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원고: 30매)
지렁이가족의 피난
김정순
강칠이네 마당에 봄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땅속의 엄빠지렁이는 걱정이 많았어요.
“이번에도 비가 많이 오려나?”
엄빠지렁이는 걱정스런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벌써 아래로부터 물이 차 올라왔어요.
“얘들아! 어서 모여.”
엄빠지렁이는 아기지렁이들을 급히 불러 모았어요.
“왜 그래요?”
아기지렁이들이 꼬물꼬물 기어와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엄빠지렁이는 아기지렁이들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빨리 땅위로 올라가야 해!”
“왜요?”
“물이 차오르고 있어. 목숨이 위태로워! 우리는 물에 잠기면 숨쉬기가 힘들어.”
“아이! 무서워!”
아기지렁이들은 오들오들 떨면서 몸을 또르르 말고 웅크렸어요.
“겁먹지 마. 내 뒤만 따라오면 돼.”
엄빠지렁이가 앞장서서 올라갔어요. 아기지렁이들이 뒤따랐어요.
“와! 환하다.”
땅위에 올라온 아기지렁이들에게는 처음 보는 세상이 신기했어요. 나무와 꽃이 넓은 마당 여기저기에 피어있었어요. 비가 내리는 풍경도 재미있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도 있었네?”
아기지렁이들은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신이나 떠들었어요.
“얘들아, 우리는 지금 피난을 온 거야. 좋아만 해선 안 돼.”
“왜요?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인데요?”
아기지렁이들은 엄빠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땅위는 위험한 것들이 많단다.”
엄빠지렁이는 새들이 갑자기 날아와 지렁이를 낚아채는 얘기를 들려주었어요. 그리고 여러 가지 위험한 것들에 대해서도….
그때였어요.
얼굴에 피부병이 심한 강칠이가 마당으로 내려서다 말고 고함을 질렀어요.
“앗! 징그러워.”
“왜 그러니? 강칠아.”
강칠이엄마와 아빠가 현관문을 열고 나왔어요.
“여기 봐! 지렁이가 너무 많아!”
“비가 오니 땅위로 올라왔나?”
강칠이엄마와 아빠도 지렁이를 보고 얼굴을 찡그렸어요.
“비 그치면 약 좀 뿌려야겠다.”
“뭐라고! 약을 뿌린다고?”
엄빠지렁이는 깜짝 놀랐어요. 지난번에 뿌린 독한 약 때문에 아직까지 몸 여기저기가 아팠어요. 이러다가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 어떤 묘안을 찾아야했어요.
엄빠지렁이는 아기지렁이들을 담장 옆 라일락 나무 밑으로 불렀어요.
“얘들아, 이리 좀 와.”
땅위 세상을 구경하느라 정신을 팔고 있던 아기지렁이들이 투덜거리며 엄빠지렁이 곁으로 왔어요.
“엄빠, 무슨 일이예요?”
아기지렁이들은 볼멘소리로 불평했어요.
“얘들아, 강칠이네 마당에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우리를 죽이려고 약을 뿌리겠단다.”
엄빠지렁이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우리 다 죽는 거야?”
아기지렁이들은 무서워서 벌벌 떨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라.”
엄빠지렁이는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했어요. 약을 뿌릴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살아온 지난날이 끔찍했어요. 그리고 나비와 벌이 하던 얘기가 떠올랐어요.
“여기는 약냄새가 너무 심해.”
나비가 벌에게 말했어요.
“나도 이제 여기는 그만 올 거야. 내 친구는 농약 섞인 꿀을 먹다가 하늘나라 갔어.”
벌과 나비는 강칠이네 마당에는 오지 않겠다며 날아갔어요.
“그래, 맞아. 우리도 더 이상 불안하게 살 수 없어. 오늘밤 떠나는 거야.”
엄빠지렁이는 강칠이네 마당을 떠나고 싶었던 계획을 오늘 저녁 행동에 옮기기로 했어요.
비가 오고 있어 움직이기도 쉬울 것 같았어요. 밤이라 사람들도 차들도 많이 다니지 않을 거고, 새들도 날아다니지 않아서 덜 위험할 것 같았어요.
바람이 향긋한 향기를 싣고 와 들려주던 예나네 꽃밭을 떠 올렸어요. 독한 약냄새가 없고 땅속에는 지렁이 먹이가 많다고 했어요.
“얘들아, 우리가 가는 목적지는 예나네 꽃밭으로 정했다.”
“예. 예.”
예나네 꽃밭의 냄새는 구수하고 향긋하다고 했어요. 향기를 따라가면 될 것 같았어요.
“얘들아, 엄마 말 잘 들어.”
엄빠지렁이는 아기지렁이들에게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예.”
“거기까지 가려면 위험한 일도 있을 거야. 너희들은 엄빠 뒤에 바투 붙어서 따라 와야 돼.”
“네, 알겠어요.”
아기지렁이들은 합창이나 하듯 대답했어요.
해가 저물자 엄빠지렁이를 따라 아기지렁이들이 대문 밖으로 나갔어요.
- 번쩍!
갑자기 승용차가 불빛을 번쩍이며 달려왔어요.
“빨리 담 쪽으로 바투 붙어!”
엄빠지렁이는 소리 질렀어요. 아기지렁이들의 가슴이 콩닥콩닥 거렸어요.
“휴! 큰일 날 뻔했네.”
엄빠지렁와 아기지렁이들은 숨을 몰아쉬었어요. 구수한 냄새가 나는 쪽을 향하여 지렁이 가족의 피난행렬이 밤새도록 이어졌어요.
비는 그치고 예나네 마당에는 아침 햇살을 받은 나무와 꽃들이 반짝반짝 빛났어요. 민들레가 노랗게 피어있었어요. 제비꽃은 꽃대 끝에 청보라 꽃잎을 매달고 나비처럼 팔랑거렸어요.
엄빠지렁이는 밤새 기어오느라 지쳤지만, 예나네 꽃밭 풍경과 향기에 편안한 숨을 쉬었어요.
“얘들아, 기운을 내고 조금만 더 참자.”
“이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어요.”
“햇빛이 강해지기 전, 가까이 있는 산나리 그늘로 가자.”
엄빠지렁이는 피부가 마를까 걱정했어요.
“고개 들 힘도 없는데 어떻게 가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지렁이들이 투덜거렸어요.
“산나리야, 미안하지만 우리가 너의 그늘로 들어가도 될까?”
“미안하긴. 들어와도 돼. 너희들 어디서 왔니?”
“강칠이네 마당에서 오는 길이야.”
“거기서 왜 나왔어?”
“우리가 징그럽다고 약을 뿌린다고 해서.”
“그랬구나. 그쪽에서는 자주 독한 약냄새가 나더라.”
“너는 우리가 징그럽지 않니?”
엄빠지렁이는 자신의 길쭉한 몸을 꿈틀거리며 말했어요.
“징그럽긴. 얼마나 늘씬하고 예쁜데.”
“내가 예쁘다고! 정말이니?”
엄빠지렁이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 믿기지 않았어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볼을 꼬집어보았어요.
“너희들은 좋은 일도 많이 하잖아.”
“우리가?”
“흙을 깨끗하게 하는 청소부잖아. 또 너희들은 우리들의 보양식을 만드는 요리사야.”
“우리가 요리사라고?”
“그럼, 요리사지. 음식물 찌꺼기며 나뭇잎 썩은 흙을 먹고 만들어준 요리가 얼마나 맛있고 영양가가 높은데.”
“피난 온 우리가 불쌍해서 위로하려는 말이지?”
“아니야. 너희들은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어. 땅속을 기어 다니며 구멍을 내어 뿌리 내리기도 쉬웠고, 맑은 공기도 드나들어 숨쉬기도 좋았어.”
“정말이니?”
“또, 너희는 지구를 지키는‘환경지킴이’이잖아.”
산나리의 말에 몸이 하늘로 붕붕 뜨는 것 같았어요.
“우리가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는 거야?”
엄빠지렁이는 너무 감격해 눈물이 날것만 같았어요. 강칠이네 식구들은 보기만 해도 징그럽고 더럽다고 했어요. 그래서 자신이 쓸모없는 동물이라고 생각했어요.
“넌 식물과 흙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동물이야. 그리고 너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순한 동물이야.”
“우리가 그렇게 대단해?”
엄빠지렁이는 산나리가 한마디씩 말할 때마다 힘이 솟는 것 같았어요.
“참, 예나네 식구들은 너희들을 지렁이라 부르지 않고 땅속에 산다고‘토룡’이라고 불러.”
“아! 행복해. 우리를 그렇게 존중해 주다니.”
엄빠지렁이는 이곳이 지렁이들이 편안히 살 수 있는 낙원이라고 생각했어요. 여기서는 지렁이를 죽이는 약 때문에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어요.
“얘들아, 우리가 아주 좋은 피난처를 찾아온 것 같아. 여기가 우리들의 천국일거야!”
엄빠지렁이는 아주 많이 기뻤어요. 친절히 맞아준 산나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싶었어요. 산나리가 꽃을 피울 때까지 보양식을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토룡아, 햇빛이 강해지기 전, 새들이 너희들을 발견하기 전, 내 밑으로 얼른 들어와.”
갑자기 짹짹거리는 참새소리가 들렸어요. 산나리가 급히 줄기를 휘어 지렁이 가족을 덮었어요.
“위험해! 빨리 내 밑으로 바짝 들어와.”
지렁이가족은 있는 힘을 다해 산나리의 밑둥치를 꽉 잡았어요.
참새가 산나리 위를 낮게 날아갔어요.
“산나리야 고마워.”
엄빠지렁이는 위기에서 구해준 산나리가 무척 고마웠어요.
“우리가 너의 밑에서 살아도 될까?”
“우리야 좋지. 너의 요리를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까.”
그때, 귀여운 소녀가 꽃밭으로 나왔어요. 소녀는 바구니속의 과일껍질을 꽃밭에 묻었어요.
“와! 피부가 고운 예쁜 소녀다!”
“이 소녀가 예나야.”
산나리는 지렁이들에게 알려주었어요.
예나의 얼굴을 보고 엄빠지렁이는 마음이 더욱 편안해 졌어요.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꽃을 사랑해서 저렇게 예쁘나보다 싶었어요. 아마도 마음씨도 고울 것 같았어요.
엄빠지렁이는 즐거운 마음으로 아기지렁이들을 이끌고 땅속으로 들어갔어요.
“우와! 맛있는 먹이들.”
낙엽과 음식물 쓰레기가 흙과 섞여 구수한 냄새를 풍겼어요.
“우와! 부드러워 땅파기도 쉬워. 강칠네 마당은 땅이 단단해서 힘들었는데.”
지렁이가족은 열심히 먹고 산나리의 요리를 만들었어요. 또한 독한 약에 오염되지 않은 흙을 먹은 덕에 토실토실 건강해졌어요. 식구도 많이 늘었어요.
“토룡아, 이리 잠깐 올라와 봐. 내가 예쁜 꽃을 피웠어.”
지렁이들은 산나리가 부르는 소리에 땅위로 고개를 내밀었어요. 예쁜 산나리 꽃이 환하게 웃고 있었어요.
“와! 예쁘다.”
“고마워. 맛있는 보양식 덕분이야.”
“우리가 더 감사해. 따뜻하게 맞아주고, 용기도 주었잖아.”
지렁이와 산나리가 주고받는 이야기에 해님이 방긋 웃었어요.
(16회 동서커피문학상 맥심상)
첫댓글 동화도 상을 받기 시작하셨습니까?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