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니브룩대 한국학과 설립위원·후원회장 역임
호기심에 시작한 컴퓨터 애호가 수준 넘어
무료 컴퓨터 클래스 두 곳 강사로 봉사활동
한국정부가 대미 수출 드라이브에 시동을 걸던 60년대말 샘플 가방 하나 들고 뉴욕에 떨어졌던 30대 초반의 주재원은 그간 힘들고 고된 여정 끝에 이곳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하고 흩날리는 백발의 모습으로 은퇴 길에 들어섰다.
무역으로 잔뼈가 굵은 그는 브로드웨이 한인상가의 주역들을 배후에서 자문했던 대부로서 리버티은행 이사장 스토니브룩대 한국학과 후원회장을 역임하는 등 커뮤니티 참여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한때 도미니카에 대형 봉제공장을 설립·운영하면서 80년대 초 적기에 부동산에 손을 댄 것이 주효해 그의 후반기 인생을 넉넉하게 장식해 주고 있다.
만난 사람=조종무 편집고문
최수용(78)의 하루 일과는 이른 새벽시간 컴퓨터를 켜면서 시작된다. 컴퓨터를 벗삼아 지낸지 10년 남짓. 그간 꼼꼼히 배운 실력으로 동영상을 이용해 작품 서너개 만들어 웹사이트에 올리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보내기도 한다.
전에는 막연하거나 얄팍하게 알던 지식을 컴퓨터를 통해 정확히 그리고 해박하게 알게되는 장점도 있어 좋다. 뒤늦게 그걸 알아서 어디에 쓸 것인가 묻는 사람이 있겠지만 매주 그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잡아 100명은 된다.
애호가 수준은 이미 넘어섰고 전문가 수준의 반 정도 실력을 갖춘 그가 무료로 가르치는 컴퓨터 클래스가 두 군데나 된다.
그가 다니는 그레잇넥 성당 클래스는 주일 오전 미사가 끝나고 오전 10시부터 시작해 낮 12시까지 2시간 동안 열리는데 기초부터 시작한 이 강의는 4년 반 만에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올라가 있다.
또 뉴욕지구 서울대 동창회 노장파들의 모임인 골든클럽 클래스는 화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2시까지 2시간 계속된다.
플러싱 162스트릿 선교사의 집을 빌려 사용하고 있는 이 강의에는 20여명이 랩톱을 들고 참가해 시간이 끝나도 가지 않고 좀더 배우려고 미적거리는 열성파들로 북적인다. 침착하고도 사색적인 그의 성격에 딱 어울리는 노년의 봉사다.
"2003년 호기심에서 컴퓨터를 하게 됐습니다. 우연히 좋은 선생을 만나 재미를 붙이게 됐지요. 무료 클래스의 내용은 컴퓨터에서 기초적인 계산을 하고 글씨 쓰고 저장하고 재미있게 작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동영상을 가지고 음악도 집어넣고 사진도 집어넣고 그림이 들어가면서 포토숍을 많이 활용하지요. 지루하지도 않고 좋아들 합니다. 사진을 직접 찍어 거기에 음악과 글씨도 넣고 손질을 해서 친구한테 보내준다던가 크리스마스 때는 카드를 직접 만들기도 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격언이 있다시피 살아 움직이는 인터넷 세계에 들어와 활발하고 보람있는 자신의 세계를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그의 치밀하고도 조직적인 두뇌는 40여년전 뉴욕에서 제대로 발휘됐다. 1960년 서울 상대 경제학과를 졸업 수출입 회사의 실무.중견 직원을 거쳐 69년 주재원으로 뉴욕에 상륙했을 때 미국에 수출된 각 회사의 수출품에 문제가 많이 생겼다.
초기에 있었던 부조리지만 악덕 수입업자들이 신용장에 함정을 만들어 놓고 상품이 도착할 때 클레임을 걸어 대금 지불을 거절하거나 단가를 깎는 등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경험을 통해 그런 케이스의 해결방법을 터득한 그는 문제 상품들을 지혜롭게 처리해 수출회사도 구하고 자칫 되돌아갈 뻔한 상품도 현지에서 적절한 판매처를 구해줬다.
74년 뉴욕에서 클레임에 걸린 S사의 인조가죽 가방을 김혁규.최희용에게 판매 의뢰한 것이 히트를 쳐 브로드웨이 한인상가의 효시가 되었던 것은 유명한 사건이었다. 그때 얻은 별명이 '유대인 킬러' '브로드웨이 대부'였다.
2년 후 독립하면서 로드웨이 엔터프라이즈를 설립한 그는 1225 브로드웨이 빌딩에 사무실을 차리고 19년간 남녀 의류 수입 및 실 수출로 연간 거래액 900만 달러라는 당시 신용조사기관 '던 앤드 브래드 스트릿'에 기록을 남겼다.
그의 은퇴 시기는 3년 전. 젊은 시절 투자했던 부동산으로부터 수입이 보장되니까 은퇴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때마침 친구처럼 정다운 소일거리 컴퓨터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부동산 투자는 1980년대 초에 이뤄졌다. 처음 퀸즈의 한 상가 건물을 76만 달러에 매입하면서 25만 달러를 다운페이 했다. 건물주 모기지 15년에 연 금리 8%로 단층에 8개 스토어가 모여있는 작은 규모의 상가였다.
공과금과 보험료를 잘 냈더니 신용이 쌓여 바로 앞에 있는 건물도 매입할 수 있었다. 임대 수입이 증가하는 한편 건물가는 20년 새 7~8배나 상승하는 등 당시 뉴욕의 부동산 과열현상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현명한 투자였다고 생각됐을 무렵 80년대 후반부터 유동자본을 확보한 한인들이 서서히 부동산 매입에 나서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몇 개의 부동산을 운영해 경험도 쌓이고 재미를 본다는 소문이 나자 빌딩을 매입한 친구와 동료들이 관리를 부탁해 와 자신이 소유한 건물 5채를 합쳐 총 13개 건물 세입자 120명 이상을 관리·운영하느라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세월을 보냈다. 어쨌든 부동산은 노후를 보장하는 효자 상품임에 틀림없었다.
1998년에는 뉴욕한인사회에서 엠파이어.BNB에 뒤이어 세 번째로 창립된 리버티은행의 이사장 직을 맡게 됐다. 자본금 865만 달러 주주 12명에 행장은 대학 동기인 우상영이 앉았다.
개점 2년만인 2000년에 플러싱 지점이 설립되고 자산이 7200만 달러로 예상보다 50% 초과 달성되는 발전을 이룬 가운데 8년만에 LA에서 창설된 윌셔은행과 합병하기에 이르렀다.
1983년부터 10년 가까이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한국학과 설립위원.후원회장으로 기부.모금 활동을 전개했으며 현재도 그는 스토니브룩대 총장 자문위원으로 있다.
지역 정치에도 참여 1989~94년까지 마리오 쿠오모 뉴욕주지사의 아시안 자문위원으로 유은희·홍성육 등과 동참했다. 1997년 대뉴욕지구 서울대 동창회장과 그레잇넥 한인천주교회 신자회장을 역임했다.
가족으로는 이화여대 출신으로 우석대 조교를 하다 결혼한 부인(김상림)과 슬하에 2녀1남을 두었다.
장녀(기원)는 다트머스대와 컬럼비아대 로스쿨을 나와서 현재 스타우드 그룹 중역으로 있으며 코넬대를 나와 스피치 테라피스트가 된 차녀(기인)는 가정주부다. NYU를 나온 아들(리처드)은 대형 로펌에서 파산 전문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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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New York Metro 원문보기 글쓴이: 최수용(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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