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참된 어른은 얼마나 될까?
얼마 전 소설을 읽고 있는데 '50대의 중후한 남자가 나타났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어디 소설뿐이겠는가. '50대의 중후한...'이란 표현 속에 가벼이 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소위 말하는 '어른'이란 의미가 숨어 있는 듯하다.
일본인 지인 중에 중세 한국어를 전공한 사람이 있다.
그에게 '어른'이란 일본어가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오또나(大人)'란 말이 있긴 하지만 한국어에서의 정서적 관록을 표현하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생물학적 '나이 들음'의 의미가 깊고, 한국어의 정서적 관록의 의미가 담겨 있는 일본어는 없는 것 같다고 한다.
시제는 다르지만 78살에 썼다는 사무엘 울만(Samuel Ullman)의 '청춘'이란 시에 그 의미를 깊게 표현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한다(중략)
박해영작가가 쓰고 지금은 고인이 된 이선균 그리고 아이유가 주연을 맡은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예전에 보고 많이 공감했다.
드라마 속 이선균의 대사에 이런 말이 나온다.
경직된 사람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이 다 말해 주잖아?
상처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아플 만큼 아팠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한 참 멀은 것 같해
주인공 이선균의 처지가 나와 많이 비슷하다 생각을 하였다.
내 나이가 육십을 넘기다 보니 중후하다는 오십대의 사람이 그리 중후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설익게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저 옷만 폼 나게 입고 귀 밑머리가 희어 졌다고 해서 '어른'은 아닌 것이다.
삶에 모진 풍파 속에 어깨가 축 늘어져 있지만 결코 처해있는 환경을 외면하지 않고 당당히 헤쳐 나가려는 굳은 의지, 내게 보이는 내 모습이 나에게 당당하고 세상이 나의 어깨를 짓눌러도 포기하지 않는 굳은 심지, 이것이 '어른'의 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