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6가야가 서기후 42년에 각각 건국되었으며, 532년에 신라에 항복하여 신라와 합병했으므로 가야가 건국된 후 490년 지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년)에도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가야가 532년에 신라에 항복했다면, 수로왕이 즉위한 해인 서기후 42년부터 셈하여 가야가 490년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가야가 562년에 신라에 항복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두 가지 설을 모두 기록한다고 쓰여 있다.
즉, 가야가 562년에 망했다면, 532년에 망했다는 기록보다 30년 더 지속되었으므로 이 경우에는 가야가 520년 지속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 ‘탑상제4(塔像第四)’ 「금관성의 파사석탑(婆娑石塔)」에 따르면, 마지막 부분에 저자의 논평이 한 편의 시로서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讃曰. 載厭緋㠶茜斾輕, 乞靈遮莫海濤驚. 豈徒到岸扶黃玉, 千古南倭遏怒鯨."
이를 번역하면, 아래와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찬하여 말한다.
석탑(파사석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벼운데,
신령께 빌어서 험한 물결 헤쳐 왔구나.
어찌 다만 황옥(黃玉)을 도와 건넜을 뿐이겠는가?
천년 동안 남쪽 왜의 침략을 막았구나."
즉, 수로왕의 왕후 허황옥이 서기후 48년에 서역(西域)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올 때, 파사석탑(婆娑石塔)을 배에 실고 왔는데, 이 글의 저자(미정)는 '파사석탑이 허황옥의 항해 안전을 도운 것만이 아니라 1,000년 동안 남쪽 왜(倭)의 노경(怒鯨, 성난 고래)를 막았다.'고 논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가야가 대략 1,000년쯤 지속했는데, 파사석탑(婆娑石塔)의 덕분이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가야의 존속기간이 490년 또는 520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상기한 시에 1,000년이라고 기록했다면, 좀 심하지 않은가?
이를 단순히 감성을 자극하기 위한 시의 과장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조선의 사관들이 1512년에 어쩔 수 없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뜯어 고쳐야만 하는 참담함 속에서 동방(東方)의 역사를 길이길이 전하기 위하여 후세에 나올 혜학자(惠學者)들에게 혹 무언가 암시하려고 했던 힌트가 숨겨져 있지는 않았을까?
즉, 부여·신라·고구려·백제 등의 건국년도를 약 200년씩 뒤로 늦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가야의 건국년도도 감추고 뒤로 늦춘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비록 가야의 건국년도를 42년이라고 기록했지만, 실제는 가야가 대략 1,000년간 지속된 후, 532년에 망했다는 암시를 시 구절에 남겨놓은 것은 아닐까?
만약 상기한 저자의 논평처럼 가야가 대략 1,000년을 지속한 것이라면, 가야는 대략 서기전 468년경에 건국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가야가 490년간 존속한 것을 반올림했다면, 500년이 되어야 하고, 존속기간이 520년인 경우, 10자리를 무조건 올렸다면, 600년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1,000년이 반올림된 것이라면, 최소한 950년 이상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600~900년은 되어야 1,000년이라고 늘려 잡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가야가 대략 1,000년간 존속되었다면, 즉, 허왕후가 서기전 468년경에 가야로 왔다면, 그 당시는 주(周)가 도읍지를 현재의 섬서성 서안[西安, 호경(鎬京)] 지역에서 낙읍(洛邑)으로 동천(서기전 770년)한 이후, 춘추시대(春秋時代, 기원전 770~403년)라고 부르는 시기의 말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그림 1] 금관가야 금관성 등 6가야 추정지역
그 당시 서주(西周) 말에 약 800개에 달하던 중소국가들이 있었는데, 춘추시대 중기에는 수십 개 국(國)으로 감소되었다고 한다.
즉, 가야가 대략 1,000년간 존속되었다면, 춘추시대 말기에 허황후 일행이 서역(西域)이라고 불리던 현재의 사천성 지역(안악현, 허씨촌)에서 양자강을 타고 동쪽으로 왔다고 추정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본 연구원이 그간 고대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금관가야의 도읍지 금관성 등의 위치를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추정할 수 있었다.
즉, 중국 23사(史)와 『삼국사기』 지리지 등에서 위사(僞史)를 솎아내고 원본(原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진사(眞史)들에 근거하면, 6가야의 대략적인 위치를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찾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가야에는 6가야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5가야의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강소성 양주시(금관가야), 안휘성 합비시(대가야), 강소성 서주시(성산가야) 등을 있는 삼각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다만, 고령가야는 현 산동반도 인근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신라 9주 중에서 상주는 산동반도 지역에 해당하는데, 고령가야는 상주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후 허황옥이 서역(西域)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오면서 배에 싣고 가져온 파사석탑(婆娑石塔)의 명칭에서 '파사(婆娑)'란 무슨 뜻인가?
영국 옥스포드 대학 발행 『산스크리트-잉글리쉬 사전』 756쪽에 따르면, '파사(婆娑)'는 산스크리트어 'Bhasa'를 한자(漢字)로 음역(音譯)한 것인데, '빛' 또는 '광채'를 의미하며 '마음속에 새겨진 감명(impression)'을 뜻한다고 한다. 또 이미 불가(佛家)에서 그리 알고 있다고 한다.
즉, 그 당시 『삼국유사』 가 써진 1280년경에 '파사(婆娑)'라는 용어로써 '마음속에 새겨진 감명(impression)', 또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와 깨달음' 등을 사유(思惟)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2,000~2,500년 전에 배를 타고 여행을 하면서 '마음속에 새겨진 감명(impression)', 또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와 깨달음' 등을 소중히 여겼던 고대인들의 삶이 현대인들의 가슴에 전율이 일게 하지 않는가?
그런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가야가 42년에 건국되었으며, 수로왕의 왕후 허황옥이 48년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가야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가야가 보다 더 이른 시기에 건국되었으며 가야가 물경 대략 1,000년쯤 지속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는 기록들이 『삼국유사』에는 아직 남아 있다.
즉, 『삼국유사』에는 상기한 저자의 시외에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기 전 서기전 6세기에 가야에서 설법하였으며, 옛 인도 마우리아 왕조 제3대왕 아쇼카왕이 서기전 3세기에 고구려에 불탑(佛塔)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23장과 24장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출처:https://cafe.daum.net/asiahistoryreserch/DHst/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