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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방송 인터뷰
질문1)
이사장님께서는 현재 우리역사 복원 운동에 앞장서고 계신데요.
처음부터 역사를 전공하거나 관심 있었던 건 아니라고요?
패널
- 저는 열심히 공부하는 스타일의 학생이 아니라 운동을 좋아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고교 시절 국사 과목은 연대와 사람이름 외우는 게 많아 싫더라구요. 그래서 육사시험 칠 때 국사 대신 세계사를 선택하여 시험을 쳤습니다.
- 그런데 1977년 소령시절 육사 생도대 훈육관을 하면서, ‘자유’라는 월간지가 생도들 휴게실에 많이 꽂혀 있길래 유해한 책은 아닌가 하고 점검하느라 읽다가 ‘이유립 선생의 우리 역사에 문제가 많다’는 내용이 일리가 있어 자꾸 읽게 되었고, 결국은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강원대에서 강의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질문2)
‘자유’지에 기고한 이유립 선생의 글을 접하면서 결국 역사학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셨네요. 이유립 선생은 1986년 타계하실 때까지 가난에 시달리면서 우리 역사를 알리는 데 매두몰신 하셨는데요. 한평생 역사 운동을 하시기까지 어떤 계기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패널
-이유립 선생의 일대기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 고성이씨인 ‘이암’과 ‘이맥’ 선생의 후손으로서 평안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 ‘이관집’의 4남으로 1907년에 출생, 6세 때 동몽선습을 배우다가 한무제가 고구려를 공격하는 장면에서 “漢武帝 討滅之하시고~”라고 읽는 것을 듣고, 내 나라를 침략한 원수에게 존칭을 붙이는 데 분개하여 서당을 그만둔 것이 역사와의 첫 인연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후 사랑방에 자주 오시던 계연수, 홍범도, 최시흥, 이덕수, 신채호 선생 등으로부터 민족혼과 역사에 대한 많은 것을 얻어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13살 때 ‘배달의숙’에 들어가 독립투사들로부터 수강했고, 14살 때 ‘조선독립소년단’에 참가하여 단장까지 하면서 소년통신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15때 어느 날 집에 오신 계연수 선생께서 부르더니 “자네 역사공부를 좀 해보지 않겠나?”고 물으셨답니다. 그런데 그때는 독립투쟁에 전념하던 때라 “지금은 독립투쟁이 더 급하므로 그것은 다음에 생각하겠다.”고 답했었는데, 그러고 3일 후 일제에 의해 목이 잘린 채 압록강에 버려진 계연수 선생의 시신을 목격하고는 “아, 그 말이 유언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그 후 역사공부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유립 선생님의 말년에 나와 인연이 되어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끝까지 단학회의 맥을 유지하려고 애쓰셨습니다. 단학회는 1909년 아버지의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이기 선생이 창립했으며, 1911년 계연수 선생이 2대 회장으로서 그 뜻을 이어 환단고기를 출판했으나 사후에 최시홍, 이덕수 선생이 회장이 되어 광복투쟁의 맥을 이었고, 1945년 이용담이 평양에서 단학회를 재건(5대 회장)하였으나 납북이 나뉨으로써 이유립 선생은 1948년 남하하여 1949년 대영절 때 남한 단학회를 재건하고 6대 회장이 되어 계연수 선생의 국사 복원의 뜻을 굳게 지키셨습니다.
이유립 선생님은 신라 삼국통일론을 비판하고 고구리 정통론을 주장하셨으며, 그 사론은 사후에 발간된 『대배달민족사』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환단고기로 역사 강의를 하시면서, 고구리 정통론 못지않게 소도경전 본훈 등 역사와 문화의 뿌리가 되는 민족정신을 강조하셨고, 환단고기에는 없지만 계연수 선생이 중요하다고 했다는 행촌 이암의 태백진훈과 태백속경을 『대배달민족사』 3권에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과 함께 게재하였습니다. 제가 겨레 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런 영향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만나면서 느낀 선생님의 특징 중 하나는, 어릴 때 어른들이 얘기했던 내용과 그 내용이 들어 있는 책 페이지까지 외우고 계실 정도로 기억력이 뛰어나셔서 조선왕조실록에서 그것을 찾아 대배달민족사 원고를 작성하셨으며, 내가 보는 앞에서 스승들의 얘기를 찾느라고 조선왕조 실록을 빨리 넘기시길래 ‘아니 선생님 그렇게 넘기시면 글자가 보입니까?’했더니 ‘몇 페이지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보세요’ 하면서 찾아서 보여주셨어요. 놀라울 정도로 속독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특징은 이유립 선생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질문3)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1학년 때 처참한 광경을 목격한 건데요. 소년 이유립 선생이 받았을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도 안 될 정돕니다. 조금 전에 이사장님께서는 이유립 선생과 인연이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패널
-이유립 선생과의 인연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 1982년 연합사령부 장병들 정신교육에 초대한 것이 인연이 되어, 돌아가시기 6개월 전부터 가깝게 모셨습니다. 1985년 8월 9일 신문에 ‘백운대 쇠말뚝 제거’ 기사가 난 것을 보는 순간, 선생님이 떠올라 다음 일요일(근무 때문에 평일에는 시간 못냄)에 이유립 선생의 제자 전형배(당시 고려대 대학원 재학)씨와 김포읍 변두리 단칸방에 혼자 사시면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던 집을 방문하여 뵙자 마자 “역사 찾기 할 기운이 돌아오고 있다”며 기사를 보여주고. “본격적으로 추진하자.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말씀드렸지만 “이 나라에선 안 된다. 그 동안 가족과도 떨어져 노력했지만 안 되더라. 이제 포기했다!”면서 완강하게 거부하셔서 다음주에 다시 방문하여 설득했으나 누그러지지 않았지만, 마지막에 “최근에 나온 조선왕조실록을 구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스승들로부터 들은 내용들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고 했으니 그것을 확인해보시려는 것 같아, 선배에게 부탁, 그 선배가 며칠 후 「조선왕조실록」을 구해 전달한 후 그 주말 3번 째 방문 때 책 내용에 대해 물었더니 옛 스승들이 한 말이 정확했다면서 좋아하셨지만, 국사바로잡기 운동 재개는 승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네 번째에는 부부가 두 아들을 데리고 방문하여, 집사람이 아이들과 함께 절을 올리면서 “이 아이들을 만주 찾는 선봉장으로 만들고 싶은데, 학교 역사교육으로는 안 되지 않겠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배워 이들을 가르칠 테니 제게 바른 역사를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자, 이유립 선생이 갑자기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치면서 ‘머리가 띵하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는 자기 세대에서 여자는 집안살림살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주부가 공부를 하여 역사 바로 찾는 일뿐 아니라 잃어버린 땅까지 찾겠다고 한 데에 충격을 받아 나온 행동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그 다음주 초(9월초?)에 제자로서 전형배씨와 함께 선생님 생활을 도와주고 있던 고성미(이후 전형배와 결혼)씨가 집으로 찾아와 활짝 웃으면서 ‘선생님께서 집 알아보라고 했다’고 전달했습니다.
- 이후 10일 정도 토요일과 일요일 집을 보러 다니면서 평일 날에는 주변의 역사 관심 인사들에게 연판장을 돌리고 만나서 설득하면서 모금을 했습니다. 당시 킴스클럼 회장 김의철, 장훈학원 이사장 박선우, 고려원 사장 김낙천, 현 수봉교육재단(경주고등학교) 이사장 이태형 등 50여명이 협조하여 모은 돈으로 화곡동에 방 세 개인 연립주택을 전세로 마련해 10월 16일에 이사를 했습니다. 떨어져 살던 가족이 모여 살게 되자 모두 좋아하셨고, 선생님도 옛 제자들을 불러 강의도 하셨는데, 집사람이 이때 선생님의 마지막 제자로서 환단고기를 교재로 공부를 했고, 열심히 집필을 하도록 독려하여 결국 돌아가신 후 한암당 선생기념사업회장이 되어 대배달민족사 발간을 주관하여 1주기 때 출판기념회까지 하였습니다.
질문4)
사모님께서도 이유립 선생의 제자였다면 두 분 다 역사공부를 체계적으로 하신 거네요. 이사장님은 현재 역사운동단체, ‘한배달’을 이끌고 계시잖아요. 어떤 단체인지 소개 좀 해주세요.
패널
-‘한배달’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집사람은 몇 달밖에 배우지 못했으니 제대로 된 제자라고 하기도 어려운 정도의 역사수준이지만, 기본 방향은 분명히 알고 있지요.
이사를 하고 나서 모금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도대체 그 분의 역사연구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모금까지 했느냐? 우리도 좀 알자.”고 요청하여, 1985년 12월 17일, ‘이유립 사학 공부방’(수요강좌)을 마련하여 매주 전형배씨가 강의하기로 했으나 당시 입대하여 시간 내기가 어려웠으므로 3회부터는 고성미씨가 강의를 했습니다. 이렇게 3개월 남짓 지나자 ‘이제 제자들로부터는 어느 정도 내용을 듣고 알았으니 이유립 선생을 모셔서 직접 얘기를 들어보고 질의응답을 하자’고 하여, 86년 4월 16일 저녁에 고려가 사장 방에서 7시 반부터 2시간 정도 질의 응답을 했습니다.
9시 30분경 마지막으로 “이제 좀 더 조직적으로 국사광복운동을 해야 할 때가~.”라고 말하던 도중에 비틀거려, 앉히고 우황청심환을 드렸으나 15분이 지나도 깨어나지 않아 젊은이들이 업고 인근 인사동에 있던 인성병원에 갔더니 뇌출혈이라 하여 필동 성심병원에 입원하여 응급조치를 받았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깨어났으나 정오경에 다시 출혈이 되면서 정신을 잃은 후 가망이 없다는 병원 측의 선언에 따라 가족들에게 연락하여 자택으로 옮겨, 자정을 넘기고 4월 18일 첫 시간에 운명하셨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그때 선생의 마지막 말씀을 들은 수강생들이 ‘선생님의 유언이니 조직을 만들자’고 결의하여, 또 다시 모금을 하여 7월 1일 인사동에 사무실 개소하고, 그해 연말 민간단체 최초의 역사운동 법인인 ‘사단법인 한배달’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질문5)
이유립 선생이 타계하신 지 3개월 후에 뜻있는 분들이 모여서 창립한 단체가 ‘사단법인 한배달’이라는 말씀인데요. 현재 30년이 지났네요. 어떤 단체인지 소개 좀 해주세요.
패널
-하는 일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다 설명드리기 어렵지만, 제일 먼저 시민 대상의 역사 강좌를 열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민간인들의 국사찾기 운동도 미약했고 역사강좌는 없었으므로 최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세대 손보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성수, 단국대 윤내현 교수님을 지도 교수로 모시고, 이기백, 이기동, 유승국 등 강단 학자들까지 강사로 모셔서 강의를 들으면서 이유립 선생으로부터 배운 지식으로 날카롭게 질문들을 하자, 그 후 강단학자들은 강의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재야사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환단고기, 삼국사, 천부경 등 원전공부를 비롯하여,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와 답사를 하는 한배달역사문화학교를 개설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국사바로잡기 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당시의 이런 활동과 연고가 있다는 자부심을 갖습니다.
다음으로 첫해 10월부터 매월 1~2회 역사 현장을 확인하는 문화유적 답사를 처음으로 진행했습니다. 그래서 ‘답사’라는 말이 한배달에서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질 정도입니다.
또 제천행사, 육의전, 단오놀이 등 전통문화 행사를 재현했으며, 그 외 일제가 명산에 박은 쇠말뚝 뽑기 운동, 1980년대 후반에 헌법 영토조항 개정 청원 등 국사 바로잡기 청원도 했고, 기관지인 계간(격월간, 월간) 『한배달』지 발간으로 바른 역사 내용을 대중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자부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데서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는 치우천왕, 천부경 등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개최했으며, 광개토호태왕비문의 해석과 ‘홍익인간’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학술 발표도 했습니다. 1990년대 말부터 교과서의 문제점을 찾아 정부에 시정 건의하기 시작한 것이 인연이 되어 최근에는 모든 국민들이 배웠고, 자식들과 손자들이 배우고 있는 현재 역사교과서의 문제점을 대중적 논리와 방법으로 제기하고 시정을 촉구하는 역사의병대를 창설하고, 학문적 논리가 아니라 대중들이 알고 제기할 수 있는 문제점과 논리로 인터넷과 밴드, 페이스북, 카톡 등의 대중적인 수단을 통해 매국사학을 타격하는 방법을 전파하는 역사의병아카데미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성토시위, 성토(학술)대회 및 언론보도 등을 통해 동북아역사재단과 같은 매국역사 기관이나 학자들에 대한 타격활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질문6)
이사장님은 ‘겨레 얼 박사 1호’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다양한 학술대회에서 ‘홍익인간 정신’을 강조하시잖아요. 겨레 얼과 홍익인간, 밀접한 관련이 있죠?
패널
박사학위 논문 제목이 ‘한민족의 형성과 얼에 대한 연구’이다 보니 그런 말이 나왔는데, 이런 논문을 쓰게 된 것은 역사와 전통문화가 나오려면 그것이 나올 수 있는 원뿌리가 있어야 하는데, 민족혼, 겨레 얼이라는 말을 많이 쓰면서도 역사책에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시도를 했던 것입니다.
겨레 얼은 민족정신과 그 실천의지가 합쳐진 것이라고 봅니다. 삼국유사에 처음 나오는 ‘홍익인간’이란 말은 현재 우리나라 교육기본법에 교육이념으로 규정되어 있을 정도로 중요한 민족정신인데, 그 해석이 완전히 잘못되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이 홍익인간이라는 민족정신과 그 실천을 강조한 재세이화(在世理化)까지를 합쳐서 겨레 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이런 겨레 얼의 원형이 들어있는 우리 민족 창세신화인 마고 신화와 단군사화, 천부경이라는 민족경전과도 연결시켜야 하며, 삼한관경제나 추대, 화백제도 등 역사 속의 제도에도 나타나고, ‘우리’라는 말과 ‘제사’라는 생활 문화를 형성한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바로 ‘홍익인간’의 의미도 그런 연결 속에서 찾아야 하는데, 우리 교과서에는 우리 민족의 창세신화조차 소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 2017년 ‘홍익인간 바로 알고 실천하기’ 학술대회에서 그런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했는데, 홍익인간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너와 내가 어우러져 우리가 되어야 한다’ 뜻이라고 밝혔습니다.
당시의 시대상황은 인구 증가에 따라 식량이 부족하여 씨족ㆍ부족 간 식량 갈등이 심화된 상황이었고, 환인이 삼위태백이라는 지형을 내려다보고 ‘홍익인간 할만하다’고 했습니다. 비옥한 넓은 땅을 보고 한 말로 볼 수 있습니다. 한자의 의미로 봐도 우리나라 자전에서는 클 홍, 더할(또는 도울) 익, 사람 인, 사이 간입니다. 그대로 대입하면 ‘사람 사이를 크게 더하라’가 됩니다. 크게 더한다는 말을 돈독해지는 것으로 보면, 싸우지 말고 어우러져 돈독하게 지내라는 뜻이 되지요. ‘우리’라는 말 뜻 그대로 너와 내가 남이 아닌 ‘하나 되라’는 당부로 보면 시대상황에도 어울리는 해석이 됩니다.
창세신화나 단군사화도 신인과 동물과 사람이 어우러져 사는 모습, 하늘의 수많은 별들의 어우러져 한 치의 오차 없이 돌아가는 모습, 천부경의 천지인의 어우러짐, 화백제도와 제사의 목적이 하나됨(祭祀爲一)이라는 해석과도 뜻이 연결됩니다. 그래서 나는 2012년에 이 홍익인간을 정치와 경제에 적용하는 원리를 담은 『너와 내가 어우러져 우리가 되는 세상』이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미래 사회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홍익민주주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지요.
사람 사이는 물론이고 우주 자연과의 관계가 서양에서 ‘생존경쟁’이라고 말하듯이 생존을 경쟁의 관계가 아니라 함께 서로 돕는 관계로 보고, ‘같이 잘 살’ 수 있을 만 하다는 것을 ‘홍익인간’ 할 만하다고 했고, 그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라는 것이 ‘재세이화’로서 나는 이것을 겨레 얼이라고 봅니다. 종교적 표현이라 할지 모르지만, 상생 방송의 상생 및 실천방법으로서의 해원과 연결된다고 봅니다. 서로의 원망을 풀어야 관계가 두터워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유립 선생님께서 ‘우리 민족 종교는 마루 종, 가르칠 교라는 한자 뜻 그대로 큰 가르침이지 신앙이 아니다’고 하신 말씀도 이런 겨레 얼과 연관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겨레 얼을 오랜 세월 실천하며 살아온 우리 겨레의 DNA에서는 자연스럽게 그런 에너지가 나올 것이고, 생존 경쟁, 무한 경쟁에 지친 세계인들에게 ‘어우러져 함께 가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한류가 뜰 수밖에 없겠지요.
질문7)
겨레 얼의 핵심이 모두가 어우러져서 하나가 되는 홍익인간 정신이고 세계로 뻗어가는 한류의 바탕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사장님은 치우학회도 맡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패널
-치우학회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저의 한배달 안에서의 별명이 치우천왕이었어요. 문무를 겸전했다고 붙은 별명이지요. 그래서 치우천왕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1990년대 후반 사)한배달 회원들이 중국에 차문화 답사를 갔다가 중국인들이 치우천왕을 중화삼조(中華三祖)라 하여 자기들 조상으로 만들어 놓은 탁록의 중화삼조당을 목격했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으면 우리 조상을 뺏기겠다는 위기감에 연구하는 학자들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1999년 12월 27일에 창립하고, 다음해에 치우자료집과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우리 역사 속의 인물로 자리매김 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질문8)
『환단고기』 「삼성기」 하下편을 보면 배달국 14대 임금, ‘자오지 환웅’에 대한 내용이 나오죠. 별칭이 치우천왕이라는 기록도 있는데요. 치우천왕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패널
치우천왕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책보다 중국책에 훨씬 많이 등장합니다. 지금까지 치우학회에서 조사해놓은 것을 보면, 우리나라 삼국사, 삼국유사, 고려사 등에는 ‘치우기’라는 별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가장 많고,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에 중국의 기록을 보완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치우천왕은 배달국 14대 임금으로서 서기전 2707년부터 1599년까지 108년간 제위했습니다. 단군보다 400여년 앞 사람이지요. 그러나 중국의 약 40여권의 책 130여개 항목에서는, ‘구려의 임금’ ‘옛 천자(서경)’ ‘동이의 수장’ ‘처음으로 군대를 조직’ ‘금속무기를 만들었다’ ‘황제헌원과 10년간 73회를 싸웠다’ 등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워낙 전쟁을 잘했으므로 한ㆍ중ㆍ일 삼국에서 전쟁신, 군신, 승리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질문9)
서기전 28~26세기에 구리로 무기를 제작해서 무기를 제작했다고 하셨는데요. 청동기 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유적은 발굴됐나요?
패널
-청동기 유적 발굴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금속사용 흔적)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거기에 대해 깊이 연구한 학자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자기들 공동시조로 만들다 보니 오히려 연구가 더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금속무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사서에 황제 헌원과 싸울 때 사용한 무기의 이름까지 등장하고 있으며, 치우천왕이 태어난 요하문명지역에서는 서기전 27~6세기의 청동기 유물은 물론 서기전 40세기의 청동 거푸집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치우천왕 때는 청동 무기를 제작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탁록 지역에 답사를 갔더니 말은 하면서도 보여주지는 않더라구요. 산동성 거야현이나 문상현 등에는 부분적으로 그런 유물과 연결되는 유적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질문10)
단군조선 이전 배달국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인데요. 중국이 치우천왕을 중화삼조로 끼워 넣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초문헌자료도 없이 신화 속 인물로만 치부하고 있는데요.
패널
바로 그래서 치우학회를 창설했다고 말씀드렸지만, 중국인들은 원래 자신들은 화하족 또는 한족이라고 했는데, 현 중국에 거주하는 인구의 다수가 동이족과 묘족이므로 한족의 시조인 황제 헌원, 동이족의 시조인 염제, 묘족의 시조인 치우제를 공동조상(중화삼조)으로 하는 ‘중화족’이라는 족명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대만의 유심종이라는 종교단체에서는 중화삼조 중 치우제를 ‘공업시조’라고 이름 붙였어요. 세계 최초의 금속무기 제작자였으니까 그랬겠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학자들 중에는 재야 연구가들을 제외하고는 치우천왕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1990년대 말에 국가대표 축구팀 응원단인 붉은악마의 상징이 치우천왕이라고 알려졌지만, 현재 중학 국어 책의 홍길동전의 대화 속에 나오는 ‘치우’에 대해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인물로 싸움을 잘 해 군신으로 추앙받는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2001년 직전 문공부장관을 지낸 이어령이 MBC-TV에 나와 ‘붉은 악마의 상징 치우천왕이 어떤 인물이냐?’는 앵카의 질문에 ‘중국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라고 황당한 답변을 했어요. 당당한 우리 젊은이들을 중국 신화 속 인물의 후예로 만든 것입니다.
심지어 현재 우리나라에는 치우천왕 사당은 없고, ‘동묘’라는 중국인 관운장 사당이 서울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으며, 사적으로 지정하여 국민의 세금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정부에 청원하기도 했지만 반응이 없습니다만, 이순신 장군께서 5회나 일기에 쓴 치우사당을 빨리 복원해야 합니다.
질문11)
치우천왕이 중국인들의 시조가 된다면, 배달국과 단군조선 그리고 중국 동북부를 지배했던 동이족의 영토까지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데요. 역사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패널
-치우를 뺏기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환단고기의 기록에 따르면 치우천왕은 하북성 요하문명 인근지역에서 태어나 산서성과 산동성, 하남성 지역까지를 장악한 분입니다. 따라서 산동반도 지역은 한나라 통일 후 중국에 흡수되었다고 치더라도, 요하문명 지역은 단군 때까지도 중국 사람들이 올라오지 못한 곳입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 그 지역 문명을 자기들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배달국 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남긴 이 지역의 유물과 유적들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는 치우천왕을 뺏겨서는 안 되지요.
김종서 박사가 연구를 해놓았지만, 흑룡강 문화와 요하문명은 한반도 지역의 문화와 연결되는 우리 조상들의 신시문명입니다. 이 분야 연구를 더 강화하여 신시, 단군 때의 활동무대였던 만주지역과 중국 동해안 지역의 고조선 및 그 이전 유적들을 찾아 우리 역사와 연결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치우천왕은 구려의 임금이라고 족명 내지 국명이 나오는데, 황제 헌원이나 염제는 어느 나라의 임금이라는 나라이름이 없습니다. 바로 배달국의 제후국이었다는 우리 기록의 타당성을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질문12)
그런 염원이 뭉쳐진 덕분인지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치우천왕이 2002년 ‘붉은 악마’ 깃발로 화려하게 부활했죠? 그런데 도깨비로 표현했는데요. 이유가 뭘까요?
패널
- ‘붉은악마’ 깃발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도깨비로 표현된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붉은악마 깃발은 1999년 장부다씨가 디자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확한 디자인 이유를 설명 듣지는 못했지만, 전화 통화에서 치우천왕에 대해 좀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그림이 그보다 5년 전에 전쟁기념관 현관 천정에 전쟁신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군대생활 하던 조 벽씨의 작품인데, 그는 ‘치우천왕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고, 고민 중 현몽에 의해 그렸다’고 했습니다. 두 그림의 원형은 귀면와, 엄격히 말해 귀면이 아니라 도깨비 문양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지만, 도깨비가 먼저인가 승리의신 치우천왕이 먼저인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붉은악마의 상징은 귀면와(사실은 도깨비 문양)의 모습을 닮았고, 그 귀면와의 도깨비는 치우천왕을 상징한다’는 것이 도깨비 박사 조자용 선생의 연구와 중국의 토템 설명 책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 선후 관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치우천왕이 도깨비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귀신도 부린 승리의 신이었으므로 그를 본받아 벽사신 도깨비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치우천왕이 도깨비를 닮은 것이 아니고, 현실적인 치우천왕의 뛰어난 능력을 가진 가상의 도깨비가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 민속에서 도깨비는 나쁜 귀신들을 몰아내고 착한 사람을 돕는 존재입니다. 특히 붉은 도깨비는 나쁜 귀신들을 몰아내고 착한 사람을 돕는 존재이니 그런 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13)
(간단한 이음말을 해 주세요)
이사장님은 우리역사를 지키는 단체 중 하나인, ‘역사의병대’의 총사령도 맡으셨다고요?
패널
-역사의병대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역사의병대는 내가 역사공부를 하다보니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관료들이 아닌 백성들의 일어난 의병에 의해 살아났다는 것을 보고, 지금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와 사학계의 학자들로서는 바른 역사복원이 어려우므로 매국사학의 문제점을 학문적으로가 아니라 대중적 소재와 논리를 개발하여 대중적인 방법으로 매국사학을 타격하자고 4년 전에 출범했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초.중.고 역사교과서에서 누구나 의문을 제기할 수 있고 수긍할 수 있는 내용들을 찾아내어 바로잡으라고 요구하자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역사 공부 단체가 아닌 매국사학 타격 단체입니다.
질문14)
매국의 역사를 덜어내기 위해 모인 역사의병장들의 모임이라는 말씀인데요.
최근 ‘미래로 가는 바른 역사 협의회’ 상임대표직도 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패널
-미사협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미사협은 말 그대로 바른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이를 대중적으로 퍼뜨리는 운동 단체들이 연대하여 대한민국 미래 100년을 대비하는 바른 역사를 복원하자는 모임입니다. 참여한 150여개 단체들이 각자의 능력과 환경에 맞는 활동을 하면서 주변의 연대를 통해 그 효과를 극대화키키는 방안을 모색하자는 것입니다.
질문15)
이사장님처럼 개별적으로 한민족 역사 복원 운동을 해 온 단체들이 힘을 응집하기 위해서 만든 단체란 말씀이시네요. 이런 노력들이 뭉쳐져서 언젠가는 우리 역사의 실체가 그대로 드러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마칠 시간이 다 됐는데요. 앞으로 계획이나 하고 싶은 말씀도 많으실 것 같아요.
패널
-계획, 하고 싶은 말씀을 해 주세요.
역사적으로 모든 나라는 외침이 아닌 내부의 적에 의해 망했습니다. 요즘 일본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일고 있지만, 지금 일본이 아닌 80~100년 전 조선총독부의 제품을 지금도 쓰고 있는 매국사학자들이 우리 겨레 미래 100년을 망가뜨리는 내부의 적이라고 봅니다. 우리 겨레의 얼을 제대로 알고 그런 존재들을 몰아내는 대중의 힘이 솟아나도록 지속 노력할 것입니다. 상생방송국에서도 많은 협력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