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노고산 사적지(서강대학교 뒷산)를 기념해 서강대학교 교정에 마련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순교 현양비 중 모방 신부 현양비 모습이다. 노고산은 천주교 박해 때 여러 처형장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유로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사적지이다. 현재 노고산 일대에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서강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순교자들의 땅 위에 학교 부지를 마련한 서강대학교는 2009년 6월 15일 기해박해 당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노고산에 4년 동안 매장되었던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를 기리기 위해 정문에서 가까운 가브리엘관 앞 소나무밭에 세 성인의 순교 현양비를 세우고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세 신부의 유해는 노고산에서 삼성산으로 옮겼다가 1901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소로 모셔져 있다.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순교현양비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순교현양비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순교현양비
앵베르 주교 순교현양비
앵베르 주교 순교현양비
앵베르 주교
앵베르 주교 순교현양비 뒷면
샤스탕 신부 현양비
샤스탕 신부
샤스탕 신부 현양비
모방 신부 현양비
모방 신부
성 모방 신부, 구산 성지는 모방 신부가 방문한 공소 중에서 그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성 모방 신부, 구산 성지
새남터 14 순교자 (앵베르, 모방, 샤스탕 외)
새남터 14 순교자 부조(앵베르, 모방, 샤스탕 외)
새남터 앵베르 주교
새남터 앵베르 주교 문서
새남터 샤스탕 신부
새남터 샤스탕 친필서한
성 모방 나 백다록 베드로신부, 새남터 성지
새남터 성 모방 베드로 신부 친필
새남터 성 모방 베드로 신부 출생신고서
성 모방 베드로 신부
성 모방 베드로 신부
한국의 파리 외방전교회 12명의 순교자들
이 작품은 한국에서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12명의 순교자들을 그린 작품이다. 이 중에서 10명이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의 일원으로 시성되었다
성 모방 베드로 신부
미리내 200주년 성당 내 순교화
세 성인의 주검을 수습하는 박 바오로(탁희성 작)
박 바오로(?~1868)가 기해박해 때 새남터 백사장에서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 주검을 수습하는 성화. 잘린 머리 셋을 입에 물고 한 시신은 업고, 둘은 팔에 둘러 매고 나왔다고 한다. 탁희성 작 [출처 : 평화신문, 2008년 9월 14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박물관 특별전 기사 중에서]
삼성산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묘비
1970년 5월 12일 김수환 추기경과 고(故) 노기남 대주교, 오기선 신부는 이곳에 세 분의 매장지임을 확인하고 이를 기념하는 소형 비석(앞쪽에 있는 작은 비석)을 그 자리에 세웠다. 또 1981년 9월에는 신림동 본당 교우들에 의해 구상 시인의 헌시와 비문이 새겨진 현재의 비석이 세워졌다.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기해 세 성직자가 시성의 영광에 오른다. 이를 기념해 사적지 부근의 땅 1만 6천여 평을 매입, 1989년에 그 유해를 다시 천묘해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92년에는 신림본동 본당에서 분리, 삼성산 본당이 신설됐다.
삼성산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묘비
성 베드로 모방 나(羅) 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鄭) 신부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范) 주교
삼성산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묘비 뒷면
삼성산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묘비 뒷면
삼성산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묘자리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范)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羅) 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鄭) 신부의 유해가 1836년부터 1901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소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묘자리이다. 기해박해(1839년)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38년 전, 주문모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에서 희광이의 칼 끝에 이슬이 되고 만다. 이 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이들의 시체는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힌다. 교우들이 유해를 거두고자 애쓴 지 나흘째 되는 날 세 명의 교우가 시체를 훔쳐 내려다 그중 한명이 붙잡혀 옥에 갇히고 만다. 그 후 스무 날 가량 지난 뒤 7-8명의 교우가 죽음을 무릅쓰고 감시의 눈을 피해 유해를 거두는 데 성공한다. 교우들은 유해를 큰 궤에 넣어 노고산(老姑山)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파수를 피해 유해를 훔쳐 낸 교우 중 하나인 박 바오로가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유해를 이장한다. 박 바오로는 이 사실을 아들인 박순집에게 알려 주고 그 자신도 일가들과 함께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순교하게 되니 1868년 3월 절두산에서의 일이다. 이 때 가까스로 화를 면한 박순집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이 묘소를 고증해 명동 성당 지하묘소로 옮길 수 있도록 하는 산 증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순교한 가족들의 시신을 찾고 베르뇌 주교를 비롯해 브르트니에르·볼리외·도리 신부 등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내 용산 왜고개에 이장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부터 4년간 박순집의 가문은 16명의 순교자를 배출했고, 자신은 1982년 82세를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인천 교회의 창설에 여생을 바쳤다. 16세 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들어가 우리 나라 최초의 수녀가 된 박 사베리오(1872-1966년)는 박순집의 막내딸이기도 하다. 한편 박순집 일가를 기념하기 위한 비가 절두산 순교 기념관 정원에 세워져 있어 순례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삼성산에 1834년부터 1901년까지 58년간 묻혀 있던 세 성직자는 1925년7월 25일 시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