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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색깔
이진 지음
개마고원/2002년 10월/279쪽/9,000원
▣ 저 자 이진
저널리스트. 미국 미조리대학 저널리즘 스쿨에서 '심층보도'를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웨스턴 컨터키 대학의 '국제 언론·미디어 경영 트레이닝 프로그램'에서 동남아시아 기자들에게 '미국 언론과 윤리' 등을 강의했고, 블룸버그 통신사에서 아시아 마켓 조사분석가로,
IRE에서 에디터로 일하는 동안에도 한국의 주요 시사 잡지들과 방송에 꾸준히 미국 관련 기사를 써왔다. 저서로는 『서울대 기숙사』를
비롯해 『미국에 관한 진실 77가지』『나는 미국이 딱 절반만 좋다』등이 있다.
▣ Short Summary
그간 노무현은 선거 공약이 됐든 미래 청사진이 됐든 숱한 말들을 쏟아냈고, 그것이 언론을 통해 소개되어왔다. 그러나 한 인물의 자질과
역량을 판단하는 데는 그러한 공약이나 청사진보다는 그것이 나온 배경, 즉 그의 사고나 철학을 들여다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 '말'로 쏟아내는 거대담론과 '몸'에서 배어나는 인성(人性)을 함께 읽을 때만이
그 판단이 온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에선 노무현의 평소
습관, 생활 태도, 기질, 기호 등과 같은 미시적인 부분에 특히 주목했다. 이는 '막말' 시비 등에서 비롯된 '가볍다', '튄다', '감이 못 된다'라는 식의 선입견들이 과연 타당한지 검증하는 기회도 될 것이다.
저자는 4개월이 넘는 기간을 서울에서 부산까지 국민경선에서부터 6.13 지방선거, 8.8 보궐선거에 이르는 선거캠페인 전 과정을 일일이 따라다니며 동행 취재했다. 또 이와는 별도로 도합 18시간에 이르는 네 차례의 장시간 단독 인터뷰를 통해, 노무현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나오는 습관에서부터 국민통합이나 엘리트주의 청산과 같은 화두에 대한 그의 내밀한 생각까지 생생한 육성으로 담아냈다. 노무현이 늘상 입에 달고 다니는 '원칙과 신뢰'가 노무현 캠프를 위시한 주변 사람들이나 실제 정치 현장에도 그대로 관철되고 있는지, 또 그렇게 되고 있다면 그것이 어떤 모양새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역시 생생한 현장 취재로 확인을 시도했다.
▣ 차 례
이야기를 시작하며
화두 1. "지나간 일은 모두 아름답다.!"?
화두 2. DJ광신도? 노무현 광신도?
화두 3. 노무현, 정치적 엽기현상?
1. 현미경으로 본 노무현
2. 노풍연가 주인공 권양숙 스토리
3. 망원경으로 본 노무현
4. 노무현의 세 가지 고민
노무현의 색깔
이진 지음
개마고원/2002년 10월/279쪽/9,000원
1. 현미경으로 본 노무현
"꼭 그렇게 침통한 표정을 찍어야 하나요?"
2002년 6월 13일 오후 6시. 지방선거 결과 개표가 막 시작되었을 뿐인데도 이미 분위기는 침울했다. 언론사들의 출구조사에서 참패가 예고되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실 맨 앞자리에는 한화갑 대표를 비롯한 몇몇 의원들이 앉아 있었지만 노무현은 보이지 않았다.
노무현이 침통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상황실에 내려오지 않자 대변인실 직원과 기자들이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당이 지고 있다고 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후보가 언론에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예전에는 없던 일이다. 그림을 만들 수 없게 된 방송사 기자들은 특히 더 곤혹스러워하면서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서성거리던 기자들이 다시 상황실로 내려간 사이 유 특보가 공보실 회의 탁자 앞에 앉았다. "8·8 보선 후보들 지원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한 기자가 물었다.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지만 참패를 번연히 예상하고 있던 기자들의 관심사는 노 후보가 8·8 보궐선거 후보 공천에 얼마만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되고 있었다. 미니 총선이라 할 수 있는 8·8 보선이야말로 민주당 내에서 노 후보의 입지가 확연히 드러나는 시험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안이나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다는 현실적 이유로 인해 노 후보가 지방선거 참패의 후유증과 재신임 문제로 지위에서 물러설 수도 있다는 환경은 상정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오늘 나온 SBS여론조사에서 2% 차이로 노 후보가 지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박근혜 씨가 나오면 1% 앞서고, 정몽준 씨가 나오면 2% 차이로 지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뒤늦게 공보실로 들어온 한 기자의 설명이었다.
그때 공보실 밖 복도에서 다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가보니 노 후보가 보였다. 잠시 비서실에 갔다 후보실로 들어가는 중인 듯했다. 카메라 기자들은 얼굴 표정을 잡기 위해 순식간에 그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노 후보는 문고리를 잡고 선 채 기자들에게 조용히 물었다. "꼭 그렇게 침통한 표정을 찍어야 하나요?" 그리고는 아주 좁게 방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개표가 진행될수록 민주당의 초상집 분위기는 극에 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같은 시각 한나라당사 상황실은 민주당보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회창 후보는 자리에 없었지만 여러 의원들이 만면에 희색을 띠고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밤 10시. 상황실에 내려간 이회창 후보가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는 뉴스를 봤다. 같은 시각에 노무현 후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두어 달 동안 자치단체장 후보들 지원유세를 하러 돌아다니며 새까맣게 타버렸던 그의 얼굴과 연신 '립밤'을 바르던 마른 입술,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와 지친 육신이 뒤엉켜 이 상황의 고문을 견디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민석 생각도 났다. 서울 여러 곳에서 노무현과 잡은 손을 치켜올리면서 젊은 한국을 외치던 그가 간밤 명동에서
보였던 초췌한 모습도 떠올렸다. 그는 이미 자신이 패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로부터 두어 달쯤 지난 뒤에 노무현에게 13일에 왜 상황실에 내려가지 않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한동안 바닥을 내려보더니 말했다.
"나는 아직도 제일 이해 못하는 것이 돈 먹고 잡혀가면서 당당하게 웃는 모습으로 사진 찍는 사람들. 나는 도저히 그 표정을 이해를 못해요.
침통한 표정으로 검찰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거에
진 사람은 침통한 표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거에 지고 아주
번들번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활짝 웃는 사람을 어떻게 국민이 신뢰할 수가 있겠어요? 난 그거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무슨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제가 그때 활짝 웃지 않아도 국민들은
희망을 가질 많은 일들이 있고, 내가 표정이 심각하다고 따라서 기죽을 국민은 아무도 없어요. 심각할 때는 심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좋습니다."
좀 의아스럽기도 했다. 말하자면 대변인을 통해서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살벌한 말을 쏘아대면서도 또 어느 자리에서 마주치면 서로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웃음을 머금고 악수를 나누는 게 정치인인지라 나 역시 노무현으로부터 그런 정치인다운(?) 유들유들한 모습을 기대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노무현은 나의 예상을 보기 좋게 벗어나 버렸다.
우리 나라 정치인들에 관해서 이러저러하게 단정하고 '그럴 것이다'고 생각해온 것들을 노무현은 얼마나 깨뜨려줄까?" 나는 노무현 코드를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게 될까?
가난했던 탓에, 그러나 가난했던 덕으로
시인 김지하가 여러 매체에 기고하고 있는 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노무현에게도 가난은 오랫동안 인생의 화두였던 것 같다. 가난에 대한 노무현의 소감은 어떤 것일까? 그는 "가난은 사람을 비굴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또 거짓말을 하게도 했다고 회고한다. 그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했던 시절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취직을 했을 때였다.
새 옷 살 돈이 없으니까 운동화에 교복을 입고 회사에 갔다. 그 '꼴'을
본 회사 상무가 교복 좀 벗고 다니라고 주의를 주었다. 단벌 신사 노무현은 결국 축 늘어진 친구의 스웨터를 빌려 입고 출근을 했다. 바지는
여전히 교복 차림이었다. 노무현은 그 바지 한 벌로 겨울을 났었다며,
허허허 웃었다.
그러고 보면 부모를 원망할 법도 하다. 노무현은 "그런 적 많죠."하며 다시 웃는다. "어릴 때 '왜 우리 아버지는 부자가 아닐까'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봤어요. '왜 우리 아버지는 일류 대학을 안 나왔을까, 대학을 안 나왔을까, 왜 고급 관리가 아닐까' 많이 생각해봤어요."
그래도 비뚤어지거나 반항을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노무현은 어렸을 때에 동네에서 예의 바르기로 유명했었다. 20여 호 되는 마을에서 어른들에게 인사를 가장 잘 하는 아이가 노무현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가난이 그의 성격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인 듯하다. 그는 자신이 어릴 적에 우울하고 심각했다고 표현했다.
가난이 사람을 비굴하게 만들고 거짓되게 만들고, 그래서 우울했고 심각한 어린아이였다면 지금의 노무현은 자신을 낙천적이라고 말한다. "모든 게 다 잘 풀려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사법고시 이후로 사실 꽤 잘 풀려온 사람이다. 시련이 많았다고 해도, 그의 한 참모의 말에 따르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여기까지 온 사람"이다. 번번이 낙선을 하면서도 별로 후회를 하거나 슬퍼해 본 일이 없다. 말 그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노무현에게는 가난이 빚어놓은 두 가지 모습이 있다. 하나는 그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좀더 단호한 표정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 가난과 소외에 무관심하고 외면하려는 사회의 태도에 대해서는 분노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가난이 빚은 노무현의 또 한 가지 모습은 그에게 '외적 로열티'가 없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대단히 겸손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옆에서 구경해 본 노무현은 허장성세가 별로 없어 보인다. 어깨를 쭉 펴고 대대하게 걷는 정치인이기보다는 좀 몸을 숙이며, 사람들을 만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한다.
그런 모습을 두고 그를 싫어하는 이들은 대통령 후보로서의 권위가 없어 보인다고 공격한다. 그래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던 날의 노무현의 모습은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싫어하는 사람들의 입에 꽤나 오르내렸다. 너무 심하게 몸을 낮추는 것 아니냐고 하자 그는 실제로 제가 윗자리에 앉아본 일이 없는 데다가 추기경을 하늘 같이 생각했고, 또 실제로 그만큼 되는 분이라고 생각했다며 설명했다. "곧 저도 정치계 지도자로서 종교계 지도자와 대등한 모양새를 갖춰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저는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노무현 연배의 많은 사람들이 가난을 겪으며 성장했다. 그게 그 시절 우리 나라의 전반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데 유독 노무현의 가난은 인구에 회자된다. 이회창을 제왕적이라 하고 한국 최고의 엘리트 집안 출신이라고 하다보니 그에 견주어 너무 보잘것없이 살았던 노무현의 성장 과정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환경은 사람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노무현이 겪은 가난, 변호사 시절의 부, 인권 운동가로서 접하게 된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해는 정치인으로서의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경험일 수 있다. 그가 서민적이라거나 그의 정치적 견해들이 있는 사람들보다는 소외된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조절해주는 데에 많이 조준되어 있다는 것도 그의 성장 환경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겠다.
2. 노풍연가 주인공 권양숙 스토리
"여보, 나도 도울게."
노무현의 아내 권양숙 씨는 사생활과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철썩
같이 믿기에 집도 언론에 개방하지 않았었다. 종로 보궐선거 때에는
참모들이 가족 사진을 선거 캠페인용 포스터에 쓰자고 했을 때도 반대했다. 그뿐 아니다. 권씨는 노무현의 참모들에게 오랫동안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잘 나가는 법률가였던 남편이 운동권 아이들을 만나 신세 망쳤다'는 원망 때문이었다. 부산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전도양양했던 변호사 남편이 갑자기 인권 운동가로 변하더니
집이고 아내고 다 팽개치고 나가서 정치만 한다고 서운해했다. 덕분에 가정 살림은 온전히 권씨의 몫이었다.
노무현이 200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로 마음먹은 뒤에도 권양숙 씨는 한참을 망설였다. 권씨는 대통령에 출마하는 사람들의 모든 사생활과 가족생활이 사회에서 난도질당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아왔다. 좋게 말하면 '검증'이고, 나쁘게 말하면 '난도질'이다. 그리고 권씨는 자식들이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 아들 건호 씨가 LG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은 뒤 입사를 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취직이 어려운 때인데 내가 입사한 것을 두고 행여 사람들이 아버지 빽으로 들어간 거 아니냐 할까 걱정이 된다."는 게 이유였다. 권씨는 "네 인생이니까 아버지 개의치 말고 살아라."고 조언했다.
"그 동안 인터뷰 거절을 많이 했어요. 정치는 남편이 하는 것이고, 나는 내조하는 사람이잖아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거든요. 남편이 노출된 사람이라 사생활에 불편이 많더라고요. 속박이었어요. 그래서 거절을 했는데 지금은 나라 살림을 맡겠다는 사람은 낱낱이 검증받아야 하므로 알고 싶어하는 부분이 있으면 알려드리겠다고 그래 마음먹었습니다."고 대답했다.
권양숙 씨의 영부인 후보로서의 '데뷔전'은 이인제 씨의 '노무현 장인 좌익 활동' 공격으로 뜻밖에 화려하게 치러졌다. 유권자들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전에 그녀의 아버지부터 소개받은 셈이다. 권양숙 씨의 아버지가 좌익이었다는 것은 두고두고 노무현을 괴롭힐지 모른다. 권씨 부친의 좌익활동은 노무현의 사상이 불순하다는 공격을 받는 데에 일조했다. 보수우익들은 집안에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이 있는 사람은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다는 공격을 퍼부었고, 「월간조선(6월호)」은 국민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최고의 직격탄을 날렸다. 「남로당 간부 노무현 장인이 주도한 창원군 학살 사건의 피살자 유족들 공개 증언」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권씨 부친 때문에 학살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유가족들의 절절하고 피맺힌 사연이 소개되어 있었다. "노무현 씨, 당신네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송곳으로 찌릅니다. 학살 지휘자가 시대의 피해자라고요?"라는 부제만 읽어도 그들의 한맺힌 사연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버지의 좌익 활동은 권양숙 씨가 세 살 때에 일어난 일이다.
물론 기자들은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 수도 없이 권양숙 씨에게 아버지 일을 물으려고 했고, 권양숙 씨를 수행하고 다니는 정무보좌 이은희 씨는 그 질문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기자들은 꼭 그 부분을 묻곤 했다. 노무현 측으로서는 당내 경선 기간 동안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이인제 씨의 '권씨 아버지' 문제 제기였다. 노무현은 당내 경선에서 사상 문제가 나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은희 씨가 권씨로부터 캠프에 정황 보고할 설명을 듣지 못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동안 유세 지역을 이동하는 노무현의 차 안에서는 불이 났었다. 여러 곳에서 전화가 쉬지 않고 걸려왔고 대책을 세우느라고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는 것이 수행비서의 말이다. 말 그대로 산지사방에서 난리가 나고 있는 동안 권씨는 침묵했다. 지금도 침묵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사진 찍어주는 아내
권씨의 집을 방문했을 때 딸 정연 씨의 사진첩을 본 일이 있다. "왜 사모님이 함께 찍은 사진은 없어요?"하고 물었더니 "그 사진들을 제가
다 찍으니까 그래요. 찍어만 주니까 제 사진이 없어요."했다. 권양숙
씨는 사진을 참 잘 찍는 이였다. 본인도 사진 찍기에 취미가 있었다고
했다.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그것을 자기 영역으로 만들지 못한 이유는 카메라 살 '돈'의 문제였다. 노무현이 변호사
시절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써야할 우선 순위에서 카메라는 멀찌감치
밀려나 있었던 것이다.
"가정주부이고 어머니로서 생각하기에 2002년 현재 우리 나라의 어머니 상은 어떤 것이고 어떤 식으로 변화, 발전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하십니까?"
"나라 자체가 너무 어려웠고, 보릿고개도 있고 그러니까 어머니 하면 마음이 아프고 이런 것도 있고 그랬는데 언제부터인가 어머니 하면 부동산 투기 같은 것만 쫓아다니고 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많이 비쳐지게 된 것 같은데요,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요. 개인적인 느낌이요. 기본적으로 그렇습니다. 사회를 지탱해 나가는 게 우리 남자들도 중심이 있어야 하지만 가정이나 사회나 보면 여자의 생각, 여자의 행동이 바로 있어야 자녀도 바로 키우고 가정도 튼튼한 가정으로 꾸려 나갈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자연인으로서, 한 가정의 부인으로서 우리 나라 여자들을 위해 국가가 바꿔줘야 할 것들은 어떤 게 있다고 보십니까?"
"나는요, 우리 나라 월급이 부인들의 통장으로 다 들어오잖아요. 우리 후보가 장관이 되시니까, 판사일 때는 월급 받아가지고 봉투로 이래 가져다줬는데, 이번에 장관 하니까 아, 내 통장으로 바로 들어와요. 되게 좋더라구요. 그런 부분은 아마 우리 여성들이 꾸준한 노력으로 조성이 되지 않았나, 이래 싶고. 딴 거는 내가 집에서 아들딸을 키우는데 우리 여성들한테 맞는 일자리가 좀 많았으면 좋겠어요. 여성들한테 맞는 일자리는 좀 차별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가령 임신 출산을 하고 아이가 어릴 때는 직장에서 시간을 좀 단축해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아이를 다 키우고 나면 정상적으로 남자들과 똑같이 일할 수 있게 해주는 거. 그런 부분이 지금 우리 여성들에게 제일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2002년 현재 우리 나라 여자들이 원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우리들이 원하는 대통령 영부인의 상은 어떤 것일까? 한국에서 사회의 주목을 받는 여자로 산다는 것은 좀체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여성상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시대이다. 한쪽에서는 사회활동에 적극적인 영부인 상을 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여인천하가 되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여자, 영부인의 역할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권씨가 선택한 입지는 겸손하고 조용한 내조인 듯하다. "여보, 제가 도와드릴게요."하고 나선 권씨의 일곱 번째 선거캠페인은 여전히 조용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나 지속적이다. 권씨는 "그렇게 일일이 손을 다 잡으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하던 남편의 안쓰러운 눈빛을 기억한다. 그리고 아직도 손을 흔들어 유권자들에게 인사하는 것이 어색하기만 권씨는 대신에 허리를 깊이 숙이며 하는 말이 늘 이렇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부족함이 많은 사람들이지만 여러분께서 힘이 되어주십시오." 노무현이 새벽에 일어나 집 나설 때의 힘은 그런 '부족함 많은 아내' 권양숙에게서 나오는 것일지 모르겠다.
3. 망원경으로 본 노무현
다양성으로부터의 도피 부추기는 정치판 유감
사람이 첫인상을 바꾸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며, 어떤 사람에겐
평생 가는 일이 되기도 한다. 70년대에 국제적 구설수에 올랐던 한 경제인은 30년이 지난 작금에 자신의 이미지를 쇄신해보려고 했더니 한
PR펌으로부터 20만 달러가 들 것이라는 견적을 받기도 했다.
1988년 5공 청문회에서 노무현이 보여준 모습은 서민과 진보적 지식인들에게는 신선하고 강렬했지만 그 강렬함은 보수우파들에겐 극단적인 인물로 보여지게 한 면이 있다. 소외된 자들에 대한 배려를 하겠다고 '벼르는' 것부터 기득권자들을 긴장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 불안감과 노무현이 빨갱이라는 그들의 단정은 통하는 점이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노무현이 빨갱이는 아닌 것 같다. 1980년대에 운동권 학생들과의 교류를 통해 진보적인 철학과 경제 학습을 했고, 그들 중 적잖은 이들이 이제는 노무현의 참모 노릇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를 빨갱이라고 여길 만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노무현의 정치 비전이나 그의 세계관을 듣고 있으면 중도주의에 가깝다.
노무현 본인은 '빨갱이'란 공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그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노동자들 편 들었으니까 그렇지요. 그리고 그 말에 대해서는 별로 유감이 없어요. 그것이 냉정하고 균형 잡힌 평가라고 보진 않습니다. 자기들이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적대감을 표현하는 거니까 과장되어 있다, 지나치다라고 생각을 하긴 하지만 별로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튄다, 거짓말한다, 교만하다, 까분다, 독불장군이다, 이런 험담들이 억울하고 분하지요. 이건 아주 교묘하고 악의적인 것입니다."
노무현은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분명히 제가 추구하는 것과 그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감 사이에는 논리적인 인과관계는 없지만 정서적으로 반감을 갖는 것이 근거가 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적대적 이해관계도 별로 없지만 그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요. 내가 노동자들에게 가서 단결해라, 각성해라, 권익을 쟁취해야 한다 하고 권리 투쟁을 부추기고 해싸니까 당연히 그렇게 느끼는 거지요. '노무현은 왜 노동자 편 드느냐, 밉다' 그렇게 말하지, 그런 건 좋다 이건데 '노무현은 완전히 불안하다, 튄다, 독불장군이다, 자질 부족이다'라고 말하는 거야말로 진짜 악의적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노무현이 노동자 편의 안전지대에 있다고도 볼 수 없다. 그는 적대적인 사람들로부터 빨갱이라 누명 씌워져도 괜찮을 만큼 전적으로 노동자 편이지도 않다. 지난해 대우차 부평 공장을 방문했다가 몇몇 노동자들로부터 받은 계란 세례가 그렇고, 삼성차 살리기 운동에 관한 그의 입장이 노동자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노무현은 좌파에서 보기에는 우파 같고, 우파에서 보기에는 좌파 같은 면이 분명히 있다. 노무현은 그것을 균형의 시각으로 설명한다. 양쪽에서 힘의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중간 다리가 되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말을 곧잘 해왔고, 현장 정치를 하겠다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노무현은 "내가 인생을 살고 있는 이유는 개개인의 행복을 최대한 보장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노사 가리지 않고 "보다 많은 사람에게 혜택이 골고루 돌아가는 사회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책 분석을 도와주는 한 학자는 양자를 모두 거두려하지 말고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득표에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아무래도 노무현은 서민 쪽의 지지를 많이 받고 있으니까 그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분명히 노동자 편이라는 선을 그려두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무현이 원하는 것은 '개인이 최대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판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제도적 판을 깨끗하게 만들어줌으로써 자본가나 노동자가 부담 없이 재미있게 살게 하겠다는 것이다. 노무현은 자신을 빨갱이라 하는 것에 이의가 없다. 다만 자본가와 노동자, 그 두 측이 조화를 이루며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화합의 장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현 정치판에만 이의가 많은 사람이다.
패러다임의 변화, 그 자그마한 일상의 뒤척임들
노무현이 양천구에서 유세를 하고 있을 때였다. 더운 햇볕을 피해 중년의 아주머니 세 명이 골목길 모퉁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 여고생들처럼 이야기에, 웃음에 노무현 연설하는 줄 모른다. 슬몃 다가가 정부에 바라는 게 뭐냐고 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줌마들은 각자의
바람을 쏟아낸다. "노인복지 문제, 노인들이 갈 곳 없게 하는 거", "깨끗한 정치", "진짜 자기를 희생할 줄 알고 아픈 부분을 감싸줄 수 있는
사람", "아파트 가격 안정 좀 해주는 거", "맞벌이, 탁아문제 개선해 주길"….
시큰둥한 모습으로 앉아있던 세 아주머니의 평범한 바람은 두고두고 되새겨보아도 의미심장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일상의 잔잔한 변화이다. 체감할 수 있는 삶의 질이 좀더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들어보면 큰 꿈도 아닌데 정치인들이 그 서민들의 등을 참 못 긁어준다.
한국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이제 우리들은 '먹고 살 만하다'. 여유가 좀 생겼다. 붉은악마에 대한 소위 사회과학적 고찰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 핵심은 결국 '재미'였다. 노무현 말대로 "나는 버스 타고 리프팅 하러 간다." 할 수 있는 여유, 내가 삶의 주체라는 독립성,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형태의 삶을 인정해주겠다는 자유방임성, 그리고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낙천적 삶의 태도는 정치권에 대한 바람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많은 유권자들이 네거티브 캠페인에 넌더리를 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변화하는 패러다임에 노무현은 얼마나 부합할까? "현실에 없는 정치인처럼 보여지는 가장 현실에 맞는 정치인"이 노무현이라는 소리도 나온다. 국민경선 때에 「경향신문」이 "노풍, 태백산맥 넘었다."고 했을 만큼 폭발적인 힘을 얻었던 것은 2002년 현재 한국인들이 원하는 현실 정치에 가장 부합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노무현은 이회창, 정몽준에 이어 인기도가 세 번째로 내려앉아 있다. '태백산맥 넘던 노풍' 시절과는 매우 다른 모습니다. 여러 가지 변인이 있겠지만 내가 그를 보면서 느꼈던 것은 당의 대권주자가 되는 순간부터 그만이 가지고 있던 색깔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정치권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대권주자로서의 모습을 갖추라."는 주문에 그만 자기 색깔이 탈색되어 버린 꼴이 되었다.
그가 애초에 원했던 것은 국민과 수평적 관계를 이루고 있는 현장에서 함께 울고 웃을 수 있고, 그러면서 가슴속엔 '이룰 수 없는 이상'을 품고 사는 대통령이었다. 은행원들이 5일제 근무에 들어간 날에 노무현도 대통령 되면 5일제 근무를 하고 싶은지 물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답했다. "대통령은 직무 중에 위기관리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통의 근무시간 관념하고는 다를 수 있지요. 그러나 대통령이 어느 날 보따리 싸가지고 휴가를 떠나기도 하고, 그러다 급한 일이 생기면 휴양지에서 허겁지겁 달려오기도 하고 이런 모습이 좋은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조금 속도가 늦어 보이고 느슨해 보이는 지도자의 모습이 그 사회를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안도감이거든요. 안정감, '지금 안전하다, 편안하다' 이겁니다. 말하자면 시스템이 잘 돌아가고 있다, 그런 뜻이 되거든요."
청남대를 개방할 생각이 있는가도 물어봤다. 청남대는 충주에 있는
대통령 별장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에 지역 주민들과의 마찰이
대단히 많았던 곳이기도 하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내 가까이에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권력의 크기가 아주 달라 보이지도 않고, 위세가 엄청나지 않아 보이고…. 그래서 청남대 같은 곳은 아무도 못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에 있고, 이런 것이지요. 때때로 편안한 모습,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사회, 그래서 대통령이 자기 직무의
한계를 깔끔하게 정리한 상태에서 일상의 일들을 느슨하게 또박또박
해나가는 모습이 필요하죠."
한국의 변화하는 패러다임이란 사실 거창하지 않다. 일상생활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것, 내일을 예측할 수 있는 사회, 부정과 부패가 없고, 내가 남에게, 남이 내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사회, 그러면서 낙오자가 없도록 서로 조금씩 도우면서 살 수 있는 사회, 양천구 아주머니들이 가족들을 위해 저녁 식탁에 올릴 반찬 몇 가지를 부담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거기에 대통령이 있어 주면 되는 것 아닐까?
4. 노무현의 세 가지 고민
'죽기보다 싫은' DJ 돕기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가 되자마자 직면한 매우 힘든 문제는 DJ와의
관계, 「조선일보」와의 대립, 마지막은 참모진에 관한 것이다. 우선
DJ와 관계를 살펴보자.
6·13 지방선거, 8·8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한 가장 주된 원인은 DJ의 세 아들의 부정부패였다. 한나라당은 노무현을 겨냥하지 않고 오로지 DJ 자식들을 놓고 '부정부패를 척결하자'고 웅변했고, 이는 아주 적절했다. 노무현이 아무리 링에 올라와 자신과 겨루자고 해도 한나라당으로서는 부정부패 척결이 순조로이 민심을 잡고 있는 마당에 노무현의 링에 올라갈리 만무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일찌감치 노무현 당으로 중심을 잡고 쇄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사태는 또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모른다. 또 노무현이 처음에 당을 진압(?)할 수 있는 좀더 적극적인 행보를 했어야 한다거나, 심지어는 DJ의 차별화나 당내 반대파 의원들의 흡수 노력을 좀더 '기성 정치인'들처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들도 있다. DJ와의 차별화를 선언하는 것은 내용 면에 있어서는 정치적인 제스처에 불과하다. 노무현은 제스처를 취하는 데 거의 경기를 내는 사람이다. 그가 원했던 것은 DJ 스스로 용단을 내려주는 것이었던 듯한데 결과는 그렇게 되질 않았다.
노무현은 주변에서 정치 정략상 필요하다면 DJ와의 차별화를 강력히 요구하는 동안에도 "예의 바르게 정치하려고 한다."는 기본 입장을 지키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사람의 도리'라고 여겼고, DJ의 자식들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현재 정치 상황 아래에서는 어떤 정치인도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 비단 정치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잉태해 온 여러 가지 얽힌 관계들 속에서 결코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언론에서 한창 김대중 대통령과의 차별화 문제를 보도하고 있던 6월 말에 최종 입장을 말해달라고 했더니 정리가 안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차별화라는 말이 좀 너무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잘못된 것을 어느 점이든 비판적으로 말하거나 또는 비판적인 요구를 하거나 하는 것까지도 지금은 차별화의 범주 속에 다 집어넣고 있는데 그런 것을 다 차별화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니냐. 그런 문제 제기를 하나 하는 것이고, 감정적·정서적으로 비방하고 그를 통해서 사람들과 과거의 소위 책임을 공유하고 있던 관계를 탈출하려고 하는 시도를 나는 차별화라고 본 거지요." 한다. 이성적 비판과 감성적 비판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DJ의 실정을 비판하면 언론에서 그것을 DJ와 차별화를 시도한다고 보도하는 것에 대한 못마땅함이었다.
노무현은 DJ를 어떻게 생각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무현은 DJ를 대단히 존중한다. 한국에 DJ같은 지도자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여긴다. "김대중 씨가 갖고 있는 특유한 탁월함은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입니다. 특히 남북관계와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 그리고 세계적인 차원에서 인권 문제를 대하는 자세, 태도 이런 것은 우리 한국에서 지금까지 어떤 지도자도 가져본 일이 없는 탁월한 식견을 갖고 있습니다. 본인이 정치적으로 너무나 정치공학에 밝고 술수에 뛰어나서 많은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일반 국민들이 바라보지 못하는 세계와 미래에 대한 통찰력 같은 것은 탁월합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노무현은 YS를 두고는 '보스'로서 따르는 사람을 잘 이끄는 시원스런 지도력이 최대의 강점이라고 생각하고, DJ를 두고는 오랫동안 구상했던 자신의 정치철학을 이행하려고 하는 노력에 감동한다고 했다. 또 그들 모두에게 한 시대를 끌고 가는 지도자로서의 역할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3김식 정치 행태가 솔직하지 못한 면이 많았고, 정치적 포부를 위해선 포기해야 할 부분이 있음에도 이를 포기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실망이 많았다. 1987년도에 양 김이 분열되었던 것이나, 3당 합당, 국민회의 창당 등이 그런 예이다.
노무현은 전직 대통령들이 다음 대통령들에 의해 감옥 가는 것은 원하지 않는 눈치이다. 죄는 철저히 묻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차리는 것이 도덕적인 행위라고 믿는다. 노무현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가 대통령이 되면 그들이 추측하고 있는 DJ의 부정을 덮어줄 것이라고 공격하고 있음에도.
3김 시대가 끝나고 있지만 그들로부터 어떻게 '차별화' 되어야 하는가는 노무현뿐만 아니라 많은 정치인들의 난제다. 어쩌면 비판은 솔직하게 하되, 그것을 감정적 차별화롤 여기는 사회의 비논리성만 없어진다면 노무현이 제대로 한번 DJ의 공과를 국민에게 드러내어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투신할 사람이 필요하다
노무현은 대통령 후보가 되고 난 뒤 참모들을 모두 모아놓은 자리에서 "이제부터는 나와의 싸움이다. 너희들도 몸에 붙어 있는 타성과 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말했다. 구태의연하고 낡은 사고와 싸우라는 '주문'이었다. 별 문제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지나치기 쉬운 잘못된 사고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무총리 서리로 지명되었던
장상 씨나 장대환 씨 모두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던 과거의 몇 가지
행적들로 인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이 그 예이다. 별 고민 없이
해온 대로 하면 된다는 생각들이 결국 훗날 자신의 발목을 잡는 주적이 된다는 것이다. 공직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기준과 요구가 유래 없이 높아져 있는 지금, 몸에 배어 있는 타성을 각 개인이 저마다 버리는
것이야말로 사회 변화를 이루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노무현의 주문을 참모들은 얼마나 소화해 내고 있을까? 구태의연한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것을 인지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내부로부터 '참모 다지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 노무현은 당 내 사람들로부터 적잖은 충고와 조언, 요구들을 들어왔다. 그가 후보가 될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부터 노 캠프 안에서는 "곧 인사 조치가 있을 것이다. 자리 재배치가 있을 것이다."는 것에 대한 저마다의 불안감이 꽤 컸었는데 결국엔 거의 전원이 당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것을 두고 민주당 직원들은 "노무현 군단이 점령군처럼 들어왔다."며 불쾌해 했다.
실제로 노무현 캠프는 민주당으로 들어가면서 한동안 업무 파악과 역할 분담이 제대로 안 되는 등 자리매김을 놓고 난항을 겪었다. 노무현과 그의 비서실을 두고 "5월 한달 동안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는 언론의 비판은 그들의 이런 자리매김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그 부분에 대한 노무현의 변은 이렇다.
"내가 지난 10년 동안 그 사람들의 역량을 평가하고 이 사람이다, 아직까지도 편하다 하는 것이거든요. 더 보충하면 되지 굳이 왜 쫓아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자꾸 쫓으라고 해요. 신뢰가 쌓인 사람은 그 사람이 흠이 없으면 쓸 수 있는 것을 용납해주어야지 나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다 자르라고 그러면 앞으로 누가 누구를 위해서 일을 하겠습니까? 공정하게 하면 되는 거죠."
캠프 경영 문제 못지않게 노무현이 심각하게 부닥친 문제는 '당 장악 능력'이다. 우리 나라는 3김식 카리스마형 리더십에서 실용적 리더십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시기에 있다. 노무현이 주장하는 네트워크형 리더십 또는 디지털 리더십이 그런 것들이지만 변화는 항상 격렬한 혼란의 시기를 거쳐 이루어진다. 반노, 비노, 영입, 분당, 신당 창당, 탈당 등 마치 꽁꽁 얽힌 실타래처럼 풀 길이 없어 보이는 민주당이고 보면 노무현의 디지털 리더십이 자리를 잡는 데에는 적잖은 세월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을 만난 뒤 시간이 흐르면서 내 머릿속에 가장 남는 그의 말은 "대통령이 할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음에도 몇 가지 안 되는 일, 그러나 획을 긋는 그 몇 가지로 기억된다는 것이었다. 노무현이 하고 싶은 일은 국민통합이다. 그리고 좀더 많은 개인의 행복이 최대한 보장될 수 있도록 제도적 판을 벌여주는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을 하기 위해 그가 넘어가야 할 산은 첩첩산중이다. 마지막 인터뷰 말미에 그에게 물었다.
"지금 현재 후보님에게 가장 필요한 도움이 뭔가요?" 그러자 노무현은 예의 그 촌스러운 웃음을 허허허 하고 웃었다. 그런 뒤에 "사람!" 했다. 그러곤 침묵했다. "투신. 투신할 사람", 그렇게 한마디 뱉고는 다시 말이 끊겼다. 그러고는 뜻밖에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내가 아주 외로울 거라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생각이 외로운 사람이 인생도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장기표 씨 반대했지요."
8·8 보궐선거에서 장기표 씨가 영등포 을구 출마 공천권을 신청했을 때 이야기였다. 노무현에게 역시 가장 큰 장애는 학맥, 인맥이었던 듯도 했다. 최종적으로 장기표 씨의 공천이 확정된 날, 노무현은 침묵한 채 후보실에 밤늦도록 남아 있었다. 어렵게 띄엄띄엄 말을 하는 노무현의 표정에는 공천 과정에서 그가 했던 고민들의 그림자가 역력하게 나타났다.
"아직 기존의 정치판에서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던 사람들 중에서도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 신청하고 있다. 기존의 거물들을 내세워 이름을 들먹거리니까 올 만한 사람들도 다 안 오지 않느냐. 왜 그들을 발굴해서 적극적으로 국민을 설득하려 해보지 않는가, 했습니다. 이번엔 승리하는 것이 좀 비관적이라고 봤기 때문에 2004년에 가더라도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인물을 키우자, 했던 것입니다."
"선거 한 번에 인물은 쑥쑥 큽니다. 상향식 공천이 일을 전부 망쳐놨다고 덮어 버렸지만 하향식 공천 중에 나쁜 것이 지방자치 질서 속에서
성장하는 사람의 길을 막아 버린다는 겁니다. 나는 지방 의원들이 올라오는 게 순서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따라, 진보적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지방의원들의 성장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진보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나한테 지금 필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수평적 리더십이 됐든 네트워크형 리더십이 됐든 이 새로운 리더십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고백에서 보듯 벽에 부닥친 것처럼 보인다. 리더십이란 그 과정을 어떤 방식으로 가져가든 이견이 있는 사람들을 조화시켜 하나로 묶어세우고 이끌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당내
갈등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무슨 대통령 타령이냐, 대통령이 되려면 당내 지도력부터 보여줘라."(「한겨레21」9월 26일자)는 식의 공박이 나오게도 생겼다. 그러나 '민주적'이란 것은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얻어지는 것이라던가. 우리는 말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권위적이고, 통제적인, 이를테면 군사문화식의 리더십에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에 맞춰 그러한 마인드를 바꿔나가는
과정을 낯설고 불편해 하는 것 아닐까? 유시민의 표현대로 "죽거나 혹은 바꾸거나"임에도 말이다. 그러나 매사에 '압축 성장'을 당연시 해온
우리의 마인드에 비춰볼 때 노무현에게 남은 시간은 그 새로운 리더십을 인식시키기에 충분한 걸까, 아니면 턱없이 모자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