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입지 효 문화 예술축제
사)한국효문화센터 http://www.hyo-culture.kr/
5월8일 오전 10시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과천시 막계동 서울랜드에서 백일장, 그림대회, 사진콘테스트와 효 문화 예술체험 횅사가 성황리에 열렸습니다.
송이풀, 토끼풀 반(만 3세) 친구들은 개막식에 참석하고 원장님이 끊어주신 티켓으로 놀이기구를 타고 왔어요^^
효의 고장 과천시 주최 공동 주관에서 개막식 입장료를 후원해 주셨고
과천시 주최 한국 효 문화센터와 과천문화원과 과천향교 공동 주관으로 관내 학교는 '효 주관의 날'로 정했습니다.
입지 최사립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된 과천 출신의 효자 최사립 선생은
효성이 지극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묘 역에 움막을 짓고 3년을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효자 최사립 정문은
과천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이와 함께 효 문화 확산을 위한 문화 예술 축제가 가정의 달 5월에 펼쳐집니다.
축제의 하나로 백일장과 사생대회도 열렸어요.
원장선생님께서 놀이기구 3종을 탈 수 있는 티켓을 준비해 주셔서
저희는 개막식에 참석하고 서울랜드에서 신나게 놀이기구를 탔어요. 우리는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너무 좋아요!! 히힛^^
먼저 부모님이 준비해 주신 간식을 맛있게 먹고, 놀이기구도 타고, 축제를 보기로 했어요^^
커다란 잉어들이 팔딱팔딱!!
원장님이 끊어주신 놀이기구 3종 티켓을 받고 무엇을 탈까? 고민하다가...바로 이곳에서! 신나게!! 히힛^^
자동차는 움직이지 않는데 아이들은 신났어요^^
낙하산 놀이기구를 타기로 했습니다^^
무서울까?^^
괜찮겠지?^^
조금 걱정하며 탔지만..
하늘높이 올라가는 순간!!
야호!!
쑤욱!! 하늘 높이!!
재밌어요^^
회전목마도 탔습니다^^
빙글빙글 돌아가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어요 ㅠㅠ
모두들 잘 타서 놀랐다고요?
왜냐하면! 한결어린이집은 자주 과천경마공원에서 진짜 말을 탄다니까요!! 히힛^^
말 위에 혼자 앉아 탔답니다^^
우리는 선생님과 함께^^
박치기 차도 타고..
서울랜드에서의 놀이기구를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모두 모두 사랑하는 엄마 아빠 덕분이예요. 감사합니다^^
최사립 효자정각(崔斯立孝子旌閣)
- 소재지 : 과천동 351-7
최사립 정려판
최사립(1505~?)은 본관이 전주(全州), 자는 입지(立之)이며, 현 막계동에서 출생하였다. 묘는 막계동에 있었으나 신도시 개발로 1979년 용인군 남사면 완장리로 이장하였다. 그는 한성부윤 사위(士威)의 5세손이며, 돈녕부첨정(敦寧府僉正)을 지낸 결(潔)의 아들이다. 막계동의 전주 최씨는 사위의 아들 조(肇)가 당시 과천현 막계 농막동(農幕洞)으로 이주함에 따라 세거하게 되었다.
최사립은 가세가 곤궁하였으나 송진으로 불을 밝히며 경서를 탐독하였고 항시 독서로 소일하여 사림의 존경을 받았다. 일찍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업하였다. 중종이 사정전(思政殿)에 행차하여 진강할 때 최사립이 10여 명과 함께 종이와 붓을 받았으며 몇 년 후 진강에 참여하여 윤홍의 등과 함께 3등으로 합격하기도 했다. 벼슬은 음직으로 배천군수[白川郡守]를 거처 사헌부집의, 해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에 이르렀다.
그는 특히 『소학(小學)』을 행동강령의 근본으로 삼아 부모를 공양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여 애곡하고 심상함이 심하였고, 여막을 지어 삼년상을 치르며 매일 조석으로 성묘하여 호곡하였다. 부친이 병으로 위독할 때에는 각처의 의원에게서 비방을 구하여 시약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으나 효험이 없었다. 그러던 중 칡꽃을 먹으면 기력을 회복할 것 같다는 말을 듣고 온 마을을 돌아 칡꽃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의 효성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배천군수를 지낼 때 좋아하는 술을 드릴 아버지가 없음을 슬퍼하며 지은 시가 족보에 실려 있다.
버들솜 하얗게 날리는 천수문 앞 天壽門前柳絮飛
한 병 술로 그리운 님 하마 올까 기다린다네 一壺來待故人歸
해 기울도록 눈 빠지게 긴 역로에서 기다리건만 眼穿落日長亭畔
많은 길손 가까이 오면 아니어라 多少行印近却非
1535년(중종 30)에 경기도관찰사 윤은필(尹殷弼)은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려 그의 효성을 포장하기를 청하였고, 이에 중종은 쾌히 허락하고 같은 해에 정려문을 세우라는 어명을 내렸다.
진사 최사립은 모친의 상을 당하자 묘 앞에 초막을 짓고 살며 애통하여 울음이 그치지 아니하였고 돌아가신 어머니께 드리는 끼니의 제사음식을 손수 정성껏 차려 올리는 일을 3년 상을 마칠 때까지 거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 부친이 돌아간 후에도 이같이 하여 동네 사람들이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이러한 효행을 장려하고 그 돈독한 풍습을 길이 전하기 위해 효자문을 세우도록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과천군읍지』에도 “효자 최사립은 음관으로 군수가 되었으며, 중종조 갑술년(중종 30, 1535년)에 효행으로 참의에 증직되고 정려가 내려졌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최사립의 행적은 1574년(선조 7) 홍문관 관리들의 건의로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 기록되었고, 그는 통정대부 이조참의(정3품)의 벼슬까지 받았다.
최사립 정려판은 규모가 263×27×3.5㎝이며, ‘효자통훈대부행배천군수 최사립지문(孝子通訓大夫行白川郡守崔斯立之門)’이라고 쓰여 있다.
정려판은 본래 정각에 걸려 있었으나 정각이 일제강점기 때 소실된 후 문원동에 거주하는 후손 최종수가 보관하여 왔다.
현재 정각은 그의 충효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과천시에서 1995년에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풍판이 달린 맞배지붕 홑처마 양식으로 복원한 것이다.
정려는 과천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과천시지 2권>1편>2장>3절>109면
출처:Daum카페 '과문사(과천 문화 사랑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