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대 농대 학생으로 맞은 5·18
증 언 자 : 원순석(남)
생년월일 : 1951. 2. 23(당시 나이 30세)
직 업 : 대학생(현재 화재보험회사)
조사일시 : 1989. 6
개 요
농과대학 학생회장으로 5월 14, 15, 16일 집회에 주도적으로 참여.
5월 18일 서울로 피신, 7월 1일 자수.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풀려남.
농과대학 학생회장 당선
나는 해남군 산이면에서 태어났지만 아버님의 직업관계로 광주에서 자랐다. 조선대 부중을 졸업하고 동신고를 졸업한 후 1년 재수하여 1973년 전남대학교 농과대학에 입학하였다.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에 입대하여 제대 후 1977년에 복학하였다.
2학년 때에는 '탈패' 활동을 하던 윤만식 등을 만나서 함께 탈춤반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80년이 되자 전남대학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소리가 높아졌다. 학도호국단 체제에서 총학생회 체제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지면서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3월 30일 무렵 총학생회장 선출을 위한 선거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총학생회장 후보로는 박관현이 나왔고, 선거 참모진들이 구성되었다. 그와 동시에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 후보들도 선정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총학생회장 후보 박관현과 그의 참모진들이 연대하여 꾸려진 것이다.
농과대학 학생회 후보로는 내가 나서게 되었다. 2차 선거유세까지 마치고 숨가쁘게 선거운동을 했다. 나는 농과대학 학우들에게 총학생회 후보 박관현을 선전하고, 동문회 등의 통로를 이용하여 학우들을 설득시켰다.
4월 9일 드디어 총학생회 회장 및 8개 단과대학 학생회장 선거가 실시되었다.
개표 결과 총학생회 회장으로는 박관현이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고 나 역시 농과대학 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대부분 우리가 의도했던 대로 총학생회와 단과대학이 구성되었다.
어용교수퇴진 싸움
4월 11일 상과대학에서는 병영집체훈련 거부투쟁이 실시되고 어용교수 퇴진문제가 거론되었다.
농과대학에서는 처음으로 어용교수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일반 학우들에게는 별로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차차 어용교수 문제가 확산되어 인문대학 학우들의 좋은 반응으로 분위기는 심각하게 되었다.
4월 25일경 오후 1시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서 2천여 명의 학우들이 모여 '어용교수 퇴진을 위한 학생총회' 집회를 가졌다.
나는 농과대학 학우들을 이끌고 함께 참가하여 '어용교수 물러가라'등의 구호를 외치고 '투사의 노래' 등을 부르며 시위했다.
5월 13일경 각 단과대학에서는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위한 교내집회를 가졌다. 집회가 끝나고 학생들은 정문으로 몰려갔다. 전경들은 정문 앞 다리에서 학생들이 나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여러 줄로 서 있었다.
나는 학생대표로 경찰서장을 직접 만나 이야기했다.
"우린 밖으로 나가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교내에서 시위를 할 것입니다."
5월 14일 이날도 전날과 마찬가지로 교내집회를 가졌다. 그날 집회 역시 15, 16일 민족민주화대성회 준비를 위한 집회였고 어용교수 문제에 대한 시국토론회장이었다.
'민주화 일정 단축하라'
'어용교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자연대학 학우들은 후문 쪽에서 시위했고 인사대와 공과대학, 농과대학 학우들은 정문에서 시위를 했다. 15일에 대비하는 시위였다.
시간이 얼마 흐른 뒤 후문 쪽에서는 싸움이 벌어졌는지 전경들이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을 쏘아댔다. 흥분한 학생들은 돌을 던지며 맞서서 싸우고 있었다. 나는 정문에서 대강의 상황을 짐작하고 서 있었다. 그러나 정문에는 학우들이 거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잠시 후 학우들이 종합운동장에 각 단과대학별로 집결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벌써 후문에서 자연대학 학우들은 페퍼포그 차를 물리치고 담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농대 학우들은 200여 명이 모여 농과대학 쪽문을 통하여 신안동 쪽으로 학교를 빠져나갔다.
전경들은 거의 정문 앞 다리만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농과대학 학우들은 순식간에 학교를 빠져나가 롯데제과 앞을 지나서 광주역을 거쳐 금남로로 집결했다.
14일 오후 자연대학, 공과대학, 인문대학, 농과대학 학우들은 단결하여 전경들의 물리력을 밀고 도청 앞 분수대 주변으로 모이게 된 것이었다. 15일 예정이었던 민족민주화대성회가 뜻밖의 도청 앞 점거로 인하여 14일 집회는 무계획적으로 진행되었다.
계엄확대
5월 15일 민족민주화대성회는 광주시민과 전남지역 학생들, 교수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성황리에 끝났다.
5월 16일 역시 민족민주화대성회는 횃불시위와 화형식을 끝으로 아무런 충돌 없이 무사히 끝났다. 전남대 총학생회에서는 정부의 추세를 살펴본 후 학내일정을 공고하겠다고 발표하고, 18일부터는 정상수업에 참석해 줄 것을 학우들에게 당부했다. 다만 18일 휴교령이 떨어지면 오전 10시 전남대 정문으로 집결할 것을 약속했다.
나는 18일 0시를 기해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전남대학교 제1학생회관에서 철야농성을 벌이던 학우들은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가하도록 하였다. 일부 학우들은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학교에서 나오던중 예비검속에 걸려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17일 밤 10시 전남대 정문으로 나가자 300여 명의 학우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정문에서 빠져나와 시내로 나왔다. 시내로 나온 나는 순천에 있는 상과대학 회장인 방민원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사태가 이상하니 올라와야겠소."
"무슨 일인데?"
"아직 모르고 있었소? 계엄이 확대되었다는 소식?"
전화를 하고 난 후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잤다.
5월 18일 완도로 피신하려다 오전 11시 30분 광주고속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피신하였다.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 다행히 불심검문은 없었다.
영창생활
한달 가량 서울에서 도피생활을 하던중 어이없는 자수를 하게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몇몇 학우들이 나와 같은 경우에 처하여 자수했다.
방민원(상과대학 학생회장)의 아버님은 정부에서 교육공무원이라는 빌미를 잡아 자수를 강요했다.
나 역시 경찰직에 계시던 아버님의 곤혹을 알게 되었다. 5월 18일 이후 내가 잡히지 않자 정부에서는 아버님에게 협박을 하였다.
7월 1일 서울에서의 도피생활을 청산하고 광주로 내려왔다. 광주로 오자마자 서부경찰서 정보과 오형사와 또 한 명의 형사가 와서 서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서부경찰서에서 505 보안대로 옮긴 후 이틀간에 걸쳐 조사를 받았다. 보안대 형사들은 내게 백지 10장 정도를 내밀면서 3월 5일부터의 행적을 모두 쓰라고 지시했다.
여러 차례 반복하여 쓰자 다른 사람들이 써 놓은 것과 대조해 보았다. 그들은 서로 맞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꼬치꼬치 캐묻고 사정없이 구타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형사들에게 소리쳤다.
"어차피 내가 쓴 조서의 내용은 남과 틀리니까 차라리 먼저 써놓은 것을 내게 달라."
그들은 이미 모든것을 그들의 계획대로 완벽하게 짜 맞추어놓았다. 이틀 후 505 보안대에서 상무대 합동수사부로 끌려갔다.
그때는 이미 각 단과대학 학생회실을 덮쳐서 모든 유인물을 수거해 두었고, 뿐만 아니라 가톨릭농민회나 농촌사회문제연구소 등을 뒤져서 한 트럭분의 유인물을 쌓아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 유인물을 농과대학 학생회에서 작성한 것으로 그 책임이 내게 전가되어 있었다.
합동수사반 형사들은 조사과정에서 김대중 씨와 연관시켜 내란음모죄로 몰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대로 되지 않자 정동년 씨와 김상윤 선배들과 관련시켰다. 윤한봉 선배가 김대중 씨에게서 돈을 받아와 양강섭을 통해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은 10만 원씩 받은 것으로 꾸며놓았다. 내란죄를 적용시키기 위해서 자금 관계를 접목시켜 둔 것이었다.
또한 복적생들은 총학생회와 교내문제를 배후조종한 것으로 되었다.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은 대부분 소요 및 포고령 위반으로 죄목이 변경되었다.
상무대로 잡혀온 우리는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생활해야 했다. 반원형의 방 6개가 있었는데 각 방마다 130-150여 명의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방이 비좁아서 전부가 눕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더위가 더욱 기승을 부렸고 벌레들이 열린 창문으로 들어와 못살게 굴었다. 날씨는 덥고 후생시설이 좋지 않아 감방 안에는 옴이 번지기도 했다.
형사들 중 박춘배는 재소자들에게 더욱 험악하게 대했다. 눈에는 살기가 돌았다. 그는 한번 걸리면 헌병들의 몽둥이를 기분 내키는 대로 휘두르며 때렸다.
석방
11월 15일경,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집에서 계속 쉬었다. 그러던 중에 1980년 당시 단과대학 회장을 역임했던 동지들과 서클연합회 회장 문석환을 포함한 9명이 모임을 결성하였다.
매달 1회로 모임을 가지면서 1981년 양강섭과 한상석이 석방되어 6월경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그 조직은 대외적으로 총학생회 동지회와 전남사회문제연구소 팀들과도 연계를 맺었다. (조사.정리 안은정)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목요일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