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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5:1-11 부활의 권리 4
조선조 중엽 율곡 이이는 왜구의 침략을 대비해 10만 명의 군사를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선조임금과 대신들은 '무사한 때에 군사를 기르는 것은 곧 화를 기르는 것과 같다'며 반대했습니다.
결국 10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선은 7년 동안 일본군에 의해 전국토가 유린되고 맙니다.
율곡의 10만 양병설이 아니었어도 전쟁 발발 2 년 전에 선조는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어 정탐하게 했습니다.
통신사였던 황윤길은‘히데요시의 눈에 광채가 있고 담력과 지략이 있어 보여 큰일을 도모할 것’으로 보고 했습니다. 반면에 부사였던 김성일은‘히데요시는 쥐새끼처럼 용렬한 인간이어서 큰일을 꾸밀 위인이 못되는 것’으로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귀국하면서 갖고 온 히데요시의 친서에는“명나라를 칠테니 길을 빌려달라”는 조선침략의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히데요시를 쥐새끼로 취급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일본이 당시 최신식 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할 때 조선 병력은 고작 7000명에 불과했습니다. 냉철하게 주변국들을 바라보는 시각만 있었더라면 충분이 막을 수 있는 역사의 비극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360년이 지난 1950년도 초 남한의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우리가 김일성보다 우세하다, 전쟁이 일어나면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말했고 이승만 대통령이나 국민은 이 말을 철썩 같이 믿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소련째 탱크를 앞세우고 쳐내려오자 삼일 만에 서울이 넘어가며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가고 맙니다
재산의 손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전사자, 아사자, 병사자를 합쳐 전 국민의 80%가 임진왜란과 6.25전쟁 통에 비극을 당했습니다.
시대적인 안목을 겸비하지 못한 지도자의 무능 그것은 곧 시대의 비극으로 이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19세기의 화가 밀레의 그림 ‘만종’이 명작일 수 있는 이유는 여백에 있습니다.
하루의 해가 넘어가는 들판에서 농부와 그 아내가 손을 모으고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그 부부의 발 밑에는 캐다만 감자와 쇠스랑과 소쿠리가 보이고 멀리로는 마을의 교회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관객은 그 그림을 보면서 세부적인 내용보다 여백에서 풍겨 나오는 차분함과 따뜻함을 느낍니다. 산업혁명으로 잃어가는 농촌의 전통과 가치, 소작농의 비애라는 여백이 바로 밀레의 만종을 명작 되게 한 것입니다.
인생이란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라고 할 만큼 살아있는 사람들은 수많은 것을 선택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삶의 연륜이 깊어지고 직급이 높아질수록 더 중요한 것을 결정하게 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 때 인생의 중요한 여백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에 따라 선택과 결정의 따른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금주 화요일에 목회자 수양회 장소인 새만금 방조제를 거쳐 여수를 답사하고 왔습니다.
아침 7시에 출발하여 저녁 12시에 도착한 힘든 일정이었습니다. 당초 세웠던 1박 2일의 답사 과정을 하루에 마쳤습니다.
급하게 답사 일정을 줄인 이유는 목양의 시간과 답사 경비를 조금이라도 아끼려는 목사님들의 선한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짧은 시간 있었지만 답사과정은 엄정했습니다.
이동간의 거리와 시간을 꼼꼼히 체크하고 음식은 직접 먹어보고 관광지는 눈으로 확인하고 산책코스는 직접 걸어보았습니다.
숙소의 침대는 누워보고 수도꼭지는 틀어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가격을 잘 조정해야 했습니다.
혹시라도 보지 못한 여백이 있을지 몰라 이동 중에 서로 대화하며 서기 목사님은 계속해서 기록해 나아갔습니다.
그날 목사님 네 명이 현지를 살피며 선택하고 결정한 것은 목회자 수양회 때 그대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좋은 결과로 나타나기를 바라지만 혹시 보지 못한 여백이 있어서 반대의 결과가 나올까봐 걱정입니다. 그 날 답사 중에 노회 내 목사님의 장모님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되어 다음날 서울 빈소로 위문을 갔습니다.
사모님의 어머니께서 70세의 일기로 새벽 예배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셔서 심장마비로 돌연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가족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그러나 빈소는 어둡지도 침울하지도 않았습니다.
위족들은 물론 위문 객들까지 한결같이 밝은 표정이었습니다. 이유는 고인 되신 권사님의 평소 삶에 있었습니다.
후덕한 인품으로 많은 사람에게 헌신했던 그 분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에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큰 지도자는 아니었어도 한 가정의 어머니요, 교회의 권사로서 여백을 아름답게 채웠기에 그 분의 갑작스런 죽음에도 서운함과 아쉬움은 있지만 유족들은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으며 소망 중에 위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분의 삶의 여백 하나하나는 아름다운 영상이 되어 자녀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스며 죽음의 빈소조차 밝게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데로 거둔다고 하나님은 인생을 향해 엄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삶의 여백에 아름다운 밑그림을 그린다면 아름다운 그림이 완성되지만 쾌락과 탐욕을 스케치한다면 비극의 그림으로 채워집니다.
아름다운 여백을 채워가는 축복의 삶,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진실한 믿음 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인생에게 내려진 축복은 인생을 보석처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석이 된 것이 아니라 보석이 될 권리를 부여 받은 데에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화선지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능력과 실력을 공급해 주시기로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완성된 믿음이나 인격이나 삶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깨끗한 양심과 선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여백을 채우려 하는 자를 하나님은 아름답게 완성시켜 주십니다.
서울 빈소에서 후덕했던 권사님의 아름다운 여백에 대해 듣던 중 또 다른 부고 소식을 접했습니다. 카센터와 세차장을 겸하는 사업장을 두고 경제적인 부유를 즐기며 딸과 아들을 둔 가장입니다.
50 줄에 접어들기까지 술을 즐기고, 평소 좋아하는 잡기인 노름으로 밤을 새우며 놀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매춘여성과 밤을 지냅니다. 그분의 삶의 여백은 쾌락과 정욕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는 이 같은 추잡한 삶을 자랑스러운 듯 떠벌리기까지 합니다.
그의 생활이 이렇게 추잡하다면 그의 가정에서의 여백은 보나 마나입니다. 아내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할 것이요 자녀들에게는 용돈만 듬뿍 안겨주는 아버지일 것입니다.
그의 삶은 매 순간순간이 잘못된 선택과 불행한 결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백에 밑그림이 잘못되었습니다. 그날 삼성전자에 다니는 그의 21살 된 딸이 목을 메어 죽은 것입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슬픔을 견디지 못한 채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한 것을 급히 병원으로 옮겨 살려놨습니다. 그랬더니 가족들 눈을 피해 병원을 몰래 빠져나와 다시 집에서 목을 맨 것입니다.
가장 빛나는 때를 살아가야 할 딸이, 삶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살아야 딸이 싸늘한 시체가 되었습니다.
왜 이런 비극이 발생했을까요? 일차적인 원인은 그 딸의 무책임한 행동에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삶의 여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죄는 근원이 있고 뿌리를 내리며 가지를 칩니다. 아버지의 추잡한 삶의 여백은 고스란히 딸의 인생관으로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인생을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지 아버지의 삶의 여백에서는 눈을 씻어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을 넘으며 찬란하게 청년기를 살아야 할 가치는 아버지에게서 결코 배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이나 딸의 마음속에 길과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리 잡을 여백은 없었습니다. 그의 가정 어디에도 인생을 아름답게 해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리 잡을 여백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평택에서 가장 큰 교회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는 그의 사업장에는 목사님과 성도들이 차량 수리차 방문합니다.
매 주일 수천명이 예배당을 드나드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도 그는 심각하게 예수믿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여백을 보지 못한 그의 실수는 임진왜란 때나 한국 전쟁 때의 무능한 지도자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과 잇다을 수 있는 여백을 보지 못한 채 정욕으로 눈먼 삶을 살았습니다.
그 딸 또한 생명과 소망의 여백을 보지 못함은 똑 같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젊음, 그것은 인생 최고의 축복입니다. 돈이 없어도 젊다는 것은 억만금 보다 귀한 것입니다.
젊음의 가치는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합니다. 못 넘을 고개가 없고 헤쳐나가지 못할 난관도 없습니다. 왜냐면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젊음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요. 젊음의 절망은 소망의 출발일 뿐입니다. 산이 높아 아름답기보다 수목이 무성하기에 아름답습니다. 들은 넓기에 귀한 것보다 곡식이 우거져기에 귀합니다.
꽃이 아름다우려면 향기와 꿀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인생이 아름다우려면 살아 있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산소 호흡기 끼고 겨우 숨만 쉬는 것으로 아름답지 않습니다. 남을 헤치며 사기 치는 사람의 생도 결코 아름답지 않습니다.
환란과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 아름다우며 사랑과 봉사와 희생의 삶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청년의 삶 이상의 보석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권리와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3절과 4절을 보시면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살아 나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우리 모든 죄와 저주와 허물을 없에기 위한 죽음입니다.
누굴 대신하거나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죽은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법을 지키려고 의롭게 죽었습니다. 기생 논개는 적장을 안고 초개와 죽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나라를 위해 죽은 이름 없는 수많은 죽음들도 있습니다.
고귀한 죽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렇듯 죽음의 가치만을 놓고 보면 숭고한 죽음들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죽음은 부활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값있게는 죽었지만 아무도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만이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가 다 갚아졌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도 다시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죄를 99%가 아니라 100% 용서했으니까 살아나신 것입니다.
사망의 괴물은 더 이상 믿는 자에게 죽음과 저주를 가져다주고 빼앗고 도적질 할 권리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사탄에게 빚이 없고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불행하게 될 이유가 전혀 업습니다.
더 이상 죄와 불행과 마귀에 대해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확실한 보증서가 주님의 부활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두어 명이 확인 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으로 부터 승천하시기 전까지 500여명이나 확인했습니다.
결국 만삭되지 못하고 태어난 자 같은 바울까지도 확인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이름으로 저주를 쫒아내고 가난을 부유함으로, 질병고통을 건강과 형통으로 바꿀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부활의 권리로 보호받기 때문에 하는 일들이 헛되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형통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권리 속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는 모두 응답을 받습니다. 멋지게 살 수 있습니다. - 할렐루야
10절을 보세요 바울은 자신이 사도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세움을 세웠으며 가롯 유다의 궐을 채울 때에는 부활의 증인으로 맛디아를 세웁니다.
갈릴리오신 예수님의 제자이거나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라는 제한안에서 초대교회는 사도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고 더더욱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가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고 잡아들이는 앞잡이였습니다.
그의 삶에는 사도가 될 어떤 여백도 없었습니다. 바울 자신도 9절에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사도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에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찾아 오셨을 때 그 날부터 그의 삶은 아름다운 여백으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에 없어서는 안 될 보석이 되었습니다. 최초의 선교사였으며 많은 성경을 기록하며 초대교회를 수놓았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은 사역과 비전을 성취했습니다. 이 같은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
바로 부활의 권리에서 나왔다고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절을 보시면 바울이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미 바울이 전한 복음의 터전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에 복음을 다시 알게 한다 말합니다.
왜 그들이 다시 알아야 합니까 ? 이유는 복음을 받았으나 그 복음을 자꾸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그 복음 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2절을 다 같이 봅시다.
그 말씀을 굳게 지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헛되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역사가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혜를 많이 받은 교회입니다. 은사도 충만합니다. 그런데 싸움도 많고 죄가 넘쳐납니다.
결국 바울의 사도권까지 의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빛의 역사보다 어둠의 역사가 더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중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문제에 대한 처방으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삶이 위태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처방은 주님의 부활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망각하고 있었던 부활의 권리, 믿는 사람을 반드시 축복하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보증 수표를 꺼내 드는 것입니다.
크리스찬에게는 세상이 알 수 없는 여백이 있습니다. 환란을 당하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여백이 있습니다.
중병에 걸려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여백이 있습니다. 심지어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는 여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더 많이 기도하며 더 굿굿하게 삶을 헤처나갈 수 있습니다.
결국 성공하게 되어 있고 더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부활의 권리로 보호되기 때문입니다.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아름다운 삶의 여백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성도는 결코 썩은 인생이나 부끄러운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었어도 썩지 않을 것으로, 욕된 것으로 심었어도 영광스럽게 다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인생은 영원에 잇닿아 있으며 우리의 삶은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영상으로, 또한 축복으로 물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우리의 인생이 끝나면 우리의 자녀들과 성도들은 이렇게 찬송할 것입니다.
“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고 밝고 밝은 그 아침을 당할 때 요단강을 건너가서 주의 손을 붙잡고 기쁨으로 주의 얼굴 뵈오리 나의 주를 나의 주를 내가 그의 곁에 서서 뵈오며 나의 주를 나의 주를 손에 못 자국을 보아 알겠네
우리가 이 세상 떠날 때에 예수의 손목을 굳게 잡고 영원히 즐거운 천국에서 주함께 살겠네. 찬송하세 찬송하세 주님 나를 구하셨네 찬송하세 찬송하세 주가 구원하셨네
주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죄의 채무를 다 갚으셨습니다. 추잡하게 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 부활의 권리속에 삶에 아름다운 여백을 채워 가시는 보석 같은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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