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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번역문
제4 탑상(塔像第四)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자장이 태화지에서 9층탑 건립의 연유를 받다(636년 (음))
자장이 태화지에서 9층탑 건립의 연유를 받다 ( 636년 (음) )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신라 제27대 선덕왕 즉위 5년, 정관(貞觀)註 206206 당 태종(太宗)의 연호로 정관 년간은 627년~649년이다.닫기 10년 병신에 자장법사가 당나라에 유학하여 곧 오대에서 문수보살이 불법을 주는 것을 감응하여 얻었다. 자세한 것은 본전에 보인다. 문수가 또 말하기를 “너희 국왕은 천축의 찰리종(刹利種)註 207207 범어로 Ksatriya이다. 고대 인도 4성의 제2계급으로 무사계급 또는 왕족을 일컫는다.닫기왕으로 미리 불기(佛記)註 208208 부처가 내세의 일을 예언한다는 의미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부처가 제자의 신상에 따라 미래의 과보(果報)를 분별한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닫기를 받았기 때문에 특별히 인연이 있어 동이(東夷) 공공(共工)註 209209 순(舜) 시대 4흉의 하나로 동이족에 속하며, 강회(江淮) 지방에 살았다고 한다.닫기의 종족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산천이 험하기 때문에 사람의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 사견(邪見)을 많이 믿어 때때로 천신이 재앙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다문비구(多聞比丘)註 210210 법문을 많이 체득하고 걸식으로 생활을 하는 남자승려로, 250계를 받아 지키며 생활한다.닫기가 나라 안에 있어서 군신이 평안하고 백성이 화평하다”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 사라졌다. 자장은 이것이 대성이 변화한 것을 알고 슬피 울면서 물러났다.
중국의 태화지(太和池) 근처를 지나칠 때 갑자기 신인(神人)이 나와서 물었다. “어찌 이에 이르게 되었는가?” 자장이 답하여 말하기를 “보리(菩提)註 211211 범어 Bodhi의 음역으로 각(覺)·지(智)·도(道) 등으로 번역된다. 불과(佛果)를 얻어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제법(諸法)을 다 깨우쳐 정각을 얻는다는 뜻이다.닫기를 구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신인이 예를 갖춰 절하고 또 묻기를 “너희 나라는 어떤 어려움에 빠져 있는가?”라고 하니 자장이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靺鞨)을 연하고 남쪽으로 왜국을 접하고 있고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여 이웃나라의 침략이 종횡하니 이것이 백성의 걱정입니다”라고 하였다. 신인이 말하기를 “지금 너희 나라는 여자가 왕이 되어 덕은 있으나 위엄은 없다. 그러므로 이웃나라가 꾀하는 것이다. 마땅히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라”라고 하였다. 자장이 “본국으로 돌아가면 장차 무엇이 이익이 되겠는가”라고 물으니 신인이 “황룡사 호법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註 212212 범천(梵天) 또는 범천왕(梵天王)이라고도 한다. 제석천(帝釋天)과 함께 정법을 옹호하는 존재이며, 부처님이 세상에 나올 때마다 반드시 제일 먼저 설법을 청한다고 한다.닫기의 명을 받아 그 절에 가서 호위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귀국하여 절 안에 9층탑을 조성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註 213213 신라의 주변국 또는 민족을 일컫는 것으로써, 일본, 중화, 오월, 탁라(托羅), 응유(鷹遊), 말갈, 단국(丹國), 여적(女狄), 예맥(穢貊)을 말한다.닫기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영원히 평안할 것이다. 탑을 건립한 후에 팔관회註 214214 우리 민족 고유의 제천의식과 신라·고려시대의 불교적 팔관재계(八關齋戒)가 결합되어 국가적 행사로 성행하였던 연중행사의 하나이다. 팔관재계는 신도가 8가지의 죄를 범하지 않도록 엄숙하게 지내는 법회로써 고대 인도의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닫기를 베풀고 죄인을 사면하면 곧 외적이 해를 가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나를 위하여 경기(京畿) 남쪽 해안에 정려(精廬) 하나를 세워 함께 나의 복을 빌어주면 나 역시 덕을 갚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 드디어 옥을 받들어 바치고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사중기(寺中記)에는 종남산(終南山) 원향선사(圓香禪師)의 거처에서 건탑의 이유를 받았다고 한다.
註 206
당 태종(太宗)의 연호로 정관 년간은 627년~649년이다.
註 207
범어로 Ksatriya이다. 고대 인도 4성의 제2계급으로 무사계급 또는 왕족을 일컫는다.
註 208
부처가 내세의 일을 예언한다는 의미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부처가 제자의 신상에 따라 미래의 과보(果報)를 분별한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註 209
순(舜) 시대 4흉의 하나로 동이족에 속하며, 강회(江淮) 지방에 살았다고 한다.
註 210
법문을 많이 체득하고 걸식으로 생활을 하는 남자승려로, 250계를 받아 지키며 생활한다.
註 211
범어 Bodhi의 음역으로 각(覺)·지(智)·도(道) 등으로 번역된다. 불과(佛果)를 얻어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제법(諸法)을 다 깨우쳐 정각을 얻는다는 뜻이다.
註 212
범천(梵天) 또는 범천왕(梵天王)이라고도 한다. 제석천(帝釋天)과 함께 정법을 옹호하는 존재이며, 부처님이 세상에 나올 때마다 반드시 제일 먼저 설법을 청한다고 한다.
註 213
신라의 주변국 또는 민족을 일컫는 것으로써, 일본, 중화, 오월, 탁라(托羅), 응유(鷹遊), 말갈, 단국(丹國), 여적(女狄), 예맥(穢貊)을 말한다.
註 214
우리 민족 고유의 제천의식과 신라·고려시대의 불교적 팔관재계(八關齋戒)가 결합되어 국가적 행사로 성행하였던 연중행사의 하나이다. 팔관재계는 신도가 8가지의 죄를 범하지 않도록 엄숙하게 지내는 법회로써 고대 인도의 풍습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불탑·승탑·탑비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생활
정치>신이>생물>사람·귀신
색인어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백제에서 공장을 요청하여 9층탑을 건립하다(643년 (음))
백제에서 공장을 요청하여 9층탑을 건립하다 ( 643년 (음) )
정관 17년 계묘 16일에 당 황제가 하사한 경전·불상·가사·폐백을 가지고 귀국하여 탑을 건립하는 일을 왕에게 아뢰었다. 선덕왕註 215215 신라의 제27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632년~646년이다.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선덕왕은 신라 최초로 여자로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귀족자제들을 당나라 국학에 입학시키고 황룡사에 9층목탑을 세우는 등 여러가지 문화적 업적을 쌓았고 대당외교(對唐外交)를 한층 긴밀히 하였으며 군사적으로는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용하여 삼국통일의 기반 닦았다. 647년 정월에 일어난 비담(毗曇)·염종(廉宗)의 난 와중에 죽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닫기이 군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이 “백제에서 공장(工匠)을 청한 연후에야 바야흐로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보물과 비단을 가지고서 백제에게 청하였다. 공장 아비지(阿非知)가 명을 받고 와서 목재와 석재를 경영하였고 이간(伊干)註 216216 신라 17관등의 제2위인 이찬(伊湌)을 말한다.닫기용춘(龍春)註 217217 신라 제25대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金龍春)은 용수(龍樹)라고도 하며 탁문흥갈문왕(卓文興葛文王)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부인은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고 아들은 후에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으로 즉위하는 김춘추(金春秋)이다. 진평왕 44년(622)에 초대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왕 51년(629)에는 고구려의 낭비성을 함락시키는 공을 세웠다. 선덕왕(善德王)대에 들어서도 왕을 대신하여 지방을 순무(巡撫)하거나 황룡사탑의 창건 책임자로서 활약하였다. 태종무열왕의 즉위와 함께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되었다(≪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원년).닫기혹은 용수(龍樹)라고 쓰기도 한다.이 주관하여 소장(小匠) 200명을 이끌었다.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는 날에 공장이 본국 백제가 멸망하는 모습을 꿈꾸었다. 공장은 곧 의심이 나서 손을 멈추었는데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어두컴컴한 속에서 한 노승과 한 장사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곧 그 기둥을 세우고 노승과 장사는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장은 이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탑을 완성하였다.
註 215
신라의 제27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632년~646년이다.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선덕왕은 신라 최초로 여자로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귀족자제들을 당나라 국학에 입학시키고 황룡사에 9층목탑을 세우는 등 여러가지 문화적 업적을 쌓았고 대당외교(對唐外交)를 한층 긴밀히 하였으며 군사적으로는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용하여 삼국통일의 기반 닦았다. 647년 정월에 일어난 비담(毗曇)·염종(廉宗)의 난 와중에 죽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註 216
신라 17관등의 제2위인 이찬(伊湌)을 말한다.
註 217
신라 제25대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金龍春)은 용수(龍樹)라고도 하며 탁문흥갈문왕(卓文興葛文王)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부인은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고 아들은 후에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으로 즉위하는 김춘추(金春秋)이다. 진평왕 44년(622)에 초대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왕 51년(629)에는 고구려의 낭비성을 함락시키는 공을 세웠다. 선덕왕(善德王)대에 들어서도 왕을 대신하여 지방을 순무(巡撫)하거나 황룡사탑의 창건 책임자로서 활약하였다. 태종무열왕의 즉위와 함께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추봉되었다(≪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 원년).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불탑·승탑·탑비
정치>신이>생물>사람·귀신
색인어
국명 : 당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9층탑의 영험
9층탑의 영험
찰주기에는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이고 이하는 183척이다”라고 했다. 자장이 오대에서 받은 사리 100알을 기둥 안과 통도사(通度寺)註 218218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靈鷲山)에 있는 사찰이다. 우리나라 3보 사찰 가운데 하나인 불보 사찰로 선덕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 자장이 당나라로부터 가지고 온 불사리(佛舍利)와 가사, 대장경을 봉안하였다고 하며, 금강계단을 둠으로 해서 신라불교의 계율 근본도량이 되었다.닫기 계단(戒壇)註 219219 스님이 되기 위해 계를 받는 단(壇)으로 양산 통도사, 김제 금산사, 개성 불일사에 현존하고 있다.닫기과 태화사(大和寺) 탑에 나누어 안치하였는데 지룡(池龍)의 청을 따른 것이다. 태화사는 아곡현(阿曲縣) 남쪽에 있는데 지금의 울주이며 또한 자장이 창건한 것이다. 탑을 세운 후에 천지가 형통하고 삼한이 하나가 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후에 고려 왕이 장차 신라를 치고자 하다가 곧 “신라에는 삼보(三寶)가 있어서 침범할 수 없다고 하는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황룡사 장육상과 구층탑, 그리고 진평왕註 220220 신라의 제2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79년~632년이다. 진흥왕 대의 비약적인 영토확장과 제도정비를 바탕으로 하여 중앙의 통치제도를 크게 정비하였다. 즉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 공부를 맡은 조부, 의례와 교육을 담당하는 례부 그리고 선부서와 승부 등을 설치하여 신라 관제발달의 새로운 발전기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수(隋)·당(唐)과 통교하여 신라 대중외교(對中外交)의 단서를 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닫기의 천사옥대(天賜玉帶)입니다”라고 하니 드디어 그 계획을 그쳤다. 주(周)나라에 구정(九鼎)註 221221 중국 하(夏)의 우왕(禹王)이 구주(九州)의 금속을 모아서 주조한 아홉개의 솥. 이것을 왕위계승의 보기로 삼은 데에서 왕위 또는 제업(帝業)을 일컫는다.닫기이 있어서 초(楚)나라 사람이 감히 엿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비슷한 것이다.
註 218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靈鷲山)에 있는 사찰이다. 우리나라 3보 사찰 가운데 하나인 불보 사찰로 선덕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 자장이 당나라로부터 가지고 온 불사리(佛舍利)와 가사, 대장경을 봉안하였다고 하며, 금강계단을 둠으로 해서 신라불교의 계율 근본도량이 되었다.
註 219
스님이 되기 위해 계를 받는 단(壇)으로 양산 통도사, 김제 금산사, 개성 불일사에 현존하고 있다.
註 220
신라의 제2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79년~632년이다. 진흥왕 대의 비약적인 영토확장과 제도정비를 바탕으로 하여 중앙의 통치제도를 크게 정비하였다. 즉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 공부를 맡은 조부, 의례와 교육을 담당하는 례부 그리고 선부서와 승부 등을 설치하여 신라 관제발달의 새로운 발전기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수(隋)·당(唐)과 통교하여 신라 대중외교(對中外交)의 단서를 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註 221
중국 하(夏)의 우왕(禹王)이 구주(九州)의 금속을 모아서 주조한 아홉개의 솥. 이것을 왕위계승의 보기로 삼은 데에서 왕위 또는 제업(帝業)을 일컫는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불탑·승탑·탑비
색인어
지명 : 오대
서명 : 찰주기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한다.
귀신이 부축하여 제경(帝京)을 누르니,
휘황한 금벽으로 대마루는 움직이는 듯하다
여기에 올라 어찌 구한의 항복만을 볼 것인가
건곤이 특별히 편안한 것 비로소 알았다
주제분류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9층탑 관련 기록(533년 (음))
9층탑 관련 기록 ( 533년 (음) )
또 해동의 명현(名賢) 안홍(安弘)註 222222 안함(安含)이라고도 한다. 신라의 고승으로 성은 김씨이고 이찬 시부(詩賦)의 손자이다. ≪해동고승전≫에는 601년 왕명으로 수에 가서 대흥성사(大興聖寺)에 있다가 605년에 귀국했다고 하며, ≪삼국사기≫에는 576년에 귀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지었다.닫기이 편찬한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라 제27대에 여왕이 왕이 되니 도(道)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九韓)이 침략하였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곧 이웃나라의 침입이 진압될 수 있다.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 제3층은 오월註 223223 중국 5대시대 10국의 하나.닫기, 제4층은 탁라(托羅)註 224224 제주도의 옛이름으로, 탁라(乇羅)가 정확한 표기이다.닫기, 제5층은 응유(鷹遊)註 225225 강소성 동해현(東海縣) 동북쪽 바다에 있던 섬나라이다.닫기, 제6층은 말갈註 226226 중국 만주 동북 지방에 살던 퉁구스(Tungus)족의 일족. 삼한시대에 생긴 이름으로, 숙신(肅愼)·읍루(挹婁)·물길(勿吉)은 모두 옛이름이다. 후에 여진(女眞)으로서 금(金)을 세웠다.닫기, 제7층은 거란註 227227 몽골 계통의 유목민족. 4세기 이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유목하면서 돌궐, 위구르, 중국을 전전하며 부족의 결성을 이루었다. 후위(後魏) 때 글안(契丹)이라 불렀고, 후진(後晋) 때는 요(遼)를 건립하였다.닫기, 제8층은 여적(女狄), 제9층은 예맥(穢貊)이다.註 228228 한반도 중북부와 만주 중남부 일대에 살던 고대 종족의 한 갈래로 한(韓)민족의 근간이 되는 민족이다.닫기”
또 국사와 사중고기(寺中古記)를 살펴보면 진흥왕註 229229 신라의 제24대 왕으로 540년에 즉위하여 576년까지 재위하였다. 죽령을 넘어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는 등 강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국경 지방을 순수하고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비와 탁경비를 세웠다. 그는 화랑도라는 청소년 집단을 공인하여 인재등용의 길로 이용하였고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황룡사 장육존상을 주조하였고 팔관회를 최초로 개최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닫기 계유에 절을 세운 후 선덕왕대 정관 19년 을사(645년)에 탑을 처음 이루어졌다. 32대 효소왕 즉위 7년, 성력(聖曆)註 230230 당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연호로 698년~699년에 사용하였다.닫기 원년 무술 6월(698년)에 벼락이 쳤다. 사중고기에는 성덕왕대라고 하는데 잘못이다. 성덕왕대에는 무술년이 없다.제33대 성덕왕 경신(720년)에 다시 세웠다. 48대 경문왕 무자(868년) 6월에 두 번째로 벼락이 쳤고 같은 왕대에 세 번째로 다시 세웠다. 본조 광종(光宗) 즉위 5년 계축 10월(953년)에 세 번째로 벼락이 쳤고 현종(顯宗) 13년 신유(1021)에 네 번째로 다시 세웠다. 또 정종(靖宗) 2년 을해(1035)에 네 번째로 벼락이 쳤고註 231231 연대표에 의하면 광종 5년은 4년으로, 현종 13년은 12년으로, 정종 2년은 1년으로, 고종 16년은 25년으로 되어 있다.닫기 또 문종(文宗) 갑진년(1064)에 다섯 번째로 다시 세웠다. 또 헌종(獻宗)註 232232 본문에는 헌종(憲宗)이라고 되어 있으나 헌종(獻宗)의 오기로 판단된다. 이에 따라 번역한다.닫기 말년 을해(1095)에 다섯 번째로 벼락이 쳤고 숙종(肅宗) 병자(1096)에 여섯 번째로 다시 세웠다. 또 고종(高宗) 25년 무술(1238)註 233233 원문에는 16년으로 되어 있으나 이해는 갑자로 기축년에 해당한다. 무술은 고종 25년이므로 이에 따라 번역한다.닫기 겨울에 몽고의 병화로 탑, 장육존상, 절의 전우(殿宇)가 모두 타버렸다.
註 222
안함(安含)이라고도 한다. 신라의 고승으로 성은 김씨이고 이찬 시부(詩賦)의 손자이다. ≪해동고승전≫에는 601년 왕명으로 수에 가서 대흥성사(大興聖寺)에 있다가 605년에 귀국했다고 하며, ≪삼국사기≫에는 576년에 귀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지었다.
註 223
중국 5대시대 10국의 하나.
註 224
제주도의 옛이름으로, 탁라(乇羅)가 정확한 표기이다.
註 225
강소성 동해현(東海縣) 동북쪽 바다에 있던 섬나라이다.
註 226
중국 만주 동북 지방에 살던 퉁구스(Tungus)족의 일족. 삼한시대에 생긴 이름으로, 숙신(肅愼)·읍루(挹婁)·물길(勿吉)은 모두 옛이름이다. 후에 여진(女眞)으로서 금(金)을 세웠다.
註 227
몽골 계통의 유목민족. 4세기 이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유목하면서 돌궐, 위구르, 중국을 전전하며 부족의 결성을 이루었다. 후위(後魏) 때 글안(契丹)이라 불렀고, 후진(後晋) 때는 요(遼)를 건립하였다.
註 228
한반도 중북부와 만주 중남부 일대에 살던 고대 종족의 한 갈래로 한(韓)민족의 근간이 되는 민족이다.
註 229
신라의 제24대 왕으로 540년에 즉위하여 576년까지 재위하였다. 죽령을 넘어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는 등 강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국경 지방을 순수하고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비와 탁경비를 세웠다. 그는 화랑도라는 청소년 집단을 공인하여 인재등용의 길로 이용하였고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황룡사 장육존상을 주조하였고 팔관회를 최초로 개최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註 230
당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연호로 698년~699년에 사용하였다.
註 231
연대표에 의하면 광종 5년은 4년으로, 현종 13년은 12년으로, 정종 2년은 1년으로, 고종 16년은 25년으로 되어 있다.
註 232
본문에는 헌종(憲宗)이라고 되어 있으나 헌종(獻宗)의 오기로 판단된다. 이에 따라 번역한다.
註 233
원문에는 16년으로 되어 있으나 이해는 갑자로 기축년에 해당한다. 무술은 고종 25년이므로 이에 따라 번역한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불탑·승탑·탑비
색인어
이름 : 안홍,진흥왕,선덕왕,효소왕,성덕왕,경문왕,광종,현종,정종,문종,헌종,숙종,고종
국명 : 일본,중화,오월,탁라,응유,말갈,거란,여적,예맥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皇龍寺鍾 芬皇寺藥師 奉德寺鍾) >경덕왕이 황룡사종을 주조하다(754년 (음))
경덕왕이 황룡사종을 주조하다 ( 754년 (음) )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皇龍寺鍾 芬皇寺藥師 奉德寺鍾)
신라 제35대 경덕대왕(景德大王)이 천보(天寶)註 234234 당 현종(玄宗)의 연호로 천보 년간은 742년~756년이다.닫기 13년 갑오(甲午)에 황룡사註 235235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 동쪽에 있었던 사찰로서 신라 선덕왕 14년(645)에 완성하여 신라 호국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 고종 때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강인구 외, 2002,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28~229).닫기 종을 주조하였는데 길이는 1장 3촌이요, 두께는 9촌, 무게는 49만 7천 5백 81근이었다. 시주는 효정이왕삼모부인(孝貞伊王三毛夫人)이요, 장인(匠人)은 이상택(里上宅) 하전(下典)註 236236 고려시대에는 품관으로 진급할 수 없는 장고(掌固) 따위의 하급 이속을 일컬었으나, 신라시대에서는 알 수 없다. 개인에게 소속된 장인(匠人)으로 추정된다.닫기이었다. [고려] 숙종(肅宗)때 다시 새로운 종을 완성하니 길이가 6척 8촌이었다.
註 234
당 현종(玄宗)의 연호로 천보 년간은 742년~756년이다.
註 235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 동쪽에 있었던 사찰로서 신라 선덕왕 14년(645)에 완성하여 신라 호국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 고종 때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강인구 외, 2002,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28~229).
註 236
고려시대에는 품관으로 진급할 수 없는 장고(掌固) 따위의 하급 이속을 일컬었으나, 신라시대에서는 알 수 없다. 개인에게 소속된 장인(匠人)으로 추정된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불탑·승탑·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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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皇龍寺鍾 芬皇寺藥師 奉德寺鍾) >경덕왕이 분황사의 약사여래동상을 주조하다(755년 (음))
경덕왕이 분황사의 약사여래동상을 주조하다 ( 755년 (음) )
또 이듬해 을미(乙未)에 분황사(芬皇寺)註 237237 선덕여왕 3년(634) 정월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경주시내의 황룡사지 북쪽에 있다.닫기의 약사여래동상[藥師銅像]을 주조하였는데 무게가 30만 6천 7백 근이요, 장인은 본피부(本彼部) 강고내말(强古乃末)이었다.
註 237
선덕여왕 3년(634) 정월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경주시내의 황룡사지 북쪽에 있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불보살상·불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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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강고내말
황룡사종 분황사약사 봉덕사종(皇龍寺鍾 芬皇寺藥師 奉德寺鍾) >경덕왕이 주조하고자 한 성덕대왕신종을 혜공왕대 완성하다(770년 12월 (음))
경덕왕이 주조하고자 한 성덕대왕신종을 혜공왕대 완성하다 ( 770년 12월(음) )
또 (왕은) 황동(黃銅) 12만근을 희사하여 부왕이신 성덕왕(聖德王)註 238238 효소왕의 친동생으로 702년부터 737년까지 재위하였다. 성(姓)은 김씨(金氏)이고, 휘(諱)는 융기(隆基), 또는 흥광(興光)이다.닫기을 위하여 큰 종 하나를 주조하고자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그 아들 혜공대왕(惠恭大王)註 239239 신라의 제3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65년~780년이다.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어머니인 만월부인이 섭정하였다. 혜공왕 4년에 대공(大恭)과 대렴(大廉)이 난을 일으켰고 동왕 6년에 김융(金融), 11년에 김은거(金隱居)·염상(廉相)·정문(正門)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어수선해졌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재위 16년에 일어난 김지정(金志貞)의 난 와중에서 죽음으로써 신라의 중대 왕실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닫기 건운(乾運)이 대력(大曆)註 240240 당 대종(代宗)의 연호로, 대력 년간은 766년~779년이다.닫기 경술(庚戌)註 241241 종명(鐘銘)에는 대력 6년 신해(辛亥, 771)로 되어 있다.닫기 12월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인들을 모아 능히 그것을 완성하여 봉덕사註 242242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의 북천(北川)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사찰이다. 창건연대에 대해서 ≪삼국유사≫ 권2 기이2 성덕왕(聖德王)조와 권3 탑상4 황룡사종(皇龍寺鐘) 분황사약사(芬皇寺藥師) 봉덕사종(奉德寺鍾)조의 기록이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데, 일연(一然)은 후자의 기록을 신뢰하여 738년(효성왕 2년)에 세워졌다고 보았다. 두 기록을 아울러 봉덕사가 착공된 시기는 성덕왕대의 일이고, 완공이 효성왕 2년인 738년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이호영, 「신라 중세왕실과 봉덕사」, ≪사학지≫ 8, 단국사학회, 1974, 3~4쪽).닫기에 안치하였다. [이] 절은 곧 효성왕(孝成王)註 243243 신라 3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32~742년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승경(承慶)이다.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이다. 비는 이찬(伊湌) 순원(順元)의 딸인 혜명부인(惠明夫人) 김씨이다. 재위 6년만인 742년 5월에 죽어 시호를 효성(孝成)이라고 하고 유명에 따라 법류사(法流寺) 남쪽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뿌렸다(≪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효성왕).닫기 개원(開元)註 244244 당(唐) 현종(玄宗)의 연호로 713년~741년에 사용하였다.닫기 26년 무인(戊寅)(738년)에 부왕인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창건한 것이다. 그러므로 종명(鍾銘)에는 ‘성덕대왕신종지명(聖德大王神鍾之銘)’이라 하였다. 성덕대왕은 곧 경덕의 아버지로 전광대왕(典光大王)註 245245 성덕왕의 이름이 흥광(興光)이므로 흥광대왕(興光大王)의 오기로 보인다. 33대 성덕왕(702~737)의 장남이 34대 효성왕(737~742)이고, 차남이 35대 경덕왕(742~765)이며, 경덕왕의 아들이 36대 혜공왕(765~780)이다.닫기이다. 종은 본래 경덕대왕이 아버지를 위하여 시주한 금이었으므로 성덕종(聖德鍾)이라 한다. 조산대부(朝散大夫) 전태자사의랑(前太子司議郞) 한림랑(翰林郞) 김필월(金弼粤)註 246246 종명에는 김필해(金弼奚)로 되어 있다.닫기이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종명을 지었는데, 글이 번다하므로 수록하지 않는다.
註 238
효소왕의 친동생으로 702년부터 737년까지 재위하였다. 성(姓)은 김씨(金氏)이고, 휘(諱)는 융기(隆基), 또는 흥광(興光)이다.
註 239
신라의 제3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65년~780년이다.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어머니인 만월부인이 섭정하였다. 혜공왕 4년에 대공(大恭)과 대렴(大廉)이 난을 일으켰고 동왕 6년에 김융(金融), 11년에 김은거(金隱居)·염상(廉相)·정문(正門)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어수선해졌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재위 16년에 일어난 김지정(金志貞)의 난 와중에서 죽음으로써 신라의 중대 왕실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註 240
당 대종(代宗)의 연호로, 대력 년간은 766년~779년이다.
註 241
종명(鐘銘)에는 대력 6년 신해(辛亥, 771)로 되어 있다.
註 242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의 북천(北川)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사찰이다. 창건연대에 대해서 ≪삼국유사≫ 권2 기이2 성덕왕(聖德王)조와 권3 탑상4 황룡사종(皇龍寺鐘) 분황사약사(芬皇寺藥師) 봉덕사종(奉德寺鍾)조의 기록이 각각 다르게 나타나는데, 일연(一然)은 후자의 기록을 신뢰하여 738년(효성왕 2년)에 세워졌다고 보았다. 두 기록을 아울러 봉덕사가 착공된 시기는 성덕왕대의 일이고, 완공이 효성왕 2년인 738년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이호영, 「신라 중세왕실과 봉덕사」, ≪사학지≫ 8, 단국사학회, 1974, 3~4쪽).
註 243
신라 34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32~742년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승경(承慶)이다.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이다. 비는 이찬(伊湌) 순원(順元)의 딸인 혜명부인(惠明夫人) 김씨이다. 재위 6년만인 742년 5월에 죽어 시호를 효성(孝成)이라고 하고 유명에 따라 법류사(法流寺) 남쪽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뿌렸다(≪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효성왕).
註 244
당(唐) 현종(玄宗)의 연호로 713년~741년에 사용하였다.
註 245
성덕왕의 이름이 흥광(興光)이므로 흥광대왕(興光大王)의 오기로 보인다. 33대 성덕왕(702~737)의 장남이 34대 효성왕(737~742)이고, 차남이 35대 경덕왕(742~765)이며, 경덕왕의 아들이 36대 혜공왕(765~780)이다.
註 246
종명에는 김필해(金弼奚)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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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상>불교사상>불탑·승탑·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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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 탑상(塔像第四) >영묘사장육(靈妙寺丈六) >선덕왕이 영묘사를 창건하고 경덕왕대 장육존상을 개금하다(764년 (음))
선덕왕이 영묘사를 창건하고 경덕왕대 장육존상을 개금하다 ( 764년 (음) )
영묘사註 247247 영묘사(靈廟寺)라고도 한다. 선덕여왕 4년(635)에 창건되었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 상에 의하면 영묘사에 成典이 설치되었다고 한다.닫기 장육(靈妙寺丈六)
선덕왕(善德王)이 절을 창건하여 소상을 만든 인연에 관하여는 모두 ≪양지법사전(良志法師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경덕왕(景德王)註 248248 신라 제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의 742~765년이다. 성은 김씨 이름은 헌영(憲英)이다.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고 효성왕의 동생이다. 757년에는 주군현의 명칭을, 759년에는 중앙관부의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757년에는 내외관의 녹봉(祿俸)을 없애고 녹읍(祿邑)을 부활시켰다(≪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경덕왕).닫기 즉위 23년에 장육존상(丈六)을 개금(改金)하였는데 [비용으로] 조(租)가 2만 3천 7백 섬이었다. 양지전(良志傳)에는 불상을 처음 만들 때의 비용이라고 하였다. 지금 두 설을 그대로 써둔다.
註 247
영묘사(靈廟寺)라고도 한다. 선덕여왕 4년(635)에 창건되었다. ≪삼국사기≫ 권38, 잡지7 직관 상에 의하면 영묘사에 成典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註 248
신라 제 35대 왕으로 재위 기간의 742~765년이다. 성은 김씨 이름은 헌영(憲英)이다.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고 효성왕의 동생이다. 757년에는 주군현의 명칭을, 759년에는 중앙관부의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757년에는 내외관의 녹봉(祿俸)을 없애고 녹읍(祿邑)을 부활시켰다(≪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경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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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문화>사상>불교사상>불보살상·불사리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四佛山 掘佛山 萬佛山) >진평왕때 사불산에 사방여래가 떨어졌다(624년 (음))
진평왕때 사불산에 사방여래가 떨어졌다 ( 624년 (음) )
사불산굴불산만불산(四佛山 掘佛山 萬佛山)
죽령(竹嶺) 동쪽 1백리 가량 떨어진 마을에 높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眞平王) 46년 갑신(甲申)註 249249 진평왕 9년(587)은 간지로 정미(丁未)이고, 갑신(甲申)은 진평왕 46년(624)이다. 어느 쪽이 맞는지 알 수 없다.닫기에 홀연히 사면이 한 발이나 되는 큰 돌에 사방여래(四方如來)註 250250 사방의 불국토에 사는 부처를 말한다. 동방 아축불(阿閦佛), 서방 아미타불, 남방 보생불(寶生佛), 북방 미묘성불(微妙聲佛)을 가리킨다.닫기를 조각하고 모두 붉은 비단으로 감싼 것이 하늘로부터 그 산 정상에 떨어졌다. 왕은 그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쳐다보고 예경한 후 드디어 그 바위 곁에 절을 창건하고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 하였다. ≪법화경(法華經)註 251251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약칭이며 ≪연경(蓮經)≫이라고도 한다. 대승경전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7권 28품으로 이루어졌다. 천태종·법상종의 소의경전이다.닫기≫을 외우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 비구니를 청하여 절을 맡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돌을 공양하며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그 산을 역덕산(亦德山)이라고 하며, 혹은 사불산(四佛山)註 252252 경상북도 문경시 대승사(大乘寺)가 위치한 산으로, 산 위 바위에 새겨진 사방불에 이하여 산 이름이 지어졌다.닫기이라고도 한다. 비구니가 죽자 장사지냈더니 무덤위에서 연(蓮)이 났었다.
註 249
진평왕 9년(587)은 간지로 정미(丁未)이고, 갑신(甲申)은 진평왕 46년(624)이다. 어느 쪽이 맞는지 알 수 없다.
註 250
사방의 불국토에 사는 부처를 말한다. 동방 아축불(阿閦佛), 서방 아미타불, 남방 보생불(寶生佛), 북방 미묘성불(微妙聲佛)을 가리킨다.
註 251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약칭이며 ≪연경(蓮經)≫이라고도 한다. 대승경전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7권 28품으로 이루어졌다. 천태종·법상종의 소의경전이다.
註 252
경상북도 문경시 대승사(大乘寺)가 위치한 산으로, 산 위 바위에 새겨진 사방불에 이하여 산 이름이 지어졌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불보살상·불사리
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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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진평왕
제4 탑상(塔像第四)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四佛山 掘佛山 萬佛山) >경덕왕대 굴불사를 창건하다
경덕왕대 굴불사를 창건하다
또한 경덕왕(景德王)이 백율사(栢栗寺)에 행차하여 산 아래에 다다랐을 때 땅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사람을 시켜서 파보라고 하니 큰 바위가 있는데, 사면에는 사방불註 253253 굴불사의 사방불은 동쪽에 약사여래, 남쪽에 석가여래, 서쪽에 아미타여래, 북쪽에 11면6비의 관음상이 새겨져 있다(김리나, 「경주 굴불사지의 사면석상에 대하여」, ≪진단학보≫ 39, 1975, 43~68쪽).닫기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절을 창건하고 그 이름을 굴불(掘佛)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그릇되이 굴석(掘石)註 254254 굴불사지 발굴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청동금고(靑銅金鼓)에서 ‘掘石寺’란 명문이 발견되어 고려시대에는 굴석사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문화재연구소, ≪굴불사유적발굴조사보고서≫, 1986).닫기이라고 한다.
註 253
굴불사의 사방불은 동쪽에 약사여래, 남쪽에 석가여래, 서쪽에 아미타여래, 북쪽에 11면6비의 관음상이 새겨져 있다(김리나, 「경주 굴불사지의 사면석상에 대하여」, ≪진단학보≫ 39, 1975, 43~68쪽).
註 254
굴불사지 발굴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청동금고(靑銅金鼓)에서 ‘掘石寺’란 명문이 발견되어 고려시대에는 굴석사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문화재연구소, ≪굴불사유적발굴조사보고서≫, 1986).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
문화>사상>불교사상>불보살상·불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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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경덕왕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四佛山 掘佛山 萬佛山) >경덕왕이 만불산을 조성하다
경덕왕이 만불산을 조성하다
경덕왕은 또 당(唐)나라 대종황제(代宗)가 특별히 불교를 숭상한다는 말을 듣고 공장에게 명하여 오색(五色) 모직물을 만들고 또 침단목(沈檀木)을 조각하여 맑은 구슬과 아름다운 옥으로 꾸며 높이가 한 발 남짓한 가산(假山)을 만들어 [그것을] 모직물 위에 놓았다. [그] 산에는 험한 바위와 괴석이 있고 개울과 동굴이 구간을 지어 있는데, 한 구역마다 춤추고 노래 부르며 음악을 연주하는 모양과 여러 나라의 산천모양을 꾸몄다. 미풍이 창으로 들면 벌과 나비가 훨훨 날고, 제비와 참새가 춤을 추니 얼핏 봐서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 속에는 또 만불(萬佛)이 안치되었는데, 큰 것은 한 치 남짓하고 작은 것은 8, 9푼이었다. 그 머리는 혹 큰 것은 한 치 남짓하고 작은 것은 8, 9푼이었다. 그 머리는 큰 것은 기장 탄알만하고 혹은 콩알 반쪽만하였다. 나발(螺髮)·육계(肉髻)·백모(白毛)와 눈썹과 눈이 선명하여 상호(相好)가 다 갖춰져 있었다. [그 형상은] 다만 비슷하게는 말할 수 있어도 자세히는 다 형용할 수 없다. 이로 인해 만불산(萬佛山)이라고 하였다.
다시 금과 옥을 새겨 수실이 달린 번개(幡蓋)와 암라(菴羅)註 255255 과일 이름으로 호도같이 생겼다고 한다. 암마륵(菴摩勒) 혹은 암마라여감(菴摩羅·餘甘)이라고 불리며 무후과(無垢果)라고 의역된다.닫기·담복(薝葍)註 256256 치자나무 또는 그 꽃을 가리킨다. 빛이 희고 향내가 매우 좋다고 한다. 섬박가(贍博迦) 또는 울금화(鬱金花)라고도 한다.닫기·화과(花果)의 장엄한 것과 누각(樓閣), 대전(臺殿), 당사(堂榭)들이 비록 작기는 하지만 위세가 모두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앞에는 돌아다니는 비구상[旋遶比丘]이 천여 구 있고 아래에는 자금종(紫金鍾)註 257257 자금은 적동(赤銅)의 이칭으로 구리를 가리킨다.닫기 세 구를 벌려 놓았는데, 모두 종각이 있고 포뢰(蒲牢)註 258258 종의 당두(撞頭) 부분이다. 포뢰(蒲牢)는 고래를 두려워하는 짐승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고래가 포뢰를 치면 포뢰가 크게 운다고 여겨서 포뢰의 모양을 종 위에 만들어 놓고 고래 모양의 당목(撞木)을 만들어 종을 쳤다고 한다.닫기가 있었으며 고래모양으로 종치는 방망이를 삼았다. 바람이 불어 종이 울리면 곁에 있던 돌아다니는 스님들은 모두 머리를 땅에 닿도록 절을 하였고 은은하게 범음註 259259 부처·보살의 맑고 깨끗한 음성 또는 경 읽는 소리를 의미한다.닫기이 있었으니 대개 활동의 중심체[關棙]는 종에 있었다. 비록 만불이라고 하나 그 실상은 이루 기록할 수가 없다.
註 255
과일 이름으로 호도같이 생겼다고 한다. 암마륵(菴摩勒) 혹은 암마라여감(菴摩羅·餘甘)이라고 불리며 무후과(無垢果)라고 의역된다.
註 256
치자나무 또는 그 꽃을 가리킨다. 빛이 희고 향내가 매우 좋다고 한다. 섬박가(贍博迦) 또는 울금화(鬱金花)라고도 한다.
註 257
자금은 적동(赤銅)의 이칭으로 구리를 가리킨다.
註 258
종의 당두(撞頭) 부분이다. 포뢰(蒲牢)는 고래를 두려워하는 짐승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고래가 포뢰를 치면 포뢰가 크게 운다고 여겨서 포뢰의 모양을 종 위에 만들어 놓고 고래 모양의 당목(撞木)을 만들어 종을 쳤다고 한다.
註 259
부처·보살의 맑고 깨끗한 음성 또는 경 읽는 소리를 의미한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불보살상·불사리
색인어
이름 : 대종황제
국명 : 당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四佛山 掘佛山 萬佛山) >경덕왕이 당 대종에게 만불산을 헌상하니 그 기교에 매우 감탄하다
경덕왕이 당 대종에게 만불산을 헌상하니 그 기교에 매우 감탄하다
그것이 완성되자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헌상하니 대종은 이것을 보고 감탄하면서 말하길 “신라의 기교는 하늘의 조화이지 사람의 재주가 아니다.”하였다. 곧 구광선(九光扇)註 260260 구광은 다양한 색깔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광선(九光扇)은 다양한 색깔로 이루어진 부채라고 추측된다.닫기을 바위 산봉우리 사이에 더하여 두고는 그로 인하여 불광(佛光)이라고 하였다. 4월 8일에는 양가(兩街)註 261261 승록사(僧錄司)의 좌가(左街)·우가(右街)를 가리킨다. 승록사는 불교 관련의 사무와 그 처리를 담당하였다.닫기의 승도(僧徒)에게 명하여 내도량(內道場)에서 만불산에 예배하게 하고 삼장註 262262 경(經)·율(律)·장(藏)의 불교 전적에 정통한 스님을 가리키는 말이다.닫기 불공註 263263 불공금강(不空金剛)이라고도 한다. 인도 사자국 사람으로 스승인 금강지(金剛智)를 따라 720년 중국에 들어와 역경(譯經)에 종사하였고 밀교(密敎)를 전파하였다.닫기(三藏不空)에게 명하여 밀부(密部)의 진전(眞詮)을 천번이나 외워서 이를 경축하니 보는 자가 모두 그 기교에 감탄하였다.
註 260
구광은 다양한 색깔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광선(九光扇)은 다양한 색깔로 이루어진 부채라고 추측된다.
註 261
승록사(僧錄司)의 좌가(左街)·우가(右街)를 가리킨다. 승록사는 불교 관련의 사무와 그 처리를 담당하였다.
註 262
경(經)·율(律)·장(藏)의 불교 전적에 정통한 스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註 263
불공금강(不空金剛)이라고도 한다. 인도 사자국 사람으로 스승인 금강지(金剛智)를 따라 720년 중국에 들어와 역경(譯經)에 종사하였고 밀교(密敎)를 전파하였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불보살상·불사리
색인어
이름 : 대종
지명 : 만불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