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만1천권의 조선
저자 : 김인숙
출판 : ㈜은행나무 2022년판
과거는 미래를 위한 거울
조선왕조가 막을 내리기 직전, 근대화 초기의 조선의 모습을 담은 책들이 있다. 아니 많다. 정확히 몇 권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국내 어느 그룹의 대기업이 재단이 되어 이런 책들을, 조금이라도 조선시대의 모습을 담은 책이라면 무조건 사들였다. 그런 책이 모이고 모여 1만 1천권이 되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모을 수 있을 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런 책들을 통해 이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당시 조선의 민낯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소설을 써서 유명해진 작가는 우연한 기회에 이런 책들이 모여 있는 서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재단의 허락을 어렵게 얻고는 그 서가를 둘러보며 어떤 책들이 있는지 하나, 하나 읽어나갔다.
<1만1천권의 조선>은 그렇게 해서 씌어졌다. 매의 눈으로 한 권 한 권 읽어나갔을 작가의 집중력과 노력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옛 선인들은 평생에 걸쳐 만 권의 책을 읽는다고 했다. 1년에 백 권의 책을 읽는다고 하면 10년 해야 천 권이다. 우리가 책을 비로소 읽는 나이를 열 살부터로 쳐도 만 권을 읽으려면 백 년이 소요되고, 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물론 의술이 발달한 지금에 쳐도 백 살이 넘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관련 내용만 추려 읽는다고 해도 적어도 작가에게 많은 시간을 빼앗았음을 쉬이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왕조 ‘조선’은 우리 후손의 입장에서 본다면 많이 아쉬운 나라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탄생케 했다는 점에서 시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시기에 존재했던 손에 잡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넘어 온 유교가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 중국에서도 이루어보지 못한 성리학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당시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과 가치관, 행동 범례들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알게 모르게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연결,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 문화의 정규 교육을 받는 후손의 입장에서 ‘조선’은 한 인간의 삶처럼 왕조의 흥망성쇠를 일궈냈지만, 마지막에 이웃 일본의 제국적 야망에 눌려 식민지 나라의 굴욕적 시간을 적지 않게 가짐에 따라 결국에는 부끄럽게 남고 말았다.
조선왕조가 다른 왕조 못지않게 화려하고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 낸 것도 많지만, 오늘날 많은 비판적 시각을 가지게 하는 왕조와 주변 정치세력에 의한 부패하고 부도덕한 역사도 많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아쉬운 것이다.
-당시 조상들이 좀 더 잘해 주었더라면.
-당쟁과 같은 배운 선비층이라면 할 짓이 못 되는 그런 패거리 정치를 지양했더라면.
-왕과 양반 계급층이 욕심을 덜 부리고 유교 경전에서도 말하는 ‘민심이 곧 천심’인 것처럼 좀 더 민생에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아쉬움은 이것만으로 쉬이 끝나지 않는다.
일제 치하 36년의 시간 속에서 참 모습의 조선을 이해하기란 아니, 이 땅의 진정한 역사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그나마 유지되었던 고유한 정신세계마저 철저히 유린당했기 때문이다. 그 여파 때문인지 아직도 이 땅의 역사학계는 우리 고유의 진솔한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 말은 우리는 아직 어떤 모습이 우리 조상의 진정한 모습이며 지금의 우리 모습인지 여전히 헷갈리고 있다는 의미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배움으로써만 어찌되었던 후손인 우리는 지금 시대에 맞게 변화와 성장, 성숙을 도모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해방 후의 자화상에는 왜곡과 오류가 많아 미래를 향한 토대로서 실격인 요소가 많았던 것이다.
저자이자 소설가인 김인숙은 이런 점을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우리 아버지의 얼굴을 가면이 아닌 민낯을 보자. 어찌 되었던 우리 아버지의 얼굴이 아닌가. 아주 어릴 때부터 그 얼굴을 보며 자란 우리로서는 이제 그 기억들을 정확하게 되살려 오늘을 살아야 하고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가 지어낸 환상이나 왜곡이 아닌 ‘제3자’가 바라보는 우리의 당시 모습이어야 한다. 그 ‘제3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서가에 모인 책들은 ‘제3자’의 시각으로 본 조선의 당시 모습들이다. 선교사, 해양학자, 군인, 상인, 외교관, 기자, 요리사, 화가, 작가 등 수 많은 다양한 직종군의 외국인들이 중세 조선에서 망하기 직전, 그리고 일제 식민지하의 시절 등을 경험하고 고국에 돌아가서 쓴 책들로 유럽 전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었다. 그 책들을 한 권 두 권 사서 모았는데 아직도 유럽의 어느 서고나 박물관에 먼지를 뒤집은 쓴 채로 발견되지 않은 채 세월만 보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사진과 그림 등이 첨부되어 이해를 돕고 있다. 책들마다 지은이의 문장을 원문 그대로 옮겨 놓기도 하고 적절한 해석을 통해 뉘앙스나 느낌 전달도 훌륭하다. 게다가 작가의 역사관이나 역사 지식도 동원돼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정의 파고에 편승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우리 스스로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과거를 정확하고 소상하게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3.08)