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 예배냐, 거짓 예배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4: 23-24절)
1996년 8월 둘째 주간에 타코마에 있는 PLU(Pacific Lutheran University)에서 재미 한국어학교 연합회 세미나와 총회가 있었다. 그 모임에 참석한 대표들 절대다수가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모든 일정을 마친 11일 주일에 PLU 소강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그 예배 시간이 아침 7시에 시작하여 30분 동안에 마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내가 예배를 집례하게 되어서 예배 장소에 막 들어가는데 강당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던 한 분이 나에게 “오늘 설교하실 목사님이십니까?”라고 묻고는 내가 그렇다고 하자 댓바람에 하는 말이 “30분 안에 모두 마쳐주셔야 합니다. 설교는 10분만 해 주십시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예배를 인도하기 위하여 강단에 서서 첫마디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자칫하면 형식적인 예배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다니는 본교회도 아니고, 먼 곳에 회의차 참석하여 주일을 맞았지만 빨리 눈 산에도 구경을 가고,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 공항에도 가야 해서 모두가 마음이 어수선합니다. 단지 주일이 되었으니까 예배를 안 드릴 수는 없어서 이렇게 참석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 예배는 형식적 예배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형식적 예배를 드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으시겠지요. 또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우리는 가인과 같이 동생을 쳐죽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신다면 우리는 아벨과 같이 형에게 맞아 죽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것을 더 원하십니까?”
그러자 장내가 숙연해졌다. 그렇게 하고서 예배를 시작하였다. 물론 설교도 10분 정도로 하면서 예배를 30분 안에 마쳤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 예배를 은혜롭게 역사해 주셨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아까 그분이 나에게 죄송했다고 사과를 하였다.
하나님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왔지만,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거들떠보시지도 않으신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없는 예배가 된다. 예배는 내 기분에 맞추어서 드리면 안 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예배를 잘 드린 것 같아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1. 하나님이 왜 참 예배자를 찾으실까?
1)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곧 가짜가 많아서 진짜를 찾으신다는 말이다.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제사가 6,000년 전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누가 바른 제사를 드리는가를 보신다. 소돔성에서는 의인 열 명이 있는가를 찾으셨다. 그러나 그곳에는 의인들이 없었다. 그래서 비참하게 멸망되고 말았다.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 멸망하기 전에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가를 찾으셨다(렘 5:1). 불행하게도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유다 나라는 비참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2) 하나님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와 만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말로 예배라고 하면 문자적으로는 하나님께 절을 하는 것이지만,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부르면 아들이 얼른 대답하듯이,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렇게 응답할 때에 비로소 대화가 이루어지고 사귐이 생기고 사랑이 생긴다.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을 부르셨다.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항의할지 모른다. “하나님이 언제 엘리를 부르셨느냐? 성경에 그런 말씀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그러나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엘리를 부르셨지만 엘리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었다. 죄가 커서 하나님과의 사이에 담이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깨끗하였던 어린아이 사무엘을 부르실 때에는 그가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따라서 대답할 수 있었다. 그가 비록 하나님의 음성을 엘리의 음성으로 착각하고 엘리에게로 세 차례나 갔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복된 일인가를 깨달아야 하겠다.
3) 하나님이 복을 주시려고 찾으신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복을 받는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을 그냥 돌려보내시는 분이 아니다. 반드시 복을 주신다. 구체적으로 어떤 복을 주시는가? 시편 103:3-5에 잘 설명되어 있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①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복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여 천국의 복락을 누리며 살게 하신다.
② 우리의 병을 고치주시는 복이다.
육신의 병은 물론이고, 마음이 병든 것, 영혼이 병든 것, 생각이 병든 것, 가정이 병든 것, 나라가 병든 것까지도 모두 하나님이 고쳐주신다.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와 나의 병든 상태를 아뢰고 깨끗이 고침을 받자.
③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는 복이다.
시편 37:4에도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노래한다. 그러므로 이런 은혜의 맛을 본 사람들은
더욱 기도에 힘쓴다. 기도하는 그 시간이 가장 즐겁고, 복되고, 귀하다(찬송 364장).
우리도 모두 기도에 더욱 힘쓰는 복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④ 우리의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 복이다.
많은 사람들이 청춘 시절을 세속적인 욕심으로 채워서 스스로 파멸의 길로 간다.
그러나 복을 받은 사람은 청춘의 때에 신령한 은혜의 길을 찾아 높이 비상한다. 전도서의 마지막 장인 12장은 이런 말로 시작한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옳다. 청년의 때에 창조자를 기억하면 우리의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해주신다.
4) 천국의 백성으로 삼으려고 찾으신다.
천국에서는 날마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 것이다. 미국에서 누가 영어를 잘하나? 한국에서 영어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한 마디도 말을 못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미국에서도 영어를 잘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예배를 잘 훈련한 사람이 저 나라에 가서도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다. 그러나 예배를 바로 할 수 없으면 그 나라에 가지 못한다.
5)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려고 찾으신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천국에 간다(마 7:21-23). 예레미야 29:11-13의 말씀을 보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것이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라고 하셨고, 또한 33:3에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행전 13:22에는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우리는 자발적으로 일하고, 나아가 목숨을 바쳐서 충성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된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서 기도할 때에 그는 하늘 보좌의 영광을 보았고,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에 오셔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살펴보신다. 예배의 자세가 바로 된 사람은 어떤 일을 시켜도 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고, 예배의 자세가 비뚤어진 사람은 무슨 일을 시켜도 역시 비뚤어지게 한다. 좋은 색시감이나 좋은 신랑감을 구하려면 먼저 그의 예배하는 자세를 보면 된다. 하물며 하나님이 아무나 불러서 당신의 일을 맡기시겠는가? 먼저 예배의 자세가 바르게 되어야 한다.
2.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할까?
1)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다.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서 나의 영혼이 예배하는 것이다. 육신의 예배가 아니다. 따라서 기도를 하거나 찬송을 부르거나 육신으로 또는 형식으로 하면 안 된다. 모두 성령으로 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15에서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라고 말한다. 또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후에 엘리사벳을 찾아가서 그를 만났을 때에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눅 1:46-8)라고 노래하지 않았는가?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드리다가 직사하고 말았다(레 10:1-2). 요즘에도 열정적인 예배가 많이 있지만, 혹시 성령의 불은 없고, 인간들의 감정을 불붙여서 하지나 않는가 반성해 보아야 하겠다.
2)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 위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밝히 나타났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 진리에서 떠난 형식적 예배를 드린다. 설교가 성경을 떠나 있고, 기도가 성경을 떠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자들의 마음에 새겨져서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 말씀이 성도들의 “발에 등이 되고, 그들의 길에 빛이 되어야”(시 119:105) 한다. 그 말씀이 성도들의 능력이 되고 지혜가 되어 세상을 이끌고 가게 되어야 한다.
3)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예배가 열납된 것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예배에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중요하게 네 가지가 있고,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
①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은 무엇일까?
a) 첫째는 기도다. 계시록 5:8에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라고 하였다. 예배시에 대표로 기도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그것을 구해야 한다. 그리하여 온 성도들이 그 한마디 한마디에 ‘아멘’ ‘아멘’하면서 함께 기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간절하고 진실한 기도로 성도들이 하나 되고, 온 성도들의 마음에 감동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열납되어야 한다.
b) 둘째는 찬양이다. 찬송은 곡조가 있는 기도다. 어려운 찬송을 부르려고 하면 가사와 곡조를 맞추느라고 뜻도 알지 못하고 찬송할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온 성도들이 잘 아는 찬송, 모두가 한 마음으로 부를 수 있는 찬송, 이왕이면 힘 있는 찬송을 드려야 한다.
c) 셋째는 신앙고백이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우리가 누구를 믿으며, 누구에게 예배하는가를 분명하게 고백해야 한다. 만약 잘못된 것을 믿는다면 그 예배는 열납될 수 없다. 우리 한국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사도신경을 채택하여 고백한다. 물론 사도신경의 내용 해석이 교파마다 다르기도 하지만, 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공통된 신앙고백을 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고백하지 말고, 한 마디 한 마디의 뜻을 새기면서 고백해야 한다.
d) 넷째는 예물, 곧 감사다. 여기에는 십일조나 감사헌금이나 절기헌금, 건축헌금 등 모든 헌금이 해당되지만, 물질로서 끝날 일은 아니다. 우리는 자기의 마음과 시간과 사랑과 몸을 드려야 한다. 헌신이 없는 예배는 제물이 없는 제사와 같다. 이 모든 순서들이 살아 있어야 한다.
②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것이 있다. 우리가 이것을 받아야 한다.
a) 첫째는 말씀이다. 말씀을 받으면 영혼에 만족이 있고, 쉼이 있으며 진리에 서게 된다. 물론 순수한 말씀이어야 한다. 그 날 그 시간,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어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곧 보혈과 성령이 들어 있어야 진리다.
b) 둘째는 축도인데 본래의 의미로는 강복선언(降福宣言)이라고 해야 된다. 우리말로 축도라고 하면 빌 축(祝)자와 빌 도(禱)자를 써서 만든 말이기 때문에 기도가 된다. 그러나 영어의 베네딕션(Benediction)은 기도가 아니다. 강복선언이요, 실제로 복을 내려주시는 것이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냥 돌려보내시지 않고 복을 주어서 보내신다는 말이다(민 6:27). 하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반드시 복을 받고 가야 한다.
c) 셋째는 신령한 은사다. 바울은 로마서 1:11에서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다. 예배를 통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 이 은사를 받으면 견고해진다. 성령의 권능을 받기 때문이다. 곧 죄를 이기며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임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목숨도 바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이와 같이 바른 예배는 많이 드릴수록 더욱 많은 힘을 얻는다. 지금은 잘 몰라도 환난이 일어나는 날, 또는 여러 가지 시험이 오는 날에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에서같이 망령된 자도 되지 말고, 소탐대실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착실하게 은혜를 받아 나중에 큰 승리를 거두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다.
d) 넷째는 천국의 평강이다.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이나 모두가 처음 외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다. 천국을 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 그런데 그 천국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만 가는 곳이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도 소유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천국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라고 하셨고,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라고 하였다.
4)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몸을 드리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라고 하였다. 예배의 형식은 정교하게 하였으나 정작 제물로 바쳐지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영적인 예배라고 하겠는가? 모리아산을 올라가던 이삭의 질문을 기억하는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 22:7)? 그렇다. 이삭은 자기를 드렸다. 오늘도 주님은 번제물로 바쳐질 어린 양을 찾고 계신다. 혹시 당신이 그 어린 양이 아닐까?
3. 우리가 어떻게 참 예배자가 될 수 있을까?
1)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십계명을 요약하면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마 22:37)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에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물으셨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배 순서 하나하나에 마음과 정성을 다한다.
① 기도를 보자.
마음을 모은 기도를 드려야 한다.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했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하였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우리의 기도에서 가장 병이 든 것이 있다. 대표로 기도하는 사람이 혼자서만 기도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 기도에 온 성도가 동참해야 한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아멘’이라고 말하면서 동참해야 한다. 축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멘’할 때에 복이 나에게 임한다. 야곱은 형에게 주려고 했던 아버지의 축복도 빼앗아서 자기의 것으로 삼았다. 누가 정말 복을 받기를 사모할까?
② 찬송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
바울은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5). 영혼으로부터, 마음으로부터 찬송을 힘차게 불러야 한다. 기도는 ‘아멘’을 잘 해야 하고, 찬송은 목청을 높여서 진실하게 불러야 한다. 어느 교회고 찬송이 살아 있으면 은혜가 있는 교회고, 찬송이 죽어 있으면 은혜가 없는 교회다. 또한 찬송을 항상 불러야 한다. 내 입에서 찬송이 쉬지 않도록 끊임없이 찬송하자. 평소에 찬송을 늘 부르는 사람이 예배 시간에도 찬송을 잘 부를 수 있다.
③ 신앙고백도 마찬가지다.
어떤 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거부하고 있지만, 신앙고백이 없는 예배는 올바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교단마다 자기 교단의 특징을 살려서 신앙고백문을 작성하여 예배 때에 사용한다. 그러나 짧은 신앙고백문 속에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전부 담을 수는 없다. 어느 고백문이나 신경이나 짧게 할 때에는 부족함이 다 있다. 그래도 한국 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이 가장 무난하다고 보아서 처음부터 예배 때에 사용해 왔다. 중요한 것은 신앙고백이 형식이 되지 않고 진실한 고백이 되도록 그 의미를 새기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일이다.
④ 헌금은 어떻게 해야 할까?
헌금은 제물이다. 그러므로 어느 것보다도 성경에 명시된 법이 있다. 세상의 세금이나 돈 거래에 있어서도 법을 어기면 벌을 받는다. 하물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 법이 없겠는가? 첫째는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따라서 드려야 하는 것인데 법에 어긋나면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으로부터 거절을 당하면 그 돈은 누구에게 갈까? 사람들이 이 간단한 이치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방심한다. 깨어야 한다.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둘째는 마음으로부터 감사와 기쁨을 가지고 드려야 한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아주시기를 간구하면서 드려야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도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겠는가를 생각하면서 선물을 택한다. 하물며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사람이 자기 기분에만 맞도록 하면 되겠는가?
십일조를 바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정성이 문제란다. 그러니까 인색한 마음으로 조금만 바치면 그것이 정성된 것인가? 예수님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라.”(마 19:21)라고 하셨다. 하나님께 바치기 싫으면 가난한 자들에게라도 주어야 한다. 자기의 불신앙과 완악한 마음을 합리화하려고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이미 그런 사람으로부터 멀리 떠나 계신다. 하나님은 제일 좋은 것을 요구하신다. 베드로에게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물으시지 않았는가!
2)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라고 말씀하셨다. 참된 신앙생활은 영으로 사는 생활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것에 실패하였기에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는 무서운 저주를 일곱 번이나 반복하셨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들은 어떠한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을까? 예수님이 밝히 선언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3) 진리에 서 있어야 한다.
최후의 심판 기준은 성경이다. 개신교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 위에 서지 않으면 다 무너질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겠는가? 세상 재물이나 지식이나 권세는 주님 앞에서 자랑이 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다. 그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귀하겠는가?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 55:2)라고 물으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된 양식이다. 배부르게 못할 돈이나 명예나 권세를 위하여 살지 말고, 진리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등불이다. 우리의 인생을 바르게 가도록 인도한다. 그래야 강건해지고 아름다워지고 승리자가 된다.
첫댓글 카페에 후원참여가 없습니다.....
한달에 두세분 후원으로 카페를 계속할수가 없어요
방 월세와 공과금을 내야합니다 공과금을
못내고 있습니다 후원으로 도와주세요....
먹을것(식품,반찬거리) 사도록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먹을것 반찬거리도 사야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없습니다 어려우시더라도 회원님께서는
작은 사랑으로 카페지기에게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농협 233012-51-024388 예금주.황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