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인류에게 오래된 생활공간 이었다 산지가 국토의 7할을 차지하는 우리땅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할수 있다 두류산 혹은 방장산의 별칭을 가진 지리산은 깊고 오묘한 산세와 더불어 곳곳에 산사(山寺)가 자리해 불교문화의 향기를 전해준다 지리산에서도 오지로 알려진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일대는 오래된 암자들로 순례객들이 발길이 끙ㅎ이지 않고 있다 찾는사람이 많다보니 함양군마천면에서는 전라북도 남원시에 다다르는길을 "지리산 칠암자길"이라 부르기도 한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고승들이 머물던길을 따라 이곳의 사암(寺庵)들을 둘려보려 틀별산행을 하기로 하고 길을 떠난다
(07:50)음정마을 벽송령백두대간 표지석앞에서 산행 시작한다 음정마을 쉬터을 지나 급경사시멘트포장도로인 마을길을 따라 올라간다 물탱크있는부분에서 산길로 접어든다
(08:13)숨을 할딱거리며 소나무숲길을 지나 올라서니 차량통제소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승용차들이 5~6대 주차되어 있다 이차량들도 우리가 갈길을 앞서 가나보다 벽소령가는 임도따라 20분가랑 가다보면 샛길을 가지마라는 표지헌수막이 걸려있는 곳에 도착한다
(08;32)이곳에서 임도를 버리고 샛길로 접어든다 들어서자마자 스피카에서 샛길을 가지말고 정규등산로를 이용하라는말과 함께 라이트불이 밝게케지면서 스피케에서 방송이 나온다 깜짝놀라 처다보니 카메라도 나를 정면으로 보게 달려있다 그래도 오늘하루는 부처님오신날이라서 묵인해준다는 소식을 접했기에 무시하고 올라간다 오름길이 가파르고 숨이 활딱거린다 날씨도 무더워서 등어리에는 땀이 범벅이된다 이마에서는 쉴새없이 뚝뚝떨어지는 땀방울이 등산화 앞굽을 적신다 25분가랑 죽을 힘을 쏘다부으며 올라서니 하늘이 보이고 능선길에 올라선다
(08:57)힘겹게 올라선 능선길에서 한숨 돌리고 이제부터는 다소 수월한길을 걷게된다 칠암자길은 이번이 6번째 가는길이고 최근에 4년전이길을 다녀갔기에 눈감고도 갈수 있는길이다 그런데 이제는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다
(09:15)평화롭게만 보이는 도솔암에들어선다 법당에들려 참배하고 잔디밭뜰에는 사탕과 가자를 준비해놓고 참배객들을 맞이한다 "진정한 불자의길 청매스님을 만나는 도솔암" 칠암자길은 지리산북부능선 삼정산기슰에 자리한 7개의 사암을 순례하는 약16km에 달하는 숲길이다 도솔암은 그길의 첫번째절이다 영원사의 부속암자로 청매(靑梅)조사 인오(印梧)(1548~1623)가 창건한것으로 전해진다 청매는 서산대사로 더알려진 청허휴정(淸虛休靜)의 법제자이다 31세에 묘향산에 들어가 수행중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승장(義僧將)이 되었다 그리고 3년여동안 왜적과 싸워 크게 공을 세웠다 그뒤 청매는 전국을 돌며 운수(雲水)행각(行脚)을 하였는데 지리산 영원사에 머물며 도솔암을 창건한걸로 추정된다 이후 1671년(광해군9년)에 왕명을 받아 정심(定心),지엄(智嚴),영관(靈觀),휴정(休靜),선수(善修)등 5대종사의 영정을 그리는 등 화사승(화사승)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청매는 5대종사의영정을 조사당에 봉안하고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자들은 경책한 "십무익송(十無益頌)"의 주인공도 바로 청매였다 "마음을 돌이켜비추어 보지 않는다면 경전을 보아도 이익이 없음이요(心不返有經無益),자성(自性)의 실체없음을 사무치지 못하면 좌선을 해도이익이 없음이요(不達成功坐禪無益),원인을 가벼이 여기면서 좋은 결과를 바란다면 도를구해도 이익이 없음이요(輕因望果求道無益), 바른법을 믿지 아니하면 고행을 하더라도 이익이 없음이요 (不信正法苦行無益),자기고집을 꺽지못하면 법을 배워도이익이 없음이요(不斷我懓學法無益),타인이 스승이될만한 덕이없다면 중생을 제도해도이익이 없음이요(他人師德㸄象無益),마음이 신실(信實)하지 않으면 아무리 말잘해도 이익이 없음이요(一生非處衆無益),배속에 무식만 가득하다면 교만하여 이익이 없음이니라"라고 하였다 도솔암에서 물한바가지 퍼마시고 내림길로 40여분 내려서니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영원사주차장이 보인다
(10;05)영원사 경내에 들어선다 예전엔 이곳에서도 절밥을 먹고 가라고 하였는데 코로나로 인하여 냉담한포정들이다 법당에들려 참배하고 경내를 둘러본다 전하는말에 의하면 산중에는 청매가 입적한후 봉안한승탑과관련하여 기이한이야기가 전해온다 처음승탑은 영원사오른쪽 숲속에 봉안하였는데 환하게 빛을 발하여 많은 신도들이찾았다고 한다
독립운동가의산실 영원사는 수많은 고승들이 머물다간곳이다 절은 유창한 산줄기가 감싸주는 양지바른곳에자리잡고 앉았다 높이900m가 넘는 이곳은 속세로 부터 멀리 떨어진 깊은산속이다 영원사에 들어서면 법당앞에 세워진 절안내판이 눈길이 머문다 백초월(白初月)이머문자리라고 한다 절은 신리 경문왕때 영원(靈源)조사의 창건이라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길이 없다 일제강점기 까지만 하여도 아홉채가 넘는 당우(堂宇)에 100개가 넘는 방이 있었다고한다 나중에전하는"실화상록(失火詳錄)"에 따르면1912년화재로 소실된것을 복원하였는데그후에 수행자가 운집하였다고 한다 또한 1938년에 찍은 가람의 모습이 다실 액자에담겨 걸려있다 이후 복원된 온전한 가람이다 그러나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으로전소되었고 현재의 당우는이후에 복원된 법당에는 "두류선림(頭流禪林)"이라 쓴 편액이 걸려있고 두해가 넘게비어있던절을 현재스님이 정돈하여현재모습으로 되찾았다고한다 스님이 펼쳐보인 "용상방(龍象牓)"을보니 이곳에서 용맹정진하던 선승들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용상은 수행자를 물에서 으뜸인 용과 묻에서 으뜸인 코끼리에 비유한데서 비롯한것이다"용상방(龍象牓)"은 용상에 해당하는 수행자들의 명단이다 수행기간 승가생활의 일상 대소사를 각자 역할분담하여 붙이는 대자보인격이다 이는 영원사에 때마다 선객(선객)들이 모여들고 역할을 나누어 정진한 자취라 항수있다 절에는 "승적부,이일록,사적기"등이 전해 오는데 그가운데 "조실안록(祖室案錄)"이 특히 눈을 붙든다 "조실안록"에는 영원사에서 주석 하셨던 부용,영관,청허휴정,사명유정,청매인오등 109명의 고승들이 등재되어 있다 이가운데 초월동조(初月東照)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온몸을 받친 불교계의 대표적인 인물중 한명이다 초월동조에게 영원사는 출가지이자 마음의 고향으로 주지직을 재임(再任)한곳이기도 하였다 초월동조는 경남고성군영오면출신으로 13세로 영원사로 출가 아였다 초월동조는 1919년4월에 경성중앙학림(京城中央學林)에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라는 비밀단체를 결성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및 독립군을 지원하기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같은해 7월에는 비밀출판물"혁신공보(革新公報)"를 간행하여 국민들의 독립의식을 고취 시키는등 독립운동을 활발이 전개 하였다 1920년2월25일애는 재일 유학생들이3.1독립선언1주년을 맞이하여 일본의회에 독립청원을 하기위한 활동을 지원하던중체포되었다가 같은해3월9일 서울의경성지방법원에송치되었다 그후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하여활동하다 귀구한 승려신상완(申尙玩)과 같이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종로경찰서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1938년에는 봉천행화물차에"대한독립만세"라고쓴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3년을받고 청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고문으로 인하여 순국하였다 더많은것을 알고 싶지만 갈길이 멀어 절을 뒤로하고 올라간다 35분가랑 오름길에서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
(10:39)영원재에 올라서니 통영에서온 쉐불링이 반갑다고 얼굴을 내민다 5~6년전에 종주할때 동행하던 친구다 오래만에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누구랑 왔느냐고 물으니 혼자 왔단다 남원에서 오신분들과 합류했단다 이제부터는 어느정도 능선길이라 바람기운도 있고 편한걸음으로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생긴다 삼정산삼거리에서 배낭을 벗어놓고 삼정산으로 올라간다 급경사 오름길에 종아리가 한짐인듯 무겁게 느껴진다
(11:14)삼정산정상에 올라선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숲속에 있는정상이라 시야가 가려져 조망은 제로이라 인정샷만 남기고 내려선다 절집이 가까워지면서 사람들소리가 떠들석하다
(11:30)상무주암에 들려 참배하고 떡한접시받아들고 나온다 간화선(看話禪)의연원(상무주암) 암자는 삼정산(1,182m)울창한숲사이에 둥지를 틀고 있다 상무주암(1,162m)이 언제생기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럽다 그러나 이작은 산중암자는 보조지눌(보조지눌,1158~1210)이 이곳에서 머무르며 큰깨달음을 얻었다고한 사실이 각인되었다 보조지눙의 비명(碑銘):(묘비에새긴글)에는 자신이 이곳에 머물던 시절을 "경치가 그윽하고 그 고요함이 천하의 으뜸으로 참으로 수행하기에좋은곳이였다"라고 적고있다지눌은 팔공산 거조암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맺고 이곳에 올라 몇몇선객(선객)들과 함께 뼈를 깍는 정진에 들어갔다 그때가 1198년 지눌의나이 41세였다 이곳에서 지눌은 "바깥인연을 물리치고 오로지 안으로 자신을 관조하는" 수행에만 전념하여 궁극의 근원을 찾아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대혜종고(大慧宗杲,1089~1163)의 어록을 보다가 마음의 깨달음을 얻었고 자연히 가슴이후련해지며 곧 마음이 편안해 젔다고 전한다 지눌의 회고담은 "선은 고요한곳에도있지않고 또한 시끄러운곳에도 있지않고 사량분별하늩곳에도있지않다 그러나 먼저고요한곳, 시끄러운곳,일상생활을 하는곳,사량분별하는곳을 버리지말고 참구하여야한다 홀연히 눈이 열리면 바야흐로 모두 자기집안일임을 안다"고 하였다 이에뜻이 들어맞아 자연히물건이 가슴에 걸리지않고 원수와 처소를 같이 하지않아 곧마음이 편안하였다고 한다 "대혜어록"을 통한 지눌과대혜의 만남을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보편화된 대혜의 간화선(看話禪)이 최초로 주목되고 또소개된것이 이만남를 통해서였기때문이다 후에 지눌은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과 경절문(莖截門)의 이른바 세가지길(三門)을 열어 후학을 지도 하였는데 화두를 참구해서 바로 깨쳐들어가는"경절문"의 연원이 바로이 상무주암에서 이루어진 것이였다보조지눌이후 수행자로 각광받은 상무주는 수선사의 제6세사주가 되는 원감충지(圓監沖止,1226~1293)도그자취를 남겼다 정혜사(정혜사)에 머물던 대선사충지는 1284년3월에 홀연히 떠나 이곳 상무주에 올랐다 충지의비명:증시원감국사비명(贈諡圓鑑國師碑銘)에는 당시의 수행모습을 "혼자선정에들매 허수아비 같았고 거미줄이 얼굴을덮고 새발자국이무릎에 있었다"고적고있다 절집을 나와서 점심상을 차린다 절에서 받은 찰시루떡으로 허기진 곱창을 달래주고 문수암으로향한다
(12:09)숲속길을 따라 문수암으로가는길은 숲속의나무들이부처라면 지저귀는새소리는 목탁소리처럼 경쾌하다 찻길은 애당초없고 오롯이 두다리로 발품을 팔아야오를수 있는곳이문수암이다 바위를 등진지붕이보인다 그곳에 문수암이 새집처럼 소박하게 앉아있다 절집의법당은 굳게 잠겨있다 문수(文殊)는 산스크리트어로 묘길상(妙吉祥)묘덕(妙德),유수(濡首)라 번역되며 "지혜가 뛰어난공덕"으로 풀이된다 그때문에 "화엄경"에서 문수보살은 보현보살과 함께 비로자나불양옆으로협시보살이되어삼존불(三尊佛)의 일원을 이룬다 문수암이 자리한곳은 높이1,060m의 고지이자 거대한 바위 아래다 입구에는 일주문대신문수보살과 보현보살상이 순례자를 반긴다 먼저 샘에이르러 목을 축인다 물소리는 법문같고 물맛은 달다 수각에는 눈뜬물고기를 새겨 놓았다 절에서의 물고기는항상눈을뜨고게르름없이 공부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속의 생물과 게으른중생을 일깨우기 위한 존재인것이다 그래서 이를 법당이나 탑처마밑에풍경(風憼)으로 달아 용맹정진의 상징으로도 여기고 있다 절경내에는 천인굴이 있는데 임진왜란때 인근의 동네사람들이 몸을 숨겨 피신한곳이라한다 임진왜란당시 지리산일대는 왜군과의 격전장으로 특히전라도와 경상도의접경에있는 이곳은 많은 피난민이모려든곳이였다 암자는659년(무열왕6년)에 마적(馬跡)조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현재의문수암은 1960년대에 지어진것이다 선학원소속으로1965년혜암(慧菴:1920~2001)이 중창한 것이라한다 혜암이 이곳에 주석할때는 영원사와 도솔암의스님들이 와서 배웠다고 한다 해인총림제6대방장과대한불교조계종제16대종정에 추대되기도한 혜암은 쉼없는정진과 서릿발같은 가르침으로 불제자들을 이끌었다 혜암은 "위법망구(爲法忘軀)"즉 "진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몸을 버릴정도로하라"는 평생법문과 함께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용맹정진으로 유명하다 문수암에서800m떨어져있는 삼불사로 향한다
(12;35)삼불사에 도착하니 여기도 스님은 안계신다 법당문은 열려있어 참배하고 나와서 주변을 둘려본다 지나온 상무주암과문수암보다는 규모가 크지만 그래도 작은 암자이다 암자가 자리한곳은 작은삼정산(1,156m)아래다 삼정산자락에는"견성(견성)골" 이라불리는 골짜기가 있는데 "까마귀나까치도 경(經)을 외우며간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때 "견성성불(견성성불)"이란 말을 떠올린다 "견성"응 참된자와 곧그성품을 바로보는것을 이른다 그러므로 이말은 그성품을보고 깨달음을 이룬다는말이다 참된자기를 깨닫고 알므로써 깨달은자인 부처가된다는 말인것이다 그만큼 골짜기는 불심이 깊은 곳이라는뜻으로 들린다 삼불사의삼불주는 법신불,보신불,화신불의 삼신불을 의미한다 육신(色身)은 집과 같다 삼신으로 돌아갈수없는 이유는 그것이 자성(자신의성품)과 함게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다 있으니 어리석어 그것을 보지 못하고 밖에서 찾는다 육신속에있는청정한법신에 따라움직이는것이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생각하는것마다 선화다면 보신(보신)이다 이도리를 스스로 깨닫고 닦는게 귀의다 그러므로 자성을 깨달으면 부처가되고 자성에미혹되면 중생이 되는것이다 삼불사를 떠나 삼정산 능선을 따라 한참을 내려와 약수암으로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