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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상대1.7동기회 원문보기 글쓴이: 海松
제55차 문화답사; 중앙박물관-澗松文華전
2016.06.14(화)景福34회 제55차 문화답사는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에서 미술사학자
崔淳雨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전시하고 있는 <최순우가 사랑한 전시품>을 관람하고
東大門디자인플라자(DDP)로 이동하여 <澗松文華전 6부 풍속인물화-일상, 꿈 그리고 풍류>를
관람하였다.
최순우가 사랑한 전시품
<최순우가 사랑한 전시품>은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알리며 박물관을 발전시키는데
평생을 바친 美術史學者 兮谷 崔淳雨(1916~1984)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프로그램으로
혜곡이 아끼고 좋아했던 작품을 그의 글과 함께 소개하여 우리 문화재에 대한 그의 생각과
애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상설전시관 9개실 곳곳에서 최순우가 발견했던 한국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우리문화의 멋과 향기를 새롭게 느낄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다.
*兮谷 崔淳雨(1916∼1984)
本貫 陽川, 1916년 경기 開城에서 崔鐘聲의 아들로 태어난 崔淳雨의 본명은 熙淳, 雅號는
兮谷으로 開城松都高普를 졸업하고 개성박물관에 근무하면서 館長인 又玄 高裕燮에게서
感化 받아 考古美術에 뜻을 두었다. (*兮: 어조사 혜)
8∙15광복 후 주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활동하면서 미술과장, 학예수석연구실장, 박물관장을
역임하며 국립중앙박물관을 확장∙발전시켰으며 考古美術學者∙미술평론가로서 현대미술에도
造詣가 깊었다.
주요 논문으로 檀園 金弘道 在世年代攷, 謙齋 鄭歚論, 한국의 佛畵, 蕙園 申潤福論 등이 있고,
저서에 <韓國美術史>,<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가 있다.
<최순우가 사랑한 전시품>이 주로 박물관 3층(불교조각-금속공예-청자-분청사기-백자실)에
있어 다른 작품사진도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文化財를 위주로 추가하였으며 사
진을 3회로 나누어 올린다.
2016. 06. 20 孤 山 朴 春 慶
제55차문화답사(3-1); 중앙박물관, 최순우가 사랑한 전시품-佛敎彫刻
(01) 국립중앙박물관 展示棟-거울못
(02) 국립중앙박물관 으뜸홀 천장
최순우가 사랑한 전시품
(05) 최순우가 사랑한 전시품
(06) 전시품 위치와 목록
(07) 金弘道 筆 書畵帖
(08) <午睡堂> -金弘道 筆 書帖-
崔淳雨는 이 서첩을 조사하여 檀園 金弘道의 生沒年을 새롭게 밝혔으며
<午睡堂>은 ‘낮잠 자는 방’이라는 뜻으로 김홍도의 堂號로 추정하고 있다.
최순우는 1976년 城北洞 韓屋으로 이사하면서 자신이 연구했던 김홍도 서첩의
<午睡堂>을 板刻하여 사랑방 현판으로 만들어 걸었는데
현재는 兮谷 崔淳雨 記念館(최순우 옛집)사랑방 뒷문 위에 걸려있다.
(09) <午睡堂> 현판-최순우 옛집 (*2011.08.13 사진)
(11) 긁는 개[黑狗圖] -英祖 때 畵員 南里 金斗樑(1696~1763) 작-
언덕에 누워 뒷발로 등을 긁고 있는 그림으로 개의 표정과 동작이 實感날 뿐만 아니라
털의 흐름을 한 올 한 올 그려내 生動感 넘치는 事實感을 보여준다.
(12) 빗접[梳函] (*梳: 얼레빗 소)
빗이나 머리단장에 사용하는 도구, 화장용품 등을 보관하는 함이다.
(13) 부처[鐵造 佛 坐像] -보물 제332호-
河南 下司倉洞 鐵造釋迦如來坐像[*문화재청 명칭]은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하사창리의 절터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鐵佛 坐像으로 당당한
어깨와 두드러진 가슴은 慶州 石窟庵 本尊佛의 양식을 이어 받은 것이며,
날카로운 얼굴 인상과 간결한 옷 주름의 표현은 고려초기 불상의 전형적인
표현 기법이다.
통일신라 佛像樣式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 초기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명칭]은 문화재청 홈페이지 ‘문화재검색’에 표기된 명칭이다.)
(14) 부처(鐵造 佛頭), 고려시대 10세기 작품
너그럽고도 앳된 얼굴의 싱싱하면서도 그윽한 미소 속에 스며진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참사랑의 간절한 뜻이 내 마음을 훈훈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최순우-
(15)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국보 제83호-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또 다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제78호)과 함께
국내에서는 가장 큰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높이 93.5㎝이다. 1920년대에 경주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하나 근거가 없으며, 머리에 3면이 둥근 산 모양의 冠을 쓰고 있어
‘三山半跏思惟像’으로도 불린다. (*跏: 책상다리 할 가)
잔잔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半跏像의 자비로움은 우수한 宗敎彫刻으로서의 崇高美를
더해주며, 국보 제78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보다 年代가 내려와
삼국시대 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6) 물가풍경무늬 정병[*靑銅 銀入絲 蒲柳水禽文 淨甁] -국보 제92호-
고려시대 대표적인 금속 공예품의 하나로 높이 37.5㎝의 淨甁이다.
어깨와 굽 위에 꽃무늬를 돌리고 그 사이에 갈대가 우거지고 수양버들이 늘어진
언덕이 있으며, 주위로 오리를 비롯하여 물새들이 헤엄치거나 날아오르는
서정적인 풍경을 묘사하였다. 먼 산에는 줄지어 철새가 날고 있고, 물 위에는
사공이 조각배를 젓고 있다. 이들은 모두 靑銅 바탕에 銀을 박아 장식한
銀入絲 技法을 썼으며, 銀象嵌무늬이다. (* 蒲: 부들 포)
현존하는 고려시대 여러 점의 은입사정병 중에서 잘 조화된 우아한 모습을 보여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17) 석류모양 주자(靑磁 石榴形 注子), 고려시대 12세기 작품
(18) 모란무늬 항아리[*靑磁 象嵌牡丹文 壺] -국보 제98호-
고려시대에 제작된 청자 항아리로 크기는 높이 20.1㎝, 아가리지름 20.7㎝,
밑지름 14.8㎝이다. 이 항아리는 꽃과 잎이 큼직하게 표현됨으로써 흑백의 대비가 강하여
시원한 느낌을 주며, 面象嵌技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상감기법의 높은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嵌: 산골짜기 감)
(19) 인삼잎 무늬 매병[*靑磁 鐵彩堆花蔘葉文 梅甁] -보물 제340호-
고려시대 매병으로 높이 27.5㎝, 입지름 5㎝, 밑지름 9.5㎝이다.
청자에 사용되는 바탕흙 위에 鐵砂顔料를 칠하고(鐵彩), 무늬 부분만 얇게
파낸 뒤 그 위에 흰색 粉粧土로 무늬를 그렸는데 이처럼 철채에 흰 그림을
그린 경우는 드물다.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鐵彩(쇳가루로 만든 칠)의 색과 풍만하고 아름다운
어깨와 몸통 부분에 흰색 蔘 잎을 단순하고 소박하게 그려, 對備와 調和를
잘 이루고 있다.
(20) 모란무늬 자라병[*粉靑沙器 剝地鐵彩牡丹文 扁甁] -국보 제260호-
조선시대의 분청사기 병으로 야외에서 술, 물을 담을 때 사용하던 용기이다. 자라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어 ‘자라병’이라고도 하며, 크기는 높이 9.4㎝, 지름 24.1㎝이다.
剝地技法과 검은 색 안료의 사용이 잘 조화되어 분청사기 특유의 대범하고 활달한 분위기가
잘 나타난 작품이다.
@剝地技法; 粉靑沙器의 胎土로 그릇을 빚은 다음, 그릇 전체에 白土로 粉粧을 하고
施文하고자 하는 문양을 그린 뒤, 문양 이외의 배경 부분의 백토를 긁어낸 뒤
그 위에 투명한 회청색의 釉藥을 발라 문양을 나타내는 방법.
(21) 모란무늬 편병(粉靑沙器 剝地 牡丹文 扁甁). 조선시대 15~16세기 작품(왼쪽)
*오른쪽은 연꽃무늬 편병/粉靑沙器 剝地 蓮花文 扁甁 이다.
(22) 연꽃 물고기무늬 병(粉靑沙器 剝地 蓮魚文 甁),
조선시대 15~16세기 작품.
(23) 매화 새 대나무무늬 항아리[*白磁 靑畵梅鳥竹文 有蓋壺] -국보 제170호-
높이 16.8㎝, 입지름 6.1㎝, 밑지름 8.8㎝의 뚜껑이 있는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로, 그림 속에
濃淡의 변화가 보이는 것이 전문 화가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보며, 이 항아리는 조선 초기의
고분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무렵 백자 항아리의 형태와 문양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壺: 병 호)
(24) 소나무 매화무늬 연적(白磁 靑畵 松梅文 硯滴), 조선 15~16세기 작품(왼쪽)
*가운데: 매화무늬 항아리, 오른쪽: 매화 대나무 무늬 항아리. 15~16세기 작
(25) 풀무늬 항아리(白磁 鐵畵 草文 壺), 조선 17세기 작품.
(26) 달항아리(白磁 壺), 조선 18세기 작품.
(27) 돌함과 뼈 단지[*綠釉骨壺(附 石製外函)]-국보 제125호- (*2015.11.04사진)
골호는 불교에서 屍身을 火葬한 뒤 遺骨을 매장하는데 사용되던 뼈 항아리로,
삼국시대 후기부터 고려시대까지 성행하였다.
뚜껑에 둥근 꼭지가 달리고 꽃잎모양으로 角이 진 화강암으로 된 外函 속에서 발견된
이 骨壺는 몸체와 뚜껑에 綠色 釉藥을 입힌 높이 16㎝, 입지름 15.3㎝으로 慶州에서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8~9세기의 뼈 항아리이다.
書畵와 佛敎彫刻品
(28) 상주 북장사 괘불[*北長寺 靈山會 掛佛幀] -보물 제1278호-
괘불은 절에서 큰 法會나 儀式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으로 이 그림은 괘불에서 많이 그려지는
靈山會上圖로 釋迦가 說法하는 장면을 나타낸 것이다. (*掛: 걸 괘)
肅宗 14년(1688) 승려 화가인 學能 등 7명이 그린 이 괘불은
길이 13.2m, 폭 8.07m이다.
傳說에 의하면 어느 날 당나라 승려가 찾아와 괘불을 그리겠다고 하면서
3일 동안 출입을 금하라고 했는데 한 승려가 궁금해서 엿보니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엿본 것을 알게 된 파랑새는
사라지고 가까이 가서 그림을 살펴보니 어깨부분이 미완성이었다고 한다.
*天柱山 北長寺
경북 尙州市 내서면 天柱山에 있는 大韓佛敎曹溪宗 제8교구 本寺 直指寺의
末寺로 신라 興德王 8년(833) 眞鑑國師 慧昭가 창건하였다.
(29) 경천사 십층석탑[*開城 敬天寺址 十層石塔] -국보 제86호-
고려시대 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절터에 세워져 있던 이 탑은
일제시대에 日本으로 무단 반출되었던 것을 되돌려 받아 1960년에
景福宮으로 옮겨 세웠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花崗巖인데 비해 大理石으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특이하며, 전체적인 균형과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태로 눈길을 끌며, 지붕돌의 처마가 木造建築의 구조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이러한 양식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국보 제2호)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30) 太子寺 郎空大師 碑
통일신라의 國師였던 朗空大師(832~916)의 행적을 기리는 비석으로
원래 이름은 ‘太子寺 朗空大師 白月栖雲塔碑’이다.
이 비석은 우리나라 서예 神品四賢 金生(711~791?)의 글씨를 集字해
만든 것으로, 김생의 글씨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한국 書藝史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31) 정조어필-제문상정사[*正祖御筆-題汶上精舍] -보물 제1632-2호-
正祖御筆-題汶上精舍는 1798년 9월 正祖가 靜窩 鄭民始(1745-1800)의
汶上精舍에 대하여 지은 御製御筆 七言詩이다. (*窩: 움집 와)
題 汶上精舍(제 문상정사)/문상정사에 제하다
城東十里好盤桓(성동십리호반환)/ 강동 십 리는 서성대기 좋으니
窈窕村容碧樹灣(요조촌용벽수만)/ 조용한 시골 모습 푸른 나무 물굽이
汶水知爲齊魯半(문수지위제노반)/汶水가 齊나라와 魯나라의 半임을 알겠으니
任他篁韻不須攀(임지황운불수반)/그대에게 황운을 맡겨두니 모쪼록 잡지는 말게나
戊午 菊秋(무오 국추)/무오년(1798) 국호꽃 피는 가을에
(*窈: 고요할 요 *窕: 으늑할 조 *篁: 대숲 황)
(32)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쓴 글씨(李昰應 筆 行書對聯)
興宣大院君 石坡 李昰應은 秋史 金正喜를 진심으로 追崇하여 그의
자신감 넘치는 筆致를 터득하였다.
我書意造本無法(아서의조본무법)/나는 마음대로 글씨를 쓰기에 본래 법도가 없지만
此老胸中亦有詩(차노흉중역유시)/이 늙은이의 가슴에도 역시 詩가 있다네.
大字 옆에 작은 글씨로 尹氏 姓을 가진 선비의 請으로 글씨를 쓰게 되었으며
이때 그의 나이는 62세였다고 적었다.
<山不在高 水不在深> <大院君章> <石坡>의 落款이 있다.
(33) 이광사가 쓴 육유의 시(李匡師 筆 陸游 詩)
李匡師가 南宋의 詩人 陸游(1125~1210)의 詩 山麓을 行書風으로
쓴 것으로 빠른 붓의 움직임과 筆劃의 힘을 느끼게 한다.
山麓(산록)/ 산 기슭
草合路如線(초합로여선)/풀들이 우거져 깊은 실처럼 좁은데
偶隨樵子行(우수초자행)/우연히 나무꾼을 따라 간다네
林間遇磐石(임간우반석)/숲에서 너럭바위를 만나
小憩間春耕(소게간춘경)/잠시 쉬면서 봄 농사 짓는 것을 구경한다오.
*圓嶠 李匡師(1705 ~1777)는 尹淳에게서 글씨를 배워 楷·草·篆·隸書에
모두 능하였고 圓嶠體라는 특유한 필체를 이룩하였으며, 鄭齊斗에게서
陽明學을 배워 아들 令翊에게 전수하는 한편 저술을 통해 후진들을 위한
귀중한 자료를 남겼으며 조선의 書藝中興에 크게 공헌하였다.
(34) 남구만 초상[*南九萬 肖像] -보물 제1484호-
南九萬(1629-1711)은 肅宗 初 大司成, 刑曹判書를 거치고 1683년
老少論이 나뉠 때 少論의 領袖가 된 인물이다.
화면의 우상단에 ‘領議政致仕藥泉南先生眞 文人領議政崔錫鼎贊’이라고
쓰여 있고 화면 좌상단에는 大司成 崔昌大가 쓴 긴 찬문이 쓰여 있다.
이 초상은 1711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35) 서원에서 즐기는 모임(西園雅集圖) -1778년경 檀園 金弘道 작-
원래의 서원아집도는 중국 北宋의 王詵이 首都 開封에 있던 자기 집 정원 西園에서 당시의
유명한 文人∙墨客들을 초청하여 베풀었던 雅會 장면을 담은 그림으로 왕선을 비롯하여 蘇軾 등
16인이 모여 시를 읊고 揮毫를 하고 玄琴을 타고 談論을 즐기거나 石壁에 題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에 많이 그려졌으며, 金弘道가 그린 <서원아집도>는
이 扇面畵 외에 6폭병풍과 8폭병풍 등이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36) 사랑채 앞에서
(37) 사랑방 내부 家具配置
(38) 부엌가구 소반
조선시대 가옥의 부엌은 안방과 떨어져 있어 음식을 장만하여 방으로 운반해야 되었다.
따라서 부엌가구는 음식을 만드는 饌房에서 쓰는 가구와 밥상으로 사용하면서 음식을
나르는 小盤으로 나뉜다.
찬방의 대표적인 가구는 그릇과 음식을 보관하는 饌欌과 饌卓이다.
소반은 儒敎의 영향으로 身分, 性, 地位가 다른 사람이 한 상에 모여 식사하지 않고
한 사람이 하나의 상을 사용하는 것이 慣習이었으므로 한 사람이 사용할 정도로
작은 소반을 마련하였다.
(39) 외다리 소반(一柱盤)
다리역할을 하는 기둥이 하나인 소반으로 一柱盤, 單脚盤이라고도 하며 盤面이 작고 기둥이
하나여서 무거운 食器를 올려놓는 밥상이 아닌 茶菓를 올려 놓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의 佛敎彫刻
우리나라의 佛像은 佛敎가 傳來된 4세기 후반에 소개되어 6세기부터 불상을 제작했으며 初期에는
中國佛像을 모방하였으나 점차 우리나라 특유의 造形感覺이 두드러진 불상을 만들게 되었다.
三國時代에는 高句麗 불상이 사실적인 人體表現보다 剛健한 氣像을 강조하였으며,
百濟는 精巧함과 洗練味가, 新羅 불상에는 素朴한 아름다움이 있다.
통일신라시대는 삼국의 불상을 하나로 아우르는 한편, 8세기에는 唐나라의 사실적인 조각양식을
받아들여 조화와 균형을 이룬 이상적인 불상을 만들었으며, 9세기부터는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
새로운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특히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유행하지 않던 降魔觸地印을 한
불상이나 智拳印을 한 毘盧遮那佛이 유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새 王朝의 활력을 반영한 거대한 불상과 지역별로 특색 있는 불상을 만들었으며,
고려 후기에는 元나라의 영향을 받은 불상을 만들기도 했다.
조선시대는 崇儒抑佛政策을 폈으나 초기에는 왕실이나 상류층에서도 불상제작을 후원하였으며
후기에는 여성과 地域民의 후원아래 전국각지에서 僧侶彫刻家들이 집단을 이루어 불상을
제작하였다.
(40) 佛敎彫刻室
불교조각실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대표적인 佛像과 菩薩像을 時代別, 主題別로
전시하였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쇠와 돌로 만든 대형불상, 국보로 지정된 半跏思惟像과 金銅으로
만든 작은 불상들을 통하여 우리나라 불교조각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41) 감산사 미륵보살-아미타불(甘山寺 石造 彌勒菩薩 立像-石造 阿彌陀佛 立像)
*慶州 甘山寺 石造彌勒菩薩立像 -국보 제81호- (왼쪽)
光背 뒷면에 신라 聖德王 18년(719)에 불상을 조각하였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으며,
돌로 만들었음에도 풍만한 신체를 사실적으로 능숙하게 표현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부터
새롭게 유행하는 국제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慶州 甘山寺 石造阿彌陀如來立像 -국보 제82호- (오른쪽)
통일신라시대의 이상적 寫實主義 양식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일 뿐만 아니라
光背 뒤의 기록으로 제작시기와 사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佛像으로 우리나라
佛敎 彫刻史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경주 甘山寺: 신라 聖德王 18년(719) 重阿飡 金志誠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 국왕과
왕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飡: 먹을 찬)
현재 절터는 田畓으로 변하여 감산사지삼층석탑(경북문화재자료 제95호) 1基와
작은 佛堂 2채만 남아있다고 한다.
(42) 부처(鐵造 佛 坐像)
충남 瑞山市 雲山面 普願寺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두 손이 모두 없어졌지만
오른손의 위치로 보아 손 갖춤은 釋迦牟尼가 보드(부다)가야의 菩提樹
아래에서 道를 깨닫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降魔觸地印으로 추정하고 있다.
몸에 비하여 큰 머리와 부자연스러운 옷 주름 등 高麗 鐵佛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43) 비로자나불(石造 毘盧遮那佛 坐像)
비로자나불은 온 누리에 가득 찬 眞理의 부처를 形象化한 부처이다.
우리나라의 비로자나불상은 8세기에 등장하여 9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中國이나 日本과는 다르게 寶冠을 쓰지 않은 모습이 특징이다.
手印은 智拳印을 하고 있으며 화려하고 生動感 넘치는 光背와 臺座는
통일신라 후반기 石佛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44) 약사불(石造 藥師佛 坐像)
慶州 南山 三陵谷 정상 가까이에 있는 磨崖大佛 건너편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으로 藥師佛은 疾病을 고쳐주고 災難에서 구해주며 음식과
옷을 주는 부처로 왼손에는 약단지를 들고 있다. 제작시기는 800년 전후로 보고 있다.
(45) 부처(木造 佛 坐像)
조선 후기에 널리 제작된 三方佛 중의 하나로 삼방불은 대개 가운데는 釋迦佛, 석가불의
왼쪽에 藥師佛, 오른쪽에 阿彌陀佛로 구성되며, 각기 中方, 東方, 西方을 관할하는 삼방불은
조선후기 사찰에서 大雄殿에 奉安되었으며 이 불상은 석가불의 오른쪽에 봉안된
西方 極樂淨土의 아미타불로 추정하고 있다.
(46) 비로자나불(鐵造 毘盧遮那佛 坐像)
端正한 얼굴, 安定感 있는 자세, 표면에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뛰어난
鑄造技術 등에서 통일신라 佛像의 전통이 엿보이나 形式化된 옷주름 등
細部 표현에서는 事實性이 떨어지는 고려 鐵佛의 특징도 나타나고 있어
통일신라 말-고려 초기에 제작된 불상으로 보고 있다.
(47) 부처(鐵造 佛頭), 고려 10세기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