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반계의 묘소가 있는 용인시 백암면 석천리 28~1번에 가서 묘소 시제 축문을 읽을 것이고 묘소 참배를 하고 돌아올 것입니다. 준비한 축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반계선생 시제 축문
오늘은 반계 유형원 선생 탄신 402주년이고 서거 351년이 되는 해의 시제 날 입니다.
저는 학문의 시작을 반계선생 연구로 하였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학계는 이름난 학자마다 모모학이란 이름으로 단체를 만들고 학술지를 발간해 내고 있으나 아직도 ‘반계학’이란 학술 단체는 없습니다.
선생은 한국의 실학적 연구를 최초로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학문에 대하여는 매년 한국실학학회에서의 중요 과제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선생이 학문을 이룩한 전라북도 부안군에서는 매년 학술대회와 기념관 건립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선생이 모셔진 이 곳 용인 백암에서는 선생의 뜻을 선양하고 이어받기 위해 농민들이 ‘반계숭모회“를 조직하여 지역문화 발전에 진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반계숭모회의 고문으로서 앞으로 용인 지역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과 종중의 일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한 인간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오랜 인연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살면서 많은 인연을 맺습니다. 우리는 반계 선생의 삶의 인연을 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선생의 일생에 대한 기본 자료는 18세기 당시 우리나라 역사학자로 유명한 순암 안정복이 지은 ‘반계선생 연보입니다. 선생에 대한 세세한 역사의 고리는 이 자료만으로는 부족하고 또한 그에 쓴 서술을 모두 그대로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애에 대한 큰 줄거리는 이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은 두 살 때에 아버지가 사형에 처해졌으니 소위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광해군 복위사건인 유몽인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조작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묘소가 바로 현재 있는 곳으로 정해졌는가를 기록으로 알 수는 없지만 이는 할아버지 유성민 (참판공)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반역자로 처형된 사람의 묘소를 쓰자니 아무도 찾지 않는 이곳을 잡았을 것입니다.
당시는 모든 산은 모든 국민이 공유했고 그래서 사유지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참판공 할아버지(휘 성민)는 여주에 몇 차례 왕래한 것 같고 이 죽산은 여주로 가는 옛길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 전무합니다. 이는 부안에서도 그렇고 용인에서도 그렇습니다. 종중에서는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는 작업을 해야 할 것입니다.
반계선생은 부안에서 3월에 돌아가신 후 유언으로 아버지의 묘소 아래에 묻히고 싶다고 하여 로 5월에 이곳으로 안장되었습니다. 반계가 아버지의 묘소를 무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이곳으로 안장된 후 영조 44년(1768) 당시 죽산부사 유언지에 의하여 비석이 세워지고 당시 석학이었었던 홍계희가 비문을 썼습니다. 이 비석은 반계의 묘소가 알려지게 함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종중에서는 이곳에 재실 겸 도서관을 만들기를 제안합니다. 반계숭모회와 함께 용인시민을 위한 학술회의를 내년 백중 전후에 개최할 것을 건의합니다. 이 반계의 학문을 용인시 백암면에 묶어두지 말고 용인시민에게 확산시키는 계기로 내년에 학술행사 개최를 건의합니다. 그리고 종중에서 세우는 비석보다는 시민 학자가 공동으로 세우는 공덕비가 세워지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한국의 현대사를 만들어 가는 역사 창조자들입니다. 이 뜻을 고하면서 반계선생님과 그 선고의 영전에 술을 올리니 흠향하여주시옵소서
2024년 10월 3일 반계사상연구소 소장 정구복 삼가 올림
첫댓글 시제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여러분이 묘소에 올라가는데 나는 시제 전에 참배했기 때문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생각하니 시간을 만나 내년 학술행사 건을 논의할 것을 못했다고 후회했습니다.
유창현 선생으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