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철학 / 김형효
2. 소유론적 의식철학과 논리적 의식일반의 허구성
다 소유주의는 자의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런데 철학적 자의식일수록 그 자의식은 보편적이라고 명명된다.
왜냐하면 이기적 자아의 얼굴을 수정없이 내미는 철학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실리적 자아나 도덕명분적 자아나 다 보편적 논리의 기치를 한시라도 놓아 본 적이 없다.
경제과학적 지식이나 도덕실천적 의지는 모두 의식일반(consciousness in general)의 성역을 신주모시듯 한다.
의식일반은 보편적 가치를 낳는 기반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보편적 가치는 개인적 심리적 호오(好惡)를 넘어서는 보편적 진리의지나 선의지가 있다는 신념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개념철학은 그동안 논리적 의식일반이 개인적 심리적 호오의 편파심을 넘어선 가치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허구적이다.
자아의 의식은 보편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띄우면서 사회적으로 장식을 해나가지만,
다급하게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개인의 자아가 위기를 당하면 자아는 자기가 살기 위하여 생존의 본능과 하나가 된다.
도덕명분적인 선의지로 사회적 공동선을 말하던 사람이
자신의 본능적 이해관계에 직결되는 상황을 만나게 되면, 그는 대뜸 이기적 작태로 돌변한다.
도덕명분주의가 아무리 反본능적 사회적 공동선을 설교하더라도
개인적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는 본능의 이기적 생존욕망을 저버리지 못한다.
경제실리주의는 본디 개인적 이기주의의 모판을 실질적으로 향유하고 있으면서
철학적으로는 인류의 공동 이익과 편리, 경제적 부의 증진에 기여하는 소유론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누구나 부인하지 못할 확실한 소유론의 철학이다.
그런데 그 소유론이 인류의 복리증진에 이바지한다고 이기주의의 틀을 벗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국가간 빈부의 격차가 부국의 이기주의에 기인한다는 소론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사회 안에서의 빈부의 격차도 부자계급의 무한 탐욕에 기인한다는 사회정의론의 주장이 전혀 허구로서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경제실리주의의 소유론이 결과적으로 범인류의 이익을 증진하게 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기주의를 인류의 차원으로 확장한 결과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 우리가 지적했듯이 인간중심주의가
자신의 이익을 사냥하기 위하여 인간이외의 중생을 순전히 인간 이익의 도구로 희생시켜도 좋다는 발상을 정당화시켜 준다.
과학기술주의의 의식일반이 이렇게 경제실리주의의 이기심으로 이어진다.
도덕명분주의의 反이기심과 反본능론이 경제실리론의 이기심과
과학기술론의 인간중심주의를 이겨 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덕명분론의 정의론과 의(義) 사상이
이기적 이익을 탐욕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의 심리를 성공적으로 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 전에 역설적인 공자의 육언육폐(六言六蔽)를 음미했다.
모든 도덕적 가치는 필연적으로 야누스적 얼굴의 이중성을 띠고 있다.
그래서 정의의 의(義)가 필연적으로 그 가치를 추종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에
남과 자기의 마음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치게 되는 ‘賊’과,
가치에의 굳센 신념이 무의지적으로 낳는 경직된 정신적 ‘교’살(‘絞’殺)의 분위기와,
의(義)의 실천이 초래하는 ‘난폭한(亂)’ 심리와 정의감이 수반하는 ‘광(狂)적’인
‘추상의 정신(l’esprit d’abstraction=spirit of abs- traction))’등이 일어나게 된다.
‘추상의 정신’은 마르셀의 철학이 설파한 가르침이다.
그는 《인간적인 것을 거슬리는 인간들(Les hommes contre l’humain)》에서 추상 명사로 불리워지는
도덕적 정신의 가치가 종종 구체적인 현실의 모습들을 고려하지 않고 공허한 구호로 둔갑하여
정신을 단세포화시키는 결과를 ‘추상의 정신’이라 불렀다.
그래서 이 구호에 현혹되면 인간의 정신은 격정적 광기로 변하게 된다는 것을 그는 역설하였다.
도덕명분론이 본의 아니게 독선과 위선으로 흐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선의지의 확신적 신념이 그런 결과를 낳는다. 확신의 의지가 없으면 새 사회를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새 사회를 만들려는 의지는 부지불식간에 고집으로 변한다.
그 고집이 유식학에서 말하는 의사식에 해당한다는 것을 우리가 앞에서 보았다.
신념의 고집은 마치 경제실리주의가 의존하고 있는 이기심과 역설적으로 닮았다.
자기 것이 옳고 타인의 것이 그르다는 판단이 그런 고집을 낳는다.
이것은 이기적 개인의 호오 감정과 무엇이 다를까?
이기적 개인의 호오감정은 물질적 이익 뿐만 아니라, 정신적 지배의지도 관계한다.
진리의지와 권력의지는 다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융(C.G. Jung)의 통찰을 받아들인다.
그는 모든 논리적 보편성과 그 주장의 무의식에는 심리적 호오의 경향이 깊이 숨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래서 심리가 논리보다 앞선다고 그는 보았다.
이 말은 자아의 의식이 모든 생각의 흐름에 동반하고 있는 한에서
인간의 생각은 아상(我相)과 아애(我愛)와 아견(我見)의 편파적인 틀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자아의 지성은 부분적(partial)이고, 자아의 의지는 편파적(partial)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에서 늘 타인들의 것과 부딪치고 장애를 일으킨다.
융의 소견은 우리로 하여금 불교적 유식학의 길로 접어들게 한다.
유식학의 견지에서 보면 인간은 무시이래로 아상·아견·아애 등이 형성하는 아치(我癡)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이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과 유사하다.
인간은 사회생활의 업을 통하여 늘 이기적 아상중심적 본능을 키워 왔었다.
사회생활은 곧 언어생활인데,
언어생활은 늘 사회적으로 남으로부터 인정과 승인을 받으려는 그런 욕망의 소유욕과 다르지 않다.
헤겔(Hegel)은 이 사회적 인정의 욕망을 잘 읽었다.
그래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그가 통찰하였다.
부모나 주위로부터 말을 배움에서 인간은 부모와 주위로부터 사회적인 인정을 겨냥하는 아상의 욕망을 무의식의 종자로 갖게 된다.
이것이 불생불멸인 제8식인 무의식(un-conscious)의 아알라야식(laya vijnana)에 저장되고 업종자가 되면서,
이것이 다시 제7식인 마나스식(manas vijnana)에 전식(轉識)되고,
이 마나스식이 제6식인 모든 의식의 활동에 前의식(pre-conscious)으로 영향을 미치는 심상(心象)이 된다.
이 아상중심의 심상이 의식의 표상 활동에 그림자처럼 동반하기에
어떤 의식의 표상도 아중심의 심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이기적이다.
그래서 그가 세상의 삼라만상을 표상해도 늘 이기적 소유의식을 지우지 못한다.
그러므로 언어학적으로 봐도 인간은 그에게 무의식으로 형성된
아상중심의 욕망의 ‘체(sieve)’를 벗어나서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언어의 체’라고 언어학자 트루베츠꼬이(Troubetskoy)는 말했다.
그래서 아무리 이성적 대화를 통하여 사회적 의사소통의 이상적 담론을 추구하려 해도
그것은 이상주의자의 꿈꾸는 낭만이지 실제로 그런 이성에 의한 이상적 일치의 사회는 도래하지 않는다.
저런 하버마스(Habermas)의 소견은 실현되지 않는 이성적 계몽주의자의 꿈이고 낭만일 뿐이다.
의식의 이성은 무의식의 아상을 이기지 못한다.
인간은 그가 무의식적으로 형성해 놓은 언어적 체를 통하여 타인의 대화를 듣기 때문에
그 체에 걸리는 것은 무의식의 심상이 통과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만인은 그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이것을 프랑스의 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자인 라깡(J. Lacan)이 이미 밝혔고,
라깡에 영향을 끼친 하이데거가 그의 《이정표(Wegmarken)》에서
세상은 ‘마음에 속하는(daseinsgehorig)’ 것으로서
‘매번마다 마음(현존재)이 작성하는 것의 전체(die jeweilige Ganzheit des Umwillen eines Daseins)’를 세상이라 묘사했다.
이 말은 각자의 마음의 관심의 수준만큼 세상이 형성된다는 것이겠다.
하이데거의 말은 하버마스의 계몽적 이성주의를 희롱한다.
따라서 의식의 이성이 아무리 공정성을 주장하고 불편부당을 역설해도,
그 이성은 자의식의 보편성이라는 명분 아래에 늘 아만과 아애와 아견의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아애가 아집(我執)을 키운다면, 아견은 법집(法執)을 낳는다.
아집과 법집은 늘 사회적 명분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찾는다.
개념의 철학이 자의식의 철학과 함께 간다는 것을 우리가 성찰했다.
그리고 자의식의 논리적 보편성의 명분도
기실 아상이라는 심리적 중심을 장식하기 위한 꾸밈과 같다는 것도 우리가 보았다.
경제실리주의가 이기주의에 축을 밖고 있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도덕명분주의도 反이기주의적 선의지의 명분을 떠난 것이 아닌 한에서,
모든 도덕주의의 철학도 我相의 영향 아래에 감추어진 아애와 아견의 아집과 법집을 굳세게 견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명분주의도 경제실리주의에 못지 않게 소유론의 철학, 존재자의 개념론이라 생각한다.
이와 함께 사회생활의 이기적 본능의 치료를 도덕명분주의에 맡기는 것은
별로 실효성이 없는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사회생활에서 인간들의 소유론적 이기적 본능의 이기배타적 욕망을 치유하기 위하여
인류는 오랜 세월동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덕명분주의의 가치론에 맡겨
도덕적 세상을 창출해주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동안 인류가 쏟아 부어 넣은 노력에 비하여 그 결과가 허망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경제실리주의는 본능의 자연적인 이기심에 바탕하여 마음의 자발적인 흐름의 성향과 일치하는 대목을 지녔지만,
도덕명분주의는 마음의 자연적 이기심의 성향을 거슬리는 방향으로 역진하는 운동을 요구함으로써
무위적 마음의 흐름을 존종하지 않는 강력한 당위의 의지로 무장할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흐름을 좋아하지
능위적인 작용을 가하여 마음이 자연성의 생리와 어긋나는 어떤 역추진을 달가와 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영위하더라도 자연적인 마음의 기호에 따라 사회생활하기를 좋아한다.
본능은 자연적 마음의 성향이다. 본능적 마음은 이기적인데, 이 이기심이 이기배타적인 길을 가기 때문에 反사회적 작태를 낳는다. 이것이 문제다.
이런 이기심의 반사회적 작태를 교정하기 위하여 도덕명분주의가 등장하여
반사회적 이기심을 당위적으로 숨죽이거나 뿌리 뽑으려 했다.
그러나 능위적 당위성은 자연적 무위성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
이것을 차연의 철학이 다시 깨달았다.
맹자는 선의 의미를 애매모호하게 읽었다.
이것은 맹자의 사유가 참으로 깊은 통찰력으로 세상을 보았다는 것을 뜻한다.
맹자에 의하면 선은 좋은 것이기도 하고 또 의로운 것이도 하다.
전자는 자연적 기호의 의미로 선을 읽은 것이고, 후자는 도덕적 당위의 뜻으로 선을 해석했다.
전자의 경향은 양명학으로 흐르는 계기를 주었고, 후자의 것은 주자학을 탄생시켰다.
선을 자연적 기호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래야만 선이 재미있고 즐겁고, 그러면서 배타적인 反사회성을 낳지도 않으면서
자리이타적인 자연성으로 마음에 이익이 되는 그런 경지로서 사랑을 받게된다.
도덕성과 예술적 놀이성이 이율배반적이지 않는 그런 마음의 자연성과 자발성을 우리가 보게 된다.
인간은 재미있는 삶을 자연적으로 갈구한다.
재미있지 않으면 인간은 즐겁게 하려 하지 않는다.
사회생활도 도덕생활도 직업생활도 철학공부도 다 재미있어야 한다.
이 재미를 본능과 본성이 다 요구한다.
그러나 본능이 요구하는 재미는 소유론적 재미이나, 본성이 그리워하는 재미는 존재론적 재미다.
본능과 본성은 다 마음의 자연적 자발성의 힘이다.
본능은 아상의 만족을 추구하나, 본성은 아상을 버릴수록 그 기쁨이 더 커진다.
스피노자(B, Spinoza)는 《윤리학(Ethique)》에서
‘인간은 선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기 때문에 선이라 여긴다’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중요한 언명이다.
인간은 좋음을 찾는 마음, 즉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철학 / 김형효
2. 소유론적 의식철학과 논리적 의식일반의 허구성
다 소유주의는 자의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런데 철학적 자의식일수록 그 자의식은 보편적이라고 명명된다.
왜냐하면 이기적 자아의 얼굴을 수정없이 내미는 철학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실리적 자아나 도덕명분적 자아나 다 보편적 논리의 기치를 한시라도 놓아 본 적이 없다.
경제과학적 지식이나 도덕실천적 의지는 모두 의식일반(consciousness in general)의 성역을 신주모시듯 한다.
의식일반은 보편적 가치를 낳는 기반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보편적 가치는 개인적 심리적 호오(好惡)를 넘어서는 보편적 진리의지나 선의지가 있다는 신념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개념철학은 그동안 논리적 의식일반이 개인적 심리적 호오의 편파심을 넘어선 가치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허구적이다.
자아의 의식은 보편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띄우면서 사회적으로 장식을 해나가지만,
다급하게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개인의 자아가 위기를 당하면 자아는 자기가 살기 위하여 생존의 본능과 하나가 된다.
도덕명분적인 선의지로 사회적 공동선을 말하던 사람이
자신의 본능적 이해관계에 직결되는 상황을 만나게 되면, 그는 대뜸 이기적 작태로 돌변한다.
도덕명분주의가 아무리 反본능적 사회적 공동선을 설교하더라도
개인적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는 본능의 이기적 생존욕망을 저버리지 못한다.
경제실리주의는 본디 개인적 이기주의의 모판을 실질적으로 향유하고 있으면서
철학적으로는 인류의 공동 이익과 편리, 경제적 부의 증진에 기여하는 소유론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누구나 부인하지 못할 확실한 소유론의 철학이다.
그런데 그 소유론이 인류의 복리증진에 이바지한다고 이기주의의 틀을 벗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국가간 빈부의 격차가 부국의 이기주의에 기인한다는 소론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사회 안에서의 빈부의 격차도 부자계급의 무한 탐욕에 기인한다는 사회정의론의 주장이 전혀 허구로서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경제실리주의의 소유론이 결과적으로 범인류의 이익을 증진하게 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기주의를 인류의 차원으로 확장한 결과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 우리가 지적했듯이 인간중심주의가
자신의 이익을 사냥하기 위하여 인간이외의 중생을 순전히 인간 이익의 도구로 희생시켜도 좋다는 발상을 정당화시켜 준다.
과학기술주의의 의식일반이 이렇게 경제실리주의의 이기심으로 이어진다.
도덕명분주의의 反이기심과 反본능론이 경제실리론의 이기심과
과학기술론의 인간중심주의를 이겨 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덕명분론의 정의론과 의(義) 사상이
이기적 이익을 탐욕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의 심리를 성공적으로 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 전에 역설적인 공자의 육언육폐(六言六蔽)를 음미했다.
모든 도덕적 가치는 필연적으로 야누스적 얼굴의 이중성을 띠고 있다.
그래서 정의의 의(義)가 필연적으로 그 가치를 추종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에
남과 자기의 마음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치게 되는 ‘賊’과,
가치에의 굳센 신념이 무의지적으로 낳는 경직된 정신적 ‘교’살(‘絞’殺)의 분위기와,
의(義)의 실천이 초래하는 ‘난폭한(亂)’ 심리와 정의감이 수반하는 ‘광(狂)적’인
‘추상의 정신(l’esprit d’abstraction=spirit of abs- traction))’등이 일어나게 된다.
‘추상의 정신’은 마르셀의 철학이 설파한 가르침이다.
그는 《인간적인 것을 거슬리는 인간들(Les hommes contre l’humain)》에서 추상 명사로 불리워지는
도덕적 정신의 가치가 종종 구체적인 현실의 모습들을 고려하지 않고 공허한 구호로 둔갑하여
정신을 단세포화시키는 결과를 ‘추상의 정신’이라 불렀다.
그래서 이 구호에 현혹되면 인간의 정신은 격정적 광기로 변하게 된다는 것을 그는 역설하였다.
도덕명분론이 본의 아니게 독선과 위선으로 흐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선의지의 확신적 신념이 그런 결과를 낳는다. 확신의 의지가 없으면 새 사회를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새 사회를 만들려는 의지는 부지불식간에 고집으로 변한다.
그 고집이 유식학에서 말하는 의사식에 해당한다는 것을 우리가 앞에서 보았다.
신념의 고집은 마치 경제실리주의가 의존하고 있는 이기심과 역설적으로 닮았다.
자기 것이 옳고 타인의 것이 그르다는 판단이 그런 고집을 낳는다.
이것은 이기적 개인의 호오 감정과 무엇이 다를까?
이기적 개인의 호오감정은 물질적 이익 뿐만 아니라, 정신적 지배의지도 관계한다.
진리의지와 권력의지는 다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융(C.G. Jung)의 통찰을 받아들인다.
그는 모든 논리적 보편성과 그 주장의 무의식에는 심리적 호오의 경향이 깊이 숨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래서 심리가 논리보다 앞선다고 그는 보았다.
이 말은 자아의 의식이 모든 생각의 흐름에 동반하고 있는 한에서
인간의 생각은 아상(我相)과 아애(我愛)와 아견(我見)의 편파적인 틀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자아의 지성은 부분적(partial)이고, 자아의 의지는 편파적(partial)이다.
그래서 사회생활에서 늘 타인들의 것과 부딪치고 장애를 일으킨다.
융의 소견은 우리로 하여금 불교적 유식학의 길로 접어들게 한다.
유식학의 견지에서 보면 인간은 무시이래로 아상·아견·아애 등이 형성하는 아치(我癡)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이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과 유사하다.
인간은 사회생활의 업을 통하여 늘 이기적 아상중심적 본능을 키워 왔었다.
사회생활은 곧 언어생활인데,
언어생활은 늘 사회적으로 남으로부터 인정과 승인을 받으려는 그런 욕망의 소유욕과 다르지 않다.
헤겔(Hegel)은 이 사회적 인정의 욕망을 잘 읽었다.
그래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그가 통찰하였다.
부모나 주위로부터 말을 배움에서 인간은 부모와 주위로부터 사회적인 인정을 겨냥하는 아상의 욕망을 무의식의 종자로 갖게 된다.
이것이 불생불멸인 제8식인 무의식(un-conscious)의 아알라야식(laya vijnana)에 저장되고 업종자가 되면서,
이것이 다시 제7식인 마나스식(manas vijnana)에 전식(轉識)되고,
이 마나스식이 제6식인 모든 의식의 활동에 前의식(pre-conscious)으로 영향을 미치는 심상(心象)이 된다.
이 아상중심의 심상이 의식의 표상 활동에 그림자처럼 동반하기에
어떤 의식의 표상도 아중심의 심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이기적이다.
그래서 그가 세상의 삼라만상을 표상해도 늘 이기적 소유의식을 지우지 못한다.
그러므로 언어학적으로 봐도 인간은 그에게 무의식으로 형성된
아상중심의 욕망의 ‘체(sieve)’를 벗어나서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언어의 체’라고 언어학자 트루베츠꼬이(Troubetskoy)는 말했다.
그래서 아무리 이성적 대화를 통하여 사회적 의사소통의 이상적 담론을 추구하려 해도
그것은 이상주의자의 꿈꾸는 낭만이지 실제로 그런 이성에 의한 이상적 일치의 사회는 도래하지 않는다.
저런 하버마스(Habermas)의 소견은 실현되지 않는 이성적 계몽주의자의 꿈이고 낭만일 뿐이다.
의식의 이성은 무의식의 아상을 이기지 못한다.
인간은 그가 무의식적으로 형성해 놓은 언어적 체를 통하여 타인의 대화를 듣기 때문에
그 체에 걸리는 것은 무의식의 심상이 통과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만인은 그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이것을 프랑스의 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자인 라깡(J. Lacan)이 이미 밝혔고,
라깡에 영향을 끼친 하이데거가 그의 《이정표(Wegmarken)》에서
세상은 ‘마음에 속하는(daseinsgehorig)’ 것으로서
‘매번마다 마음(현존재)이 작성하는 것의 전체(die jeweilige Ganzheit des Umwillen eines Daseins)’를 세상이라 묘사했다.
이 말은 각자의 마음의 관심의 수준만큼 세상이 형성된다는 것이겠다.
하이데거의 말은 하버마스의 계몽적 이성주의를 희롱한다.
따라서 의식의 이성이 아무리 공정성을 주장하고 불편부당을 역설해도,
그 이성은 자의식의 보편성이라는 명분 아래에 늘 아만과 아애와 아견의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아애가 아집(我執)을 키운다면, 아견은 법집(法執)을 낳는다.
아집과 법집은 늘 사회적 명분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찾는다.
개념의 철학이 자의식의 철학과 함께 간다는 것을 우리가 성찰했다.
그리고 자의식의 논리적 보편성의 명분도
기실 아상이라는 심리적 중심을 장식하기 위한 꾸밈과 같다는 것도 우리가 보았다.
경제실리주의가 이기주의에 축을 밖고 있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도덕명분주의도 反이기주의적 선의지의 명분을 떠난 것이 아닌 한에서,
모든 도덕주의의 철학도 我相의 영향 아래에 감추어진 아애와 아견의 아집과 법집을 굳세게 견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명분주의도 경제실리주의에 못지 않게 소유론의 철학, 존재자의 개념론이라 생각한다.
이와 함께 사회생활의 이기적 본능의 치료를 도덕명분주의에 맡기는 것은
별로 실효성이 없는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사회생활에서 인간들의 소유론적 이기적 본능의 이기배타적 욕망을 치유하기 위하여
인류는 오랜 세월동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덕명분주의의 가치론에 맡겨
도덕적 세상을 창출해주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동안 인류가 쏟아 부어 넣은 노력에 비하여 그 결과가 허망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경제실리주의는 본능의 자연적인 이기심에 바탕하여 마음의 자발적인 흐름의 성향과 일치하는 대목을 지녔지만,
도덕명분주의는 마음의 자연적 이기심의 성향을 거슬리는 방향으로 역진하는 운동을 요구함으로써
무위적 마음의 흐름을 존종하지 않는 강력한 당위의 의지로 무장할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흐름을 좋아하지
능위적인 작용을 가하여 마음이 자연성의 생리와 어긋나는 어떤 역추진을 달가와 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영위하더라도 자연적인 마음의 기호에 따라 사회생활하기를 좋아한다.
본능은 자연적 마음의 성향이다. 본능적 마음은 이기적인데, 이 이기심이 이기배타적인 길을 가기 때문에 反사회적 작태를 낳는다. 이것이 문제다.
이런 이기심의 반사회적 작태를 교정하기 위하여 도덕명분주의가 등장하여
반사회적 이기심을 당위적으로 숨죽이거나 뿌리 뽑으려 했다.
그러나 능위적 당위성은 자연적 무위성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
이것을 차연의 철학이 다시 깨달았다.
맹자는 선의 의미를 애매모호하게 읽었다.
이것은 맹자의 사유가 참으로 깊은 통찰력으로 세상을 보았다는 것을 뜻한다.
맹자에 의하면 선은 좋은 것이기도 하고 또 의로운 것이도 하다.
전자는 자연적 기호의 의미로 선을 읽은 것이고, 후자는 도덕적 당위의 뜻으로 선을 해석했다.
전자의 경향은 양명학으로 흐르는 계기를 주었고, 후자의 것은 주자학을 탄생시켰다.
선을 자연적 기호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래야만 선이 재미있고 즐겁고, 그러면서 배타적인 反사회성을 낳지도 않으면서
자리이타적인 자연성으로 마음에 이익이 되는 그런 경지로서 사랑을 받게된다.
도덕성과 예술적 놀이성이 이율배반적이지 않는 그런 마음의 자연성과 자발성을 우리가 보게 된다.
인간은 재미있는 삶을 자연적으로 갈구한다.
재미있지 않으면 인간은 즐겁게 하려 하지 않는다.
사회생활도 도덕생활도 직업생활도 철학공부도 다 재미있어야 한다.
이 재미를 본능과 본성이 다 요구한다.
그러나 본능이 요구하는 재미는 소유론적 재미이나, 본성이 그리워하는 재미는 존재론적 재미다.
본능과 본성은 다 마음의 자연적 자발성의 힘이다.
본능은 아상의 만족을 추구하나, 본성은 아상을 버릴수록 그 기쁨이 더 커진다.
스피노자(B, Spinoza)는 《윤리학(Ethique)》에서
‘인간은 선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기 때문에 선이라 여긴다’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중요한 언명이다.
인간은 좋음을 찾는 마음, 즉 이익을 좋아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