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1월20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수원] 가장 깨끗한 사람, 자캐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독서 : 묵시 3, 1 - 6. 14 - 22
† 복음 : 루카 19, 1 - 10
★ 생명력을 잃은 사르디스 교회는 칭찬은 조금 듣고 질책을 많이
받는다. 라오디케이아 교회는 물질적인 부를 자랑하지만 주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모든 것이 결여되어 있다(제1독서).
★ 세관장인 자캐오는 부자였으나 세리라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키가 작다는 이유로 무시당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써 돈으로 살 수 없는 구원을 받았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세관장인 자캐오는 세리라는 이유로 죄인으로 낙인 찍혀 유다인
사회에서 배척당한 사람입니다. 더욱이 그는 키가 작아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하였으나 키가
작아서 군중 속에 파묻히고 맙니다. 그러자 그는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키가 작다는 약점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셨습니다.
예수님께 마음의 문을 활짝 연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약점과 한계가 있습니다. 약점이 있고 불완전하기에
남들에게 비판받거나 무시당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상처들을 다 없애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상처에 대처하는 좋은 방법은 상처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상처와 화해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은 약하고
불완전하며 약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환자가 자신의 아픈 곳을 의사에게 보이거나 말하지 않으면 의사는
환자를 고칠 수 없습니다. 열등감이라는 상처는 자신의 약점과
불완전함을 숨기려고 할 때 생깁니다. 그러면 열등감은 치유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시며
사랑하십니다. 이웃이나 주님께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 놓을 때
상처에서 해방되어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매일 미사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가장 깨끗했던 사람, 자캐오
2012년 나해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복음 : 루카 19,1-10
< 가장 깨끗했던 사람, 자캐오 >
2011년 11월에는 14년 전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군대 가기
전 친구들과 택시기사의 돈을 빼앗고 엉겁결에 살인을 하기까지
하였던 한 사람이 14년 간 아무 의심도 받지 않고 살다가
공소시효 11개월을 남겨놓고 경찰에 검거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사건 일체를 자백하고 자필로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피해자 가족에게 죄송하다. ... 그동안 죄책감에 시달려
밤마다 악몽을 꾸는 등 무척 힘들었다. 자살과 자수까지
생각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 경찰이 늦게나마 사건을
해결해줘 고맙다.”
이들은 엉겁결에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었고 택시를 불태운
다음 군에 입대하였기에, 4년 동안 계속된 수사에서 아무
것도 찾아낼 수 없어서 그렇게 미궁 속으로 끝나버린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11개월만 잘 버텼으면 공소시효가
지남에도 불구하고 경찰에 검거된 이들의 심정은 ‘후련하고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그 죄책감 때문에 끝까지 참지 못하고 술자리에서
회사 동료들에게 그동안 감추어 왔던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동료들이 경찰에 신고하여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얼마 전에 상영했던 ‘이웃사람’이란 영화도 이런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어서 많은 호응을
받았었습니다. 죄책감을 느끼는 이들은 종교인들만이 아닙니다.
살인자들도 느낍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어떤 자신의 노력으로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죄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양심이 안정을
찾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씻겨지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들을 숨기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위선자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솔직해 지는 것뿐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 용기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리코에 들어가셔서 세관장 자캐오의
집에 머무시기로 결정하십니다. 자캐오는 자신도 인정하고
타인들도 인정하는 죄인입니다. 따라서 더 솔직히 죄를 고백할
필요가 없는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성인이라고 자처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선택에 불만을 가집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위선적으로 위인인척 하는 사람들보다는 죄인임을 솔직히 고백하는
사람들과 사귀고 싶은 것입니다. 관계는 믿음이 바탕이 되는데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과 무슨 온전한 관계가 되겠습니까?
클라인스가 쓴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Imposture phenomenon’
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임파스쳐는 사기꾼이라는 뜻입니다.
사칭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가면형상(假面現象)”이란
뜻으로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의사, 변호사, 국회의원, 대기업의 중역 가운데 70%가 이 병에
걸려있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못하면서 하는 척, 아는 것
없으면서 대단히 아는 것처럼, 알고 보면 이렇다 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부끄럽기 짝이 없으면서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남의 것,
남의 돈, 남의 지식 가지고 내 것인 양 착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프로이트는 이런 사람을 ‘위선자’(Hypocrite)
라고 말했고, 이렇게 거짓된 자아가 있는 한 진실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는 한 누구를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받을 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들 중 70%만이 가면을 쓰고 살아갈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 것을 안 한 척, 슬프면서도 기쁜 척,
부족하면서도 많은 척, 혹은 그 반대로 많으면서도 없는 척
하며 살지 않습니까?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는 자신 안에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 그래서 또 어느 정도는 위선적인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가 다 죄를 짓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모든
사람들에게 진실하게 고백할 수 있도록 겸손한 사람도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겸손하다면 죄도 짓지 않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부끄러워 자신들의 몸을 가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하느님이 나타나자 나무 뒤로 숨었습니다. 이는
죄 자체가 솔직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래서 위선적이 되며, 그것이
드러날까 봐 두려워하게 되고, 그렇게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죄책감을 씻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고해성사만한
것이 없다고 많은 심리학자들도 의견을 모읍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할까요? 그 고해성사 한 것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지는 않습니까? 어쩌면 주님께서 고해성사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는 하지만 더 완전해 지려면 모든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겸손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몸을 하나도 가리지 않았어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자캐오가 나무 위로 올라갔다는 의미는
이미 자신의 죄를 만 천하에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를
원하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고, 그런 면에서 보통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깨끗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내 안에 주님께서 거하시지 않으면 참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캐오처럼 솔직하고 겸손한 사람의 마음에 거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의 모든 죄를 하나도 가림 없이 온 천하에 고백하고 다닐
수 있는 겸손함을 갖던가, 굳이 위선적으로 아닌 척 하고 다닐
필요가 없도록 감출 필요가 있는 죄는 하나도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모든 사람들에게 고백할 수 없는 죄는 짓지 않도록 노력하고,
또 죄를 지었다면 자신을 인정하고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고 솔직해
지는 두 방법을 병행하는 것이 완덕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일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내 깊은 상처 사이로 크신 하느님의 은총이
2012년 나해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 루카19,1-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내 깊은 상처 사이로 크신 하느님의 은총이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총의 강도가 평소보다 두드러지게
강할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향해 우리의 닫힌
마음을 활짝 열 때입니다. 내 위치, 내 체면, 내 위신, 내 학식을
자랑하거나 내세울 때가 아니라 내 고통, 내 어둠, 내 부족함, 내 깊은
상처를 활짝 열어 보일 때 놀랍게도 하느님의 크신 은총이 내 삶 안으로
스며들어오는 체험을 자주 했습니다.
세관장 자캐오 역시 비슷한 체험을 했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는 사실
예리코의 명망가였습니다. 국경도시인 예리코는 목 좋고 물 좋은
자리였습니다. 큰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고,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는 여러 곳에 세관을 설치하고 운영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척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세리들은 사악하기로 정평이 나있었습니다. 특히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하는 과정에서 가난한 백성들은 세리들의
봉이었습니다. 그렇게 뜯어낸 돈으로 고리대금업도 했겠지요.
현상유지를 해나가기 위해 고위층에 상납도 충실히 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그들의 악행이 가혹했으면 ‘세리가 지나가면 집이 무서워
떤다.’는 속담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캐오는 이런 세리들의 보스 격인 세관장이었습니다. 재산이
많다보니 그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키가 눈에 띄게
아주 작았지만 요즘으로 치자면 조폭세계의 큰 형님으로 군림했습니다.
예리코의 밤의 세계, 지하 세계를 장악했던 것입니다. 매일 흥청망청,
매일 꿍짝꿍짝, 그 어떤 것도 아쉬울 것 없이 누릴 것 다 누리며
그렇게 불나방 같은 삶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룬 자캐오였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내면은 점점 더
허탈해지고 허망해졌습니다. 돈이 주머니를 가득 채울 수는 있었지만
마음을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사회적 입지와 권세가 어깨를 세워줄
수는 있었지만 깊은 내면의 공허함을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돌아보니 밥 먹듯이 죄만 지어왔지 그 무엇 하나 이 세상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게 허리를 굽혔지만 다들
돈을 보고 저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구와도 진심어린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었습니다. 왕따 중에서도
철저한 왕따였습니다.
이런 자캐오 곁을 예수님께서 지나가십니다. 주님께서 자캐오가
당신을 향해 활짝 열어 보인 공허한 내면, 깊은 죄, 오랜 상처를
눈여겨보십니다. 그 오랜 상처 사이로 당신의 따뜻한 은총을
스며들게 하십니다.
그 은총이 얼마나 부드럽고 따스했는지 자캐오는 순식간에
하느님을 향한 회심의 여정에 접어듭니다. 내려오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할 뿐만 아니라 정중하게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모십니다. 뿐만 아니라 너무도 송구스럽고
과분하게도 자캐오에게 결정적인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참으로 파격적인 예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대 거룩함과
의로움의 대명사격이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단호하게 죄인이라 단언하시고 당대 공공연한 대 죄인이었던
세관장 자캐오를 성덕의 정상에로 올라가게 하십니다.
이렇게 진로가 완전히 뒤바뀐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하느님을
향해 서있던 그들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너무나 당당하게
똑바로 서서 나는 의롭고 거룩하며 죄 없는 사람이고 외치는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나락으로 내려 보내십니다.
반대로 나처럼 죄 많은 사람 없을 것입니다. 나처럼 상처 많은
영혼도 없을 것입니다. 과연 나같이 비참한 존재도 하느님
구원의 대상에 포함될 수 있을까요? 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 구원의 도성 안으로 들어서게 하십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인천] 주님은 인간적인 기준을 뛰어 넘는 분이십니다.
은행, 병원, 백화점, 음식점, 카페 등등 어디든 친절을 제일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어디를 가든 친절한
서비스를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손님의 잘못된 행동과 말임에도 불구하고 ‘죄송합니다.’
라는 사과의 말부터 먼저 합니다. 하긴 워낙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매체가 발달되어 있어서, 조금이라도 불친절하면 난리가 나지요.
그래서일까요? 우리들은 친절을 받는 것에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친절을 받고 있으면서도 본인은 그렇게 친절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크게 문제를 만들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서비스가 형편없다.
음식에 정성이 들어가지 않았다.’ 등등의 말들을 서슴지 않게 말하고
각종 불친절의 말과 행동을 합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문득 제가 갑곶 성지에 있었을 때가 떠올려 집니다.
이 성지의 첫 번째 전담 신부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었지요. 그래서 초창기에는 직원 한 명과 제가 모든 것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별히 9월 순교자 성월의 경우 하루에 몇 천
명이 성지를 방문하는데, 단 두 명이 성지 안의 일을 다 하면서 그
많은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못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바빠서
듣지 못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저희에게 돌아오는
소리는 “불친절하다.”는 것이었지요.
최대한 친절하려고 노력을 해도 내 몸이 하나밖에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러한 상황은 전혀 이해하려하지 않고 무조건 불친절하다는
말을 하는 그분들이 참 미웠습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생각을 표현하시는
분들에게는 저 역시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외면하게 되더군요.
그러나 저 역시 사람인지라, 불편함을 이해해주시는 분들에게는 정이
가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드리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자 어떻게든 방해하려 합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으로, 당시에는 매국노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였습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이 감히 누구를 만나려고 하느냐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철저히 방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고정관념이 주님을 만나려는 순간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키가 작다는 신체적인 약점 역시 주님을 만나는데 방해의 요소로
작용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인간적인 기준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이러한 인간적인 조건을 뛰어넘어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오늘 복음을 통해 보여주시지요. 그리고
구원이라는 큰 선물까지 베풀어 주십니다.
스스로는 불친절하면서도 남은 친절해야 한다는 생각,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심과 이기심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내가 먼저
친절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면 어떨까요? 사람들이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큰 역할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늘 서로 돕는다면, 아무에게도 행운은 필요 없다(소포클레스).
어느 절에 붙어 있는 글귀. 가슴에 새길 말입니다.
일로 생각하지 맙시다.
저는 책 읽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면 서점에
가는 것이 저의 또 하나의 즐거움이지요. 책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읽을 책이 있다는 자체에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이 즐거움이
괴로움이 될 수도 있음을 신학생 때 체험했던 적이 있지요. 즉, 단순히
취미로서는 즐겁지만, 이것이 일이 될 때에는 괴롭더라는 것입니다.
신학생 때 일주일에 2~3권의 책을 읽으며 한창 책에 재미를 붙이고
있을 때였지요. 그런데 도서관에서 일손이 필요하다며 신학생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책이 좋았기에 도서관에서 일하는 것도 즐거울 것
같아서 얼른 신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반납된 많은 책들을 원래의
자리에 꽂아 놓는 일을 하는데 너무나 지겨웠습니다.
그때 깨달았지요. 책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 책이 어떤 일의 수단이
되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들은 어떤 행동이든 일로서 받아들일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성당 가는 것도 일로 생각하고, 봉사하는 것도
일로 생각하고, 사랑 나눔을 실천하는 것 역시 일로 생각하다보니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간직하는 것이고 그 시간 자체가 괴로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일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인 생각을 간직해보면
어떨까요? 세상의 눈으로는 가장 지루하고 괴로운 일이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내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자캐오야 내려오너라
오늘은 복음을 영성생활의 내적 측면에서 상징적으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썼다는 면과
높은 나무에 올라갔다는 점을 자신의 영적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으로 보았고, 키가 작았다는 것과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는 점을 아직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영적 상태라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자캐오의 모습을 상정한다면 두 가지 모습, 즉 영적 성숙을
위한 노력은 있는데 내적으로 충분히 성숙되지 못하는 상태라는
이중적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2000년 전 자캐오에게만
있었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신앙인 역시 이런
상태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성장하고 진보하는 길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에 있다고 흔히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기술을 배우고자 합니다. 기도하는 기술, 묵상하는
기술, 관상하는 기술을 찾아 배우면 더 훌륭한 영성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실제로 영적 진보와 성장은 “의식과 깨달음”에 있습니다.
영적인 기교만으로는 온전하게 하느님께 이르는 영적 성장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에 대해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 통달하고,
묵상하는 방법 관상하는 방법을 통달한다고 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보는 힘”과 “직관하는 능력”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기술적이고 기교적인 면에 집중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두 가지 면을 오늘 복음과 비교해서 생각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혼자”라는 것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열망을 갖고는 있지만 그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혼자 찾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은 모든 것이 개인주의화 되어 가는 문화적 환경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택배로 주문하면
되고,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인터넷 “다음”이나 “네이버”
등의 지식검색에서 찾으면 다 채워줍니다. 개인의 문제마저도
혼자서 위로를 찾고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회성 만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캐오의 열망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인데 그가 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본다면 자신 앞을 지나가는 예수님을 그냥 한 번 보는 것이기에
그 만남은 한 번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기도와
하느님의 만남이 이런 일회성 만남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자신의 내적 문제가 생겼을 때만 예수님께
다가가 “위로”와 “평화”를 청합니다. 답답하고 뭔가 해결 안되면
성당에 나가 위로를 찾습니다. 마치 성당이나 예수님이 “박카스”와
같은 “피로 회복제” 역할을 하는 것에 익숙한 것이죠.
예수님은 오늘 이 관계를 뒤집어 놓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진정
당신을 만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당신이 직접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관계”, 다시 말해 “만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자캐오야, 내려오너라.” 하시는 말씀은 우리에게 건네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영적 발전 혹은 성장을 바라는 근본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캐오나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직접적인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만남을 이루는 방법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당신의 길로 우리가 들어오길 고집하지
않고 찾아가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여는 것(개방)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 당신이 부족한 자캐오를 받아들여 같이 지내고자
하는 것처럼 우리도 부족한 다른 이들을 받아들여 “함께 살아갈 때
(공동체의 삶)” 비로소 우리는 신앙 안에서 “보는 눈”과
“직관하는 능력”을 올바로 갖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기도하는 방법, 묵상하고 관상하는 방법들이
하느님을 찾는 기술이나 기교가 아닌 기쁨을 얻게 하는 통로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만나고 영적으로 더 깊어지는 것은 어떤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그분과 세상을 만나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 혼자만이 멀리 보고 있다고 자랑하는 어리석음은 탓하여 주시고,
저의 어리석음은 당신 앞에 부끄럽게 하소서. 아멘.”
- 글라렛 선교 수도회 이회진 신부 -
◈ [대전] 그리스도인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 있습니다. 세관장 자캐오입니다. 당시 세리들은
사람들한테 과한 세금을 징수해서 부를 축적했기에 온갖 모욕과 사회적
따돌림을 받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캐오는 그런 세리들 중에서도
으뜸인 ‘세관장’이었으니, 그가 받았을 사회적 대우가 어떠했는지는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도 사랑받고 싶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뵙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면 나무에 오르는
것보단 군중 속을 파고들어 가는 것이 훨씬 더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멀리서는 어깨에
가리고, 가까이에서는 밀쳐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길가에 있던 돌무화과나무에 오르게 됩니다.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 있습니다. 군중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잘 차려입은
옷차림으로 나무에 매달린 자캐오의 옹색한 모습이 그의 부정했던
부유함과 작고 나약한 모습을 한데 묶어 매달아 놓은 듯 초라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누군가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나무 위에 매달린 채
모든 이의 비난을 받으실 분. 그렇게 높이 들어 올려지실 분. 바로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예수님은 단 한
사람 자캐오를 선택하십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한 나의 노력. 그것이 비록 최고의 방법은 아닐지
몰라도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면 결코 이를 포기해선 안 됩니다.
주변을 의식해서 긋지 못했던 성호경이, 어색해서 미뤄왔던 가족과의
기도시간이, 귀찮아서 피해 왔던 작은 봉사의 노력이 우리를 바로
주님 닮은 모습으로, 주님과 하나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닮은 사람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 양동혁 신부(대전교구 월평동천주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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