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꿀밤 가루를 쪄서 그릇에 담아냈다. 몇 알 강냉이 옆에 한 덩어리다. 적어 그걸 먹어야 끼니가 됐다. 처음이어서 저게 맛이 있을까 넘겼다. 괜찮다. 맨날 거친 잡곡으로 조금씩 먹다가 배부를 수 있었다. 달짝지근한 게 맛났다. 사카린을 넣어서 달금하게 했다. 좀 팍팍 해도 허기지니 그런대로 요기해야 한다.
부모 따라 가을 산기슭으로 다니며 떨어진 도토리를 주웠다. 하나하나 줍다가 많은 곳은 두 손바닥으로 퍼 담았다. 몇 부대와 자루를 이고 지고 다래끼에 가득 채워 안고 내려왔다. 인민군이 들어온 봉화 지역 피란 통에 이 고을 저 마을로 이부자리와 옷가지를 짊어지고 다니며 포탄과 총탄 소리에 살려고 허둥댔다. 피해 다니면서 이내 다가오는 끼니마다 먹거리를 찾아 헤매야만 한다.
그냥 버리고 거들떠보지 않던 게 올해는 천지다. 가나안 광야에 뿌린 만나를 쓸어 줍듯 꿀밤을 갖고 와 말린 뒤 자루에 넣어 밟아 껍질을 벗긴다. 키로 흩날려 알만을 골라내 맷돌에 간다. 며칠간 물에 담가 떫은맛을 우려내 가루와 물을 1대 3으로 푹푹 삶아내 묵을 쑨다. 이때 계속 저어야 한다. 눌어붙기 때문이다.
이런 별미인 호강스러운 음식은 오늘날 얘기다. 그럴 겨를이 어디 있나. 날것으로 질겅질겅 깨물다가 찧어 설삶은 것도 씹었다. 그렇게도 맛대가리 없을 수 있나. 목에 걸려 넘어가질 않는다. 개밥에 도토리라더니 그럴싸하다. 걸쭉한 것은 핥아대고 떫으며 쓴맛 나는 것은 그만 밀쳐낸다.
가루를 솥에 쪄서 한 줌씩 나눠 먹어야 했다. 내년 씨로 뿌릴 귀한 낟알을 손 떨리게 조금씩 넣어 올렸다. 어른은 어쩔 수 없이 우적우적 삼키지만 아이는 곡식 낱알만 들고 개밥처럼 찍 남겼다. “내년 농사를 어쩌나.” 씨 나락 까먹는 소릴 하면서 지난다. 그런 세월이 지난 지 엊그제다. 가맣게 잊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살아간다.
그때 그랬단다 말을 하려 해도 그 시절 굶주리던 조부모와 얼마 전 부모도 어언 다 돌아가시고 없다. 세월이 하 수상할 땐 수없이 떨어지지만 풍요로울 땐 별로다. 그게 어찌 알아서 챙긴다. 변란과 전염병이 일거나 큰 홍수와 심한 가뭄으로 어수선하면 막 떨어진다. 신기도 해라 맛없다고 뭐라 할 수 없어라.
‘그때를 아십니까’ 방송은 그저 재미로 봤다. 설마 그랬을까 하면서. 일제 때 공출로 뺏기고 이어 한국전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어 허덕였을 때다. 먹을 게 그렇게도 없을 때 이 구황식물 도토리가 산에 깔렸다. 굶지 말라고 자연이 베푼 귀한 음식이다. 춘궁기엔 나물이라도 뜯어서 먹지 가을 겨울은 이거 없으면 낭패다.
고마운 참나물로 중턱부터 온통 산을 뒤덮었다. 산자락에서부터 상수리와 굴참, 떡갈, 갈참, 졸참, 신갈나무로 빽빽하다. 다 키 높으며 아름드리인 것들로 도토리를 맺는다. 봄 여름 내내 푸르다가 가을엔 단풍으로 울긋불긋 아름다움을 한껏 떨친다. 겨울엔 앙상하지만 눈 덮였을 땐 눈꽃으로 추울 땐 상고대로 다시 피어난다.
암수 한 그루로 5월에 꽃 피어 9월 중순에서 10월 초까지 열매를 떨군다. 상수리는 선조 때 임금 수라상에 올랐다 해서 이름한 것으로 전한다. 잎을 짚신 바닥에 깔아 신었다 해서 신갈이라 부른다. 상수리와 굴참, 떡갈은 방석 모양을 한 껍질이고 신갈과 갈참, 졸참은 기왓장 모양을 하고 있다.
졸참 열매는 가장 작고 길쭉하면서 맛이 여섯 중에서 낫다. 전국에 분포하는 나무다. 서로 뒤엉켜 다투지 않고 교잡으로 번진 잡종이 많다. 굴참은 뒤집은 껍질로 지붕을 이어 너와집처럼 굴피집을 만든다. 또 코르크로 병마개를 했다. 마을 뒷산인 산기슭에도 자라 사람을 가까이하는 나무다. 산자락의 소나무에 이어 산 중턱을 오르면 흔해 빠진 것이 신갈이고 내려오면서 상수리가 상록수 사이사이에 보인다.
전라도와 제주에 비슷한 열매의 가시나무도 있다. 도토리 굵기는 상수리가 둥글고 크다. 다음은 신갈이고 굴참, 졸참나무 순이다. 다람쥐가 먹는다. 눈으로 덮이기 전까지 열심히 옮겨 묻어둔다. 산까치도 물고 위쪽으로 날라 땅에 숨긴다. 잊어버리거나 찾아내지 못한 것은 봄날에 싹으로 돋아나서 꼭대기까지 참나무숲을 이룬다.
돼지도 먹는데 갈참을 잘 까발려서 바작바작 깨문다. 도토리 찾는 돼지를 돝으로 부른다. 자연이 배고플 때 허기를 때우라 내리는 것이지만 많이 먹거나 모처럼이어서 변비가 생긴다. 또 꽃가루는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있다. 전으로도 굽는데 자작자작한 게 들기에 수월하다.
신라 말기 당나라에서 돌아온 고운 최치원을 함양 태수로 보냈다. 지리산 참나무를 마을 가운데 십 리나 심어 열매를 쉬 줍게 했다. 읍을 넓히면서 하림을 베어내는 바람에 절반 정도 남은 상림이다. 커서 죽고 다시 자란 것이 울울창창하다. 가을 졸참나무 고목 낙엽을 밟으며 꼬불꼬불 오솔길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숲엔 모기나 뱀이 없다니 신기도 해라.
‘마음이 맞으면 도토리 한 알로 시장을 멈춘다.’는 속담이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오순도순 정든 삶을 말함이며, ‘도토리 키재기’가 있다. 도긴개긴이나 오십보백보의 말로 비슷함을 이른다. 은행은 암수가 따로 있어 엄격하다. 벌레도 달려들지 못하는 잎이다. 고약한 냄새를 피워대는 열매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도도한 나무다.
그러나 도토리와 밤, 대추 등 대부분 열매 맺는 나무는 암수가 함께한다. 이들 참나무는 참깨와 참꽃, 참새, 참빗과 같이 참 자가 든 것은 진실이라는 뜻보다 많음이라는 내용이 강하다. 산에는 흔해 빠진 것이 참나무이다. 그 속에 나는 참나물이 있다. 예전에 취나물과 곰취 등과 같이 지천이었나 보다.
원양어업에서 잡은 큰 고기를 뭐라 이름 붙일까 하다가 치가 많아서 참치라 했다. 삼치와 멸치, 꽁치, 갈치로 부르니 무심코 다랑어를 그렇게 이름했다. 그것도 큰 바다에는 우글우글 많은 물고기이기 때문이다. 참나무 열매는 먹을 게 달리고 없을 땐 귀하다 해서 꿀밤이라 불렀다. 개밥이 어떻고, 키재기라니 가당찮다, 고마운 열매이다.
첫댓글 오늘은 도토리 얘기로 옛날의 춘궁기
나무의 종류 도토리로 만든 먹거리 가지 수
함양 상림 숲 얘기 끝이 없어요
전으로도 굽는데 자작자작한게 들기에 수월하다는 말
요즘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나 들을까요
수고하셨습니다
바닷가 집 앞 십 리 방풍림을 만들었는데 소나무 사이에 한 줄로 참나무를 심었습니다.
그게 요즘 커서 도토리를 많이 떨어뜨립니다.
새벽마다 사람들이 줍는다고 야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