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
제4편 바이런이 묻혀있는 매솔롱기와 레판토( Repanto) 해전과
신탁의 도시 엘피(Delphi)의 아폴론 신전 돌아보기 -2018년10월 8일-
오안니나의 팜보티스 호수에서 뿜어나오는 짙은 물안개를 바라뵤며 상괘한
아침식사를 마쳤다
오늘은 19세기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경이
묻혀 있는 메슬롱기를 거쳐 레판토 해전이 일어났든 항구와 고대 신탁의 도시
델피를 탐방하는 일정이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과 동시에 국가들도 몰락하면서
비잔티움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오스만 투르크의 통치시대가 되었다
그리스 독립전쟁은 1821년에서 1829년까지 근데 그리스의 혁명주의자들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일으킨 독립 전쟁으로 나중에 유럽 열강들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얻고 1932년 그리스 왕국이 탄생하였다
특히 메솔롱기는 그리스 독립전쟁(1821년~1829년) 당시 많은 그리스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투쟁했든 곳으로 1824년에 전쟁에 참전한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이 이곳에서 사망하여 묻혀 있는도시이다
오늘날 메솔롱기의 영웅가든(Garden of heroes)에는 조지 고든 바이런의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영웅 공원에는 그리스 독립을 위하여 메솔롱기에서 활약했든 그리스의 영웅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 동상을 세우고 기념비도 새겨져 있었다
1788년 영국에서 태어난 바이런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피를 받아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도 17세에 캔브리치 대학에 들어가 3권의 시집을 낼 정도로
낭만주의의 시인으로 감정적 무절제와 반항기를 바탕으로 날카로운 풍자와 비판
의식을 나타내며 근대 지식인의 내적 고뇌를 보여 주는 문장들로 19세기 초 유럽
대륙의 주옥같은 글들을 발표하였다
특히 1808년에는 상원이 된 후 친구 존 캠 호브하우스와 함께 포르투갈에서 부터
그리스까지 지중해 지역을 그랜드 투어를 하면서 1812년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
을 발간하였다고 한다
1916년 이혼 사실이 사교계에 널리 퍼졌으며 스캔들을 피해 런던을 떠나 이태리에
머물면서 다시는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를 답사면서 호탕한 생활과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1819년 이탈리아 독립운동 비밀 결사인 카르보나리당에 들어가 혁명에 동참했다.
1823년 런던 주재 그리스 독립운동 결사 단체의 권유를 받고 오스만 튀르크가
장악하고 있는 레판토 요새 공격 작전에 참여하였고 메솔롱가에서 거주하면서
그는 단순히 군비 지원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군사를 이끌었고 외교 문제에도
개입했다고 한다
1824년 전쟁 중 지병으로 사망하자 그리스 혁명군의 상징으로서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으며 메솔롱기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그의 심장은 산 스피리디오네
교회에 안치되었고 시신은 영국으로 이송되어 그의 영지 뉴스테드에 있는 후크넬
코르칸드 교회 가족 납골당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145년 후인 1969년 바이런의 기념비만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 세워졌다고 한다
우린 메솔롱기를 떠나 레판토 해전(Battle of Lepanto)의 격전지였든 페트라
만으로 향했다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연결해주는 아름다운 리오-안티리안 다리를
보면서 페트라에 도착하였다
파트라는 4천년 전부터 고대 로마 시대에 동부 지즁해의 거점 도시로 만들어
세계적인 항구 도시로 만들었으며 성인 안드레아가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북쪽에 있으며 그리스 본토와 연결하는 곳으로
"서쪽으로 가는 관문"이란 파트라는 유럽과 소통하는 상업 교역거점 도시로
그리스에서 3번째로 큰도시이다
서기 60년경 사도 안드레아는 파트라의 총독 에제아테스의 아내 막시밀라가의
중병을 기도로 고쳐 주었으며 의술의 기적을 베풀자 주위 사람들은 기독교를
믿기시작하자 총독은 이것을 우려했는데 마침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 칙령에
따라 총독 에제아테스는 안드레아를 십자가 형을 집행하려고 하였으나 안드레아
에게 헤택을 받은 사람들이 언두레아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안드레아는 “x자
모양의 십자가”에 죽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60년 11월3일에 순교 하였다.
안드레아의 두개골 유해는 로마 교황청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1964년 9월 교황
바오르 6세의 지시로 이곳 안드레아 대성당으로 옮겨져 모시고 있다고 한다
레판토 해전은 570년 베네치아 공국을 점령하기 위하여 오스만의 술탄 셀림 2세의
군대가 키프로스에 침입하자
베네치아의 교황 피우스 5세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동맹군을 만들어 1571년
10월 7일 레핀토 해군 기지에서 서쪽으로 출항한 오스만 함대와 메시나에서
출항한 신성 동맹의 함대가 그리스의 서부 파트라스 만에서 만나 개전 하였다
개전 후 5시간에 걸친 전투에서 기독교 동맹인 신성 동맹은 오스만 제국의 80척의
배를 침몰시키고 130척의 함선을 나포하여 30,000명을 전사 시킨 전승을 이룩하였다
이 전투가 세계 3대 해전으로 기록되는 것은 특이한 전술적 함대 배치와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레판토 전투 이후 세계를 움직이는
축이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세게의 지배 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해 가고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세계의
역사를 만들었으며 중동과 유럽 사이의 계속된 싸움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레판토 해전에서 스페인 참전 용사로 참여 했든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전투 중 한쪽 팔을 잃었다고 한다
그리스의 맑은 공기와 따스한 태양을 마음껏 즐기면서 우린 신탁의 도시 텔피
(Delphi)로 2시간 동안 버스로 이동하였다
델피(Delphi)는 그리스 포키스 협곡의 파르나소스 산자락에 있는 고대도시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라 만들어진 곳으로 신 제우스가 독수리 2마리를 동쪽과 서쪽에
놓아 주면서 세계의 중심을 향해 날아가게 했더니 2마리의 독수리가 델포이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 지점은 돌멩이로 표시되어 있고 그리스인들은 그 돌을
세계의 중심인 옴팔로스라고 했다 그래서 이곳에 신탁을 세웠다고 한다
신탁(Oracle)이란 신에게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예언을 받고져 신의 계시를
받는 것을 말하며 우선 박물관부터 먼저 관람하였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은 태양의 신 제우스의 아들인 아폴론은 인간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정화시켜 주며 예언과 신탁을 통해 인간에게 미래의
일과 제우스의 뜻을 전달해 주었는데 기원전 6세기경 세계의 중심인 델피에
신탁소를 세웠다고 한다
신탁의 절차는 제에 쓰는 빵'펠라노스'와 기준에 맞는 제사용 가축을 준비한
기도자는 제사를 올리기 전에 전달자인 영매 피티아와 먼저 카스탈리아 샘에서
목욕을 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성스런 카소티스 샘물을 마신 뒤 신전에 들어갔고 신전의 지하
골방으로 내려가 성스러운 3각 의자에 앉아서 아폴론의 성스러운 나무인 월계수
잎을 입에 물고 즁엉거리며 신탁을 말했다고 하며 기도자가 그말을 직접 벋지
않고 사제가 그 말을 기록하여 해석해 주었다고 한다
신탁은 델로스 펠로폰네소스등 여러곳에서 생겼지만 가장 오래된 신탁은
북서(北西) 그리스의 도도나에서 내린 제우스의 신탁이라고 한다
신탁은 매달 7일 열렸는데 7은 아폴론의 행운의 수였다고 한다
신탁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만 많이 존재햤는데 신탁을 기록한 역사가들은
헤로도토스와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핀다로스,
플루타르크 등의 그리스 고대의 시인들이며
리비우스와 유스티누스, 비디우스 등 고대 로마의 대표적 지식인이 신탁의
에언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사례가 남아 있다고 한다
기원전 5세기 인류 최초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가 쓴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사는
신탁에 의지해서 길흉을 물어 길조가 나와야 전쟁터에 나가듯이 사사건건 신탁에
의지하여 생각하였기 때문에 헤로도토스는 신탁의 해석을 매우 중요하게
기술하였다고 한다
낙소스의 스핑크스는 아폴론 신전 기둥에 있는 것으로 몸과 다리는 사자모양으로
가슴과 날개는 새 모양 머리는 소년으로 만든 스핑크스는 낙소스 섬이 가장 번영
했던 BC 6C 작품으로 스핑크스 바닥에 낙소스가 신탁에 우선을 가진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신성한 길에서 발견된 제물인 금은으로 만들어진 황소의 동상이라고 한다
마차 끄는 소년상은 4마리의 말이 붙어 있었는데 말은 베니스 산마르코 성당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4년마다 델피에서 열렸던 퓌티아 경기의 전차종목에서 우승한 델피의 마부상
(Charioteer of Delphi)인 청동상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Quardriga)를
묘사한 커다란 청동 조형물의 일부분이다.
마부의 얼굴은 수도자와 같은 자기 절제의 모습으로 이 시기에 그리스인들이
추구하였던 이상적 관념의 세계를 조형물로 구현한 것이라고 한다
옴파로스와 댄서의 기둥이라고 하는 유물은 기원전 330년경에 아테네의 델피
순례자 행렬이 델피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여 헌정한 것이다.
기둥높이 13m에 달하며 윗부분에 춤추는 듯한 세 명의 여인이 조각되어 있어
이와 같은 명칭이 붙었으나 아폴론에게 공물을 바치는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
케크롭스의 세 자매로 해석되고 있다.
옴파로스는 아폴론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세 발 솥을 덮는 뚜껑으로 기둥
꼭대기에 올려놨다고 한다.
신전으로 향하는 길목에 로만 아고라(Roman agora)가 기둥만 남아 있다
성역으로 가는 동쪽 출입문이 있는 곳에 전형적인 스토아식 건물이다.
성스런 길을 따라 주변에 세웠던 화려한 보물창고와 여러 기념물은 없어지고
기단부만 남아 있었다
아폴론 신전으로 올라가는 성스런 길을 지나가면 보이오티아 보물창고가 나온다
아폴론 신전으로 올라가는 성스런 길
은 보이오티아
기원전 510-48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아테네 보물창고이다
이주식 (Distyle) 건물로 사각 벽기둥 안타( Anta)사이에 두 개의 원형 돌기둥이
있으며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시빌의 바위라는 안내판에는 델피의 최초여자 예언자 히에로필레 시빌(Hierophile
Silvil)이 바로 이바위 위에서 예언을 노래했다고 한다
지역의 전설에 , 델피의 최초 여자 예언자인 히에로필레 시빌(Hierophile Sibyl)이 바로 이 바위 위에
아폴론 신전의 명성이 나기전에 기원전 14세기에서 11세기까지 미케네 시대의
에언을 노레하는 장소로 그녀는 트로이 멸망도 예언했다고 한다
아래 보이는 석주들은 아폴론 신전과 함께 아테네 스토아( Stoa of Athenians)
로써 페르시아 전쟁 때 획득한 전리품을 진열하기 위해 세운 열주 건물이라고 한다
기원전 510-470년경에 건축되었으며 페르시아 해군을 쳐부순 후 적선의 밧줄과
뱃머리에 있던 인물상 머리(Ship figurehead)를 이 스토아에 진열하고 아폴론
신에게 바친 것이라고 한다
스토아는 기둥이 한줄 또는 두 줄의 회랑을 형성하고 이 위에 지붕이 씌워진
건물을 말하는데 아고라 주변에 세워져 가게나 사무실과 같은 공공용도로
사용되다고 한다
스토아 끝자락에는 낙소스 스핑크스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펠라의 아폴론 신전은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지도적인 역활을 하여
승리한 것을 과시하기 위하여 세계의 중심인 델피에 아테네 시민들의 돈을 모아
건축한 아폴론 신전이라고 한다
아폴론 신전의 문간 방에 해당하는 프로나오스의 벽면에 유명한 델피
격언(Delphi maxim) 세 개가 각인되어 있었다.
γνῶθι σεαυτόν (know thyself): 너 자신을 알라.
ηδὲν ἄγαν (nothing in excess): 중용을 지켜라
Ἑγγύα πάρα δ'ἄτη (make a pledge and mischief is nigh):
지킬 수 없는 약속은 하지마라 라고 신탁의 가르침을 적어 놓고 었는데
여러 고민거리를 안고 신전을 찾은 모든 사람에게 내려진 아폴론의 신탁
이라고 한다
아폴론의 지혜는 밝은 대낮에 우리가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비춘다고 하며
작열하는 태양의 조명을 받으면 모든 사물이 명료하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이는 것처럼 아폴론의 지혜의 빛에 비친 세계는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보여준다고 한다
아폴론 신전 앞에 장쾌한 산과 깊은 계곡이 바라다 보이는 높은 장소에 원형으로
지은 원형극장이 남아 있었다
지금의 이 극장은 1세기 로마제국 초기에 만든 것으로 반원형 관객석에는
5천명이 앉을 수 있다
기원후 67년 네로황제의 델피방문을 위헤 이곳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프로스케니온(Proskenion)에 헤라클레스의 열두 과업을 묘사한 부조로
장식했다고 한다
델피가 세계의 베꼽이고 중심지이고 신탁을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여기서
퓌티야 종교축제가 열렸다.
퓌티아 경기장은 1877,56M로 기원전 582년 이래로 4대 그리스 경기
(Panhellenic games) 가운데 퓌티아 경기가 이곳에서 4년 주기로 열렸다.
그리스 본토와 에게 해는 물론 지중해 주변의 모든 그리스 식민지에서 참가한
운동선수들이 6일내지 8일간 지속된 축제는 퓌톤에 대한 아폴론의 승리를
재현하는 것으로 4일간에 걸친 축제 후에 이곳 스타디움에서 체육경기가
시작되었다고하며
2세기경 아테네의 부자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출연한 기부금으로 햔재의
자석 계단이 있는 스타디움으로 개조 하였다고 한다
아테나 프로나이아 지성소는 여러 신전과 보물창고가 있는 곳으로 하며
중앙의 제단과 아테나 신전 보물창고 톨로스(Tholos)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기원전 4세기(BCE 380-360년)에 원형의 건물로 검은 색깔의 엘레우시스 석재를
사용한 건축물 삼단으로 계단식 플랫폼을 깔고 이 위에 대리석으로 마감하였다고
한다
건축가 테오도로스(Theodorus)가 설계하였고 20개의 도리아식 기둥을 세웠고
안쪽에는 10개의 코린트식 기둥을 세웠으며 중요한 신상을 보관했을 것으로만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우린 이것으로 오늘의 강행군 투어를 마치고 델피의 Amalia 호텔에서 피로를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