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유현식
며칠 전 아내는 ‘장모님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무슨 일로 하셨데?”
“그냥 하셨다는대…….”
아무래도 처가에 다녀올 때가 됐나 보다.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한 달에 1회 이상 아버님과 어머님을 찾아뵙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난달은 큰 처남네 조카의 결혼식장에서 어머님 만나서 몸이 불편해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아버님을 찾아뵙지 못했다.
마침, 서울살이를 접고 보령서 정착을 준비하는 동생 집의 전기 보수공사와 정착 준비는 잘 진행되는지 탐방하러 갔다. 낙향 후 진행할 카페의 장소와 운영 계획을 소상히 알아두고 기거할 오래된 집의 콘센트와 전등을 교체 후 다음 날 대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여 처가에 들렸다.
이미 아내에게서 나의 행선지를 전해들은 터라 마당에는 커다란 솥이 걸려있고 아궁이에는 장작불이 활활 타올랐다. 지인과 대파를 다듬고 계시는 어머님은 인사를 받자마자
“우리 둘째 사위여.”하며 아주머니에게 소개하신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서둘러 아버님이 계실만한 거실에 들어서니 손짓하며 들어오라 하신다. 올해로 89세인 아버님은 고단했던 삶의 증표인 듯 한쪽 무릎을 쓸 수 없다. 나 홀로 외출을 못하신지 벌써 10여년, 오랜 세월을 집안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찾아오는 손님이 마냥 반갑다. 아버님 곁에서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 가장 예뻐하는 외손주 이야기까지 곁들이면
‘얼능 죽어야 하는디.’라는 넋두리도 안하시고 환하게 웃으신다.
늦은 점심 밥상을 물리고 나니 어머님은 오랫동안 장작불로 고아낸 소꼬리 곰탕을 포장하며 ‘처의 작은어머니가 ○○의료원에서 무릎을 수술했다는 소식과 작은어머니의 퇴원에 맞추어 고아낸 곰국인데 작은어머니의 퇴원이 2주 후로 미뤄져서 사위에게 주는 것’이라며 핑계를 대신다.
90년 9월15일 밤 구두레 공원에서 있었던 이브의 유혹,
“달이 밝네요.”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공원의 가장 높은 언덕에서
“보름달이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냅다 허리를 껴안았다.
그녀의 유혹이 있던 후, 밤늦은 시각에도 수화기를 붙들고 있는 딸에게 하는 소리가 유선 전화기의 선로를 통해 들려온다.
“전화만 하지 말고 한 번 오라고 혀.”
며칠 후 찾아뵈니 곧바로 혼인 날자와 예식장을 알아보는 어머님께
“대학꺼정 가르쳐 놓고 아무것도 없는 집에 시집 보내능겨.”
작은어머니의 냉정한 평가에도
“우린 못 배워서 깝깝 했잖어, 대학 나왔쓴게 우덜처럼 깝깝하게 살진 안을껴.”라고 응대했다는 말을 전해들어 그 핑계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다.
첫댓글 소상한 삶의 현장을 다녀온 기분입니다.
눈에 선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