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날
아침 7시, 아내가 성환 전철역까지 데려다 주었다. 오늘 야탑역 차병원에 검사결과를 보러간다. 10시까지 야탑역 차병원에 가려면 서둘러야 한다. 지난 해 12월 27일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술 석 잔을 마시고 잠시 혼절했었다. 놀란 친구들이 119를 불러 건국대 병원까지 가서야 깨어났는데 그 일로 차병원의 신경과, 심장내과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느라 네 차례나 들락거렸고 오늘 마지막 결과를 보는 날이다. 나는 원래 술이 약해서 젊을 때도 술을 마시면 잠이 드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술을 잘 안 마시지만 그날은 기분이 좋아 소주 석 잔을 마시고 탈이 난 것이다. ‘빌어먹을, 어쩌다 재수 없이….’ 수원역에서 전철을 갈아타고 야탑역까지 가려면 2시간은 조히 걸린다. 늘 아내와 함께 다녔지만 따라다니며 고생하는 아내가 안쓰러워 오늘은 혼자 가기로 했다. 혈액검사 때문에 아침도 굶었다. 가능하면 일찍 검사를 받고 아침을 먹어야지.
이른 아침이어서 다행히 전철은 노인석 빈자리가 있어서 느긋하게 앉아 눈을 감았다. 졸리지는 않다. 이어폰을 끼고 방송을 듣는다. 옆자리의 늙은이가 다리를 쩍 벌리고 내 다리를 밀어댄다. 겨울철 두터운 덧옷을 입어 가뜩이나 좁은데 이놈의 영감은 멋대로 편히 자리를 잡더니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입을 헤 벌린 채 어느 새 잠이 든 눈치다. 내 쪽으로 그의 체중이 실린다. 정말 잠이 들었나? 짜증스럽게 어께로 밀어보지만 잠시 뿐, 다시 내게로 기대온다. 아휴, 밉살스러운 늙은이. 그 늙은이에게 신경이 쓰여 눈을 감고 앉아 있어도 느긋하지 않다.
드디어 수원역에 내려 그 밉살맞은 늙은이에게서 벗어났다. 그놈의 늙은이 조느라 내릴 역을 지나치면 쌤통이겠다. 출근하느라 바쁜 젊은이들 틈에 끼어 분당선으로 갈아탄다. 바쁘게 걸어가는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기분이 좋아진다. 긴머리를 흔들며 춤추듯 사뿐 사뿐 걸어가는 싱싱한 젊은 여자들의 싱그러운 풋내가 풍기는 듯하다. 겨울철 두터운 옷도 녀석들의 예쁜 몸매를 완전히 가리지는 못한다. 출근길의 복잡한 전철에도 다행히 노인석 빈자리가 있어 앉을 수 있었다. 휴, 다행이다. 밉살맞은 늙은이도 없다. 느긋하게 이어폰을 꽂고 눈을 감았다. 늙어서 좋은 점도 있구나!
9시, 야탑역에 도착했다. 1시간 반을 전철에서 시달리니 비록 앉아서 왔지만 허리가 아프다. 혈액검사 예정은 10시지만 도착하는 순서대로 별 제한 없이 검사를 받는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말라 한시가 급하다. 잽싸게 번호표를 뽑고 검사를 받았다. 아, 이젠 물로 마실 수 있고 밥도 먹을 수 있다. 길 건너 맞은편 식당에서 선지해장국을 먹었다. 시장이 찬이라더니 정말 꿀맛이다. 신경과 진료예약시간이 11사 20분이니 거의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한다. 커피집으로 들어간다. 한산하다. 맞은편에 통통하고 복스러운 처녀가 노트북을 펼쳐놓고 무언가 열심히 들여다본다. 녀석은 내가 맞은편에서 저를 훔쳐보는 줄도 모르고 노트북만 열심히 들여다본다. 나는 소파에 기대앉아 여유롭게 녀석을 감상한다. 통통한 볼, 터틀넥 스웨터의 봉긋한 가슴이 탐스럽다. 녀석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도 아니다. 턱을 괴고 소파에 기대 반쯤 누운 자세로 열심히 노트북을 들여다본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으려니 무료하다. 잠시 밖에 나가 담배 한 대를 피운다.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도 녀석은 여전히 혼자 노트북을 보고 있다. 저 아이는 누굴 기다리는 눈치도 아닌데 왜 혼자 커피집에 저렇게 퍼질러 앉아있을까?
11시, 병원으로 돌아가 4층 신경과에 접수했다. 환자가 많아서 20분이나 진료가 늦어진단다. 차병원 병리실에 근무하는 조카딸 선주가 찾아왔다. 녀석도 이미 50대 후반이다. 싹싹하고 착한 선주에게 이 병원에 올 때마다 신세를 진다. 녀석 덕분인지 간호사들도 아주 친절하다. ‘이러니 병원에도 빽이 있어야 하는구나.’ 드디어 차례가 되어 신경과 의사를 만났다. 별 이상 없단다. ‘글쎄 그렇다니까. 공연히 검사를 받느라 힘들게 병원에 드나들고, 돈 버리고, 조카띨 신세만 졌지 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지으며 병원을 나서는데 선주는 심장내과의 또 다른 검사를 마저 받아야 안심할 수 있다며 한 번 더 병원에 오란다. ‘아이고, 아는 게 병이라고 녀석 때문에 한 걱정 더하게 되었구나.’ 그렇지 않아도 신경과에서 예방약이라며 처방해준 4개월치 약이 한 보따리나 되는데 이건 혹 떼려다 붙인 격이 아닌가. 에라, 그래도 날 위해서 하는 소린데 ‘알았다.’고 녀석을 토닥여주고 병원을 떠났다. 덕분에 매일 먹는 혈압약에 한 가지 약을 더 먹게 되었다. 조카딸 말대로 다시 심장내과 검사를 받으면 또 다른 약을 주는 건 아닐까? 에구, 늙기도 힘들구나.
그래도 기분이 좋다. 당장 죽을 병은 아니라니 다행이다. 이제 또 전철을 타고 지루한 여행을 하겠구나. 또 젊고 예쁜 여자애를 만나면 더 즐거울 텐데…. 아마 틀림없이 만날 거야. 2023. 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