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동 그집
이정림
차가 어쩌다 사직동 근처로 지나가면, 늘 고개를 빼고 밖을 내다본다. 사직동은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 제2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사직공원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보면 좁은 골목이 있다. 그 모퉁이에 가게가 있는데, 그 집에는 생강을 하얗게 말린 편강이나 거무스름한 치자 몇 알이 든 봉지가 밖에까지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어머니가 저냐에 치자 물을 들일 때나 언니 옷에 노랗게 물감을 들일 때면 막내인 나에게 그것을 사오게 하셨다. 그 당시에는 옷을 집에서 직접 염색해 입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손에는 언제나 붉고 푸른 물이 가실 날이 없었다.
그 가게에서 내가 제일 많이 사다 먹은 것은 '요깡'이었다. 지금은 양갱이라고 불리는 그것의 겉종이를 조심스럽게 벗기고 달착지근한 팥앙금을 한 입 베어먹을 때면 혀가 그대로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골목길을 조금 휘돌아 내려가면 오른쪽에 우리 집이 있다. 방이라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안방과 오빠가 쓰는 건넌방뿐인 아주 작은 한옥이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는 정사각형 널을 이어 맞댄 청마루가 있었는데, 마루는 길이 들어 색깔이 아름다웠고 얼굴이 얼비칠 정도로 윤기가 돌았다. 둥근 대들보와 휘어진 서까래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천장은 또 얼마나 보기 좋았던가. 나는 햇살이 잘 드는 그 툇마루에 앉아 만화책을 보고 동화책을 읽었다.
작은 마당에는 시원한 물이 콸콸 쏟아지는 펌프가 있었다.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 동네 사람들이 곧잘 길어가곤 하던 펌프 옆에 터주대감인 양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콩나물 시루였다. 햇빛이 들어가지 않게 꼭꼭 여며 놓은 보자기를 들치고 호기심 많은 아이들처럼 콩나물 두어 개가 머리를 내밀고 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사슴과 꽃이 민화처럼 그려져 있는 아름다운 꽃담은 내게 그림에 대한 동경을 막연히 갖게 만들었다.
길다란 부엌 찬마루 밑으로는 장작이 착착 쟁여져 있었다. 어느 해 겨울에는 어머니와 언니가 장작을 사서 마포에서부터 소달구지에 싣고 왔다고 하는데, 그 모습은 상상만 해도 동화적이지 않은가. 새까만 무쇠솥이 나란히 걸린 부뚜막 옆으로는 안방으로 통하는 작은 미닫이문이 있어, 그 문으로 어머니가 음식을 들이미시면 우리는 방에서 두레상을 펴고 식탁을 차렸다.
고향은 천안이지만, 내가 세 살 때부터 유년 시절을 보낸 집은 그 사직동 집이었다. 아버지는 그 고장 초등학교에 후원금을 내실 정도로 재력가이셨지만, 어린 자식들이 유학할 집이 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 사직동 집에서 언니와 오빠는 서울 명문학교를 다녔다. 언니와 오빠가 주고받는 말 중에서 가장 많이 들리던 말은 '시집'이었다. 김기림이나 정지용 같은 시인의 이름은 어린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아, 학생들이 왜 만날 시집 장가 타령이나 할까 그게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나는 요즘도 너른 천안 집이 아닌 그 작은 사직동 집을 꿈에서 본다. 꿈속에서도 집이 좁은 것이 불만이어서 윗집인 내 친구 집까지 사서 트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너 나 할 것 없이 아파트에 사니 꽃담이 아름다운 한옥에서 사랑채에는 서재를 만들고 마당에는 파초를 심어 빗소리를 듣는 것도 운치가 있을 것 같아 언젠가 일부러 그 동네를 찾아가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리움은 정말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지, 너무도 달라진 동네 모습에 허탈한 느낌마저 들었다. 양갱을 사러 드나들던 가게는 이미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고, 층계를 몇 개 올라야만 대문을 열 수 있는 것이 부러웠던 내 친구 집은 볼품 없는 다가구 주택이 되어 있었다. 석필로 그림을 그려대던 집 앞 골목길은 또 어찌나 좁은지, 내가 갑자기 거인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다행인 것은 겉모습이 약간 변하긴 했지만 우리 집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나무 대문 틈으로 살며시 안을 들여다보면서, 6·25때는 불에 탄 화폐가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다니는 모습을 놀라 쳐다보던 그 아름다운 마루도 그대로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앞집에 살던 조경희 선생이 며칠 간 그 속에서 숨어 지내기도 했던 사연 깊은 마루이지 않던가.
그러나 그 집도 머지 않아 없어질 운명에 처해 있다. 그 곳이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어 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때문이다. 내가 두부를 사러 다니던 공중 수도 곁의 가겟집은 거대한 오피스텔들 속에 묻혀버렸고, 아버지가 의사였던 내 친구의 커다란 기와집은 자동차 정비소로 변해 있었다.
빠르게 변하는 세월 속에서 유년의 장소들이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정말 그 속에 용궁이 있을까 호기심으로 들여다보던 사직공원 안의 풀장도 메워진 지 오래고,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우거져 조금은 무섭기까지 했던 숲은 앞이 훤히 내다보일 정도로 잘 다듬어져 있다. 다만 사직공원 문 옆에 있는 불에 탄 고목만이 아직도 옛날을 떠올리듯 홀로 초라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이제 추억마저 거두어 가지고 갈 나이에 옛날의 장소가 남아 있다 한들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어차피 추억은 쓸쓸할 때 혼자 가슴속에서 만나 보는 정인(情人) 같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