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시를 설득한 김대중 대통령
처음 부시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아주 무례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그런 부시에게 무시당했다는 기분을 느꼈다.
"나(부시)는 북한 지도자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이 모든 합의를 준수하고 있는지 확신이 없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내 답변을 가로챘고 심지어 나를 디스맨(this man)이라고 호칭하기도 했다.
친근감을 표시했다고 하나 매우 불쾌했다. (김대중 자서전 2권 414p)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불쾌한 감정에만 머물지 않고 곧바로 이 상황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전화를 들었다.
(2001년) 3월9일 시카고에 도착했다. 그날 일정을 끝내고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집에 있었다. 내 전화에 놀란 듯했다. 나는 대통령의 아버지를 에둘러 설득했다.(김대중 자서전 2권 415P)
1년 뒤 부시 대통령이 한국을 답방하자 김대중 대통령은 그레그 전 주한미대사를 만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는 부시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 격의 없는 텍사스식 대화를 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부시 대통령을 휴전선으로 안내해서 남과 북을 잇는 철도공사 현장을 둘러보게 하라고 조언했다. 그의 조언은 치밀했다.(김대중 자서전 2권 465P)
2월 20일 답방한 부시 대통령은 "김 대통령께 문제를 안겨 드릴 생각은 없으며 햇볕정책을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북한에 대한 과격한 발언을 또 쏟아냈다.
김정일 위원장은 자기 백성을 굶주리게 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악랄한 독재자입니다. 북한에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어 체제를 붕괴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김위원장은 왜 서울 방문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까?(김대중 자서전 2권 466P)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이번엔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다. 이 공세적 질문을 오히려 기회로 활용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러시아를 악의 제국으로 지칭했지만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대화를 했고 데탕트를 추진했습니다. 결국 공산 체제의 변화와 냉정 종식을 이룩했습니다. 닉슨 대통령은 전범자라고 규탄하면서도 중국을 방문하여 관계 개선과 개방 개혁을 유도했습니다. 친구와 대화는 쉽고 싫은 사람과의 대화는 어렵지만 국가를 위해 필요에 의해 대화할 때는 해야 합니다. 미국은 한국전쟁 때 공산당하고도 대화를 했습니다.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고 북한의 살길을 열어 주면 북한은 핵과 대량 살상 무기를 틀림없이 포기할 것입니다.(김대중 자서전 2권 466P)
이 회담의 결과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받아냈다.
부시 대통령은 회견에서 햇볕정책을 지지하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으며 대화를 통해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김대중 자서전 2권 468P)
김대중 대통령은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이날 오후엔 그레그 전 주한대사가 제안한 철로공사현장을 부시 대통령에게 보여주는 평화이벤트를 벌였다.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면 최전장 전투 부대를 찾는 게 관행이었다. 분단과 대결의 현장을 보여주자는 구상이었다.(김대중 자서전 2권 468P)
김대통령의 노력은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대통령께서 하신 얘기 오늘 낮 회견에서 써먹었습니다." 그가 비로소 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는 2001년 워싱턴 회담 때 한국을 변방으로 나를 촌놈으로 알고 그냥 무시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주위 사람들에게도 "김대통령을 다시 봤다. 존경한다"고 말했단다.(김대중 자서전 2권 470P)
김대중 대통령은 감동적인 마지막 일격까지 가했다. 종교 얘기를 하면서 부시 대통령이 이휘호 여사와 같은 감리교 신자임을 알고 반가움을 표시하면서 영국에서의 감리교의 훌륭한 역할에 대해서 곁들였다.
폭동의 위기로부터 영국을 구출하여 19세기 찬란한 빅토리아 왕조 시대를 열게 만든 세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언론이고 둘째는 법원이요 셋째는 감리교였습니다... 감리교는 당시 시민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고 안정을 찾아주었습니다. 당시 성공회는 왕족이나 귀족들 종교로서 사교 그룹 비슷했으나 대중들의 고통은 외면했지요. 존 웨슬리가 감리교를 창시해서 성공회가 외면한 사람들을 품어준 것입니다. 감리교는 버림받은 그들을 위로하고 보호했기 때문에 불만과 분노에 찬 그들을 위로하고 희망속으로 이끌 수 있었습니다. 감리교가 영국 사회를 구원한 것입니다. 대통령께서 믿는 감리교가 그래서 위대합니다.
설명을 마치자 그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더욱 친밀하게 다가왔다
망니니 부시를 길들인 김대중 대통령 거다란 | 조회 387
------------------------------------------------------------------------------------------
김대중 대통령께
청와대출입기자가 쓴 굿바이DJ
김대중 대통령이 이제 퇴임을 맞습니다.
김대통령의 임기 5년 중 3년을 곁에서 지켜본 저는 조금 감회가 특별합니다. 하물며 본인의 감회야 오죽하겠습니까.
김대중 대통령의 일생은 완전히 상반된 두가지 정의가 가능합니다.
첫번째는 "참 복많은 인생"입니다. 일생 중 30여년간을 민주화 지도자로 인정받으며 살았습니다. 결국은 평생 그렇게 하고 싶어했던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됐고 마침내 21세기 첫 노벨평화상 수상자까지 됐으니 개인으로서 더 이상의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대통령 재직 중에는 분단 이후 첫 남북정상회담의 주인공으로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월드컵 개최국 대통령으로 4강 신화를 앞마당에서 지켜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거꾸로 볼 수도 있습니다. "참 힘들고 불운한 인생"입니다. 생과 사의 문턱까지 갔던 절대절명의 죽을 고비를 네 번이나 넘겼습니다. 납치와 연금,투옥의 나날이 20년 이상 계속됐습니다. 고의성 짙은 교통사고로 30여년간 다리를 절게 됐습니다. 수십년간 뿌리깊은 반대세력의 음해와 공격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장남은 고문 후유증으로 지금도 건강하지 못한 상태이고 차남과 삼남이 나란히 구속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과연 그의 일생은 행복한 일생입니까, 불행한 일생입니까. 잘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저는 그를 떠나 보내면서 그동안 못했던 얘기를 몇가지 하고 싶습니다. 3년 동안 이 얘기를 못했던 것은 그가 아직 현직에 있었기 때문이고 제가 아직 청와대에 출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이 얘기를 미루는 것은 저의 기자적 양심에 꺼리끼는 일인 것 같아 더 주저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사실 청와대에 출입하기 전까지 DJ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제가 정당에 출입할 때는 그가 정계를 떠나 있을 때였고 그가 정치에 복귀한 뒤에는 제가 주로 사회부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88학번인 저는 후보단일화 논쟁이 치열했던 87년 대선에서 비껴서 있었고 기자가 되기 전까지 호남지역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저에게 DJ의 이미지는 "매우 노회하고 독선적인 정치인"이라는 것 이상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안 지켜본 DJ는 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여리고 수줍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주관이 확고하고 고집이 세지만 자기 고집을 무조건 강요하기보다는 설득하고 토론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측근들에게도 하대를 하지 않고 예의를 갖추는 섬세한 결벽성이 있는가 하면 자기 철학과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관철시키는 추진력을 보이기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남의 말을 잘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젊은 시절의 그는 지금과는 또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는 80세에 가까운 노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야당투사가 아닌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여유를 가진 상태였습니다. 저는 그가 좀더 유연하고 유머러스하고 쇼맨쉽도 갖춘 대통령까지도 돼주길 바랐지만 이미 80을 바라보는 그에게는 무리한 기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해외에 나갔을 때 DJ가 받는 대우는 제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선진국에 갈수록 그는 넬슨 만델라와 동격인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 '20세기의 영웅'이었습니다. 현지 언론들은 그의 방문에 맞춰 DJ 일대기를 특집으로 제작하고 특집면을 만들었습니다. 에이펙이나 아셈처럼 세계 강대국들이 모두 참석하는 국제회의에서도 DJ는 거의 언제나 첫 번째의 발언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지난해 덴마크에서 열린 아셈 때는 주최국인 덴마크의 라스무센 총리가 각국 정상들을 소개하면서 오직 DJ에게만 "excellent leadership, President Kim"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블레어와 시라크, 주롱지와 고이즈미 같은 쟁쟁한 인물들도 아무 수식어 없이 이름만 소개됐는데 말입니다. 그만큼 DJ에 대한 특별대우는 국제사회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였습니다.
DJ가 참석하는 기자회견이나 투자유치 설명회는 그의 이름만으로도 일단 대성황을 이뤘습니다. 정상들간의 외교적 수사(修辭)는 늘 과장되게 마련이지만 DJ에 대한 것은 수사라 하더라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김대통령은 나에게 살아가야 할 힘, 살아가야 할 도덕적 스승이자 길잡이다"(조스팽 프랑스 총리), "김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독일이 한국의 금융위기 때 한국을 돕는 동기가 됐다"(라우 독일 대통령)하는 식이었습니다.
현 정부에 다소 비판적이었던 한 선배 기자조차도 이런 모습을 보고는 "머리색 검고 얼굴 노란 황인종 중에서 백인들에게 이런 대우를 받는 사람은 중국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다. 오직 DJ 뿐이다"고 하더군요. 외국에 사는 우리 동포들은 우리나라 대통령에 대한 이런 대접에 "너무나 자랑스럽다"며 눈물을 글썽이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얘기들은 국내 언론에 거의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동행한 30여명의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누구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입니다. '대통령을 칭찬하는 기사는 낯뜨겁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겠고 국내의 뿌리깊은 반(反)DJ 정서를 눈치 보느라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CEO인 그가 이런 'DJ 브랜드'를 갖고 있었으니 이것이 한국에 대한 투자유치와 IMF 극복, 그리고 우리나라의 외교적 위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네임밸류에 만족하지 않고 발로 뛰면서 한국 경제와 햇볕정책을 세일즈했습니다.
해외순방 때마다 저는 80에 가까운 DJ가 강행하는 빡빡한 일정에 먼저 넉다운이 될 지경이었습니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DJ의 공식일정은 전임 대통령들의 두 배가 넘었습니다. 유력 언론들이 자신의 국정이념을 제대로 전해주지 않으니 직접 뛰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연설문은 밤을 새워가면서 직접 작성했고 지난해 2월 '악의 축' 발언으로 한반도 위기가 고조됐을 때는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준비하느라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DJ가 2001년말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치 불개입을 선언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정당에 출입하는 선배 기자들의 상당수도 "DJ는 어떤 식으로건 대선에 개입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옛날의 DJ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의 DJ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노벨평화상 수상자이고 해외에서는 세계적인 위인으로 평가받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남은 욕심이 있다면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역사적인 평가를 받는 것뿐일 겁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성공하고 싶어했지만 그의 반대파들은 그를 여전히 특정 정파, 특정 지역의 수장으로만 간주하고 끊임없이 흠집을 내려고 했습니다. 몇몇 보수언론들의 노골적인 왜곡보도는 같은 기자입장에서 부끄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가치관과 이념을 달리하는데서 나오는 비판이 아니라 오직 DJ를 공격하기 위해서 사실 자체를 왜곡하고 호도하는 나쁜 보도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제 그의 시대는 역사 속으로 저물어 갑니다. 성공도 있었고 실패도 있었습니다. 다만 경제개혁과 남북협력,그리고 IT 육성이라는 그의 기본방향이 옳았다는데는 큰 반론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의 실패가 너무나 극적으로 강조돼온 반면 성공에 대한 평가에는 지나치게 인색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공과(功過)는 역사가 평가할 것입니다. 단지 저는 대한민국을 위해 바친 그의 열정과 진심만은 우리가 인정하고 그를 보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대통령. 이제 좀 편안히 지내십시오."
호준석 YTN기자
---------------------------------------------------------------------------------
민주주의완성 경제위기극복 IT산업육성 남북관계발전 한류전파 국제적위상 여성지위향상 등
국제사회가 공인하는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역사속의 진정한 위인이다.
새누리당과 김영삼이 97년 11월 부도낸 나라
서울시내에 노숙자가 가득했다
어느 달엔 중소기업 사장 수십명이 자살한 달도 있었다..
가정은 절단 나고 온나라가 신음했던 시절...
97년 12월 대통령 당선되고 그 다음 해 취임식연설이다
1997년 1월 23일 재계 자산순위 14위 규모의 대기업 '한보철강'이 자금난에 부도 처리된다.
한보철강의 부도로 계열사는 물론이고 수천 개에 이르는 하청업체와 거래업체,
또 한보에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들까지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며 부도 위기에 몰린다.
대한민국 외한위기 사태에 첫 신호탄인 셈이었다.
3월 18일, 재계의 26위인 삼미그룹이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다.
철강 경기가 좋았던 때는 12개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계 17위까지 올랐던 그룹이었다.
삼미그룹의 부도로 100여개나 되는 삼미특수강 하청업체도 연쇄 도산할 위기에 놓였다.
4월 21일, 자금난을 겪던 진로그룹의 부도를 막기 위해 정부는 급히 부실기업정상화 대책을 내린다.
하지만 부실기업정상화 대책이 급박하게 추진되면서 제2 금융권 등 자금시장에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다.
진로 문제에 정부가 강력하게 개입하며 부도를 막겠다는 방안이었지만
이로 인해 다른 기업의 부도는 되려 앞 당겨지고 말았다.
이후 5월 대농그룹, 6월 한신공영 등 굴지의 기업이 줄줄이 부도처리되며 무너진다.
7월 15일 재계 서열 8위인 기아그룹이 부도 방지 협약 대상으로 지정되며 사실상 부도 처리된다.
10대 재벌도 안심할 수 없다는 항간의 얘기가 현실로 드러나 충격은 더했고
기아의 5천개가 넘는 협력 업체또한 비상에 걸려 기아의 부도는 한국 경제에 큰 파장을 일으킨다.
부도 발표까지 했다가 가까스로 부도를 면했던 쌍방울 그룹이
10월 15일, 결국 자금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법원에 화의 신청을 냈고 다음 날 최종 부도처리 된다.
쌍방울과 함께 태일정밀 그룹 또한 10월 16일 부도를 맞는다.
열흘 동안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 경제에 대한 평가를 끝낸 국제통화기금 IMF 조사단은
한국은 장기적인 구조 조정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위기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며
한국은 경제위기라고 하기 어렵다는 발표를 한다.
하지만 10월 24일 미국 S&P사는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장기 AA- → A+, 단기 : A1+ → A1로 하향조정한다.
연이어 주식값이 폭락하고 환율이 솟구치는 상황이 발생되고
10월 27일, 1달러에 940원을 넘어서는 모습까지 연출되며 주가 500선 붕괴가 우려되는 사태가 빚어진다.
미국 무디스사 역시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장기 : A1 → A2, 단기 : P1 → P2로 하향 조정한다.
10월 28일, 결국 하루만에 종합주가지수 500선 마저 무너지며 증시 붕괴의 위기감은 고조된다.
하락지수는 35.19포인트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고 하락폭 6.63%도 사상 최대치였다.
미국 투자기관 모건스탠리는 '아시아를 떠나라' 라는 보고서를 띄웠으며
강경식은 정부에 외환시장개입중단 지시했지만 재판에서는 불인정된다.
10월 30일, 환율은 1달러에 천원 가까이 치솟았다가 정부의 개입으로 폭등세가 주춤해 졌고,
주가는 다시 폭락해서 외환시장과 증시는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져 버린다.
10월 31일, 환율의 급등으로 11월 1일부터 유가가 인상된다는 소식에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로 사람들이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11월 1일 해태그룹이 끝내 부도처리 된다. 당시 재계 순위 24위었던 해태그룹은
30대 그룹 가운데 5번째로 부실기업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됐다.
11월 4일 재계 순위 25인 뉴코아 그룹이 화의 신청을 한 데 이어 최종 부도가 났다.
11월 7일 주가가 사상 최대 폭으로 떨어졌고 환율은 다시 급등하며
조금씩 안정세를 보이던 금융 시장이 다시 흔들거리기 시작한다.
11월 10일 환율이 사상 처음으로 미화 1달러에 천원을 넘어선다.
물가는 오르고, 또 외채를 갚아야 하는 기업의 부담은 그만큼 커지게 돼 가계와 기업 모두 먹구름이 낀다.
당시 김영삼은 전 부총리 홍재형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고 한다.
11월 17일 외국언론은 한국 IMF구제금융 요청 가능성 시사하였고
프랑스 경제 전문지 레 제코는 IMF가 한국에 400-600억달러 긴급 지원을 검토하였다고 보도하였지만
이때까지만하더라도 재정경제원은 '사실무근'이라며 뻔뻔하게 부인하는 태도를 보인다.
11월 21일 정부는 결국 국제 통화기금 IMF의 구제 금융을 신청하며
경제 우등생 한국의 신화를 뒤로 한 채 사실상의 국가 부도를 인정한다.
외환 위기가 한창이었던 11월 초 외환 보유고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강경식 부총리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지 열흘도 안돼서 IMF의 구제 금융을 요청한 것이다.
12월 3일 국제통화기금 IMF의 긴급 자금지원을 위한 협상이 최종 타결된다.
IMF로 부터 550억 달러를 지원받게 됐지만 이후 한국 경제는 사실상 IMF의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됐다.
금융기관으로서는 처음으로 고려증권이 12월 5일 최종 부도처리 된다.
직접적인 원인은 IMF 체제에 따라 위기를 느낀 거래 은행들이 자금 제공을 기피하여
어음 2,700여억 원을 막지 못해 끝내 쓰러진 것이다.
12월 6일, 고려증권에 이어서 재계 12위인 한라그룹이 부도를 낸다.
한라그룹의 부도로 현대를 비롯한 거래 업체들의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고,
국내 자동차 업체들의 생산 차질이 생겼다.
1997년 한해 동안엔 무려 하루 평균 40개 기업이 쓰러졌다.
정부는 협상 과정서 하나를 양보하면 IMF는 또다른 조건을 내세워서 항복을 요구했고,
결국 IMF기관에 이것 저것 다 내주고 말았다는 논란에 휩싸인다.
IMF에 도움을 받는 것은 불가피했지만 IMF의 요구에 너무 많은 것을 내준 게 아니냐는 우려에
당시 건설교통부 장관은 국민들이 뭘 몰라서 내정간섭으로 오해한다는 발언을해 논란이 된다.
12월 10일 1달러에 1600원까지 환율이 치솟으며 연초 800원대에 비해 2배로 오른다.
환율이 연일 사상 최고치로 기록하면서 생필품 68품목까지 따라서 치솟았고
서민들의 생활고는 갈수록 심해졌다.
정부는 부도 위기에 몰린 5개 종합 금융사
나라, 대한, 신한, 중앙, 한화 총 5개 종금사 업무정지명령을 내린다.
이대로 뒀다간 기업과 다른 은행들까지 함께 쓰러질지 모른다는 우려때문이었다.
미국 무디스사 한국국가신용등급을 장기 : A3 → Baa2(준 Junk),
단기 : P-3 → N∙P(투자부적격)로 하양조정한다.
12월 11일 환율은 1달러에 1719원까지 치솟았고
나흘 연속 제한폭까지 오르며 외환시장은 마비돼 버린다.
국제통화기금 IMF의 자금지원에도 불구하고 외국 금융기관은 외화 빚을 찾아가고 있고,
외국 투자자들도 여전히 대한민국을 외면하고 있는 상태였다.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당선 선거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다.
12월 23일 사상 처음 1달러가 2천원선으로 폭등한다.
갚아야 할 외채만 2,000억 달러였으며 외화가 절대적으로 모자란 상태서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은 자꾸만 떨어져 외화 차입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시 김대중 당선자는 우리 경제의 실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해 막다른 골목에 서있다며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외환위기를 극복해내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2000년 12월 10일,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을 위한 노력과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증진시킨 공로로 새천년 첫 번 째 노벨평화상으로 지목된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 자리서, 국제통화기금은 모두 차관를 상환하고,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공식 발표한다.
그리고 2001년 8월 23일, IMF로부터 빌린 195억달러를 모두 갚으며
불과 3년 8개월만에 외환위기사태, 즉 IMF사태가 공식 종료된다.
=======================================================================
넬슨 만델라의 전략
억압적인 법조항으로 인해 합법화되고 제도화되어 있던 인종차별정책에 맞서기 위해 1912년에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창설되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ANC의 다른 여러리더들도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키자는 운동을 벌였지만 남아프리카 정부와 실질적인 협의를 도출하는데 성공한 사람은 바로 감옥에 갇혀 있던 만델라뿐이었다.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법적으로 아무런 권리도 없고, 바깥세상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완벽하게 통제된 상황에서 그는 어떻게 ANC 동료들, 간수들, 감옥 당국, 정부, 그리고 국제사회로하여금 협상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할 수 있었을까?
ANC에서 발휘했던 만델라의 리더십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세에 기초를 두고 있으면서, 인간관계에서 나오는 힘과 지극히 합리적인 논리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투옥된 만델라는 자신의 임무 중 하나는 편협하고 야만적인 간수들과의 화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서전이 자유로 가는 긴여정에서 만델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간수들조차도 변화할 수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특유의 따스함과 매력을 발산하는 만델라에게는 그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가 특별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별난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감옥의 관계자들에게도깊은 인상을 남겼다. 1981년 법무장관이 만델라에 대한 보고서를 요청했을 때 거기에서는 다음과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 만델라는 동기부여가 매우 잘되어 있고 모든 일에 항상 이상적으로 접근한다.
- 뛰어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매우 밝고 긍정적이다. 권위를 상징하는 존재에 대해서는항상 친절하고 공손한 태도로 대한다.
- 그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능력을 지녔지만 분별없이 선동적인 것은 아니다.
- 겉으로 꾸며낸 위장술일지도 모르지만 백인에 대한 원한은 전혀 보이지는 않는다.
만델라가 감옥에서 보여준 다분히 정치가다운 행동 덕분에 그와 거래를 해도 문제가 없겠다고 믿게 된 남아프리카 정부는 어느 날 밤, 대통령 클레르크와의 비밀회의에 참석시키기 위해서 만델라를 비밀리에 감옥 밖으로 빼내게 되었다. 만델라를 만난 클레르크 대통령은 그와 손을 잡으면 그들이 이끄는 두 개의 정당이 합의점을 찾을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남아프리카 정부와의 논의가 진행되면서 국제사회는 만델라가 있는 감옥으로 밀사를 보내 취재를 했는데, 그때 기자들이 받은 만델라의 첫인상은 악의에 가득 찬 게릴라 두목이 아닌 모든 것을포용할 줄 아는 대통령감이라는 것이었다. 만델라에 대한 이러한 평가 덕분에 각국의 정부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남아프리카에 압력을 가해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킬 수 있었다.
만델라의 통치기간 중에는 어떠한 복수나 협박도 없었다. 흑인, 백인, 아시아인, 유색인종 등을포함한 모든 국민이 만델라와 함께 ‘화해’라는 국가정책을 통해 하나가 되었으며, 조국을 재건 건설적인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사건을 예견했고, 비록 보잘 것 없었지만 그가 가진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으며, 한 인간으로서 대단한 자질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주변 당파들을 파트너십과 화합으로 인도하는 정치적 노련함을 보여주었다.
========================================================
넬슨 만델라 인터뷰
뉴스위크: 이라크 문제에 대해 어떤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수년 동안 중동 문제에 대해 중재 노력을 기울였던 것처럼 이라크 문제에서도 중재하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현재의 충돌에 다시 개입하려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입니다.
만델라: 믿을 만한 여러 조직에서 중재 요청이 있었고 그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고려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을 풀기 위해서는 어떤 개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유엔과 같은 조직이 나설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미국의 외교 정책에는 여러 가지 심각한 실책이 있었고, 그런 실책들이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란에 대한 적절하지 못한 지원은 결국 1979년 이슬람 혁명을 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중도파를 지원하고 격려하기보다는 무자헤딘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정책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집권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취한 행동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것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유엔이 조심스럽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던 결정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살펴보면, 미국의 태도가 세계 평화의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현재 말하고 있는 것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부권이 염려스럽기는 해도, 해외로 나갈 수 있으며, 행동할 수 있고, 여러 나라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재 미국이 세계에 보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가장 강력한 말로 비난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리고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이 이런 미국의 결정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도 당신은 알게 될 것입니다. 미국이 이런 결정이 내리게 된 것은 부시가 미국 내 무기 생산업체와 석유 산업을 만족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런 요인들을 생각한다면, 저처럼 권력과 영향력 없는 개인이 중재자로서 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뉴스위크: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가 야기하는 위협이나 사담 후세인이 핵무기를 만들려고 한다는 논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쨌든 사담 후세인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바 있고, 이스라엘에 미사일을 발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화요일에 부시 대통령은 유엔에서 입장을 표명하면서, 지적할 증거는.......
만델라: 바그다드에서 유엔 무기 사찰단으로 활동했던 스코트 리터(Scott Ritter)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했다는 증거는 어떤 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부시나 블레어는 그런 무기가 존재한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대량살상 무기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아무도 그것을 말하지 않을 뿐입니다. 이라크에 이런 기준을 적용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유색인종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전혀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백인이기 때문입니다.
뉴스위크: 이 문제를 인종 문제로 보시는 겁니까?
만델라: 그런 요소가 있습니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조용조용히 말하고 있습니다--사람들은 분명하게 반대입장을 표명할 용기가 없거나 공공연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만약 유엔에 백인 사무총장이 있다면 미국과 영국이 현재처럼 유엔을 대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트로스 갈리나 코피 아난과 같은 흑인이 사무총장이기 때문에 미국이 유엔을 존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국은 유엔을 경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 혼자만의 견해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뉴스위크: 현재 직면하고 있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타협안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만델라: 유엔입니다. 유엔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만약 미국과 영국이 유엔으로 가고, 유엔이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한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있다고 말하고, 우리가 무언가 행동해야만 하고 생각할 때, 그 행동을 지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뉴스위크: 부시 행정부가 유엔에서 펼치고 있는 외교적 노력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보십니까, 아니면 부시 대통령이 여전히 일방적으로 일을 추진하려는 의도가 있으면서도 유엔에서 발언함으로써 정치적인 핑곗거리를 구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만델라: 미국이 현재 세계에서 유일 강대국이며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물론 대통령 주변의 여러 사람들도 고려해야만 합니다. 콜린 파월 장군은 평화시에, 그리고 걸프전이 발발했을 때에는 전시에 미군을 지휘했습니다. 그는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죽고, 젊은이들이 죽어 가는, 국제적 긴장과 전쟁의 비참한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점을 알고 있고 지난해 9·11이후 이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사정을 알리기 위해 돌아다니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동맹국의 지원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딕 체니와 같은 사람들……어제 저는 그가 미국의 실질적인 대통령(real president)이라는 기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그 기사가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딕 체니, 그리고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 이들이 대통령을 잘못 이끌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부시 대통령에 대한 제 인상은, 이 사람은 함께 거래할 만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에 뒤떨어진, 다시 말해 대통령이 현대에 어울리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은 바로 대통령 주변의 사람들입니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만이 부시가 현대에 어울리는 인물이 되도록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뉴스위크: 체니 부통령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만델라: 그렇습니다. 제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저의 석방 결정에 반대했습니다. (웃음). 미국 의원의 다수가 제 석방을 위해 애를 썼는데, 그는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체니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여기서 딕 체니를 언급하는 것은 그를 가장 고루한(arch-conservative) 인물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뉴스위크: 이라크 문제를 발언하고자 하신 데 대해 저는 흥미롭습니다. "나는 프란스케이로 가서 쉬겠다"고 했는데 말이죠.(만델라는 프란스케이 출신이다--역자 주) 그 말이 농담이었던 듯싶습니다. 여전히 매우 활동적이니 말입니다.
만델라: 저는 물러나서 제 아이들과 손자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지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갖가지 심각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해서라도 평화를 끌어내려고 노력해야 할 양심적인 사람들이 '아니다(no)'라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
넬슨 만델라의 두 얼굴
세상을 움직여온 것은 휴머니즘이 아니라, 돈과 권력이었다. 과학적 지식이나 역사적 지식은 언제 어느 때나 변조, 급조될 수 있다.
따라서 자크 데리다가 '차연'이라는 개념을 통해 성경의 허구성을 파헤친 것처럼, 사회에서 주류로 통용되는 모든 사실(팩트)들은 정치적, 심리학적으로 '해체(deconstruction)'될 필요가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넬슨 만델라가 '민족 해방의 영웅' 내지는 '인종차별 폐지의 선구자'로 서구 사회에서 필요 이상의 관심을 받아온 이면에는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있다
넬슨 만델라, 젊은 시절에는 정말 훌륭했다.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에 그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지도자로서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 즉 남아공 옛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을 지도했으며, 무려 26년만 동안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90년 2월 11일 출소했다.
문제는 그가 대통령이 되는 조건으로 감옥에서 백인들과 일종의 거래를 했다는 데에 있다. 실제로 그는 대통령이 되고나서 백금, 우라늄 등의 광산을 백인 소유로 이전하는 등 백인들의 자본을 보호해주는 정책을 펼쳤다.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이전의 경우 빈민가에 무료 전기배급이 되었으나, 만델라 때에는 부분적 무료로 바뀌었다. 그러다보니 일반 흑인 국민들은 왜 흑인 대통령을 만들어줬는데, 백인 대통령 때보다 못한 복지정책이 실행되느냐고 따지고 들어 시위도 많이 일어났다.
만델라가 퇴임한 이후부터 남아공 경제는 쑥대밭이 된다.
---------------------------------------------------------
승승장구하던 남아공 경제 잇단 경고음… 무슨 일이?
집권당 부정부패가 ‘발목’ 신용등급 추락… 성장률 ‘뚝’
빈부격차에 전국적 파업도
1994년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한 뒤 승승장구하던 ‘아프리카의 맹주’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추락하고 있다.
신흥경제대국 브릭스(BRICS)에 가입할 정도로 경제도 성장했으나 역설적이게도 정치 경제적 번영을 이끌었던 집권당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부정부패가 발목을 잡고 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최근 남아공엔 ‘입찰사업가(tenderpreneur)’란 신조어가 유행이다. 정부사업 입찰(tender)에 관여해 기업가(entrepreneur)처럼 부를 축적하는 정치인이나 관료를 일컫는다.
과거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이끌었던 ANC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없애고 해외자본을 유입해 나라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1999년 만델라가 물러난 뒤 ‘고인 물은 썩기 시작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최근 보도했다. ANC 1당 집권 체제가 지속되면서 집권당이 너무 많은 권한을 가진 게 독약이 됐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극심한 빈부격차다. 남아공은 백금과 우라늄 등 풍부한 광물자원을 바탕으로 올해 국내총생산(GDP)이 4199억 달러(약 464조 원)에 이를 만큼 성장했다. 인구 4900만 명인 남아공의 1인당 GDP는 지난해 기준으로 8201달러에 이른다. 하지만 소득불평등을 가늠하는 지니계수는 0.63으로 1993년 0.59보다 오히려 악화됐다.
이코노미스트는 “아프리카 제1의 경제대국이란 명성이 무색하게 실업률이 40%를 넘는다”며 “상위 10%는 갈수록 부유해지고 하위 50%는 하루 2달러로 생계를 연명한다”고 지적했다.
빈부격차의 심화는 올해 전국적 파업이란 악순환을 낳았다. 8월 백금 광산 파업시위 도중 34명이 숨진 ‘마리카나 사태’를 비롯해 분야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분규가 이어졌다. 환경미화원과 경찰까지 총파업을 예고한 상태다. NYT는 “연쇄파업으로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해외투자자본이 빠져나가는 이중고가 밀어닥쳤다”고 분석했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지난달 남아공의 신용등급을 A3에서 Baa1으로 한 단계 내린 데 이어 이달 12일에는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도 한 단계 낮췄다. 화폐가치도 올해 3월 달러당 7.44랜드에서 현재 8.72랜드로 급락했다. 남아공 중앙은행은 올해 자국 경제성장률이 2.6%에 머물러 아프리카 평균인 5%에도 못 미칠 것으로 내다봤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2012-10-25
-----------------------------------------------------------
만델라가 백인들을 위해 남아공 경제를 팔아넘겼다
만델라 前부인-英신문 진실 게임?
만델라의 전 부인 위니 마디키젤라-만델라
최근 영국 신문에 실린 인터뷰에서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난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사회에 파문을 불러 일으켰던 만델라의 전 부인 위니 마디키젤라-만델라 여사가 자신의 발언 내용을 전면 부인하고 나섰다.
13일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위니 여사는 넬슨만델라재단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나는 그런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면서 "따라서 날조된 인터뷰 내용에 대해 내가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내 가족의 단합을 깨고 넬슨 만델라의 업적을 훼손하려는 이해할 수 없는 시도에 대해 수일 내로 대처할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자인 인도계 영국작가 V.S 나이폴의 부인으로 저널리스트인 나디라 나이폴이 작성한 인터뷰 기사를 게재한 영국 일간지 런던 이브닝 스탠더드는 위니 여사의 인터뷰 내용이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이 신문은 위니 여사가 지난해 8월 요하네스버그 외곽 소웨토의 자택에서 나디라 나이폴과 장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해놓고도 이를 부인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면서, 당시 위니 여사와 나이폴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이 그 증거라고 밝혔다.
앞서 위니 여사는 지난 8일자 런던 이브닝 스탠더드에 실린 인터뷰에서 `살아있는 성자'로 불리는 만델라 전 대통령을 "가족의 골칫덩이"로 지칭하면서 만델라가 부당한 합의로 흑인들의 권익을 지켜내지 못했으며, 아파르트헤이트(흑인차별정책) 철폐 투쟁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많은 영웅들과 비교할 때 만델라는 `애송이' 혁명가라는 둥 인신공격성 발언을 쏟아냈다.
현직 의원이자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전국집행위원회 위원이기도 한 위니 여사는 1958년 만델라 전 대통령과 결혼했으며, 만델라가 출소한 지 2년 만인 1992년 별거에 들어가 1996년 공식 이혼했다.
jusang@yna.co.kr| 2010-03-13(요하네스버그=연합뉴스) 권정상 특파원
----------------------------------------------------
만델라의 두얼굴?
前부인 "그는 골칫거리" 독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영웅 넬슨 만델라의 이혼한 부인 위니 만델라가 전 남편 넬슨 만델라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위니는 지난 8일 영국 신문 이브닝 스탠더드와의 인터뷰에서 "과거 만델라가 감옥에서 석방되는 조건으로 백인들과 거래를 해 흑인들에게 고통을 떠넘겼다"며 "대다수 흑인들이 경제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만델라가 아파르트헤이트(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를 종식시킨 공로로 1993년 당시 백인 대통령 프레데릭 드클레르크(de Klerk)와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한 것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만델라의 동상이 요하네스버그의 백인 부촌에 자리한 사실도 지적하며 "흑인의 피를 쏟은 빈민가엔 동상도 안 세웠다"고 했다. 또 만델라의 감옥살이를 수발하는 동안 가족은 '만델라'라는 낙인 때문에 고통받았다며 "그는 우리 집안의 골칫거리였다"고 했다.
위니는 1958년 결혼해 1963년부터 27년간 만델라의 옥바라지를 하며 '마마 만델라'로 대중의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남편의 수감 기간 부정(不貞)을 저지른 사실이 밝혀져 남편 석방 6년 뒤 이혼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 경제를 백인들에게 팔아넘긴 대가로, 노벨상을 받게되는 등 지금과 같은 영예를 얻게 된 것이다. 지금도 남아공에서는 그의 동상이 흑인들이 사는 지역이 아니라, 백인들의 도시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나는 넬슨 만델라를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는다. 이 세상에 치부 없는 인간은 없으며, 인간은 누구나 권력에 굴복당하기 마련이니까. 나 같아도 1%의 엘리트가 전 세계 부의 80% 이상을 독점하는 현실을 그대로 방관하는 멍청한 자들이 국민들이라면 그들이 민주주의를 누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대중들이 단순히 넬슨 만델라를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를 남아공 민주화를 이룬 신화적인 존재로 '찬양'한다는 데에 있다. 대중들은 자신이 찬양하는 상대가 정말 진실한지 아닌지는 관심도 없으며, 언제나 자신의 평범한 인생에 활력소를 공급해줄 영양원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면서 "역시 인생은 살만해. 넬슨 만델라를 봐. 저런 사람들도 있잖아."하고 자위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신격화된 마더 테레사나 마하트마 간디 역시 넬슨 만델라와 같은 전철을 밟은 인간들이다. 한 손으로는 인권을, 한 손으로 강탈을!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같이 권력에 목마른 주제에, 겉으로는 '기부 천사'인냥 행세하는 역겨운 놈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으로 따지면, 김대중이나 노무현이 한국판 넬슨 만델라고 할까나?
박정희는 1979년 10월 부마항쟁 당시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한 말에서 볼 수 있듯, 한국을 자기의 왕국이라고 생각하는 수준
남아공에서 만델라에 대한 평가는 한국에서 박정희에 대한 평가랑 비슷하다고 할까?
바보들의 지배적인 특성 중 하나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국의 정치 제도를 외국과 비교하거나, 자국의 정치인들을 외국의 정치인들과 비교하여 깎아내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적불문, 어디에나 통용되는 법칙이다.
최근 죽은 넬슨 만델라를 찬양하는 무리도 그러한 범주에 든다.
기본적으로 나는 오직 좁은 문을 통해서만 진실과 거짓을 규명할 수 있다고 믿는 반대중주의자다.
결코 어떤 사상이나 인물을 맹목적으로 찬양하지 않으며, 잘 짜여진 구조보다는 그 속에 감춰진 틈새, 즉 인간의 온갖 위선이나 사회 구조의 불합리성 등을 보려 하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기관 중 하나인 주요 언론사에서 아무런 정치적 의도없이 순수하게 넬슨 만델라를 십 수 년간 찬양해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 언론사의 순수성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멍청한 것이다.
어떤 언론 기사든 신문의 톱, 즉 제 1면에 실리는 기사들은 모두 사회의 여론을 어떤 특정 방식으로 유도하기 위한 치밀한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다. 프로파간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atrick@chosun.com 2010.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