리지 않는 조그만 신문 뭉치를 끼고 걸어가는 품이 암만 보아도 만화감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그러한 뒷모습을 카메라에 넣다가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얼마나 분하고 답답했음 저렇게까지 할까……?
지나가던 사람들도 이상하게 돌아는 보았을망정 감히 웃지는 못했다.
나는 그날의 일을 기사로 적어 보냈다. 다음다음날 ‘40대 배달원 등장’이란 제하에, 접종되는 동아일보 배달 방해에 관한 기사와 함께 신문을 끼고 나서는 장군의 거대한 뒷모습이 신문에 꽤 크게 보도되었다.
좁은 지방 도시의 일이니 그것이 곧 화젯거리가 되었다. 알 만한 사람들은 곧 지국, 아니 장군의 구둣방을 찾아왔다. 동시에 구독자 수도 차츰 늘어갔다. 장군은 그것이 자기의 사진이 신문에 소개된 덕택이라고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지국을 찾아오는 놈팡이 친구들도 동아일보라 하지 않고 숫제 구둣방 신문이라고 익살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기쁜 것은, 나의 모교인 동래고보 그해 신입생들이 무더기로 몰려와서 구둣방에서 신을 맞추게 된 것이었다. 언론 탄압에 대한 학생들의 반발이기도 했다. 물론 직접 동기는 장군의 사진이 곁들여진 그날의 기사에서 받은 자극에 있었다 하겠지만, 이심전심으로 번지는 민족 감정의 발로라고 생각할 때 여간 흐뭇하지 않았다. 나는 처음으로 신문을 맡은 보람을 느꼈다.
장군은 갑자기 바빠졌다. 파리를 날리듯 하던 구듯방이 별안간 동래고보의 지정 양화점처럼 되어, 급히 원피(原皮)를 사들인다, 직공을 구한다 해서 하루 몇 차례 부산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좁은 가게에 조그만 이불까지 하나 들여놓았다.
“인자는 자네가 한텍 근사하기 사야지? 신문 덕으로 한몫 잡게 댔이니 말이다.”
나도 흐뭇해서 이렇게 부추겼다.
“그래, 사자고. 공동으로 말이대잇!”
신문도 늘어나고 구두 주문도 늘어났다는 뜻이리라. 우리는 곧 양산집으로 갔다. 구듯방에도 술과 안주를 보냈다.
“이 기사는 누가 썼소?”
배코머리가 신문을 내게로 밀어대며 표정을 굳혔다. 장군의 뒷모습이 사진으로 나와 있는 ‘40대 배달원 등장’이란 타이틀의 바로 그 기사가 실린 신문이었다. 빨간 줄이 기사에 둘러져 있었다'
예의 고등계 방이었다.
“내가 썼소. 왜 머 잘못된 데가 있나요?”
기사는 새삼 읽어볼 필요가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트집 잡으려는 건지? 나는 배코머리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신문 배달은 누가 방해했는데요?”
이쪽에서 마주 쳐다보는 게 못마땅했던지 말하는 티가 한결 딱딱해졌다.
“누가 했다고는 쓰지 않았지요?”
나는 되도록 침착한 태도를 보이며 반문을 했다.
“쓰지도 않았지만(그것이 당신들의 수법이 아니오?) 풍기는 인상이……”
불쾌하다는 눈치다.
“그건 당신 같은 이가 그렇게 받아들이니까 그럴 테죠.”
“그리고 또 경방단 바로 옆 골목이라구 했는데, 그 부분도 마치 경방단원이 그런 짓을 한 듯한 인상을 주기 쉽거든. 안 그래요?”
그는 계속 능글맞은 눈초리로 이쪽을 쏘아보듯 했다.
“그것도 지나친 생각일 테죠. 속단이랄까? 억측이랄까? 아무튼 견해의 차라고밖에 볼 수 없지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선웃음을 지으려다 말았다.
“억측이라고?”
배코머리는 별안간 눈에 독기를 번득여 보이더니,
“무슨 실례의 말을…… 우린 결코 억측으로 일을 하고 있지 않소. 오해해선 곤란합니다. 언중유골이란 말이 있지 않소? 그런 저의쯤도 모르고 일을 하고 있겠소?”
“계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모르지만 나는 경방단원이 그랬으리라는 저의를 가지고 쓴 것도 아니고, 또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이 점만은 명백히 해둡니다.”
나는 맺고 끊듯이 말해주었다. 사실 그 기사로는 하등 책잡힐 데가 없었다.
“그래요? 그런데 신문을 털치기¹¹당했다면서도 왜 경찰에 신고는 안 했지요? 그런 것쯤은 아실 텐데…….”
배코머리는 의문스런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그 물음에는 얼른 답이 안 나왔다. 신고를 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에 그랬노라고 할 수도 없고,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확실히 이쪽의 실수이긴 하다.
“거보시오. 당신들은 우선 경찰부터 의심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오. 안 그래요?”
“……”
나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것은 구차스런 변명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경방단에서 항의 연락이 오고해서 이렇게 오시게 한 게니까 그 점 을 이해해서 뒤탈이 없도록 해주시오.”
배코머리는 이런 위협 비슷한 소리를 했다. 마치 미리 준비했던 말인 듯이.
“뒤탈이라뇨? 경방단에서 누가 그럽디까?”
나도 약간 언성을 높였다.
“그건 말할 수 없소. 그저 그렇게만 알면 되잖소.”
“알겠소.”
나도 뱉듯이 말하고 일어섰다.
경방단이란 단체는 거의 한국인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일본사람들로 재향군인회란 것처럼 정부나 경찰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던 만큼, 개중에는 일반 한국인에게는 배급을 주지 않던 설탕부스러기 따위 조금 얻어 처먹는 재미로 왜놈들의 부추김을 받아서 고자질이나 행패를 일삼고 다니는 놈도 없지 않았다. 게다가 제복이 검고 모임도 대개 밤에 갖고 있었기 때문에 뽈쥐떼〔박쥐떼〕 란 별명까지 붙어 있었다.
“개 같은 놈들!”
경방단 앞을 지나올 때 내가 이렇게 뭉클거린 것은 비단 배코머리 같은 일본인들만을 두고 한 것이 아니었다. 나대로 짚이는 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아일보 지국 간판이 없어진 것은 바로 그날 밤의 일이었다. 아차! 싶었다. 배코머리란 놈이 뒤탈이란 말을 했더랬는데……
상고머리의 구둣방 소년 직공을 보내서 경찰에 신고를 하였다.
“자기 집 기둥에 걸려 있는 간판 없어진 것까지 우리에게 어쩌라는 거야.”
도리어 퇴박을 맞고 돌아왔다. 예상한 대로의 반응이었다. 나는 또 지방 소식으로서 그것을 사실대로 적어 보냈다. 동아일보에 대한 그런저런 박해는 비단 동래지방에만 한한 것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그런 유의 방해나 박해 사실이 사회면에 한두 건씩은 으레 보도되었다. 소위 항다반사란 것이었다.
간판이 없어진 데 대해서는 장군은 나 이상으로 화를 냈다. 그는 툴툴거리며 나가더니 금방 새 간판을 하나 만들어가지고 왔다. 그리고 낮에는 내걸고 밤에는 꼭꼭 떼어서 구둣방 안에 세워두기로 했다. 그것도 곧 또 소문이 퍼졌다.
“어떤 놈들이 간판꺼정 띠이 〔떼어〕간담서? 뽈쥐 같은 놈들!”
이러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러한 소문은 한편으로는 당국의 입장을 도리어 덜 좋게 만드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하필 신문사 간판만을 떼어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시장 안 고기장수나 떡 장수 할머니들까지,
“와 간판 안 띠어 딜놓는기요?”
일부러 이런 큰 소리를 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놀라 돌아보게끔 하였다.!
총독 각하께서 점잖게 사장을 불러서 자진 폐간을 해달라고 부탁을 해도 끝내 듣지 않고, 드디어 구독 방해와, 신문 기업에 있어서 가히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광고 탄압 등 갖은 술법을 다 써보아도 악착같이 신문을 계속해 나가니까, 이번에는 본사의 경리 기타 장부를 모조리 압수해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말하자면 목을 조를 대로 졸라보다가 그래도 안 들으면 각하께서 무슨 구실을 만들어가지고서라도 어떤 영단(?)을 내릴 배짱인 모양이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경영난에 허덕이던 본사에서는 각 지사에 밀린 지대의 납부를 호소했다. 내가 맡은 동래지국에도 전 지국장 때부터 밀린 지대가 수월치 않았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나도 들인 밑천의 반이라도 건져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게는 본사의 경우보다 끝장이 더 빨랐다. 읍내를 제와하고는 가장 독자수도 많고 따라서 밀린 지대도 많은 기장면이란 데 갔던 날 밤이었다.
그곳 분국장이란 친구의 호의와 노력으로 장기 미납 독자들을 어느 술집에 모아놓고(겨우 십수 명밖에 안 나왔지만), 내 딴은 비장한 어조로 독자들의 협조를 요청 했다―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을 대충 이야기하고는, 비록 억울하게 창씨개명은 했을망정 민족의 대변지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만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켜야 됩니다, 지금 당국이 취하고 있는 온갖 악랄한 박해를 이겨 나가야 합니다, 하는 식으로 동아일보의 수난 현황을 설명하고는 오래 밀린 지대의 조속한 납부를 간청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처 얘기들도 끝나기 전에 방문이 와락 열리고, 그곳 주재소 수석과 본서의 형사 두 사람이 나타났다.
“다른 사람들은 꼼짝 말고 지국장하고 분국장만 이리 나왓!”
분국장과 내 손목에는 느닷없이 쇠고랑이 찰깍 차였다.
그날 밤 마지막 기차 편으로 우리는 동음으로 끌려와서, 아무 심문도 받지 않은 채 곧 수감되었다. 물론 따로따로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그대로 처박혀 있었다.
체포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먼저 분국장이 불려 나가는 모양이었다. 그는 상해에 망명중인 ×씨의 처남뻘 되는 사람이라, 나는 별안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놈들의 취조 방향이 이상한 데로 나아가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분국장이 불려 나간 지 네다섯 시간 지난 뒤에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우리가 끌려간 곳은 배코머리가 도사리고 있는 고등계 방이 아니었다. 본관과는 좀 떨어져 있는, 무덕관(武德館)이라 해서 경찰관들이 유도나 검도 연습을 하는 널찍한 창고 같은 데였다. 그 널찍한 창고 같은 방 한쪽 구석에 팬츠 바람의 분국장이 벽을 향해 앉아 있었다. 그는 잠깐 나를 돌아보다가 한 계원의 호
통 소리에 질려 다시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 한가운데쯤에 임시로 갖다놓은 듯한 취조 테이블 곁에는 굵직한 밧줄과 몽등이와 양동이 따위가 지저분하게 놓여 있었다.
고문용 도구들이다. 일종의 위협 전술이리라.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학창 시대의 흠으로 미루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다졌다.
“며칠간 잘 생각해보았지?”
배코머리는 나를 세워 둔 채 이렇게 물었다. 말씨부터가 전과는 달랐다.
나는 대답을 안 했다.
“기장에는 머하로 가소까?”
그는 급해선지 일본말과 우리말을 마구 섞었다.
“신문 대금 받으러 갔소.”
나는 되도록 태연한 태도를 취하려고 애썼다.
“신문 대금 받으러 갔음 개인 집으로 찾아갈 일이지 머 한다고 사람들을 술집에 모아놓고 말을 했지?”
나는 또 대답을 안 했다.
“거기서 무슨 말을 했어?”
“밀린 신문 대금 내달라고 했소.”
“거짓말 말아! 창씨개명 욕했지?”
배코머리는 테이블을 탁 쳤다. 굳이 테이블을 칠 필요도 없었다.
“그런 말도 했소.”
나는 이미 어떤 각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겁하게 숨길 필요가 없었다.
배코머리는 좀 싱거워진 모양이었다. 곁에 섰던 졸개 고문단(拷問團)들도 멍 청히 있을 따름이었다.
“허가 없이 사람들 모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리고 나쁜 말이 하면……”
“치안유지법 위반일 테죠.”
“음, 지국장쯤 되니 법은 알구먼!”
배코머리는 연방 맥이 빠지는 모양이었다.
취조는 싱겁게 끝났다.
“데리구 가 처넣어 둬!”
배코머리는 졸개들에게 이렇게 뱉고 일어섰다. 그대로 나가려다 나를 돌아보더니,
“끝장났어!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사장 이하 간부 사원들이 모두 도둑질이 해서 회사 문닫케 됐으니까……원통하지?”
이렇게 놀리듯이 빈정거리고는 까불까불 사라졌다.
결국 무슨 구실을 만드는구나 싶었다.
분국장과 나는 다시 구류간으로 끌려갔다. 저만큼 뒤떨어져서 끌려오는 분국장은 그새 볼이 퉁퉁 붓고 한쪽 이마짬에 혹이 불쑥 솟아 있었다. 아마 상당히 당한 모양이었다.
“쥑일 놈들!”
나는 분국장에 대한 미안스런 생각보다 그를 그렇게 만든 휘겡이¹² 같은 놈들의 소행에 이가 갈렸다.
그러고도 꽤 오랫동안 우리는 동래서에서 썩다가 놈들이 꾸민 소위 일건 서류와 함께 결국 검사국으로 넘어갔다. 친구 생일 술 얻어먹던 놈들도 자기들의 비위에 거슬리기만 하면 마구 덮칠 수 있는 예의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리라.
장군으로부터 무슨 연락을 받았던지 우리가 포승에 묶인 채 밀려 올라가는 전차에 뜻밖에 장군과 함께 아내가 뒤따라 올랐다.
(장군은 우리가 서에 갇혀 있는 동안 늘 우리에게 신경을 쓰고, 더러는 용케 바깥소식을 전하기도 하고 또 물어가기도 했다. 그는 감방 경험이 많은 친구였다.)
우리가 압송 경관에게 끌려 전차 맨 앞 구석자리에 가자, 장군과 아내는 서 있는 승객들을 비집고 따라왔다.
“보소!”
아내는 묶여 있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나를 쳐다보는 얼굴빛이 백지장보다 희게 보였다. 질려 있었다.
압송 순경은 대개 순해 보여서 그런 정도는 과히 탓하지 않았다. 그저 포승 한 끝만 꼭 쥐고 차 밖을 멍청하니 내다볼 따름이다.
“걱정시켜 미안하오.”
나는 아내를 보고 비로소 입을 뗐다.
아내는 수척했을 내 얼굴만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아이들은 다 별일 없소? 집에도?”
“야.”
내 손을 잡은 조그만 손에만 힘을 주는 것 같았다.
“너무 걱정 마오. 곧 나가기 댈 끼니·…….”
나는 무슨 자신이라도 있는 듯이 이렇게 속삭이고 장군을 돌아보았다.
“걱정시켜 미안해. 신문이나 잘 부탁하네.”
“너무 걱정들 말게. 곧 풀려 나올 끼다. 사장꺼정 들어갔다카이.”
장군은 분국장과 나를 보고 이렇게 꺼내다가 말을 뚝 끊었다. 그러고는 여느 때와는 달리 장군답지 않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사장까지 처넣었으니 신문은 영락없이 폐간을 당하고 말 거란 뜻일까? 나도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아니 두려웠다. 별안간 정신이 훵 나가는 것 같았다.
법원 앞에서 우리는 전차를 내렸다. 장군과 아내도 따라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검사국 정문에서 제지를 당하고, 나와 분국장만이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압송 경관은 갑자기 엄격해졌다. 그는 내게 창 너머 아내의 얼굴을 마지막 돌아보는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끝장―세번째 검사 심문을 받던 날이었다. 그날은 분국장과 내가 한꺼번에 심문을 받았다. 진술서에 무인(拇印)을 눌렀다. 그것만으로 치안유지법 위반죄는 충분히 성립되는 것이다.
고랑을 찬 채 ‘병아리통(대기실)’으로 끌려가는 도중, 바로 담 너머 한 거리에서 요령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신문 호외다! 뜰에서 서성거리던 사람들이 동아, 조선 양대 신문에 결국 강제 폐간령이 내렸다고들 숙덕거렸다.
나는 별안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나를 흘끗 쳐다보는 분국장의 눈에는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가 웬만한 희생쯤은 달게 받을 각오를 하고 지켜오던 것이 일시에 수포로 돌아간 셈이었다. 분했다.
마침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판검사들도 오후부터는 쉬어야 한다. 그래서 조사나 재판을 받던 피의자들도 감옥으로 되끌려 가는 시간이 빨랐다. 마치 외국에 수출이라도 되어가는 곰이나 원숭이들처럼 무거운 쇠고랑들을 찬 채, “빨랑빨랑 올라!”라고 외치는 형무관들의 불호령에 쫓겨 호송차에 오르기가 바빴다.
호송차의 그물 창을 통해서 내다본 거리의 광경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양대(兩大) 민족지가 강제 폐간을 당한 날이라면, 항의 데모는 없을망정 무언가 다른 기색쯤은 있음직한데, 거리를 지나가는 동포들의 결음걸이나 표정들에서 그런 빛은 전연 느껴지지 않았다. 개중에는 무슨 제복이나 공무원 타입들은 제쳐놓고서라도, 그렇잖을 만한 모습의 사람들도 있었는데…… 저러고서도 행여 해방이라도 되는 날엔 “내가 애국자다!” 하고 뻔뻔스럽게 얼굴을 쳐들고 대중 앞에 나서는 놈들도 있을 테지? 틀림없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제기 랄……!”
나와 분국장은 창에서 동시에 눈을 돌렸다. 차라리 호송차 안 분위기가 좋았다.
“신문이 없어졌다 카제?”
“그렇다네 .”
“영영 적막강산이로군.”
이런 숙덕임들이 오고 갔다.
십 분도 채 못 되어서 차는 까막소〔감옥〕 철문 앞에서 덜커덕 멈추었다. 끼익! 하고 철문이 서서히 열렸다. 감옥 안뜰이 시야에 활짝 펼쳐진다. 팔월의 태양이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히 흘러내리고 있다.
나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그다지 넓지도 않은 감옥 안뜰이 별안간 허허한 사막으로 변했다. 그 허허한 사막 한가운데 분국장과 나의 그림자가 조그만 점처럼 꽂힌다. 이상한 착각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순간적인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결국 올데로 온 것이 아닌가? 아무것도 잘못된 것은 없다.
‘동아일보와 우리는 당분간 감옥살이를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으리라…….’
나는 가벼운 기분으로 내 보금자리가 있는 삼사(三合) 쪽을 향해 천천히 (물론 내 기분만이었지만) 발을 떼어놓았다.
-끝-
2016년 4월 3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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