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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2021년, “나모아미따불을 해라” 한 마디에 나를 찾고 극락 간 도관 스님
1) 고등학교 졸업하고 19살에 석남사로 출가
도관道觀 스님(속가 이름 徐成香)은 1953년 진주에서 태어났다. 1953년은 한국전쟁(1950)이 일어나 3년간 전국이 황폐되고 겨우 휴전상태로 들어간 혼란의 시기였다.
도관 스님은 중학교 때 독실한 불교 신자인 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침은 물론 저녁에 일하고 돌아오신 할머니는 손을 씻고 봉창문 앞에서 반드시 부처님에게 기도하고 저녁을 먹었다. 도관 스님도 어려서부터 불교책을 즐겨 읽고 할머니에게 전생 이야기에 관한 책이나 경을 읽어드리면 할머님은 늘 기뻐하셨다.
스님은 진주여자중 · 고등학교 다닐 때 특히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여 두각을 나타냈고, 학교에서도 선생님이 특별히 원효대사를 조사 · 발표하라고 해서 역사적인 사실과 종교적인 면에서 잘 준비된 발표를 하여 칭찬을 받은 적도 있었다. 스님은 학교 다닐 때부터 벗들에게 “나는 출가할 거야!”라고 이야기했고,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고기를 먹지 않았다. 닭 · 토끼와 뛰어놀던 모습이 생각나서 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그림 그리는 벗들과 음식점에 가면 벗들이 먼저 “고기 빼고 야채만 넣어 주세요!”라고 할 정도로 남다른 면이 있었다. (화정애 보살 회고)
이런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낸 도관 스님은 1971년 졸업하자마자 19살 나이에 출가하게 되었다. 이런 이른 출가는 집안에서 출가한 스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출가한 집안 어른을 찾아갔다가 출가를 결심하고, 비구니 수도처로 많은 비구니가 정진하고 있던 석남사에 가서 백졸 스님을 은사로 득도得度하였다. 당시 석남사 주지 인홍 스님에게 “저는 가장 열심히 수행하시는 백졸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싶습니다”라고 당돌하게 간청하여 그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미계를 받고 시작한 석남사 생활은 농사일하고 기와를 이는 등 고달팠지만, 출가 생활 자체가 큰 목적이고 보람이었기 때문에 늘 즐거웠다. 그리고 몇 년 뒤 본사인 통도사에서 조계종 합동 비구니계를 받았다.
2) 본격적인 화두 참구와 포교
석남사에서 수행하고 있던 어느 날 성철 스님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만약 계속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면 10촌을 넘었다.”
집안 스님들 인연 때문에 학교 다닐 때부터 성철 스님을 가끔 뵈었고, 그때마다 출가하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아 훌륭한 화가가 되는 것이 목적이라 출가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석남사에서 서예를 배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보낸 소식이다. 성철 스님은 그림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도관 스님의 습을 알고 있어 늘 “너는 그림을 많이 그리면 쟁이밖에 안 된다”라고 하셨는데 다시 붓을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책한 것이다.
“그럼 저는 언제쯤 그림을 그릴까요.”
“후제 해라.”
“후제는 해도 됩니까?”
“그러면 된다.”
여기서 ‘후제’란 ‘뒷날 어느 때’란 뜻으로 도관 스님은 그 ‘후제’를 ‘자신의 욕망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을 때’라고 이해하고 붓을 놓은 뒤 수행에 전념하였다.
석남사에서 수행하던 중 어떤 큰스님이 “마하반야바라밀다는 마하반야바라밀다가 아니고, 다만 이름이 마하반야바라밀다이다”라고 하는 설법을 듣고 크게 발심하게 되었다. 바로 금강경의 고갱이가 화두가 된 것이다. 석남사에서 수행을 위한 기초를 닦은 도관 스님은 몇 년 뒤 본격적인 공부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경남 어느 지역에 토굴을 짓고 4년 6개월간 한결같이 묵언 정진하였다. 4년 묵언하며 오로지 화두에만 매달리던 도관 스님은 이때 일생 수행할 자량資糧을 확보하게 되었다.
혼자 수행하던 도관 스님은 늘 잠이 올 때 깨워 줄 도반이 그리웠다. 그리고 자리 自利만이 아니 이타행이 대승불교의 고갱이라는 것을 깨닫고 토굴에서 나와 어느 산중에서 불사를 했다. 길이 좁아 큰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가까운 마을 앞에 기와 · 모래 · 시멘트 같은 건축자재를 내려놓고 가면 작은 운반 수단으로 산골짜기 안까지 옮겨 도랑에서 물을 퍼다가 새로운 도량을 만들어 가는 것 자체가 큰 수행이었고, 이때도 화두를 놓치지 않으려는 정진은 계속되었다.
창건주를 도와 불사가 끝나자 스님은 미련 없이 그 절을 떠났다. 그리고 인연 따라 유행하면서 수행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이젠 어딘가 자리를 잡고 수행과 동시에 법을 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사천의 한 산자락을 뒤로한 곳에 불사를 시작했다.
3) 말년에는 돌아갈 고향을 찾았다.
인적이 드문 사천 산자락 불사는 몇 년 가지 않아 끝이 나고 크지 않지만 안정된 대성사 불사가 끝났다.
도관 스님은 대성사에 선방(금당)을 마련해 화두 참구를 이어가며 지도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중생 제도를 위해 신도들에게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데 전념하였다.
그리고 말년이 되어 가면서 스님은 늘 주위에 이야기하였다.
“나는 69세에 간다.”
60대 중반에 이르자 천천히 고향에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바로 염불을 시작한 것이다. 40년 이상 화두에 매달렸던 스님은 이승에서 확철대오 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아시고 이런 생각을 한다.
‘초지보살 경지에 이른 원효 성사도 말년에 무애無㝵 박을 치고 전국을 돌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외쳤고, 천태종을 다시 세운 고려시대 요세 스님도 천태정토를 펴고 마지막에는 극락발원을 했다. 서산대사는 법안종과 임제종을 이어받은 선사지만 「나무아미타불」 7자 법문은 반드시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라고 말씀하셨다. 특히 『선가귀감』의 다음 말씀이 마음 깊은 곳을 때린다.’
“마명이나 용수는 다 (대승의 종지를 세운) 조사지만 모두 ‘극락 가서 태어나라’고 뚜렷하게 말씀하셨고, 마음 깊이 권하셨는데, 내가 누구라고 감히 (극락) 가서 태어나길 바라지 않겠는가?”
4) 모든 수행과 포교를 염불로 바꾼 도량
정토 도량으로 바꾼 스님은 정토 법문의 3가지 밑천(資糧)인 믿음(信) · 바람(願) · 염불(行) 3가지를 마련하여 스스로 정진하며 대중을 이끌어 갔다.
(1) 아미타경으로 믿음을(信)
도관 스님은 정토삼부경 가운데 가장 짧으면서도 ① 극락은 어떤 모습인가? ② 극락은 왜 가야 하는가? ③ 어떻게 하면 극락에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아미타경을 믿음의 뿌리를 만드는 경전으로 모셨다. 그래서 이전에 천수경이나 다른 경을 읽었던 법회 순서는 모두 아미타경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자기는 물론 모든 신도들에게 평소 아미타경을 읽도록 독려하여 믿음의 뿌리를 단단하게 하였다.
▣ 유튜브「아미타경 독송 및 염불 (도관 스님과 대중들)」첫머리 참조
(2) 아미타 부처님을 찬탄과 발원(願)
아미타경에 보면 부처님은 “사리뿌뜨라여, 이 말을 들은 중생들은 마땅히 그 나라에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을 내야 한다.”
“사리뿌뜨라여, 나는 그런 사실을 보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니, 이 말을 들은 중생은 마땅히 그 나라에 태어나길 바라는 마음을 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극락 가겠다는 바람(願)이 있어야 극락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관 스님은 다음 같은 발원문을 만들어 자신은 물론 모든 인연 있는 이들에게 수시로 외도록 하였다.
아미타 부처님은 광명의 부처님이시고
아미타 부처님은 생명의 부처님이시고
아미타 부처님은 진리의 부처님이시고
아미타 부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며
아미타 부처님은 시방삼세 모든 부처님 가운데
아미타 부처님이 제일이시니
제가 이제 크게 귀의하여 신 · 구 · 의 삼업 죄를 참회하나이다.
지극한 정성으로 아미타 부처님을 염송하여
아미타 부처님을 뵈옵고,
아미타 부처님 같이 무상대도를 성취하여
아미타 부처님 같이 일체중생 제도하기를 발원하옵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 유튜브「아미타경 독송 및 염불 (도관 스님과 대중들)」끄트머리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XkvFOMqAyfI
(3) 염불 – 정토선 염불 행(行)
아미타경으로 믿음을 다지고, 발원문으로 극락을 가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극락을 가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부처님을 마음에 새기는 염불이다. 그렇다면 염불을 어떻게 할 것인가? 도관 스님은 염불하는 절과 스님들을 직접 찾아가서 배우고 직접 해보는 과정에서 정토선 염불을 접하게 되었다. 『극락과 염불』이라는 책(129~130쪽)에 극락에 간 관정 스님이 직접 관세음보살에게 배워온 염불이 소개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염불하는 것이 가장 좋고, 수행하여 가장 빨리 이룰 수 있습니까?”
“선禪과 정토淨土를 함께 닦으며 (禪淨雙修), 한마음으로 염불하고, 염불하면서 참선하는 것을 ‘정토선淨土禪’이라 한다.”
“정토선을 어떻게 닦아야 할지 가르쳐 주십시오.”
“사람들을 2반으로 나누어 염불하되, A반이 아미따불을 2번 염불하면, B반은 소리 없이 (속으로 따라서) 염불(黙念)하며 듣고, 이어서 B반이 아미따불을 2번 염불하면, A반은 소리 없이 (속으로 따라서) 염불(黙念)하며 듣는다. 이렇게 수행하면 힘들지 않고, 또 염불이 끊어지지 않는다. 이근耳根은 가장 영민하기 때문에 (계속 들으면) 귓속에서 저절로 염불 소리가 나게 되는데, 바로 마음이 염불하는 것이다. 마음과 (염불하는) 입이 하나가 되면 불성이 스스로 드러나게 되고, 고요해지면 선정(定)이 생기고, 선정에 들어가면 지혜(慧)가 생기느니라.”
스님은 정토선을 수행한다는 서방사에 직접 가서 염불 소리를 들어 보고, 염불 CD를 받아와서 실제 신도들과 실제 해보니 그 이전에 했던 염불에 비해 확실히 신심이 나고 정진이 잘 되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도량에 정토선 염불이 끊이지 않았다.
▣ 유튜브「정토선 염불(도관 스님과 대중들)」
https://www.youtube.com/watch?v=dl5Z4tkcmOE
5) 불교는 수행하는 종교 – 모두 생활 속의 염불 수행
정토를 닦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절 사부대중이 모두 수행자가 되었다. 모든 매주 토요일(오후 2시~ 4시) 아미타 기도를 하였고 초하루, 보름 법회 때도 언제나 아미타경 독송으로 시작하고 아미타경 독송으로 끝났으며, 나머지 대부분 시간은 정토선 염불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끝에 가서 잊지 않고 극락 가는 발원을 하였다.
신도들에게 절에 오지 않을 때도 집에서 하루 적어도 20분 이상 염불할 것을 강조하고, 시간이 없고 잘되지 않을 때는 10번 염불하는 십념염불十念念佛을 권했다. 모두 인사할 때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화할 때도 ‘나무아미타불’이었다. 근기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20분 이상 염불하고, 날마다 1~2시간씩 하는 신도들도 있었다. 아이들 있는 집은 나무아미타불 유튜브를 자장가로 들려주었다.
도량에는 젊은 신도들이 많이 왔다. 법당 안에서 기도할 때도 아이들이 마음대로 뛰어놀도록 놓아두었기 때문이다. 책을 보아도 되고, 누워도 좋고, 놀이를 해도 괜찮고, 찰흙으로 무엇을 빚어 만들어도 된다. 아이들은 그렇게 크는 것이고, 결국 염불 소리 속에서 큰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염불하게 되며, 고등학교, 대학교 가서도 똑같이 염불하고 기도하였다.
다만 재齋를 지낼 때는 아이들을 달랬다.
“재 지내고 나면 맛있는 것 많이 줄 터이니 재 지내는 동안에는 조용히 하자.”
실제로 재가 끝나면 아이들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집어 가게 했다. 그러면 작은 아이들은 자기도 하고, 속이 든 아이들은 나무아미타불을 따라서 하는 기특함을 보였다.
도관 스님은 이처럼 모든 대중이 함께 정진하였는데, 이미 참선을 통해 높은 수행력을 터득한 스님은 염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부터 꿈에 극락세계 다녀오고, 사방에서 염불 소리가 들려 오는 경지에 이르러 때때로 극락에서 본 칠보 다락과 여덟 가지 공덕의 물을 이야기해 주어 많은 사람이 신심을 갖게 해 주었다.
6) 제천보살을 극락에 가도록 이끌고 도움 염불까지
도관 스님은 표현하지 않고 주변 일들을 맡아서 자기 일처럼 하고, 또 남을 도와주는 일이 많았다. 스님이 주변 사람들을 위해 자비를 베푼 가장 대표적인 일을 들자면 수행 도반으로 평생을 함께한 공원空圓 스님 모친을 10년 넘게 보살피며 마지막에 극락 가도록 최선을 다한 일이다.
80이 넘어 몸이 불편한 제천보살(이은남 보살을 절에서는 그렇게 불렀다)은 눈이 거의 안 보여 자식들이 돌보기 어렵게 되자 절에 와서 지내게 되었다. 같은 절에 딸이 있지만, 그냥 스님이고, 도관 스님이 ‘우리 스님이 될 정도로 제천보살 말년을 극락 가도록 이끌어 주었다. 옛날부터 속가에서도 “나이 들면 남새 밥 먹고 염불한다”라고 했다. 제천보살은 처음 절에 와서는 라디오를 들었지만 ’우리 스님‘의 인도로 염불에 전념하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세상을 쉽게 여읜 제천보살은 그 뒤 하루 내내 1,000념 염주를 돌리며 염불에 집중한 나머지 어떤 때는 2~3일씩 고요(靜)에 머물 정도로 경지가 높아졌다. 이 모든 것이 도관 스님의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이끌어 준 덕분이었다.
마지막 가실 때는 1,000념 염주가 무거워 돌릴 수가 없자 108 염주로 바꾸어 돌리고, 그것도 힘에 부치자 그 염주를 목에 걸어 드렸더니 염주를 쓰다듬으며 염불을 이어갔다. 어느 순간 마지막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아는 ’우리 스님‘이 갑자기 소리쳤다.
“보살님 무엇하십니까?”
이 죽비소리에 제천보살은 다시 정신을 다잡아 “나무아미타불”을 이어 갔다. 그리고 그렇게 묵에 걸린 108 염주를 만지며 염불하다가 93세의 나이로 2008년 극락으로 갔다.
7) 연꽃 자리(蓮花臺) 타고 극락 간 도관 스님
(1) 죽음을 미리 준비하고 모든 것을 회향하다.
스님은 「연지대사 극락세계 발원문」 가운데 다음 부분을 좋아해 늘 염하였다.
이 목숨 마칠 때 갈 시간 먼저 알아
여러 가지 병고액난 이 몸에서 사라지고
탐진치 온갖 번뇌 씻은 듯이 없어져
육근 화락하고 한 생각 분명하여
이 몸을 버리옵기 정에 들 듯하여지이다.
2021년 목숨 마칠 때 갈 시간 먼저 알아 차분히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먼저 스승 옥봉 스님 유물로 간직하고 있던 그림 1점을 기증하였다. 옥봉 스님은 근대 최고의 묵죽墨竹 화가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1883~1950)의 제자였다. 옥봉 스님은 스승의 작품 2점을 가지고 있다가 제자 도관 스님에게 물려주었다. 도관 스님은 그 그림을 일주 선생이 1944년 여운영 선생과 건국동맹을 함께 했던 인연을 생각해 몽양 여운영 기념관에 기증하였다. 좋은 작품은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스님의 의견 때문이었다.
8월 9일(음력 7월 2일) 생일, 도반과 함께 나가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연못에서 연꽃도 보고 절로 돌아온 뒤 말했다.
“나 이제 가야겠다.”
올해가 바로 자신이 늘 69세에 가겠다는 바로 그해였다. 그리고 그 뒤 한 달 정도를 소파에서 눕지 않고 하루 22시간을 생활하셨다. 도반 스님이 물었다.
“열불하고 계십니까?”
“노력하고 있다.”
먼저 유품으로 갖고 있던 스승 옥봉 스님 그림을 정리해서 따르는 신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3형제에게 줄 때는 맏언니에게 1점을 주며 동생들과 따뜻하게 잘 지내라는 당부로 화목하게 하는 방편으로 삼기도 했다. 보름 전부터 살면서 고마운 분들께 인사를 하고, 오래된 스님들에게 통화하고, 신세 진 분에게 용돈도 드리고, 불편했던 분께 “유감없다”, “고마웠다”고 하나하나 회향하고는 완전히 세상일을 놓아 버렸다.
9월 15일 수요일, 목욕 삭발하고 그때까지도 스스로 몸을 움직이다 마지막에는 휠체어에 의지하였으나 16일까지도 차 타고 외출도 하고 공양도 하시면서 마지막까지 염불에 골몰하였다. 모든 것을 놓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니(心無罜碍) 두려움이 없이(無有恐怖) 편안해 보였다.
9월 17일 금요일 지병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다리가 너무 많이 부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도반이 스님에게 말했다.
“스님, 아무래도 병원에 가서 도움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 말을 듣자 스님 눈에서 갑자기 번쩍 빛이 났다. 평소 10년간 지병이 있었지만 약 먹는 것을 즐겨하지 않고 병원에 가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던 스님 눈에 나온 섬광은 무슨 뜻일까? 그러나 입원한 뒤 그런 뜻을 물을 겨를도 없었다. 당시 코로나가 크게 유행해 보호자는 한 명만 가능했고, 보호자는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었다. 도반 스님은 만일의 경우 일 처리를 해야 했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런 안타까움도 걱정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 일요일(19일)인 다음날 하루 지내고 월요일인 9월 20일(음력 8월 14일) 스님은 조용히 혼자서 극락으로 가셨기 때문이다. 세속 나이 69살, 법랍 50년이었다.
병원의 통지와 함께 스님은 잊지 않고 극락 간 소식도 전해 주었다. 평소 스님 따라 열심히 정토선 염불하였으나 깊이 교리를 공부하지 않았던 신도에게 전화가 왔다.
“작은 스님, 꿈에 큰 스님이 아주 큰 연꽃 타고 올라가시면서 손을 흔들며, ’나는 전혀 아프지 않다‘라고 하고 너무 환하게 웃으시면서 가셨어요.”
입관한 뒤 스님들과 대성사 신도분들이 꽤 많이 와서 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스님들과 신도들은 “큰스님 얼굴이 마치 살아 있으신 듯 색이 전혀 변하지 않아 신심이 났다”고 했고, 어떤 신도는 “밥을 못 먹었는데 큰 스님 얼굴 뵙고 신기하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도관 스님은 임종게도 없었고, 마지막 남긴 말씀도 없었다. 평소에 다하고, 할 말을 하나도 남겨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대성사 신도들은 평소 이끄시던 말씀 따라 날마다 유튜브 틀어 놓고 ’나무아미타불’을 생활화하고 있다.
卍 보정의 꼬리말
1. 정토선이 무엇이고 어떻게 수행하는 것입니까?
엮은이가 처음 도관 스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2019년 말인가 2020년 초로 기억한다. 진주에서 엮은이가 지은 『극락과 염불』이란 책을 샀는데 정토선은 어떻게 수행하고, 염불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고 싶어 전화했다고 하였다. 정토선에 대해서 설명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1시간이 넘었다. 스님은 무언가 하나라도 더 찾으려는 에너지가 목소리에 베어 마치 학술 토론을 하듯이 법담을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정토선 염불에 대해서는 가까운 서방사를 추천하였다. 그 뒤 서방사에 직접 가서 염불 소리를 들어 보고 염불 CD를 받아와서 신도들과 실제 정토선 염불로 염불 수행을 시작하였다. (앞에서 본 유튜브 참조)
그다음 통화에서는 정토선에서 가장 중요한 수행단계인 자성염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실제 자성염불이 된 굉수 스님을 소개해 드렸다. 자주 연락을 못 했지만, 전화하면 보통 1시간이 훌쩍 지나가곤 했다. 그래서 2020년 6월 첫째 주 일요일 서방사에서 열리는 관정 스님 다례재 때 만나서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2000년 3월부터 코로나 대유행 사태가 벌어져 행사가 취소되고 그다음 해도 이어지면서 스님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2. 원력(願力)이 업력(業力)을 이겼다 – 나를 찾아 준 ‘나무아미타불’
2020년 12월 엮은이가 두 번째 하는 “살아서 하는 장례식” 안내장을 보냈더니 12월 18일 전화를 해 주셔서 다시 한 시간 통화가 이어졌다. 이때 스님은 “나무아미타불을 하라”는 붇다의 말씀을 듣고 다시 태어난 이야기를 해 주셨다.
“지병 때문에 병원에서 일주일밖에 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지만 나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희한한 경계를 경험했습니다. 내가 나를 보니 나는 분명히 살아있는데, 내 이름이 무엇이고,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나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빈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내가 누구입니까?’ 이처럼 ‘왜 내가 없지?’ 하고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무아미타불을 하라’는 말씀이 또렷하게 들렸고, ‘나무아미타불’ 한마디 하자마자 깨어나서 원래 나로 돌아왔다. 부처님이 아니면 누가 그런 능력이 있겠습니까? 나는 깨어나서 물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아팠는가?’ ‘3주 동안 아팠습니다.’” (2020년 12월 18일 오후 3시 녹음 파울 가운데서)
그 당시 10년을 앓았던 지병이 막바지에 이르러 병원에서 “입원하면 6개월을 입원 안 하면 1주일도 넘기기 어려울 수도 있다.”라고 해서, “병원에서 무의식에 가느니 절에 가서 마지막을 맞이하겠다”라고 하고 썼던 입원서를 주어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3주 동안 자신을 잃어버린 것은 분명히 지병 때문이 아니었다. 지병 때문이라면 일주일 안에 죽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슨 상황이었을 것인가? 우리는 전화로 꽤 길게 토의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의 문턱에서 염불하는 자신에게 감당하기 힘든 업이 한꺼번에 몰려왔고(업력業力), 그에 대비한 스님의 (원력願力), 곧 마지막까지 염불하여 극락에 가야 하겠다는 원력과 부딪쳐 죽음까지도 어찌하지 못한 상태로 들어가서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스님이 다시 ‘나무아미타불’을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곁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고 염불을 했던 도반의 도움 염불이었다.
“당시 스님의 상태를 보고 운명하는 것보다 더 슬픈 것이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슬펐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무아미타불을 계속해서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공원 스님 회고)
전생부터 쌓인 엄청난 업이 몰려와 6도를 윤회하는 길로 끌어갔고, 스님은 이제 더 이상 윤회를 하지 않고 극락에 가겠다는 원력으로 막아 가는 과정이 3주가 갔고, 마지막 도반의 도움 염불(助念)을 합쳐 한마디 ‘나무아미타불’을 하므로 해서 한꺼번에 8억 겁의 업을 녹여 버렸던 것이다.
『무량수경』에 “붇다 이름을 듣고 기뻐 뛰며 (아미타불을) 단 한 번만이라도 염念하면 이 사람은 큰 이익을 얻고 위 없는 공덕을 갖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其有得聞 彼佛名號 歡喜踊曜 乃至一念 當知此人 為得大利 則是具足 無上功德)”라고 했고, 『관무량수경』에는 “그 사람이 괴로움에 눌려 붇다를 염念할 경황이 없어, 길동무(善友, 道伴)가 다시 그대가 만일 그 붇다를 염念할 수 없으면 ‘무량수불께 귀의합니다(나모아미따불)’라고 불러야(稱) 한다. 이처럼 마음 깊이 소리가 끊어지지 않게 10번 ‘나모아미따불’을 부르면, 붇다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염하고 염하는 사이 80억 겁의 나고 죽는 죄를 여읜다.(彼人苦逼 不遑念佛. 善友告言 : 汝若不能念彼佛者, 應稱敀命無量壽佛, 如是志心, 令聲不絶, 具足十念 稱南無阿彌陀佛. 稱佛名故, 於念念中, 除八十億劫生死之罪)”고 했다.
다시 태어난 스님은 붇다가 더 주신 삶을 살면서 목숨을 걸고 열심히 수행하는 한편 염불 보급에 온 힘을 다 쓰고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거사님도 이번 장례식 대 참석자들에게 꼭 염불하도록 권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보급하는 것이 장례식보다 더 중요합니다.
3. 내가 염불해야지 염불 소리를 듣는 것은 질이 다르다.
2021년 코로나 때문에 모임이 불가능했으므로 올 불교 강의는 온라인으로 했다. 2월 28일부터 3월 1일까지 ‘동북공정 백서 발표회’를 마치고 이어서 3월 20일부터 6월 19일까지 토요일에 3개월간 12강을 하는 일정이다. 이때 보낸 안내서를 보고 다시 스님이 전화를 걸어 왔다. 1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염불 수행에서는 ‘자성염불’에 대해 길게 논의하였다.
<도관> ”굉수 스님에게 자성염불이 어떤 것이냐고 물으니 염불 소리를 하루 내내 듣는다고 했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염불이란 내가 해야지 다른 염불 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은 질이 다르다고 봅니다.“
<보정> ”자성염불은 남의 소리가 아니고, 스스로의 자성이 염불하는 것입니다. 염불이라는 것도 방편이기 때문에 정토선에서는 자성염불이 되면, 스스로는 염불을 하지 않고, 몸속에서 나는 염불을 찬찬히 들으면서 그 염불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봐내야 합니다. 이는 ‘염불하는 놈이 누구냐’라는 화두와 같은 것으로 진짜 의정을 내는 것입니다.“
<도관> ”사실 나도 염불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주 맑고 아름다운 염불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내가 염불하는 소리를 뺀 다른 소리는 모두 번뇌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무시하고 내 염불만 했다.“ (2021년 3월 16일 16시 녹음파일 가운데서)
자성염불 단계에서 보통 먼저 다른 곳에서 염불 소리가 들리거나 귀에서 들리고, 오래 듣다 보면 단전에서 들린다. 그리고 사람의 자성이란 바로 자기이므로 스스로의 성품이 염불하는 것이지 남이 한 염불이 아니었다. 이 내용을 보면 스님은 자성염불을 통해서 모든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일념一念 단계에 이미 들어가고 있었다. 그 단계에서는 스스로 염불을 하지 않고, 더 깊이 들어가다 보면 무념無念까지 이르러 극락을 가기 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근기인데 극락 가서 공부하는 것을 선택하여 아쉬웠다.
우리는 그 밖에도 많은 주제를 가지고 1시간 이상 법담을 이어갔다. 처음 전화할 때는 목소리가 가라앉아 힘들어했으나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나중에는 온몸의 기운이 목소리에 실릴 정도로 본디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것이 이승에서는 마지막 대화였다.
4. 남에게 염불 권하면 한가지로 극락 간다 하시니라 (勸他念佛同生西方)
끝으로 스님이 자신이 있는 도량 식구들 모두에게 믿음(信) · 바람(願) · 염불(行)이라는 튼튼한 밑천을 대 주고 염불하도록 한 공덕과 90이 넘은 노보살을 극락으로 인도한 공덕이 얼마나 큰지 그 자료를 소개한다. 이 내용은 ‘아미타불’ 카페지기 혜련 거사의 질문에 대답했던 자료이다.
1) 『현호경賢護經』에 사람이 억만금 재보財寶를 가져 모든 불보살과 사람에게 보시하면 비록 그 받은 복이 끝없이 크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한번 ‘나모아미따불’을 염念하게 권한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또 대자보살大慈菩薩은 두 사람에게 염불을 권하면 스스로 염불하는 것과 같고, 10명 넘게 권하면 복덕이 헤아릴 수 없이 크다고 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미따불에게 등과 초를 이바지하면 모든 붇다가 기뻐하여 목숨이 다해 극락에 태어나 시방세계를 환하게 본다고 하였다. 『법화경』에 ‘나모 붇다(붇다에게 귀의합니다)’라고 한 번 부르면 모두 불도를 이룬다고 하였다. (賢護經云 有人将持億萬財寶 普施諸佛菩薩諸衆生 則其得福亦雖無量. 又不如有人 勸令稱念一聲阿彌功德. 大慈菩薩云 勸二人念佛則 比於自已念佛, 又勸十餘人則福德無量. 若人燈燭供養阿彌陀佛則 諸佛歡喜 命終生於極樂 微見十方世界. 法華經云 一稱南無佛者 皆以成佛道.)
2) 『현호경』에 ”가령 어떤 사람이 시방의 미진수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일곱 가지 보석으로 보시하고, 또 모든 중생에게 옷과 먹을거리 같은 4가지 필수품을 보시하여 모두에게 아라한과를 얻게 하면 그 복이 많으냐 많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셨다. 현호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그 복은 아주 많습니다.” 붇다가 현호에게 말했다. “(그것은) 어떤 이가 다른 사람에게 한 번 아미따불을 염하게 하는 공덕만 못하니라. 남을 권하는 것이 이럴진대 더군다나 자기가 염불하면 어떻겠느냐! 한 사람에게 한 번 염불하게 하는 것이 이럴진 데 많은 사람에게 권하여 많은 사람이 염불한다면 어떻겠느냐!” (賢護經云, 假使有人以七寶滿十方微塵數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 復以衣服飮食四事供養一切眾生 皆令得至阿羅漢果 其福多不. 賢護白言世尊 其福甚多. 佛告賢護 不如有人勸令稱念一聲阿彌陀佛功德 即過於彼, 勸他旣爾 何況自念, 一聲尚爾 何況多耶.)
『현호경賢護經』은 CBETA에 실리지 않은 것을 보면 현재 전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규기窺基의 『아미따경 소』, 회감懷感의 『석정토군의론釋淨土群疑論』, 가재迦才의 『정토론淨土論』에서 인용한 것을 보면 당나라 때는 존재했던 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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