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로 박혀
김 상 립
여름철이 돌아오면 가끔 격동의 강을 건넜던 먼 옛날 학창시절이 생각난다.
대학 3학년때, 나는
이유 있는 꿈을 가지고 K대학교 총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를 했고, 주변의
도움으로 무사히 당선되었다. 그러나 계절이 여름으로 접어들기 시작하자 한일회담 반대데모가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들 불처럼 번져나갔다. 이 운동은 주로 대학이 중심이 되어 맹렬하게 들끓기 시작했으니, 자연 나는 그 중심에 서게 되었다. 처음 우리는 학교에서 단식운동을
벌였고, 명동거리에 나가 기습시위도 하며 차차 범위를 넓혀갔다. 그러나
각 대학이 개별적으로 데모를 벌이다 보니 힘이 약해 번번히 밀리고 말았다.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여긴 학생대표들은 전체 대학이 한꺼번에 힘을 합치자 하여, 신촌에 있는 Y대학 해부학 교실에서 회합을 가졌다. 한참 회의를 진행 중인데, 빨리 몸을 피하라는 화급한 연통이 왔다. 우리는 재빨리 뒷문으로 빠져 나와 각자 흩어졌다. 나도 골목길을
따라 빠르게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계속 뒤따라온다. 돌아보니
모 여자대학교 J회장이었다. “김회장 뒷모습보고 무조건 따라왔어요” 한다. “어서 피합시다. 잡히면
다음 계획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눈 앞에 제법 번듯한 2층
여관이 보인다. 둘은 연인처럼 손을 꼭 잡고 문을 밀쳤다.
은발의 아주머니가 나와 우리를 살피더니, 2층끝방을 주며
조용히 하고 절대로 밖으로 나오지 말란다. 학교부근이라 눈치로 벌써 상황을 알아챈 거 같았다. 얼마 후 호루라기소리, 발자국소리가 시끄러웠고, 우리가 묵은 여관에도 경찰이 왔다. 주인이 뭐라 했는지 1층만 검문을 하고 돌아간다. 비로소 우리는 길게 숨을 내쉬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둘은 학생운동의 현주소, 효율적인 활동방안, 조직강화 등을 토론하다가 희붐한 새벽에 탈출했다. 한 길로 나와서야
둘은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금새 여름 방학이 왔다. 나는 고향에도 가지 못하고 개학과
동시에 강행해야 할 데모와 관련하여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다. 간간이 J가 보고 싶었지만 그때는 고정된 연락처가 없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오후, 기숙사에서 쉬고 있는데 놀랍게도 J회장이 먼 길을
찾아왔다. 나는 J를 금여(禁女) 구역인 기숙사방으로 몰래 데려와 차도 마시고, 라면도 끓여 먹으며
놀다가, 밤이 되자 비를 맞으며 호숫가를 산책했다. 우리는
인생과 사랑을, 앞날의 꿈과 희망, 그리고 종교와 예술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짧은 여름 밤은 금새 가버렸다. 그 후 몇 번의 조심스럽기만 한 데이트가 이어졌다.
한편 학생회장들은 실패한 전 모임을 참고로, 다시 데모준비를
서둘렀다. 날자 와 장소를 잡고, 각자에게 임무를 배분하고
굳은 약속까지 교환했다.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부모님 생각이 난다. ‘이번 일에서 적어도 책임자들은 감옥 가는 일을 피할 수가 없겠구나.’여긴
나는 서둘러 고향으로 향했다. 노부모님은 연락도 없이 웬일이냐고 깜짝 놀라셨다. 지나다가 들린 거라고 말하고는, 큰 절을 올렸다. 아마 두 분은 내가 왜 그러는지 짐작 했겠지만 아무 말 없었다. 나도
입 꾹 닫고 어머니 옆에서 잠을 청했고, 다음날 일찍 서울로 향했다.
나는 내 신변을 감추어야 했기에 고성을 거쳐 진주 쪽으로 빠져나가는
코스를 택했다.
아뿔싸! 내가 탄 버스가 고성 하일면에서 급 커버를 돌다가
언덕길 아래로 추락하였다. 사람이 7명이나 죽은 큰 사고였고, 나는 통영 적십자병원으로 실려가 수술을 받았다. 내가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는 한 밤중이었다. 고통을 견디며 아침을 기다렸다. 돌연
사복경찰 두 명이 들어왔다. 나는 “학교에 꼭 연락해야 하니, 전화 좀 쓰게 해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우리는 상부의 지시로 당신을 학생데모가 잠잠해질 때까지 24시간
감시해야 하니, 양해 하시오.” 하고 나가버린다. 쪽지라도 적어서 서울에 알려야 하는데, 내가 선택할 방법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약속한 데모 날자는 지나고, 그 뒤 소식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병원에 앓아 누운 내 신세는 감옥생활이나 다름없었다. 데모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아마 학생들은 나를 보고 비겁하게 도망갔다고
거센 비난을 퍼부었겠지? 그런 나를 옹호하기 위해서라도 J회장은
더 격렬하게 나섰을 것이고. 만약 나 대신에 잡혀가 감옥살이라도 하게 되면, 그 빚을 어찌 갚을까? 마음이 점점 불안해 진다.
입원한지 석 달이 지나 퇴원을 하고, 아직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학교에 갔다. 학생회에 서 그날의 얘기를 물으니 상세한 얘기를 피하고 모두 건성으로 답한다. 나의 불참으로 인하여 간부들의 처신이 몹시 난처했으리라 짐작되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J회장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여기저기
더 알아보려다가, 만약 도피생활을 하고 있다면, 괜히 들쑤셔
곤란한 지경을 만들까 봐 소식 올 때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공백이란 게 참 무섭다. 함께 학생 운동하던 사람들도
연락이 닫지 않고, 내가 겪은 사고라도 알려야 하는데 그럴 기회마저 잡을 수 없었다. 정치에 대한 꿈도 한 순간의 사고로 만신창의가 되었으니, 아예 그쪽은
쳐다보기도 싫어졌다. 내가 마음 먹고 갈려는 길을, 운명이
막아선 것 같아 억울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우울증에 빠져 술을 찾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어영부영 하다가 졸업을 맞았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마음도 추스르지도 못한 채, 사회라는 무대 위에 그냥 내팽개쳐졌다.
그리고 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때 난 보건사회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수위실에서 옆
다방에서 손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연락을 주었다. 나가보니 다방 한 쪽 구석에 J가와 있었다. 얼굴을 보니 이미 많이 울었던지 눈도 부었고 뺨에는
검은 눈물을 닦은 흔적도 남았다. 나는 무슨 말을 꺼낼 수가 없어 한참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던 그녀가 씩 웃는다. 드디어 입을 연다. 며칠 전 우연히 나와 친한 대학동창생을 만났는데 억지로 붙들고 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단다. 그래서 저간의 사정을 처음으로 상세하게 알게 되었다 했다. 그 동안
나를 오해하고 잊기 위해 일부러 애쓴 일들이, 한꺼번에 그리움으로 바뀌어 졌는지 몇 날 며칠을 불면의
밤을 보냈다 했다.
그날 엄청난 숫자의 학생들은 모였고, 대회를 시작해야
하는데 개회사를 맡은 김회장은 오지 않고, 머리 속이 하얘지더란 다.
에라 모르겠다. 나중에 따지고 내가 나서야겠다 하고는 앞장서서 데모 대를 이끌었단다. 그녀는 체포되어 일사천리로 재판은 진행되고 실형을 받았는데, 그런
상황이 비밀리에 진행되었는지, 외부와는 연락이 전혀 닿지 안 더란다.
다행이랄까 학생회와 관계도 없는 어떤 학생이 불쑥 나타나 자기 옥바라지를 하며, 필요한
잔 심부름을 다 해주었다 했다. 6개월쯤 형을 살고 석방되던 날도 그 사람이 다가와 다정하게 어깨를
짚는데, 순간 그의 손에 내 삶을 맡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결혼을 했고, 지금 여자애도 하나 있다 했다.
자기는 그의 손을 운명의 손으로 받아들였는데, 내 소식을
듣고 나니, 믿고 좀 더 신중히 사안을 판단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일어나 많이 괴로웠단다. 그녀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우리가
겪었던 사건은 끔직한 일이었고, 요행이 오늘 만나 그 동안의 오해를 풀어서 너무 좋아요, 또 내 속 마음을 다 털어놓고 나니 왠지 앞으로 잘 살아질 것 같아요.” 잠시
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길고 긴 악수를 나누었다. 그날따라 J의 손이 참 따뜻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3시간이 지나있었다.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격동의
시기를 견딘 학창시절의 추억도 이젠 거의 다 씻기고 삭아서 희미해졌다. 그러나 교통사고로 얻은 후유증은
아직도 나를 괴롭히고, J에 얽힌 사연은 가시로 내게 박혀있다. 아프고
서글퍼서 잊고 싶은 이런 기억이 끝까지 살아남아 오히려 내 노후를 버텨준다. 인생이란 진정 놀라운 여정이다.
첫댓글 선생님.
가슴이 먹먹합니다.
저는 선생님도 이해하고,
J회장님도 이해할 것 같습니다.
훗날 속마음을 털어놓아준 그 분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아프고 서글퍼서 잊고 싶은 이런 기억이 끝까지 살아남아 오히려 내 노후를 버텨준다.'
는 선생님을 응원합니다.
오늘은 프로이트 공부하는 날이라 오고 가는 길 내내 선생님 생각했습니다.
이제 좀 편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편안합
니다. 미안한 마음이야
어찌 없앨 수 있겠습니까
만, 내 의지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일. 건강하고 행복
하게 살길 바라야지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만
읽히니 저는 아직 철부지인가 봅니다.
어디 수소문
하셔서 한 번만 더 만나보시면 좋겠어요.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합니다.
추억이 많아야 노후가 풍요롭다던
선배의 말이 떠오릅니다.
잘 읽고 갑니다.
한 번 더 만나면 뭐라
할건데요?
나는 할 말이
없어 그냥 그 시간에
기억을 멈추어 두고
있답니다.
그간의 각자가
살아온 이야기를 그냥 나누시라고요.
남과여를 떠나
한시대를 한하늘 아래
공유했던이로
다른 삶을 살았을 각자의
이야기를 나눠보시면
서로 힐링이 되실듯요.
옷은 새옷
사람은 옛사람이라고 압니다.
묵은지기가 최곱디더.
아이구야 꼭 경험 많은
내 선배같네요. ㅎㅎ
송구합니더.
두분 사이가
애틋해서
안타깝습니다.호호
작품을 읽으며
맺어지는 인연으로
끝나기를 바랬습니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을 아직 앓고 계신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사고 후유증은 신경통이니
나을 방법이 없고요...
맺어질려면 사고도 나지
않았고, 그 사람이 모진 일
을 당하지 않도록 각본이
짜졌겠지요.
나는 사고 났을때 그녀와
끝난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핏빛 사랑을 핏빛 보석으로 만드셨군요. 멋진 사랑! 제 가슴마저 아리해져 옵니다.
사랑 보다는 동지애가 더
가까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려. 하기사 여자의 몸으로 그것도 대학시절에 형을 살았으니 사랑보다 더 진한 사랑이라 말하는게 더 옳을지도 모르겠네요.
여름이 오면 한 번씩 몸살이 나는 추억입니다.
J 스치는 바람에
J 그대모습 보이며
난 오늘도 조용히
그대 그리워 하네
J 지난 밤 꿈속에
J 만났던 모습은
내 가슴속 깊이
여울져 남아있네
J 아름다운 여름날이
멀리 사라졌다해도
J 나의 사랑은
아직도 변함없는데
J난 너를 못잊어
J난 너를 사랑해
J우리가 걸었던
J추억의 그 길을
난 이밤도 쓸쓸히
쓸쓸히 걷고 있네
================================
이선희 가수가 불러 공전의 히트를 친 노래 J에게를 불러 드립니다. 이 노래에서 J라는 부름은 총 열번 나옵니다.
남평 선생님의 글에서도 J라는 단어가 열번 나오네요! 이선희 씨가 선생님 이야기 듣고 "J에게"를 부른게 아닐까요?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람은 언제나 온유하며 ~"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니 내 인생이 다 소멸되어 버렸으니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 이 생에서 못다 전한 사랑을 꼭 전하고 싶어집니다.
아름다운 추억이 많은 사람은 저금을 많이 한 사람과 같다고 한 일본의 백세 시인 할머니 말씀이 떠오르는 아침입니다.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며 아름답게 살아가시는 남평 선생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원 무슨 박수까지나. ㅎ
나에겐 아픈 시절이었고
더 아픈 추억입니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수 없이 일어났던 군사정권 초기에는
모든게 힘의 논리였지요.
행복한 추억만 좋은걸로
알았는데 아프면 아플 수록 노년에 위안이 될 줄은
예전엔 미쳐 몰랐습니다.
긴 댓글 고맙습니다.
김 선생님과
정 수석부회장님의 댓글이
본문만큼이나 아름답습니다.
눈부신 하루를 예감합니다.
남평 선생님께!
<추억은 가시로 남고> 이 작품을 제가 이선우사장이 관리하는 "그린에세이 카페"에 올려 두었더니 "우보"라는 분이 댓글을 아래와 같이 보내 오셨기에 전달드립니다.^^
========================================
우보첫댓글 20.07.01 08:37
한국의 이태리라는 통영의 멋장이
수필집 사인까지 해서 주셨는데
다시 읽어보니 새롭습니다.
뵌지 어언 20여 년이 되었네요.
시방은 어케 지내실까?
선생님
누구나 말못할 사랑 품고 살아간대요.
가슴에 비릿한 상처 그건 핏빛이래요.
참 아름답고 슬픈 사랑입니다.
추억할수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 이제사 풀어내셨군요.
비껴간 인연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잘 읽고 뭉클한 가슴 잠재우렵니다. ㅎ
비껴간 인연이라.
왜 그랬을까요?
누가 나를 막았을까요?
사고는 왜 났을까요?
사람 일이란 모르겠어요.
어쨓든 좋은 추억이든
나쁜 추억이든 가시되어
남아있는 것은 삶을 함께
하는것 같아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